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6 20:22:12
지난해 9월 ‘약물 혼용’으로 당뇨병성 말초신경병증(diabetic peripheral neuropathy, DPN) 유전자치료제 ‘엔젠시스’(VM202)의 임상시험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던 헬릭스미스는 5개월 만인 지난 14일 약물 혼용도 없었다고 말을 바꿨다. 임상 설계 자체가 실패 원인인 게 분명함에도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효성·안전성은 입증됐다며 뻔뻔한 태도를 취해 업계와 투자자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헬릭스미스는 지난 14일 “지난해 10월부터 한국과 미국에서 조사팀을 조직하고 임상 3-1상에서 발견됐던 약동학적 분석의 이상현상 조사를 완료했다”며 “그 결과 원인을 명확히 파악했고, 환자 간 약물 혼용은 없던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지난해 9월 환자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 3상의 주요 지표인 ‘3개월 후 통증 감소효과’가 위약 대비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이같은 임상 실패 원인으로 엔젠시스를 맞아야 할 환자에 위약이, 위약 환자에 엔젠시스가 잘못 투약됐다며 약물 혼용 가능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여기에 임상을 진행한 CRO(임상시험수탁기관)를 고발하겠다며 엄포까지 놨다.
하지만 이번 발표로 약물 혼용과 같은 어이없는 실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게 드러났다. 이번에는 “주 평가지표 달성에 실패한 것은 엔젠시스 약효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통증이라는 지표가 가진 특수성에 따른 임상 방법상 문제”라며 흔한 실수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로 인해 회사 주가는 요동쳤고 지난해 바이오업계에 불어닥친 악재를 연장시켜 업계의 신뢰 회복 노력에 또 다시 찬물을 끼얹었다.
회사 측은 101명을 대상으로 한 3-1B상을 진행한 결과, 전체 환자 대상 엔젠시스의 6, 9, 12개월 통증감소 효과가 위약 대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았고 위약과 엔젠시스군 간의 통증감소 효과 수치의 차이가 각 1.1, 0.9, 0.9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어 프리가발린 또는 가바펜틴 등 진통제를 복용하지 않는 환자 53명에선 같은 기간 1.3, 1.2, 1.5을 보여 전체 집단 대비 높게 나타났으며, 엔젠시스 투여를 멈춰도 8개월 이상 효과가 유지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헬릭스미스 측은 “임상이 진행될수록 통증에 대한 반응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후기로 갈수록 통증감소 효과가 유의미하게 크게 나타났지만 초반에는 효과가 덜했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엔젠시스의 1차 평가변수 세부기준을 바꿔 재임상에 들어갈 방침이다. 실패한 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주요 지표를 유리한 방향으로 바꾼 뒤 임상을 진행하겠다는 이야기다. 기존 ‘투여 3개월 후 통증 감소’는 ‘장기 투여 후 통증 감소’로 변경될 가능성이 크고, 환자군도 프레가발린·가바펜틴을 사용하지 않는 통증성 DPN 환자로 한정될 전망이다.
여기에 통증을 정확하게 측정할 능력이 없거나 통증 변동성이 심한 피험자를 가려낼 수 있는 방법 도입, 통증지표 최신 기법으로 변경, 통증 측정 방법의 정교화, 유럽 허가를 위한 QoL(삶의 질) 지표 추가, 검사가 단순하고 쉬운 신경기능 검사 방법 도입 등을 발표했지만 얼마나 정교한 측정 기준을 도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해 9월 김선영 대표가 직접 약물혼용이 의심된다고 주장했던 내용은 이같은 임상 결과 발표조차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그는 “일부 위약군 환자의 혈액 샘플에서 엔젠시스 DNA 레벨이 높게 검출됐고, 반대로 엔젠시스 투여군에서 이 수치가 낮게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상 결과 90일, 180일, 270일 통증감소 효과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약물혼용 주장도, 통증감소 효과도 최근 발표 내용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그대로 공개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영 대표 친인척인 이혜림, 김승미 씨는 지난해 9월 주식담보대출 일부 상환을 이유로 각각 2500주, 500주를 23일 장내 매도했다. 이날은 헬릭스미스 3상 실패 사실이 장 마감 후 알려진 날이다. 두 사람의 처분 금액은 5억3000만원으로 3일 뒤인 작년 9월 26일엔 김선영 대표가 같은 이유로 주식 10만주를 매도해 약 76억원을 챙겼다. 그 다음날 헬릭스미스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헬릭스미스는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공시불이행을 이유로 지난 18일 불성실공시기업 지정 예고를 받았다. 약물 혼용이 없었고 임상 설계 실패에 의한 임상실패라는 내용을 즉시 공시하지 않고 주말을 넘긴 지난 17일에 발표했기 때문이다.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되면 벌점 5점을 받는다. 1년간 누계 벌점이 15점 이상이면 코스닥시장 상장규정에 따라 상장폐지 심사 대상에 오를 수 있다.
이같은 임상시험, 기술개발, 품목허가 등 단계별 불확실성이 높은 정보가 잘못 해석돼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치자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는 지난 9일 ‘코스닥 제약바이오 업종 기업의 공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공시와 관련 위험성을 사전에 공개하도록 유도하는 취지에서 도입된 이 제도로 ‘임상 성공’ 등과 같은 판단을 자의적으로 내릴 수 없다. 임상 착수, 임상 완료, 허가 획득 같이 객관적이고 명확한 표현만을 쓸 수 있게 했다. 헬릭스미스는 이 제도를 적용받는 첫 사례가 됐다.
게다가 이번 발표로 주가가 하락하자 투자 손실을 우려한 전환사채(CB) 투자자들이 조기 상환을 요청하면서 또 다시 CB를 발행해 상환금을 마련하고 있다. 빚내서 빚막기다. 헬릭스미스는 지난 20일 800억원 규모의 CB 발행을 결정했다. 이 중 550억원은 채무상환, 250억원은 운영자금에 쓰일 예정이다.
회사 측은 이같은 상황 속에서 후속 3상 임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회사 관계자는 “후속 임상 프로토콜이 사실상 완성된 상태로 미국 FDA 제출 시기를 조율 중”이라고 설명했다.
헬릭스미스의 입장 번복에 대해 바이오업계의 시선은 싸늘하다. 업계 관계자는 “약물혼용을 임상실패의 이유로 드는 사례는 글로벌 업계에서 매우 찾아보기 드물다”며 “한국 바이오 업계 전체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처사”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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