“대한의사회가 또 반발했다” 기자실 대화나 편집회의 때 자주 나오는 말이다. 이 문장에서의 방점은 ‘의협’도 ‘반발’도 아닌 ‘또’에 찍혀있다. 최근 5개월간 의협의 반대 성명은 1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 이상 나온다. 지난 6월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으로 갈등이 깊어졌을 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의협 혹은 산하 의사단체에서 숨 가쁘게 성명서들을 쏟아냈다. 9월 갈등 봉합으로 다소간 줄어드는 듯 했으나 여당 의원들의 입법 활동이 시작되자 다시 의협의 ‘반발’ 성명이 급증했다. 의협을 코너로 모는, 의사들에겐 의업의 업권이 침해당할 소지가 있는 입법이나 규제안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 의원들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의협을 자극하는 입법을 연이어 발의 중이다. 문신사를 양성화하는 ‘문신사법’, 병원에 CCTV를 강제하는 ‘CCTV법’, 실손보험 청구자료를 병원이 제출토록 하는 ‘실손보험법’, 자세한 질환 설명을 의무화한 ‘친절한 의사법’, 강력 범죄자의 의사면허 재발급 자격을 제한하는 ‘투스트라이크 아웃법’ 등이 그것이다. 이보다 앞서 의협이 지난 7월 4대 악법으로 규정한 ‘공공의대 설립’, ‘의대 정원 확대’, ‘원격진료 도입’, ‘한반첩약 급여화’는 해결되지도 않았고 언제고 다시 수면 위에 재부상할 포인트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다보니 의료계로서는 신경이 반짝 날카로워질 만하다. 의협 입장에서 쉼없이 반대를 소리 높일 수밖에 없다. 이들 법안 중 상당수는 이미 18대, 19대, 20대 국회에서부터 줄곧 발의되던 법안으로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하지만 의료계의 강한 반발에 막혀 계류됐다가 매번 무산된 법안들이 올 하반기 들어 몇 달 새 우수수 발의된다는 점은 분명 구조적인, 내재화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의료계 안팎에서 “의료계에 대한 괘씸죄를 묻겠다는 게 아니냐”는 말들이 나오는 상황이다. 이는 의료계를 리드해온 전임자들의 잘못도 크겠지만 이를 풀어나가려는 전략적 사고가 부족한 현 집행부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 소통에서 화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청자인데 화자의 반복되는 말과 주장은 가치를 줄이기 마련이다. 또 강도가 높아지며 거칠어지는 어투는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반발이 잦아지면 희소가치가 줄어 굳이 자세히 살펴보거나 들어보지 않게 되는 게 일반이다. 의협의 반복적인 ‘반발’은 의료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만 나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 의료계 파업으로 의료계는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을 저지할 수 있는 시간은 벌었을지 모르나 여론만 보자면 완벽하게 진 싸움이었다. 직전까지 전염병 상황 속에 이타적 영웅의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그려졌던 의사들이 한순간 ‘제 밥그릇 때문에 환자들을 볼모로 잡은’ 이기적인 집단으로 비쳐졌다. 의사들은 파업의 명분을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야 했다. 도리어 반발하는 국민들에 대해 치기어리고 오만한 워딩이 튀어나갔다. ‘전교1등’ ‘개돼지’ 같은 말들이 분을 참지 못한 몇몇 의사의 실수로 노출됐다가 허겁지겁 철회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의협 등 의사단체의 폐쇄성이 큰 역할을 했다. 내부의 결속다지기가 우선이라(최대집 회장은 임기 중 3번째 탄핵됨) 국민과의 소통은 차순위로 밀려 미처 민심을 살필 여력가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과 상식과 정서에 맞게 의협이라는 이익단체의 논리를 풀어나가야 한다. 의료계가 국민과 소통이 부족한 것이 이상으로 어쩌면 갈등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정부와 소통하고 있는지도 묻고 싶다. 충분히 정부 당국자와 정치권을 만나 설득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한 때는 ‘덕분에’ 캠페인까지 만들며 의사를 영웅이라 칭하던 게 정부 측이었다. 언론인들과의 소통도 원활했는지 의문이다. 의협이 상대하는 언론이라는 게 의사들의 말을 웬만큼 알아듣는 보건의료계 전문지 위주다. 공중파 또는 종편 방송이나 종합일간지, 무수한 비 보건의료계 매체들과 스킨십을 하며 자기들의 고충을 호소해봤는지 궁금하다. 최대집 의협 회장은 억울할 것이다. 의료계 내부에서는 과거보다 투쟁 강도가 떨어졌다고 하고, 민심과 언론은 투쟁 일변도로 도대체 소통하지 않으려 한다고 낙인 찍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협 등 의료계는 시선을 외부로 확장해야 한다. 국민에게는 보다 겸손하게 소통하고, 정치권이나 정부에게는 공유할 가치를 찾아 은유와 상징으로 갈등을 해결할 길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의사들은 국민이 의사집단을 보는 심리를 헤아려, 의사들을 밀어붙이는 작금의 정책들이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의료서비스에 어떤 불이익을 줄 것인지 논리를 세우고 전략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정부와 여당에도 문제가 있다. 모든 변화에는 속도가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문 대통령 임기, 4년 국회의원 임기의 전반기 안에 뭐든 빨리 입법을 진행시켜 가시화된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의사를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있음을 인지하고 속도를 조절하면서 대화로 푸는 게 옳다.
2020-11-12 18:17:25
제약 영업 부문, 아니 제약업계 그 자체가 숙명적으로 벗어버리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제약사와 병원 간 이뤄지는 ‘불법 리베이트’다. 이번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리베이트가 주요 화두로 꼽혔다. 이번 복지위 국감의 이슈는 독감백신의 허술한 유통 과정, 의사 국가고시 재응시 불허 등이었지만 영원한 핫이슈인 의약품 리베이트도 도마에 올랐다. 복지위 소속 국회의원들의 국감 질의와 보도자료를 통해 ‘제약사의 경제적 이익 지출보고서’ 작성 기준의 유명무실함, CSO(영업대행사)에 의한 불법 편법 영업 난립, 다양한 리베이트 수수기법 등을 꾸준히 제기했다. 권칠승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2일 제약사·의사의 리베이트 현황을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했다. 그는 최근 5년간 32개 제약사에서 759개 품목이 불법 리베이트로 복지부 행정처분(약가인하 532개, 급여정지 96개, 과징금 94개, 약가인하 및 경고 34개, 경고 3개)을 받은 사실을 공개하면서 리베이트 제공업체·수령자 등 관련 정보를 지속적으로 공개하고 행정처분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에스티는 267개 품목에 대한 행정처분을 받아 가장 많은 행정처분을 받은 업체로 밝혀졌다. 이어 씨제이헬스케어(114개), 한올바이오파마가(74개), 이니스트바이오제약(49개) 등이 뒤를 이었다. 이와 함께 리베이트 수수로 행정처분을 받은 의사 2578명 중 46명(1.78%)만이 면허취소 처분을, 924명(35.8%)이 면허정지 처분을 받은 현황을 지적하면서 의료인 처벌 강화의 필요성도 피력했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도 지난 7일 보도자료를 통해 올해 상반기 적발된 제약·도매업체 8곳의 불법 리베이트 규모가 8억원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6~2020년 6월) 의약품 리베이트 제공액은 2016년 96곳 220억원, 2017년 35곳 131억원, 2018년 27곳 37억원, 2019 14곳 73억원으로 변해 왔다. 복지부가 제약·의료기기 업체의 지출보고서의 형식적인 작성 관행을 다시 한번 들여다볼 계기도 마련됐다. 고영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7일 ‘경제적이익 제공 지출보고서’ 작성관리 의무화 제도가 부실하게 운영된다고 지적했다. 고 위원은 한국애보트를 예로 들고 ‘K-선샤인액트’로 지칭되는 지출보고서 작성 의무화 제도가 사실상 방치돼 있다고 지적하면서 관리감독 강화를 촉구했다. K-선샤인액트는 초강력 리베이트 근절 대책이다. 2016년 11월 17일 국회에서 통과된 약사법 조항에 마련된 선샤인 액트는 제약사가 의사 등에게 견본품, 학회 참가비, 제품 설명회 때 식음료, 임상시험·시판 후 조사 비용 등을 지원하거나 제공할 경우 ‘누가’, ‘언제’, ‘누구에게’, ‘얼마 상당의 무엇을’ 제공했는지 경제적 이익 내역을 빠짐없이 작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관련 영수증이나 계약서 같은 증빙서류를 5년간 보관해야 하고 정부가 요청하면 다 공개해야 한다. 이처럼 만물을 살균하는 ‘선샤인’처럼 부패에 대한 강력한 소독제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8일 “제약회사가 영업대행사(CSO)에 판매수수료를 높게 책정하고 이를 통해 의사에게 리베이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신종·변종 리베이트 사례가 줄었다”며 “최근 정부 감시 강화로 리베이트 직접 제공이 줄었지만 합법을 포장하면서 리베이트를 우회적으로 제공하는 통로가 많다 ”고 지적했다. 그는 리베이트 근절을 위해 CSO 허가제 도입을 주장했다. 아울러 복지부와 공정거래위원회가 따로 설정하고 있는 리베이트 규제 재분석·평가, 지출보고서 에 상세한 기록 누락에 대한 대책 마련, 난립하는 제네릭 규제 강화 등을 제안했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CSO가 존재의 취지와 달리 신종 리베이트 제공 창구로 악용되고 있는데도 약사법 상 사각지대로 인해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미흡하다”며 CSO를 처벌할 법적 조항을 약사법에 담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CSO가 리베이트의 창구가 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지난해 국감에서도 언급됐던 사항”이라며 “문제는 복지부 장관이 개선을 진행하지 않은 덕분에 제재 방안이 없다. 복지부의 직무유기다. 관련 법안 발의할 예정이므로 복지부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는 제약업계의 불법 리베이트를 근절하기 위해 다양한 규제책을 내놨다. ‘리베이트 쌍벌제’, ‘리베이트 약가인하 연동제’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규제 강화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음에도 비웃기라도 하듯 해마다 불법 리베이트로 입방아에 오르는 제약사는 끊이지 않고 있다. 리베이트는 영업사원에겐 실적으로, 기업으로선 매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제약업계가 불법 리베이트 근절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약산업은 곧 리베이트 산업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제표준기준인 ISO37001(반부패경영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윤리경영을 위한 자정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제약사 직원이 의사를 가급적 자주 만나 자사 제품을 홍보하고 이런저런 불편한 것을 해결해주고 정을 쌓으며 판매를 권유하는 식으로 영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돈이 오가는 뿌리 깊은 리베이트 관행은 언제 소멸될지 모른다. 우선 ‘언택트’(비대면) 시대를 맞아 의사와 영업사원이 대면하는 전통적인 영업방식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불법 리베이트가 근절되지 않는다는 게 일선 영업사원의 토로다. 때마침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 코로나19)로 전세계적으로 언택트 서비스 활성화가 키워드로 떠올랐다. 상위 제약사들이 자체 의료정보 포털 사이트를 열고 자사 전문의약품을 홍보 중이지만 사실 내용의 깊이나 보편성이 떨어진다. 우선 이런 것부터 고객친화적으로 고쳐야 한다. 물론 너무 깊은 학술적인 내용을 홈페이지에 담는 게 불필요할 수 있다. 일부 제약사들은 의사만 들어갈 수 있는 여러 사이트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영업사원 없이도 궁금증을 해결할 만한 정보가 제공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결론적으로 의사와 영업사원이 만나지 않을수록 리베이트는 줄게 돼 있다. 물론 제약사들은 의사들이 대면 접촉을 선호하지 않고, 이럴 경우 손님이 떨어져나간다는 정서에 쪄들어 있다. 한국인은 얼굴을 마주하고 친분을 쌓아야 일이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디지털 채널을 통한 의사와 제약사 간 소통은 늘어날 전망이다. 아이큐비아가 코로나19가 본격화된 지난 2월 제약사를 대상으로 영업·마케팅 프로모션 활동 등을 분석한 결과, 국내 의사들의 디지털 채널 선호도는 21%였다. 비록 대면 접촉 26%, 미팅 및 이벤트 28%, 출판 및 인쇄정보 25%보다는 비중이지만 대세는 디지털 또는 모바일로 만나는 게 일상화될 날이 앞당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이 여러 의원들의 지적에 ‘철저히 조사해서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게 허튼소리가 되지 않으려면 리베이트 재원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달되며 이와 관련한 당사자들의 심리구조는 어떤지를 파악해서 입안에 나서야 할 것이다. 대책은 ‘디테일’이 중요하다.
2020-10-15 11:52:48
공무원은 다른 말로 공복(公僕)이라고도 불린다. 국가와 사회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이다. 헌법 7조 1항은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명명하면서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식품의약품안전처 감사 결과 2018년 소속 공무원 32명이 업무 관련 주식을 거래한 것으로 나타났다. 식약처 공무원 행동강령 12조에 따르면 직무수행 중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 유가증권, 부동산 등과 관련된 재산상 거래 또는 투자가 금지돼 있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강서갑, 보건복지위)이 식약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 7월 1일~12월 31일 식약처 업무 관련 주식보유·거래한 공무원이 32명에 달했지만 부당 이익을 취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감사를 종결한 것으로 확인됐다. 식약처 A 직원은 제약회사 2곳의 주식을 두 달 새 1억3000만 원가량을 매수했다가 감사가 시작된 시점에 전량 매도했고, 또 다른 B 직원은 제약회사 주식 6000여만원 어치를 샀다가 인허가 담당 부서로 옮긴 뒤 감사가 시작되자 전량 매도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직무 관련 정보를 이용해 부당 이득을 남긴 직원은 없었다며, 이해 충돌 소지는 있을 수 있지만 법적인 문제는 없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이유로 32명 중 징계를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표면상으로는 부당이익을 취한 것이 아닐지 몰라도 공무수행 중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주식을 매입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행 제도에서는 식약처 공무원이 자진 신고한 내역을 토대로 주식거래 시기와 민원처리 내역을 비교해 직무 연관성을 따지기 때문에 자진신고 하지 않으면 파악할 방법이 전무하다. 반면 금융위원회의 경우, 자기 명의의 계좌를 등록한 다음 매매명세를 분기별로 신고하게 돼 있어 차이를 보인다. 강선우 의원은 “의약품의 인허가를 담당하는 식약처 공무원이 제약사 주식을 거래했다는 사실은 일반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았을 때 이해하기 어렵다”며 “인허가를 담당하는 식약처 공무원이 관련 제약주식을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은 시장의 혼선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식약처는 지난달 23일 관련 업무 담당 공무원은 아예 주식거래를 하지 못하게 못을 박는 ‘식약처 공무원 행동강령 일부개정훈령안’을 공포했다. 새 행동강령에 따라 의료제품(의약품 및 의료기기) 외의 부서로 발령받아 주식거래 제한 대상자에서 빠졌을 때도 전보일로부터 6개월 동안은 해당 주식을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 기존 행동강령은 대민 관련 인허가, 승인 업무 등을 담당하는 직원들에게만 적용됐으나, 이번 개정으로 의료제품 분야의 모든 공무원이 규제 대상에 포함됐다. 우리 헌법이 공직자를 봉사자로 지칭한 점은 타 직업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과 도덕성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공직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높을수록 국민의 행복도도 높아질 수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공직자가 갖춰야 할 세 가지로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을 꼽았다. 다산은 율기의 방법으로 6조(六條)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칙궁’(飭躬, 단정한 몸가짐), 청심(淸心, 깨끗한 마음가짐), 제가(濟家, 집안을 잘 다스림), 병객(屛客, 잡객(청탁)을 멀리함), 절용(節用, 물건의 절약), 낙시(樂施, 즐거이 베풂)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공직자들이 ‘율기’를 갖췄다고 보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공직자들의 뇌물수수 및 비리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공정과 정의를 내세워 정권을 잡은 현 정부는 왠지 이를 적발하고 경우가 적어졌다. 오히려 최재형 감사원장의 독립적인 행정부 감시 노력을 방해하는 쪽으로 율기를 흩뜨리고 있다. 식약처는 행동강령 일부개정훈령안을 통해 주식투자 견제 장치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진작에 처벌 또는 징계 조항이 마련돼 실행되고 있어야 마땅했다. 셀트리온을 시작으로 일어난 K-바이오 바람에 제약·바이오 기업 주가가 루머와 정보로 춤을 추며 급등락한 지가 5년도 훨씬 넘은 얘기이기 때문이다.
2020-10-06 18:13:07
10일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을 거부한 의과대학생을 구제할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의료인력 공백 등을 이유로 의대생 구제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의대생 스스로가 두 번의 국시를 거부한 만큼 다시 구제안이 나오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가장 애가 단 것은 스승들이다. 10일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는 성명문을 내고 “의·정 합의에 따라 정부는 온전한 추가시험을 시행해야 한다”며 “국시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는 장·단기적으로 매우 크다”고 호소했다. 이어 “향후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강조했다. 앞서 의료계 파업을 주도했던 대한의사협회도 7일 성명문을 발표했다. 의협은 “의대생의 국가시험 응시 거부는 일방적인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정당한 항의이므로 마땅히 구제책이 마련돼야 한다”며 “의협은 이들이 정상적으로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해 대응할 것”이라고 강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정부는 국시 거부 의대생을 구제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10일 손영래 중앙사고수습본부 방역총괄반장은 정례브리핑에서 “의대생이 자유 의지로 국시를 거부한 만큼 추가시험 검토는 불가능하다”며 “추가적 기회 부여는 공정성과 형평성의 문제인 만큼 국민적 양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의협과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의대생들이 국시에 응시하지 못해 피해를 본다면 총궐기대회 등 단체행동을 불사하겠다고 나서 애써 봉합한 의료파업이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 문제의 주인공인 의대생들의 태도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지난 8일 서울대 의대 학생회가 올해 의사 국시를 치러야 하는 본과 4학년 1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1%가 국시를 거부하는 데 반대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10일 오전 10시부터 진행된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 향후 방침에 대한 마라톤 논의에서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도리어 강경파의 목소리만 커지는 모양새다. 이화여대, 성균관대, 순천향대, 울산대 본과 4학년 학생들은 국시에 추가 접수하지 않겠다는 성명서를 SNS에 게시했다. 당초 의사 국시 실기시험은 9월 1일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의료파업으로 정부는 8일로 연기했다. 현재 응시대상자 3172명 중 446명이 접수를 마쳤고 나머지 약 85%는 현재 시험을 거부한 상태다. 첫날 8일 시험을 치른 사람은 6명에 불과했다. 시험은 9월 8일부터 오는 11월 20일까지 43일간 병원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보게 됐다. 예년의 경우 많은 응시생들로 인해 하루에 3차례로 나눠 100명 단위로 시험을 진행해왔으며, 평균 합격률은 90% 안팎이었다. 올해는 의료파업으로 3차례로 나눠 진행하던 관행이 사라지게 됐다. 응시자 부족으로 그럴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난달 접수했던 국시 원서를 의료파업으로 의대생들이 거의 전부 철회했고, 4일 의협과 정부가 의료파업 철회에 합의하면서 당시 예고된 국시 재접수 마감시점이었던 4일 24시가 6일 24시로 한번 더 연기했음에도 의대생들이 요지부동으로 접수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의대생들은 “4일 나온 정부‧의협 간 합의안이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의 백지화가 아니라 원점에서 재검토로 설정된 것은 투쟁의 취지와 목표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거부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전공의와 의대생의 생각이 협상에서 반영되지 않은 소외감과 분노도 이면의 거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스승과 선배 의사들은 원활한 학사 운영 및 의사 수급을 위해 하루빨리 의대생들이 학업에 복귀하길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당초 9월 1일 시작할 예정이었던 의사 국시 실기시험 일정을 8일로 한 차례 연기한 바 있고, 의협의 요청과 짧은 신청기간을 감안해 접수 기간과 시험 일자를 한 번 더 연장하는 조치를 취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본인들의 자유 의지로 이를 거부했고, 스스로 시험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에 추가 시험을 검토하라고 하는 의료계 요구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다시 말씀드린다”고 10일 손영래 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스승과 선배의 입장으로서 잘 가르친 제자이자, 같은 길을 가게 될 후배가 의료파업 투쟁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큰 고통일 수밖에 없다. 머잖아 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에 배치돼야 할 이들이 국시에 발이 묶어 졸업이 늦어지면 그만큼 의료공백이 커지고, 의료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는 점도 현실적인 걱정이다. 그럼에도 얽힌 매듭은 결국 의대생이 풀어야 한다. 정부의 공권력이란 사실 매섭다. 1980년대에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었다가 해임된 교사, 또는 끝내 교사로 임용되지 않는 전국의 국립 사범대 출신 졸업생 등 수천명은 그 여파로 장기간 지금도 큰 피해를 입고 있다. 냉정한 게 현실이어서 이미 성인인 의대생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투쟁을 위해 단체를 만들고, 협의해서, 결정한 행동의 결과는 의료파업이었고 이로 인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파업 과정에서 일어난 학업과 경제의 손실은 자력으로 회복해나가야만 한다. 공부할 기회가 손실된 것을 더 열심히 공부해 메워야 한다. 교수와 의협, 선배 의사들이 의대생의 편에 서서 불이익을 막아주거나 줄여줄 수는 있다. 선후배 간에 서로 힘이 되어 주는 모습은 어떤 집단에서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스스로 시험을 칠지 말지 결정하지 않은 의대생들을 두고 의료계가 정부에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모양새는 자기 결정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성인에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종국엔 다시 한번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응석을 부리는 모습으로 비쳐지고 투쟁의 명분마저 약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8일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국시 거부 의대생을 구제할 필요가 없다고 답한 국민이 52.4%나 됐다. 이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김성주 더불어 민주당 의원(보건복지위)은 “지금까지 의료계의 목소리는 충분히 국민들에게 전달됐고 국민과 국회가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의 주장에 힘을 실었던 의대생들의 목소리는 어른의 것이었다. 그들이 어른스럽게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승과 선배들이 기다려주시길 부탁한다. 다시 한번 의사 없는 응급실과 진료실을 찾아 여러 병원을 뛰어다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는 국민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2020-09-10 20:33:50
지난해 9월 ‘약물 혼용’으로 당뇨병성 말초신경병증(diabetic peripheral neuropathy, DPN) 유전자치료제 ‘엔젠시스’(VM202)의 임상시험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던 헬릭스미스는 5개월 만인 지난 14일 약물 혼용도 없었다고 말을 바꿨다. 임상 설계 자체가 실패 원인인 게 분명함에도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효성·안전성은 입증됐다며 뻔뻔한 태도를 취해 업계와 투자자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헬릭스미스는 지난 14일 “지난해 10월부터 한국과 미국에서 조사팀을 조직하고 임상 3-1상에서 발견됐던 약동학적 분석의 이상현상 조사를 완료했다”며 “그 결과 원인을 명확히 파악했고, 환자 간 약물 혼용은 없던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지난해 9월 환자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 3상의 주요 지표인 ‘3개월 후 통증 감소효과’가 위약 대비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이같은 임상 실패 원인으로 엔젠시스를 맞아야 할 환자에 위약이, 위약 환자에 엔젠시스가 잘못 투약됐다며 약물 혼용 가능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여기에 임상을 진행한 CRO(임상시험수탁기관)를 고발하겠다며 엄포까지 놨다. 하지만 이번 발표로 약물 혼용과 같은 어이없는 실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게 드러났다. 이번에는 “주 평가지표 달성에 실패한 것은 엔젠시스 약효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지표가 가진 특수성에 따른 임상 방법상 문제”라며 흔한 실수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로 인해 회사 주가는 요동쳤고 지난해 바이오업계에 불어닥친 악재를 연장시켜 업계의 신뢰 회복 노력에 또 다시 찬물을 끼얹었다. 회사 측은 101명을 대상으로 한 3-1B상을 진행한 결과, 전체 환자 대상 엔젠시스의 6, 9, 12개월 통증감소 효과가 위약 대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았고 위약과 엔젠시스군 간의 통증감소 효과 수치의 차이가 각 1.1, 0.9, 0.9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어 프리가발린 또는 가바펜틴 등 진통제를 복용하지 않는 환자 53명에선 같은 기간 1.3, 1.2, 1.5을 보여 전체 집단 대비 높게 나타났으며, 엔젠시스 투여를 멈춰도 8개월 이상 효과가 유지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헬릭스미스 측은 “임상이 진행될수록 통증에 대한 반응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후기로 갈수록 통증감소 효과가 유의미하게 크게 나타났지만 초반에는 효과가 덜했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엔젠시스의 1차 평가변수 세부기준을 바꿔 재임상에 들어갈 방침이다. 실패한 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주요 지표를 유리한 방향으로 바꾼 뒤 임상을 진행하겠다는 이야기다. 기존 ‘투여 3개월 후 통증 감소’는 ‘장기 투여 후 통증 감소’로 변경될 가능성이 크고, 환자군도 프레가발린·가바펜틴을 사용하지 않는 통증성 DPN 환자로 한정될 전망이다. 여기에 통증을 정확하게 측정할 능력이 없거나 통증 변동성이 심한 피험자를 가려낼 수 있는 방법 도입, 통증지표 최신 기법으로 변경, 통증 측정 방법의 정교화, 유럽 허가를 위한 QoL(삶의 질) 지표 추가, 검사가 단순하고 쉬운 신경기능 검사 방법 도입 등을 발표했지만 얼마나 정교한 측정 기준을 도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해 9월 김선영 대표가 직접 약물혼용이 의심된다고 주장했던 내용은 이같은 임상 결과 발표조차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그는 “일부 위약군 환자의 혈액 샘플에서 엔젠시스 DNA 레벨이 높게 검출됐고, 반대로 엔젠시스 투여군에서 이 수치가 낮게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상 결과 90일, 180일, 270일 통증감소 효과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약물혼용 주장도, 통증감소 효과도 최근 발표 내용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그대로 공개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영 대표 친인척인 이혜림, 김승미 씨는 지난해 9월 주식담보대출 일부 상환을 이유로 각각 2500주, 500주를 23일 장내 매도했다. 이날은 헬릭스미스 3상 실패 사실이 장 마감 후 알려진 날이다. 두 사람의 처분 금액은 5억3000만원으로 3일 뒤인 작년 9월 26일엔 김선영 대표가 같은 이유로 주식 10만주를 매도해 약 76억원을 챙겼다. 그 다음날 헬릭스미스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헬릭스미스는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공시불이행을 이유로 지난 18일 불성실공시기업 지정 예고를 받았다. 약물 혼용이 없었고 임상 설계 실패에 의한 임상실패라는 내용을 즉시 공시하지 않고 주말을 넘긴 지난 17일에 발표했기 때문이다.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되면 벌점 5점을 받는다. 1년간 누계 벌점이 15점 이상이면 코스닥시장 상장규정에 따라 상장폐지 심사 대상에 오를 수 있다. 이같은 임상시험, 기술개발, 품목허가 등 단계별 불확실성이 높은 정보가 잘못 해석돼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자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는 지난 9일 ‘코스닥 제약바이오 업종 기업의 공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공시와 관련 위험성을 사전에 공개하도록 유도하는 취지에서 도입된 이 제도로 ‘임상 성공’ 등과 같은 판단을 자의적으로 내릴 수 없다. 임상 착수, 임상 완료, 허가 획득 같이 객관적이고 명확한 표현만을 쓸 수 있게 했다. 헬릭스미스는 이 제도를 적용받는 첫 사례가 됐다. 게다가 이번 발표로 주가가 하락하자 투자 손실을 우려한 전환사채(CB) 투자자들이 조기 상환을 요청하면서 또 다시 CB를 발행해 상환금을 마련하고 있다. 빚내서 빚막기다. 헬릭스미스는 지난 20일 800억원 규모의 CB 발행을 결정했다. 이 중 550억원은 채무상환, 250억원은 운영자금에 쓰일 예정이다. 회사 측은 이같은 상황 속에서 후속 3상 임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회사 관계자는 “후속 임상 프로토콜이 사실상 완성된 상태로 미국 FDA 제출 시기를 조율 중”이라고 설명했다. 헬릭스미스의 입장 번복에 대해 바이오업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업계 관계자는 “약물혼용을 임상실패의 이유로 드는 사례는 글로벌 업계에서 매우 찾아보기 드물다”며 “한국 바이오 업계 전체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처사”라고 꼬집었다.
2020-02-26 20:22:12
범행 자백 직원만 유죄, 문학선 전 대표를 포함한 나머지 임원은 무죄. 수십억원대 불법 의약품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로 4년 가까이 끌어온 한국노바티스 약사법 위반 소송의 최종 결과다. 그나마도 공소시효가 지난 부분은 면소됐고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5단독 재판부는 불법 리베이트 연관성을 인정하면서도 기준으로 삼을 만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서울서부지방검찰청은 2016년 8월 노바티스 전현직 임원 6명, 의약전문지 5곳, 보건의료계 출판업체 1곳 등 관련자 34명을 약 25억9000만원의 불법 리베이트 제공 혐의로 불구속 기소해 법정에 세웠다. 이 중 대형병원 의사 15명은 약식기소로 벌금형 처분을 받아 법정에 서지는 않았고 진행 과정에서 사망한 M매체 대표 S씨를 제외한 개인·법인 피고인 18명이 재판을 받았다. 한국노바티스는 리베이트 살포 관련 사실이 적발된 뒤 보건복지부와 공정거래위원회가 부과한 대체과징금 566억원을 납부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판매업무정지 3개월 처분을 받았으며, 국세청 세무조사까지 받는 등 위법행위가 사실상 만천하에 드러났다. 약사법상 의약품을 공급하는 제약사가 공급받는 자인 의료인을 대상으로 좌담회를 열 경우 참석 유도를 위해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 것은 판매 촉진 목적이 개입될 수밖에 없어 불법 리베이트로 간주되며 처벌 대상이다. 검찰이 확보한 노바티스 내부문건 자료에는 노바티스가 2012년 ‘M라운드테이블’이라는 이름의 좌담회를 주최했고 관련 계획안에는 회당 2000만~3000만원의 예산이 편성됐으며, 상세내역에 골프·식사 등 항목이 포함돼 있다. 또 노바티스 전직 임직원 중 유일하게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김 모씨가 문학선 전 대표를 거쳐 글로벌 본사 재무 담당에게도 라운드테이블미팅(RTM) 등 행사에 집행된 예산내역을 보고하고 향후 지출 계획을 함께 조정했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매출액 규모가 비슷한 다른 제약사와 비교해 노바티스가 의약전문지에 지급한 광고비가 유독 많았던 점도 지적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판사가 인사 이동을 이유로 수차례 교체됐고 그 때마다 검찰과 변호인단은 과거 주장했던 내용을 반복하며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다보니 재판부도 비슷한 내용의 심문은 생략하는 등 공판 내용도 간소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지난해 이뤄진 공판에선 엄정한 법 집행 의지는 희석돼 날카로운 공방이 없었다. 변호인단은 검찰 측 주장에 대해 오히려 중간중간 비웃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피고인의 태도도 돌변했다. 처음 기소했을 때 전반적으로 혐의를 인정하는 피고인 진술이 많았던 것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하나같이 ‘그 때는 리베이트 관련 혐의에 대해 사실이라고 대답했지만 생각해보니 당황해서 잘못 이야기한 것 같다’는 논리로 돌아섰다. 한국노바티스 측도 라운드테이블미팅에 참여하는 의료진 편집위원 선정 등을 E출판사가 주도했으며 직접 관여한 바가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또 여기에 소요되는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의약전문지들에 광고비를 제공하고 대신 집행하도록 한 부분에 대해서도 노바티스와 전문지 담당자 선에서 벌어진 일탈일 뿐 관리자는 위법성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발뺌했다. 편집위원 선정 관여나 세부 집행내역을 증명할 객관적 자료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일부 피고인이 범행을 자백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노바티스와 전문지·출판사 등 피고인들이 노바티스를 통해 불법 리베이트에 가담한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해볼 수 있다”고 위법성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피고인은 고의성이 없었고 제약사의 전문의약품 홍보 효과가 중요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다소 모호한 논리로 무죄 취지 선고를 내렸다. 마땅한 기준이 없다는 게 이유다. 노바티스 한국법인이 566억원의 과징금을 납부하고 식약처로부터 판매업무정지 처분도 받은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된 피고인 중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유죄 취지의 발언을 한 직원 한 명뿐이라는 사실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이 직원이 혼자 25억9000만원을 횡령한 것도 아니고 정상적인 회사 결재를 받아 예산을 집행했을 뿐이다. 검찰이 주장한 대로 부서장, 한국법인 대표, 아시아지역 본부를 거쳐 스위스 본사 재무 담당으로 이어지는 보고 체계 하에서 이 돈의 성격과 집행내역에 대해 아무도 몰랐다는 항변이 사실이라면 노바티스의 경영능력에 중대한 하자가 있는지 의심해볼 만하다. 지난해 11월 1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문 전 대표는 징역 1년6월을 구형받았다. 그는 “검찰은 적법한 광고행위를 리베이트 행위로 보고 전문지 대표 등과 공모한 혐의로 기소했다”며 “극소수 직원의 일탈 행위가 정당한 활동으로 제품 홍보에 힘쓴 직원들의 노력까지 범법행위로 만들어선 안 된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또 “적법한 광고비 집행을 이유로 업계 생활을 마감하고 전과자가 되는 상황을 납득할 수 없다”고 호소하며 다른 노바티스 임직원들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일로 책임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날 다른 전직 임원 K씨는 “글로벌 기업에선 윤리의식이 사람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리베이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고, B씨는 “이 사건으로 경력도 단절돼 3년간 사회생활을 못하고 있어 정신적 고통이 크다”고 주장했다. 억울함과 도덕적 무결함을 주장했던 이들은 선고 당일 무죄 판결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이들은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켰지만 결백을 입증한 기쁨의 눈물보다는 실형을 면했다는 안도의 눈물로 느껴졌다. 이번 판결로 일각에선 의료진 좌담회나 다른 형태의 불법 리베이트 창구 활용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에 재판부가 모호한 판결을 내리면서 명확한 기준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한 부분은 꼭 제도 설계에 반영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 무조건 법리적으로 무죄를 주장하며 이기면 된다는 소송만능주의가 만연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아무리 무죄 판결을 받아도 불법 행위에 대한 개연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에는 추호의 변함이 없다. 이번 사건이 노바티스를 비롯한 전 제약바이오 업계에 잘못된 선례로 남아 더 은밀한 불법 행위가 만연하지 않길 바란다. 다행히도 검찰은 지난 설연휴가 끝난 28일 항소했다. 당시 법정 분위기로만 봐서는 항소하지 않을 듯하던 검찰이 1심 판결을 받아들이기에는 명분이 없어도 한참 없었을 것이다. 청와대와의 대립을 불사하고 엄정한 법 집행을 강조하며 검사들 다잡기에 나선 윤석열 검찰총장 체제하에서는 더욱 그렇다. 노바티스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여러나라에서 기업윤리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미국, 중국 등에서 불법 리베이트를 제공한 혐의로 상당한 벌금을 물었다. 지난해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인 마이클 코언에게 로비 자금으로 120만달러를 주고 트럼프 행정부 출범 초기의 보건의료정책을 탐지하려 한 사실이 밝혀져 곤욕을 치렀다. 또 지난해 그리스에선 불법 리베이트 문제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수백만 유로를 공무원에게 지불했다는 내부고발자 주장이 이어지면서 2017년 1월 시작했다가 중단된 수사를 지난 8월 그리스 검찰이 재개했다. 보건부 장관, 개발부 장관, 유럽연합(EU) 집행관 등 전직 정부 고위 인사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뒷거래가 있다는 정황을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해외 사례를 볼 때 공정거래위원회, 식품의약품안전처, 국세청으로부터 시달릴 만큼 시달리고 거액의 과징금도 냈으니 이제는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게 노바티스 국내법인의 절절한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봄바람이 불려면 멀었다. 검찰이 항소했고 사법부의 준엄한 판결이 아니라면 진정한 단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손세준 기자 md@mdfact.com
2020-01-31 03:16:02
2016년 8월 24일. 삼성전자가 야심차게 내놓은 ‘갤럭시 노트7’에서 첫 배터리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전세계에서 동일한 폭발이 보고되면서 이 모델은 전량 리콜됐고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에 다른 갤럭시 제품 사용자에게도 불안·불신을 남기며 갤럭시 등 삼성 스마트폰 브랜드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삼성이 이듬해 ‘갤럭시 노트 8’을 출시하면서 선택한 전략은 기존 셀러브리티 활용이 아닌 SNS 인플루언서를 통한 ‘진정성(Authentity)’ 보여주기였다. 유명 인플루언서는 배터리 폭발을 우려하는 소비자에게 ‘삼성 스마트폰은 안전하다’라고 설득하기에 최적화된 소통 창구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소비자와 쉽고 빠르게 소통하기에는 이만한 수단이 없었다. 최근 5년 새 유튜브를 중심으로 개인 방송이 활성화되고 콘텐츠 제작에 특성화 된 소위 ‘크리에이터’ 활동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힘을 빌려 마케팅에 나서는 기업이 점차 늘고 있다. 지상파·종편·케이블 TV의 보도나 온·오프 라인 매체 기사 등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벗어던지고 특정 인플루언서의 팔로워(Follower)에게 직접적·효과적으로 홍보하는 방식은 업종·제품에 따라선 매력적인 채널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세계적 추세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인플루언서 마케팅 시장은 2017년 20억달러(약 2조1300억원)를 기록했고 올해 최대 약 100억달러(약 10조600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약 1400명의 인플루언서와 계약을 맺고 플랫폼 역할을 하는 CJ E&M의 다이아티비(DIA TV)가 시청률조사기관 티엔에스(TNS)를 통해 2018년 발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6%가 ‘인플루언서가 일반 연예인보다 가깝고 친밀하게 느껴진다’고 응답했다. 이들 중 95%는 ‘기업보다 인플루언서가 전달하는 정보를 더 신뢰한다’고 답했다. 쉽게 말해 기업 홍보에 있어 값비싼 광고 플랫폼보다 인플루언서를 통한 짤막한 소개가 더 먹혀들어간다는 이야기다. 유튜버가 더 신뢰를 얻는 것은 친밀감에 있다.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 친구가 해주는 말처럼 다정다감하고 어려운 것을 쉽게 얘기해준다. 쉬운 언어로 친밀감 있게 소통하는 것은 곧 신뢰도로 연결된다. 여기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IT문화에 익숙한 X세대 이후의 정서, 전문가들의 권위적·교과서적인 표현방식에 대한 ‘반감’ 또는 ‘비호감’이 유튜버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시각이 나온다. 인플루언서는 미디어로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불안·불신·불만의 3불(三不) 사회에서 대중은 정부·정치권 발표보다 사업가 백종원의 말 한마디를 신뢰한다. 어려운 실증적 논문 대신 쉽고 편하게 설명하는 유튜버의 동영상에 만족감을 느낀다. 이들은 인스타그램,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전 채널에 걸쳐 활동하며 다양한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며 신뢰까지 얻고 있다. 이들에 대한 호감 또는 신뢰가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대중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의약품·건강기능식품·일반식품 등은 허위·과장 정보로 소비자 건강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소비자가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다이어트·탈모·항암 효과 등 기능성에 대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제품이 부지기수다. 장점만 나열하고 건강 상태에 따라 어떤 치명적인 부작용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인플루언서가 의뢰받는 제품을 충분히 이해해야 하는 과정이 전제돼야 하지만 얼마나 충실히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사실상 겁 없는 인플루언서 행태에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대표적으로 유튜버 ‘밴쯔’(29·본명 정만수)가 1심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은 사례를 들 수 있다. 정 씨는 320만명의 유튜브 구독자를 보유한 정상급 인플루언서로 지난 4월 건강기능식품으로 제품 인증을 받고도 과장광고한 게 적발돼 처벌받았다. 2017년 건강기능식품 브랜드 ‘잇포유’를 론칭하면서 다이어트 효과 등을 치료 효과로 오인하게 한 혐의다. 정 씨는 이 사건으로 구독자 60만명을 잃었다. 건강기능식품을 광고하기 위해선 건강기능식품협회의 사전광고 심의를 받아야 한다. 최근 인플루언서의 허위·과장광고 품목·방식 등이 다양화되면서 적발 사례에 비춰보면 건기식으로 인증받은 제품을 판매한 정 씨의 벌금형은 억울할 정도다. 인증받은 건강기능식품을 속여 파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인증 절차가 필요없는 건강식품까지 난립하면서 근거없는 효과와 체험 수기 등이 퍼져나가고 있다. 무분별한 판매로 발생하는 부작용 등에 대해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배째라’식 방송이 계속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9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허위·과장광고를 일삼은 인플루언서 15명과 유통전문판매업체 8곳을 적발했다. 팔로워가 10만명이 넘는 인플루언서만 대상으로 조사해 이보다 팔로워 수가 적은 ‘마이크로·나노 인플루언서’까지 포함하면 위법 행위자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적발 내용은 다이어트·디톡스·부기 제거에 효과가 있다는 거짓·과장 광고 65건(이하 업체당 경로별 중복건수 합계), 제품 섭취 전·후를 비교한 거짓 체험기 34건, 다이어트 효능·효과 표방 등 건강기능식품으로 오인·혼동 광고 27건, 원재료 효능·효과를 활용한 소비자 기만광고 15건 등이다. 먹으면 살 빠지는 다이어트 보조제, 마시면 신체 내 독소가 빠져나가는 디톡스 쥬스, 발바닥에 붙이면 노폐물이 빠져 검게 변하는 발 패드 등은 모두 허위다. 이들 인플루언서는 SNS를 통해 특정 제품 섭취 전·후 얼굴, 몸매, 체중 변화 등을 체험기 형태로 올리며 거짓으로 효과를 홍보했다. 이에 앞서 본인이 운영하는 쇼핑몰 링크, 공동구매 공지 등을 띄워 소비자 구매를 유도하는 등 소비자를 기만했다. 여기에 온라인 홍보를 대행하는 광고대행사까지 가세했다. 소비자인 척 다이어트로 효과를 봤다며 SNS 댓글을 수백개 남기거나 제품 섭취 전·후 체형 변화 사진, 체중변화 영상 등을 올린 뒤 베스트 리뷰로 지정해 50만원 상당 적립금을 제공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스스로 지급한 적립금은 SNS 내 타깃 광고 플랫폼인 ‘스폰서 광고’ 비용으로 썼다. 심지어 한 유튜버는 다이어트 보조제를 설명하면서 약국 내부를 배경으로 흰 가운을 입고 촬영해 약사가 설명하는 것으로 오인토록 하는 영상도 올라와 논란이 됐다. 게다가 해당 제품은 약국에서 판매되지도 않는 품목이다. 흰 가운을 입는 게 현행법 상 위법은 아니지만 배경이 실제 약국으로 나온 만큼 도를 넘었다는 평가다. 이처럼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난립하자 SNS에서 화제된 제품이 진짜 효과가 있는지 검증해보는 ‘크리에이터’(광고비를 받기 시작하는 유튜버)가 등장해 덩달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먹기만 해도 살이 빠진다는 다이어트 보조제를 먹었지만 살이 더 찌거나, 세탁기에 넣기만 해도 외부 세탁조 청소가 된다는 세제를 사용했지만 효과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이 유튜브 채널 시청자는 “실상을 검증해 신뢰를 얻었다는 비판적 크리에이터들도 언젠가는 광고성 영상을 만들지도 모르겠다”며 “효과없는 것을 증명하는 영상은 대체로 믿고, 효과가 있다고 설명하는 영상은 거르면서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약처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8월까지 전체 온라인 건강기능식품 허위·과대광고 및 기준·규격위반으로 적발된 건수는 총 6만2599건으로 이 중 허위·과장광고가 4만90건에 이르고 기준·규격위반도 2만2509건으로 확인됐다. 2018년에만 1만921건이 적발된 만큼 앞으로 연간 적발 건수는 점점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건강기능식품 이상사례 신고 건수도 2015년 502건에서 2018년 964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고 5년간 총 피해 건수는 3754건에 달했다. 품목별로는 영양보충용제품이 1135건, 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 635건, DHA/EPA 함유 유지제품 298건, 홍삼류 184건, 가르시니아캄보지아추출물 176건, 백수오등복합추출물 제품 142건, 프락토올리고당제품 138건 순이었다. 식약처 관계자는 “인플루언서를 이용해 소비자를 기만하는 부당한 광고 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실시하겠다”며 “고의·상습 위반업체는 행정처분과 함께 고발 조치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건강기능식품의 과장광고 처벌은 즉각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 헌법재판소가 2018년 6월 건강기능식품의 사전 광고 심의가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현행법상 위반 사례를 적발해도 법원 판례가 많지 않아 선고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다. 선고가 지연되는 만큼 실제 처벌은 보류 또는 감면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식품산업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일반 건강식품에도 과학적 근거가 있다면 기능성을 표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정고시안을 발표해 허위·과장광고가 난무할 것으로 관측된다. 건강기능식품 업계 관계자는 “건기식의 사전심의 없이 광고가 허용되고 일반 건강식품까지 기능성 표기가 허용된다면 소비자가 직접 건강식품·건강기능식품의 성분·효능 등을 확인하고 걸러내야 한다”며 “전문적인 내용을 모르는 소비자의 피해가 지금보다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정헌 차의과대 의료홍보미디어학과 교수는 “한국은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교육을 통한 국민영양 관련 미디어 이해 및 수용자의 리터러시(文解) 교육이 전무하다”며 “자연스럽게 정보를 접하고 분별력을 향상시키는 정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익광고 같은 소극적 형태가 아니라 교육 과정 속에서 광고에 따른 구매행태 변화, 허위과장 콘텐츠 식별 능력 등을 포괄하는 소비자학 개론 수준을 가르칠 필요도 있다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충성도 높은 팔로워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플루언서들이 휘두르는 말의 칼날은 소비자의 주머니에 구멍을 내고 부당이득을 훑어낸다. 누군가 허위과장 광고로 재미를 보는 동안 소비자는 허접한 제품을 사서 후회하게 된다. 인플루언서의 무책임한 행태에 대해 과거 전력과 기만성을 감안한 비례적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제조·판매자들은 기존 건강기능식품 관련 광고에 제약이 많고 심의 규정이 너무 까다로워 마케팅 재량이 없다고 불만이다. 이 틈을 노려 상대적으로 제제가 느슨한 인플루언서들이 활개를 친다. 마케팅에 대한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면서 허위과장 광고를 엄정하게 처벌할 묘안은 없을까. 유감스럽게도 건강기능식품이나 향후 기능성이 허용될 건강식품은 약과 식품의 경계선상에 놓여진 존재의 특성상 사실에 가까운 홍보냐, 과장 광고냐는 논란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현란한 인플루언서의 말 속에 필요한 것만 주어담을 수 있는 문해력이 요구된다. 수고롭지만 조금만 수준 높은 검색을 해봐도 과장된 것은 알아챌 수 있어 다행이다.
2020-01-13 19:49:57
2016년 8월 24일. 삼성전자가 야심차게 내놓은 ‘갤럭시 노트7’에서 첫 배터리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전세계에서 동일한 폭발이 보고되면서 이 모델은 전량 리콜됐고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에 다른 갤럭시 제품 사용자에게도 불안·불신을 남기며 갤럭시 등 삼성 스마트폰 브랜드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삼성이 이듬해 ‘갤럭시 노트 8’을 출시하면서 선택한 전략은 기존 셀러브리티 활용이 아닌 SNS 인플루언서를 통한 ‘진정성(Authentity)’ 보여주기였다. 유명 인플루언서는 배터리 폭발을 우려하는 소비자에게 ‘삼성 스마트폰은 안전하다’라고 설득하기에 최적화된 소통 창구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소비자와 쉽고 빠르게 소통하기에는 이만한 수단이 없었다. 최근 5년 새 유튜브를 중심으로 개인 방송이 활성화되고 콘텐츠 제작에 특성화 된 소위 ‘크리에이터’ 활동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힘을 빌려 마케팅에 나서는 기업이 점차 늘고 있다. 지상파·종편·케이블 TV의 보도나 온·오프 라인 매체 기사 등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벗어던지고 특정 인플루언서의 팔로워(Follower)에게 직접적·효과적으로 홍보하는 방식은 업종·제품에 따라선 매력적인 채널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세계적 추세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인플루언서 마케팅 시장은 2017년 20억달러(약 2조1300억원)를 기록했고 올해 최대 약 100억달러(약 10조6000억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약 1400명의 인플루언서와 계약을 맺고 플랫폼 역할을 하는 CJ E&M의 다이아티비(DIA TV)가 시청률조사기관 티엔에스(TNS)를 통해 2018년 발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6%가 ‘인플루언서가 일반 연예인보다 가깝고 친밀하게 느껴진다’고 응답했다. 이들 중 95%는 ‘기업보다 인플루언서가 전달하는 정보를 더 신뢰한다’고 답했다. 쉽게 말해 기업 홍보에 있어 값비싼 광고 플랫폼보다 인플루언서를 통한 짤막한 소개가 더 먹혀들어간다는 이야기다. 유튜버가 더 신뢰를 얻는 것은 친밀감에 있다.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 친구가 해주는 말처럼 다정다감하고 어려운 것을 쉽게 얘기해준다. 쉬운 언어로 친밀감 있게 소통하는 것은 곧 신뢰도로 연결된다. 여기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IT문화에 익숙한 X세대 이후의 정서, 전문가들의 권위적·교과서적인 표현방식에 대한 ‘반감’ 또는 ‘비호감’이 유튜버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시각이 나온다. 인플루언서는 미디어로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불안·불신·불만의 3불(三不) 사회에서 대중은 정부·정치권 발표보다 사업가 백종원의 말 한마디를 신뢰한다. 어려운 실증적 논문 대신 쉽고 편하게 설명하는 유튜버의 동영상에 만족감을 느낀다. 이들은 인스타그램,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전 채널에 걸쳐 활동하며 다양한 소비자 욕구를 충족시키며 신뢰까지 얻고 있다. 이들에 대한 호감 또는 신뢰가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대중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의약품·건강기능식품·일반식품 등은 허위·과장 정보로 소비자 건강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소비자가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다이어트·탈모·항암 효과 등 기능성에 대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은 제품이 부지기수다. 장점만 나열하고 건강 상태에 따라 어떤 치명적인 부작용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인플루언서가 의뢰받는 제품을 충분히 이해해야 하는 과정이 전제돼야 하지만 얼마나 충실히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사실상 겁 없는 인플루언서 행태에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다. 대표적으로 유튜버 ‘밴쯔’(29·본명 정만수)가 1심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은 사례를 들 수 있다. 정 씨는 320만명의 유튜브 구독자를 보유한 정상급 인플루언서로 지난 4월 건강기능식품으로 제품 인증을 받고도 과장광고한 게 적발돼 처벌받았다. 2017년 건강기능식품 브랜드 ‘잇포유’를 론칭하면서 다이어트 효과 등을 치료 효과로 오인하게 한 혐의다. 정 씨는 이 사건으로 구독자 60만명을 잃었다. 건강기능식품을 광고하기 위해선 건강기능식품협회의 사전광고 심의를 받아야 한다. 최근 인플루언서의 허위·과장광고 품목·방식 등이 다양화되면서 적발 사례에 비춰보면 건기식으로 인증받은 제품을 판매한 정 씨의 벌금형은 억울할 정도다. 인증받은 건강기능식품을 속여 파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인증 절차가 필요없는 건강식품까지 난립하면서 근거없는 효과와 체험 수기 등이 퍼져나가고 있다. 무분별한 판매로 발생하는 부작용 등에 대해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배째라’식 방송이 계속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9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허위·과장광고를 일삼은 인플루언서 15명과 유통전문판매업체 8곳을 적발했다. 팔로워가 10만명이 넘는 인플루언서만 대상으로 조사해 이보다 팔로워 수가 적은 ‘마이크로·나노 인플루언서’까지 포함하면 위법 행위자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적발 내용은 다이어트·디톡스·부기 제거에 효과가 있다는 거짓·과장 광고 65건(이하 업체당 경로별 중복건수 합계), 제품 섭취 전·후를 비교한 거짓 체험기 34건, 다이어트 효능·효과 표방 등 건강기능식품으로 오인·혼동 광고 27건, 원재료 효능·효과를 활용한 소비자 기만광고 15건 등이다. 먹으면 살 빠지는 다이어트 보조제, 마시면 신체 내 독소가 빠져나가는 디톡스 쥬스, 발바닥에 붙이면 노폐물이 빠져 검게 변하는 발 패드 등은 모두 허위다. 이들 인플루언서는 SNS를 통해 특정 제품 섭취 전·후 얼굴, 몸매, 체중 변화 등을 체험기 형태로 올리며 거짓으로 효과를 홍보했다. 이에 앞서 본인이 운영하는 쇼핑몰 링크, 공동구매 공지 등을 띄워 소비자 구매를 유도하는 등 소비자를 기만했다. 여기에 온라인 홍보를 대행하는 광고대행사까지 가세했다. 소비자인 척 다이어트로 효과를 봤다며 SNS 댓글을 수백개 남기거나 제품 섭취 전·후 체형 변화 사진, 체중변화 영상 등을 올린 뒤 베스트 리뷰로 지정해 50만원 상당 적립금을 제공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스스로 지급한 적립금은 SNS 내 타깃 광고 플랫폼인 ‘스폰서 광고’ 비용으로 썼다. 심지어 한 유튜버는 다이어트 보조제를 설명하면서 약국 내부를 배경으로 흰 가운을 입고 촬영해 약사가 설명하는 것으로 오인토록 하는 영상도 올라와 논란이 됐다. 게다가 해당 제품은 약국에서 판매되지도 않는 품목이다. 흰 가운을 입는 게 현행법 상 위법은 아니지만 배경이 실제 약국으로 나온 만큼 도를 넘었다는 평가다. 이처럼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난립하자 SNS에서 화제된 제품이 진짜 효과가 있는지 검증해보는 ‘크리에이터’(광고비를 받기 시작하는 유튜버)가 등장해 덩달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먹기만 해도 살이 빠진다는 다이어트 보조제를 먹었지만 살이 더 찌거나, 세탁기에 넣기만 해도 외부 세탁조 청소가 된다는 세제를 사용했지만 효과가 없음을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이 유튜브 채널 시청자는 “실상을 검증해 신뢰를 얻었다는 비판적 크리에이터들도 언젠가는 광고성 영상을 만들지도 모르겠다”며 “효과없는 것을 증명하는 영상은 대체로 믿고, 효과가 있다고 설명하는 영상은 거르면서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약처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8월까지 전체 온라인 건강기능식품 허위·과대광고 및 기준·규격위반으로 적발된 건수는 총 6만2599건으로 이 중 허위·과장광고가 4만90건에 이르고 기준·규격위반도 2만2509건으로 확인됐다. 2018년에만 1만921건이 적발된 만큼 앞으로 연간 적발 건수는 점점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건강기능식품 이상사례 신고 건수도 2015년 502건에서 2018년 964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고 5년간 총 피해 건수는 3754건에 달했다. 품목별로는 영양보충용제품이 1135건, 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 635건, DHA/EPA 함유 유지제품 298건, 홍삼류 184건, 가르시니아캄보지아추출물 176건, 백수오등복합추출물 제품 142건, 프락토올리고당제품 138건 순이었다. 식약처 관계자는 “인플루언서를 이용해 소비자를 기만하는 부당한 광고 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실시하겠다”며 “고의·상습 위반업체는 행정처분과 함께 고발 조치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건강기능식품의 과장광고 처벌은 즉각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 헌법재판소가 2018년 6월 건강기능식품의 사전 광고 심의가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현행법상 위반 사례를 적발해도 법원 판례가 많지 않아 선고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다. 선고가 지연되는 만큼 실제 처벌은 보류 또는 감면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식품산업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일반 건강식품에도 과학적 근거가 있다면 기능성을 표시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정고시안을 발표해 허위·과장광고가 난무할 것으로 관측된다. 건강기능식품 업계 관계자는 “건기식의 사전심의 없이 광고가 허용되고 일반 건강식품까지 기능성 표기가 허용된다면 소비자가 직접 건강식품·건강기능식품의 성분·효능 등을 확인하고 걸러내야 한다”며 “전문적인 내용을 모르는 소비자의 피해가 지금보다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정헌 차의과대 의료홍보미디어학과 교수는 “한국은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교육을 통한 국민영양 관련 미디어 이해 및 수용자의 리터러시(文解) 교육이 전무하다”며 “자연스럽게 정보를 접하고 분별력을 향상시키는 정책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익광고 같은 소극적 형태가 아니라 교육 과정 속에서 광고에 따른 구매행태 변화, 허위과장 콘텐츠 식별 능력 등을 포괄하는 소비자학 개론 수준을 가르칠 필요도 있다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충성도 높은 팔로워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플루언서들이 휘두르는 말의 칼날은 소비자의 주머니에 구멍을 내고 부당이득을 훑어낸다. 누군가 허위과장 광고로 재미를 보는 동안 소비자는 허접한 제품을 사서 후회하게 된다. 인플루언서의 무책임한 행태에 대해 과거 전력과 기만성을 감안한 비례적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제조·판매자들은 기존 건강기능식품 관련 광고에 제약이 많고 심의 규정이 너무 까다로워 마케팅 재량이 없다고 불만이다. 이 틈을 노려 상대적으로 제제가 느슨한 인플루언서들이 활개를 친다. 마케팅에 대한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면서 허위과장 광고를 엄정하게 처벌할 묘안은 없을까. 유감스럽게도 건강기능식품이나 향후 기능성이 허용될 건강식품은 약과 식품의 경계선상에 놓여진 존재의 특성상 사실에 가까운 홍보냐, 과장 광고냐는 논란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현란한 인플루언서의 말 속에 필요한 것만 주어담을 수 있는 문해력이 요구된다. 수고롭지만 조금만 수준 높은 검색을 해봐도 과장된 것은 알아챌 수 있어 다행이다.
2020-01-13 19:49:57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암담하다. 문재인정부가 ‘서민 의료비 부담 감소’를 목표로 야심차게 추진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 ‘문재인케어’가 도입 2년 만에 의료쇼핑 증가, 건강보험 재정 고갈, 보험료 인상 악순환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다. 정부가 공개한 표면상 성과는 그럴듯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3만6605명이 혜택을 받았으며 줄어든 의료비(환자 본인부담금)는 총 2조2654억원, 1인당 평균 308만원이다. 이 중 노인·아동 등 의료취약계층의 본인부담금은 약 8000억원 경감됐다. 아동 입원진료비의 본인부담률은 10~20%에서 5%로 낮아졌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복지는 없다. 진료비 부담이 대폭 줄었다는 정부의 자화자찬의 이면엔 건강보험 재정 적자라는 어두운 그늘이 져 있다.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초음파검사 등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자 환자들은 몸에 작은 이상만 느껴도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문케어의 상징인 MRI의 경우 과거엔 검사 후 질환이 확진될 때에만 보험이 적용됐지만 이젠 질환 여부와 상관없이 혜택을 받을 수 있어 검사 건수가 급증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뇌 MRI에 보험이 적용된 지난해 10월을 기준으로 전후 6개월간 MRI 검사 건수를 비교한 결과 10월 이후 검사 건수는 149만건으로 이전 6개월의 73만건보다 두 배 이상 뛰었다. 총 진료비도 1995억원에서 4143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진료 및 검사 건수가 느는 만큼 소요되는 건보 재정도 눈덩이처럼 불었다. 건강보험은 7년간의 연속 흑자 행진이 끝나고 지난해 1778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27년까지 보장성 강화대책에 따른 건강보험 재정지출을 추계한 결과 현재 20조5955억원인 누적적립금은 문재인 정부 임기가 끝나는 2022년에 11조5000억원으로 줄고, 2026년엔 모두 소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멍난 재정을 채우기 위해 건강보험료는 올해 3.49% 올랐고, 내년에도 3.25% 인상될 전망이다. 문케어의 핵심 과제인 비급여의 전면 급여화도 시작부터 꼬였다. 진료비 부담 감소로 대형병원으로의 환자쏠림이 심화되자 1·2차 의료기관들이 급여 진료에 비급여 진료를 끼워넣는 등의 방식으로 살길을 모색하면서 되레 비급여 비중이 증가하는 ‘풍선효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비급여 진료 증가는 실손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졌다. 손해보험 업계에 따르면 실손의료보험 손해율은 2017년 4분기 113.6%에서 2018년 122.7%, 올해 3분기 133.5%로 높아지고 있다. 문케어가 시행되면 비급여 감소로 실손보험료가 인하될 것이라는 정부의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갔다. 결국 문케어는 도입 취지와 달리 건강보험료와 실손보험료 인상을 유발, 오히려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큰 병원에 환자를 뺏긴 1차 의원과 중소병원은 폐업 위기에 내몰렸고, 손해율 상승으로 인한 손보사들의 피해도 막심하다. ‘문케어 최후의 승자’라는 대학병원도 실상은 경증질환 환자만 몰려 의료자원 소모율 대비 수익률은 썩 만족스럽지 못한 실정이다. 상급종합병원 및 연구중심병원 지정에서 불리해지는 혹도 달았다. 결과적으로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았다. 대국적인 차원에서 정책 틀을 짜지 못하고 ‘진료비 감소’라는 지엽적인 성과에만 매달린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이 낳은 참사다. 물론 인구고령화와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건강보험 혜택을 확대하는 것은 당연한 국가적 과제다. 하지만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급격한 비급여의 급여화는 국민, 의료계, 보험업계의 공멸을 초래할 뿐이다. 한 때 20조원 넘던 건강보험 적립금은 문케어의 여파로 6~7년 안에 바닥날 것으로 전망된다. 적립금이 고갈되면 양심적으로 병원을 이용한 선량한 가입자에게 피해가 전가된다. 복지 확대도 좋지만 건강보험 재정 형편부터 살펴야 한다. 소아 환자, 암 등 중증질환 환자, 희귀난치성질환 환자 등이 선제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건보 보장성 강화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적절한 보장 범위에서 건보 재정을 투입하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보험 재정을 갉아먹는 비급여 과잉진료와 이에 동조하는 의료쇼핑은 강도 높은 규제 및 행정처분으로 뿌리뽑아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현실적인 수가 인상을 통해 정상 진료만으로 의료기관을 운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다만 본래 인간이 선하고 자율적이라는 성선설의 전제 아래에서만….
2019-12-23 03:16:44
해외 바이오파마 동향을 파악하다보면 수백억원은 기본이고 수조원에 이르는 제약회사 간 인수합병 소식을 흔히 접하게 된다. 천문학적 금액에 처음엔 믿기지 않았지만 최근 다국적 제약사에 부는 인수합병 광풍을 보면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스위스 노바티스가 지난달 말 기준 주가에 24% 프리미엄을 얹혀 11조원에 미국 더메디신컴퍼니(메드코)와 인수 거래를 체결했다. 미국 머크(MSD)는 지난 9일 107% 프리미엄을 주고 미국 아큘을 27억달러(3조원 육박)에 사들였다. 프랑스 사노피도 같은 날 172%에 이르는 높은 프리미엄을 얹혀 25억달러에 미국 신톡스를 매수했다. 이밖에도 올해 초 미국 BMS가 경쟁사 세엘진을 약 87조원에, 지난 6월 화이자는 어레이바이오파마를 12조원에 인수했다. 이같은 빅딜의 핵심은 신약후보물질, 일명 파이프라인의 확보다. 빅파마는 바이오벤처를 사들여 파이프라인을 획득하고 법적 권한도 갖게 된다. 시장조사업체 이밸류에이트파마에 따르면 현재 연간 144조원 수준인 전세계 항암제 시장 규모는 5년 뒤 2024년엔 배 가까이 커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 2020년 전후로 글로벌 상위 매출액 15개 바이오의약품들 대부분은 특허 만료를 앞두고 있다. 화끈하다 못해 광적인 빅파마들의 파이프라인 확보 투자는 성공 가능성은 불투명하지만 블록버스터급 신약 하나가 창출하는 이익이 엄청나기에 위험성이 높아도 안정적인 주수입원을 확보하겠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의약품 시장조사 기관 아이큐비아(IQVIA)에 따르면 작년 기준 미국에서 임상 1상부터 식품의약품국(FDA) 승인까지 신약 개발에 걸린 기간은 평균 12.5년으로 집계됐다. 2017년보다 6개월 더 길고 2010년 이후 약 26% 늘어났다. 지난해 신약개발 성공률도 11.4%로 전년보다 낮아졌다. 2008~2018년 평균 신약개발 성공률은 13.8%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D 투자는 늘리고 있다. 글로벌 상위 15개 다국적 제약사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은 20%에 가깝다. 이에 비해 신약으로 얻는 영업이익률은 25%다. 리스크가 있어도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지 않고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다는 게 불안하고 성공하면 수 년 또는 십 수년간 안정적인 매출이 보장되기 때문에 투자처를 찾을 수밖에 없다. 월스트리트 투자분석가들은 더메디신컴퍼니의 심장질환 siRNA치료제 ‘인클리시란’, 신톡스의 IL-2 억제제 ‘THOR-707’ 등 긍정적인 임상결과가 충분치 않은데 거액의 인수합병이 이뤄진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패한 투자결정으로 인한 손실의 책임은 누가 지나? 미국·유럽의 경우 배임죄에 대한 죄목이 없거나 미미한 수준의 처벌이 내려지기 때문에 최고경영인(CEO)의 결정과 추진에 별 부담감이 없다. 그 와중에 프로젝트와 관련 연구인력의 구조조정이 수시로 이뤄진다. 스위스 로슈 같은 경우는 분기별로 가망성 없는 파이프라인을 버리는 컷 아웃(Cut out) 작업을 벌인다. 사노피의 경우 당뇨병 관련 연구를 축소하고 암·면역질환으로 연구중심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연구인력의 해고와 이동이 예상된다. 승승장구하는 암젠도 안주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며 오랜 창업 전우들을 솎아내고 항시적인 연구 프로젝트의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연구인력은 그나마 회사에서 잘려도 갈 데가 많다. 이름값이 있으면 소용이 있는 데로 전직하면 되고, 이름값이 없으면 그레이드를 낮춰서라도 갈 데가 넘친다. 관리직·마케터들은 부평초처럼 떠도는 파리 목숨이고 희망퇴직의 위로금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다. 신약개발 성공률이 낮아진 것은 심장혈관계·내분비계·신생아·생식 관련 부작용을 조기포착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높아진 임상시험 윤리, 까다로워진 FDA 등 규제기관의 심사 문턱 등이 원인이다. 반면 정치·외교·사회·문화·보건 등을 지나치게 ‘돈의 관점’에서 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희귀난치성질환에 대한 패스트트랙 적극 적용 등 신약 심사 기간을 단축하고 신약 허가를 늘리라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미국 보험회사들도 신약 치료에 대한 보험처리에 관용적이다. 이로 인해 가입자가 내야 할 보험료는 날로 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신약후보물질이라 하면 획기적인 치료법일 것으로 기대하지만 최근 등장하는 항암제는 단일요법으로 효과를 명료하게 보이는 것은 거의 없고 기존 치료제(표준요법)에 신약후보를 추가하는 2제, 3제, 4제 병용요법 등을 진행해 무진행 생존기간을 수 개월 또는 기껏해야 1년 남짓 늘리는 데 불과하다. 암환자가 아닌 사람이 보기엔 미미한 개선인데 한 사이클 치료에 수백만~수천만원이 들어간다. 결국 의료보험 가입자들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환자와 그 가족들에겐 한줄기 희망일 것이다. 최신 약들은 무슨 수용체에 음성 또는 양성, 기존 치료제가 듣지 않는, 원래 A암인데 B란 기관이나 장기로 전이된 등등 적응증에 붙는 단서조항도 길어지고 복잡해졌다. 약리기전 상 특정 수용체를 막으면 다른 수용체로 우회해 암이 퍼지고 또 부작용이 초래되고 내성이 형성되는 등 생리학적·분자생물학적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맞춤치료를 통해 환자의 병리 상태에 가장 부합하는 항암제를 골라서 치료받는 것도 맞다. 한계도 이해되고 명분도 그럴싸한데 과연 이게 환자들을 위한 진심에서 우러난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제약바이오 산업적인 차원에서 일선 바이오벤처들이 대박을 꿈꾸며 열심히 연구하는 프론티어정신, 기업가정신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이들이 직접 신약을 시판하든지, 빅파마에 거대한 몸값을 받고 유망 파이프라인이나 회사를 넘기는 것도 기업 생태계의 선순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가만 있으면 망한다는 불안감 속에서 광적으로 저지르는 최근 수년간의 빅파마-바이오벤처 간 인수합병 투자는 ‘돈 넣고 돈 먹기’식 노름판이나 과열된 한국의 아파트 투기처럼 보여진다. 특히 임상 증상 개선 효과가 뚜렷하지 않아 시판허가가 거절된 치매 신약후보물질을 갖고 한번 더 허가해달라고 떼를 쓰는 글로벌 B업체나, 이렇다할 효과가 없어보이는 데도 허가 논리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잘 포장해서 임상시험 허가를 통과하려는 국내 H벤처는 눈에 거슬릴 정도다. 과연 누구를 위한 신약개발인가. 거기엔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인류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휴머니즘이 사라졌다. 환자의 절박함을 바탕으로 고가 신약을 떠안기려는 상혼만 보인다. 제약사 간 파이프라인 확보 전쟁을 자제하고, 가치 있는 신약개발을 위해 지구의 모든 제약사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봐야 할 때다.
2019-12-15 15:52:37
지난해 12월 16일 발생한 신생아 사망사건으로 이대목동병원 의료진이 구속된 것을 두고 의료계 안팎이 시끄럽다. 시민단체와 환자단체는 당연한 결과라는 입장인 반면 의사단체들은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이달 초 검찰은 신생아 사망사건과 관련해 주치의인 조모 교수와 박모 교수, 수간호사 한 명 등 총 3명의 의료진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의료사고로 의료진이 구속된 것은 손에 꼽힐 만큼 이례적이다. 2016년 1회용 주사기를 재사용해 C형간염 집단 감염 사태를 일으킨 다나의원 원장 이후로 처음이다.이후 조 교수는 구속적부심사에서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보증금 1억원을 내고 석방됐지만 다른 두 명의 의료진은 아직 구속 수감된 상태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사건은 중환자실 환아 4명이 인큐베이터 안에서 치료를 받던 중 오후 9시32분께부터 오후 10시53분께 사이 순차적으로 숨져 사회적 충격을 줬다.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와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를 바탕으로 신생아들이 시트로박터 프룬디균(Citrobacter freundii)에 오염된 지질영양 주사제를 맞고 균 감염(패혈증)으로 사망했다고 결론내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마음의 준비도 없이, 허무하게 떠나보내야 하는 유가족의 슬픔은 글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국민들도 분노했다. 의료진의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누군가는 이번 사건에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그 책임과 국민적 공분이 의료진 몇 명에게만 집중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네 아이의 생명을 앗아간 이번 사건은 정부 지원 부재, 신생아관리시스템 부실, 인력 부족 등 의료계 내부의 총체적 문제가 곪아 터져 발생했다. 가장 먼저 책임을 져야 할 곳은 관할 부처인 보건복지부다. 해당 병원은 사건 당시 감염관리 항목 51개 중 50개에서 ‘상’ 등급을 받아 의료기관 인증을 획득했다. 인증시스템의 부실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대목이다.중환자·신생아 분야의 경우 진료할수록 손해를 보는 기형적인 의료시스템을 방치한 책임도 크다. 정부가 여론에 편승해 특정 의료진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의료진 구속이 가뜩이나 열악한 응급환자·중환자·신생아 분야를 더 퇴보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들 분야는 노동강도가 세고 수가는 낮아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사고 발생시 무조건 의료진을 법적으로 처벌하면 대체 누가 중환자 및 신생아 진료를 맡겠냐는 게 의사들의 주장이다. 다만 의료진 구속의 적절성 여부와는 별개로 마치 의사가 피해자인 것처럼 주장하는 일부 의료인들의 발언은 문제가 있다. 아무리 시스템적인 문제라도 최종적인 환자관리 책임은 분명 의사에게 있다. 의료진 구속의 부당함을 주장하기 전 유가족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가 먼저다.
2018-04-20 10:09:56
그동안 정신질환 환자를 본인 동의 없이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었던 강제입원 요건을 강화한 ‘정신건강복지법’ 시행을 앞두고 의료계 반발이 거세다. 인권 보호라는 취지를 살리지 못한 졸속 개정으로 인력 부족 및 치료효과 저하는 물론 정신질환 환자의 퇴원 대란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혼란도 커지고 있다. 국공립병원 정신과의사로부터 입원 여부를 재심사를 받은 뒤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퇴원해야 하기 때문이다.오는 30일 시행되는 정신건강복지법은 강제입원이 가벼운 증상의 정신질환자를 사회에서 격리하거나, 멀쩡한 사람을 가두는 범행의 도구로 악용될 수 있어 개선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와 헌법재판소 지적에 따라 20년만에 전면 개정됐다.개정안에 따르면 그동안 자신 혹은 남을 해칠 우려가 있거나 치료가 필요한 경우 중 하나만 해당하면 강제입원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두 가지 요건 모두 충족해야 한다. 또 현재는 의사 1명의 진단만으로 강제입원할 수 있었지만 해당 법 시행 후에는 각기 다른 의료기관 소속 정신과 전문의 2명의 일치된 진단이 필요하다.국내 정신질환자 강제입원과 장기수용의 문제는 심각하다. 정신과 입원 환자의 80%이상이 비자의 강제입원이며, 평균 입원일수는 평균 100일이 넘는다. 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 비자의 입원율은 30%이내, 평균 입원일수는 30일 이내에 그친다. 이에 헌법재판소는 2016년 9월 ‘본인의사와 상관없이 보호의무자 2명과 의사 1명의 동의가 있으면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 정신보건법 제24조 1항, 2항에 대해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이런 상황에서 강제입원 요건을 강화하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철저한 준비와 전문가 의견 수렴 없이 졸속으로 개정안을 추진하는 것은 자칫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비현실적인 강제입원 요건이다.새 개정안은 자신이나 남을 해칠 우려가 있을 경우에만 강제 치료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강제입원의 대상이 되는 정신질환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는다. 망상과 환청이 있고 이상한 행동을 해도 본인은 병이 없다고 생각할 경우 치료를 거부하면 치료를 시작할 방법이 없다.게다가 이런 정신질환은 발병 초기에 입원치료를 받아야 증상이 치료가 늦어질 경우 자해나 타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의사 1명이 아닌 ‘제2 전문의’가 추가된 강제입원 결정 방식이 ‘때우기식 행정 절차’에 머물 공산이 크다. 새 개정안이 시행되면 1년에 판정해야 하는 건수만 23만건이며 이는 하루 평균 900건에 육박한다. 하지만 현재 전국에 정신과 국공립 의사는 140여명에 불과하다. 즉 365일 24시간 일을 해도 시간과 인력이 턱없이 모자라다. 이에 신경정신학회는 “전문의 한 명이 자신이 속한 병원 환자 진료와 더불어 외부 병원에 나가 ’제2 전문의‘ 역할까지 감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퇴원 대란도 우려된다. 개정안대로 시행되면 정신의료기관 입원 환자 8만명 절반에 가까원 3만4000여명이 법 기준에 맞지 않아 퇴원할 수밖에 없다. 다만 정신질환자의 ‘퇴원 대란’과 관련해 정신질환자를 ‘예비 범죄자’로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문제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이 비정신질환자보다 훨씬 높을 것이란 편견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하지만 대검찰청의 2011년 범죄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비정신질환자의 범죄율과 비교해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2010년 한 해 동안 일어난 전체 범죄 110만8307건 중 비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범죄는 53만2929건,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범죄는 4136건이었다.수익 악화로 인한 정신과 축소 운영 등 경영 구조조정도 우려되는 대목 중 하나다. 정신과의 경우 건강보험 환자보다 의료급여 환자가 훨씬 많다. 하지만 다른 진료과와 달리 의료급여환자 수가가 ‘일당정액제’로 수년째 묶여 있다보니 운영할수록 적자가 쌓이는 구도인 게 사실이다.이런 상황에서 강제입원 절차를 까다롭게 만든 개정안까지 시행되면 환자 수가 자동 감소해 수익이 악화되는 것은 물론 강제입원 진단에 동원되는 인력까지 감안하면 추가 채용으로 인한 비용 증가가 부담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4명의 정신과 전문의를 두고 200여개 병상을 운영했던 한 정신병원은 지난해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아예 문을 닫기도 했다.영국은 1960년대 수용병원 폐쇄정책에서 큰 실패를 맛봤다. 1962년 정신질환자의 탈시설화와 지역사회 보호를 위해 대규모 정신병원 폐쇄정책을 도입했지만 지역사회 지지체계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병원 폐쇄 정책이 선행되자 대도시에 노숙자가 급증했다. 한 차례 실패를 겪은 후 대형 정신병원의 단계적 폐쇄와 강제입원 및 장기입원 억제를 유도하고, 지역사회 내 복지서비스 전달체계를 강화함으로써 탈시설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원칙도 준비도 없이 시행될 정신보건법은 정신질환 환자가 치료받을 권리와 인권 등 두 가지 토끼 모두 놓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보건당국은 개정법의 무리한 시행을 자제하고 유관 단체 및 전문가들과 소통해 개정안을 손볼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정신질환자의 사회적 편견을 없애고, 조기진단을 통한 최적의 의료서비스 제공이 가능하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2017-05-14 23:21:26
지난 1월 정부가 소주·맥주 등 주류에 건강증진부담금 부과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담뱃값 인상에 이은 2차 서민·꼼수 증세’라는 반대여론이 쏟아져나왔다. 보건 당국은 “건강보험 재정 충당책으로 건강증진부담금을 더 높이거나 술에 부과하는 방안은 검토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지만 ‘아닌 땐 굴뚝에 연기날까’라는 냉소적 반응이 지배적이다.최근엔 빈병 보증금 인상 문제로 외식업체들이 일제히 주류 가격을 올리면서 건강증진부담금 논란이 재점화됐다. 이달 초 환경부는 ‘자원순환을 통한 원가절감’이라는 명목으로 빈병 보증금을 소주는 기존 40원에서 100원, 맥주병은 50원에서 130원으로 인상했다. 이에 맞춰 편의점업계와 일부 식당들도 덩달아 주류 값을 올렸으며, 일부 식당은 인건비와 물가 상승을 이유로 보증금 인상분보다 술값을 더 올려 소비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정부는 병 반환을 전제로 한 빈병보증금을 빌미로 판매가를 올리는 것은 위법이라며 업체 단속에 나섰지만 일부에선 본격적인 건강증진부담금 도입을 위한 정부의 ‘노림수’가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반대여론을 의식해 권투로 치면 링을 빙빙 돌며 ‘잽’만 날리는 아웃복싱을 하고 있다는 시각이다.주류에 건강증진부담금을 부과해 건강보험 재정 손실분을 충당하는 방안은 17·18대 국회에서도 논의됐다가 번번이 좌절됐다. 그러던 중 지난해 건강보험공단 산하 건강보험정책연구소가 형평성 문제가 지적됐던 건보료 부과체계를 소득 중심으로 개편할 경우 연간 2조3000억원의 재정손실이 난다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관련 사안이 재차 논의되기 시작했다.정부는 2015년 흡연율을 감소시킨다는 명분으로 2500원이던 담뱃값을 4500원으로 2000원이나 올렸다. 여기엔 한 갑당 840원가량의 건강증진부담금이 포함돼 있다. 이후 담배로 인한 세수는 지난해에만 12조4000억원으로 담뱃값 인상 전보다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주류에 비슷한 수준의 건강증진부담금이 부과되면 술값이 10~20%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정부가 정책 추진을 위해 세금을 더 걷어들이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지만 이번엔 방법과 대상이 한참 잘못됐다. 특히 주류에 대한 건강증진부담금 부과 논의가 불편한 이유는 ‘국민건강 증진’이라는 명분은 허울일 뿐 결국 세수 증대가 목적인 게 담뱃값 인상을 통해 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담뱃값 인상 후 정부가 벌어들인 12조4000억원 중 금연사업에 쓰인 것은 겨우 1300억원, 건보재정 지원금 등을 포함해도 3조원에 불과하다. 담배 판매량은 인상 첫해 반짝 떨어졌다가 지난해 다시 인상 전의 83% 수준까지 회복됐다. 금연클리닉 지원 등 금연정책마저 시들해지면서 정부 곳간만 채웠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그저 국민의 뇌리에 남는 것은 방송사에서 내보내는 금연 공익광고가 거의 전부다. 언론친화적 광고 플레이로 언론의 뭇매를 덜 맞는지도 모를 일이다. 담배처럼 술에도 건강증진 부담금을 매기자는 방안이 출발부터 비난받는 이유다.이미 높은 비율의 세금이 매겨진 주류에 또다른 세금을 부과하는 것도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국내에서 생산 및 판매되는 주류는 출고가 기준 72%가 주류소비세, 21%가 교육세로 부과된다. 부가가치세 등이 합쳐지면 전체 술값의 약 53%가 세금이다. 일본의 경우 세금 비율이 43%이며 유럽연합(EU) 중 주류 세금이 가장 높은 영국도 세금 비율이 33%에 불과하다. 건강증진부담금 같은 간접세를 인상해 세수를 확보하겠다는 발상 자체도 선진국스럽지 못하다. 간접세는 납세의무자와 실제 조세부담자가 다르고 소득이 적을수록 조세부담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역진성(逆進性)을 띤다. 특히 주류의 경우 담배와 마찬가지로 저소득층의 소비량이 고소득층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국 건강증진부담금은 고달픈 일상을 한 잔의 술로 위로받았던 서민층에 대한 배려 없음이다.정부가 정녕 국민건강을 생각한다면 담뱃세와 주류세를 세수확보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의심이 들지 않도록 거둔 세금을 온전히 국민건강 증진을 위해 쓴다는 것을 체감되는 정책과 수치로 입증해야 한다. 고소득자의 탈세 방지, 영혼 없는 정책에 의한 국고 누수 차단 등으로 새어나가는 세금을 막는 게 우선 아닐까.
2017-03-02 12:16:04
지난 26일 ‘대통령 비선 진료’, ‘불법주사 구입’ 등 의혹과 관련해 열린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의 긴급 기자회견을 본 다른 학교 의대 교수는 SNS에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거나 하도 어이가 없어 참고 볼 수 없는 모습이라는 의미다. 기자회견 내내 모르쇠로 일관하며 책임 회피에 급급한 서 병원장의 모습에 의료인들은 “왜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냐”며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결과적으로 서 병원장의 기자회견은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를 둘러싼 의혹만 더 증폭시켰다. 그는 청와대가 발기부전치료제 비아그라와 팔팔정 등을 구입한 사안에 대해 “청와대 의약품 구매는 경호실 소속 의무실장에게 소관으로 주치의는 결재라인에서 완전히 빠져 있으며 프로포폴 구매 내용 등도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는 “주치의 자문을 받고 비아그라를 구입했다”는 이선우 청와대 의무실장 발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이다. 대통령 자문의인 김상만 녹십자 아이메드 원장이 주치의 몰래 박 대통령을 진료했다는 의혹과 관련해선 “직접 보지 못해서 모른다”, 백옥주사나 태반주사 시술에 대해선 “적어도 나는 구매 요청을 한적 없다”며 정확한 대답을 피했다. 최순실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산업부에서 15억원이 지원된 김영재 의원 관련회사 봉합실 개발에 이름을 올린 것에 대해선 의료용품의 국산화를 위해서였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긴급 기자회견 소식을 들었을 때 큰 기대는 안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단순히 해명자료를 내면 될 정도의 내용을 굳이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것은 그날(26일) 대규모 촛불집회를 앞두고 심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서였을까. 의도야 어쨋든 면피성 기자회견은 서 병원장에게 자충수가 됐다. 서 원장은 이병석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장(박근혜 정부 1대 주치의)에 이어 2014년 9월부터 지난 2월까지 2대 주치의를 지냈다. 이 시기 청와대는 ‘고산병 예방 및 치료’를 목적으로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와 팔팔정을 구입했고 전립선비대증과 탈모 치료에 쓰이는 ‘프로스카’, 국소마취제인 ‘리도카인’, 전신마취 유도제인 ‘에토미데이트리푸로 주사제’ 등도 들여왔다. 대통령 주치의는 대통령의 건강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진료 방침을 결정하는 자리다. 청와대에 사용처도 알 수 없는 대량의 약들이 유입됐는데도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이제와서 결재 라인을 운운하며 의무실장과 민간의사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은 엄연한 직무유기다. 안 그래도 최순실의 국정 의료농단으로 뒤숭숭했던 의료계 전체의 체면을 더욱 떨어드렸다. 국내 최고의 의사들만 모였다는 서울대병원의 수장이 보여준 무책임한 모습에 보통사람들조차 ‘겨우 저 정도냐’며 고개를 저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서 병원장은 “죄를 짓거나 판결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며 병원장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그가 박근혜 대통령의 후광을 입어 차관급인 서울대병원장 자리에 오른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전임 박용현-성상철-오병희 등이 굳건한 라인을 세워 병원장을 바통 터치하던 거센 물결에서 난망이던 자리에 오른 그가 주치의로서 무한책임의 자세를 보여주기는커녕 책임회피에 급급하는 모습이 아쉽다. 주치의라면 환자의 신체적 질병 외에도 정신적 지지까지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전직 국회의장·국무총리가 중심이 된 사회원로들에 이어 이른바 ‘친박 중진’의원들도 박 대통령의 하야를 건의한다는 마당이다. 사면초가의 박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며 행여나 해를 입을까 몸조심하는 민낯이 드러나니 보기에 민망하다.
2016-11-28 21:01:50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검찰 수사가 뜻밖에 의료계로도 향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로부터 소개받은 민간 의사의 사적 시술, 다들 궁금해하는 ‘세월호 7시간’ 등과 관련해 언론들이 의료계 전반을 들쑤시고 있다. 청와대가 2년 간 태반주사·백옥주사·감초주사·마늘주사를 2000만원이라는 거액에 구매하고 심지어 발기부전치료제인 비아그라까지 들여왔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라 나오자 국민들은 과연 그런 약이 필요한지, 또는 미용성형시술과 관련된 의약품인지, 세월호 7시간 공백과 관련 있는지 등 의구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박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의 피의자가 됐다 해도 아직 대통령을 유지하고 있는 데도 국가 2급 비밀인 대통령의 건강 관련 이슈가 언론을 통해 여과없이 알려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박 대통령 초대 주치의를 맡았던 이병석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장(산부인과 교수)은 지난 23일 모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 측이 태반주사 등 영양주사를 먼저 요구했고, 의학적 근거가 희박한 영양주사를 대통령에게 놓을 수는 없어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밝혔다. 또 “차움의원 출신 대통령 자문의 김상만이 자신과 상의 없이 대통령을 독대해 영양주사제를 놓은 사실을 몇 차례 사후 보고 받았으며, 자신이 원해 대통령 주치의를 그만둔 게 아니다”라고 말해 의혹을 증폭시켰다. 이 병원장은 박 대통령 취임 초인 2013년 2월부터 주치의를 맡았다가 2014년 9월 갑자기 물러났고, 그 뒤를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산부인과 교수)이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같은 발언은 국민의 알권리 충족 면에선 두둔할 수 있겠지만 비단 대통령이 아니어도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를 따지면 바람직하지 않다. 의료법 조항으로 봐도 엄연한 ‘불법’이다. 2012년 신설된 의료법 시행규칙 제1조의 3제 1항은 ‘환자는 진료와 관련된 신체상건강상 비밀과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하며, 의료인과 의료기관은 환자의 동의를 받거나 범죄 수사 등 법률에서 정한 경우 외에는 비밀을 누설 발표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료법에 의사의 환자 비밀누설에 대한 별도의 벌칙은 없으나 환자가 이로 인해 심대한 침해를 입을 경우 명예훼손으로 의사를 형사 고소할 수 있는 사안이다. 또 개인정보보호법은 의료기관과 환자 정보를 일체 비공개하고 있고, 비밀을 누설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의사윤리 강령에도 의료인은 직무를 통해 알게 된 환자의 비밀을 철저히 지키고, 학술적인 논의나 질병의 파급을 방지하기 위한 경우에도 환자의 신상 관련 사항은 공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 병원장이 최순실 사태, 세월호 7시간 등 의혹과 관련해 박 대통령의 건강 또는 처방과 관련된 정보를 밝힐 게 있었다면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에 가서 진술했어야 했다. 대리처방 의혹을 받고 있는 차움의원처럼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일관하는 것도 문제지만 설사 사실인 내용이더라도 환자 정보를 언론을 통해 흘린 것은 국내 최고 사립 대학병원의 장으로서 적절치 못한 처사다. 예전에도 환자의 진료정보가 동의 없이 외부로 유출된 사례가 있다. 공교롭게도 최순실 단골병원 원장으로서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외래교수 임용 특혜 의혹을 받고 있는 김영재 원장은 2003년 모 개그우먼의 지방흡입수술 등 진료기록을 언론에 공개해 물의를 빚었다. 당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속돼 벌금형을 받았다. 물론 박 대통령의 건강 이슈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현 사태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스스로가 자초한 면이 크다. 공적 시스템인 청와대 의무실을 거치지 않고 민간병원 의사에게 임상근거가 부족한 특정 미용주사를 맞거나 대통령의 혈액 및 관련 정보가 민간병원에 넘어간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꼭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모든 환자는 자신의 진료 및 처방 정보를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몇 년전부터 원격의료, 빅데이터사업이 추진되면서 의료계에서도 정보 보안의 중요성이 강조된 지 오래다.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의료계는 환자정보 보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를 갖길 바란다.
2016-11-24 16:4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