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망 파이프라인 잡겠다며 수 조원 도박, 빅파마의 돈 잔치
2019-12-15 15:52:37
거액 투자 결정의 경영실패는 누가 책임지나 … 휴머니즘 상실의 아수라장 같아
해외 바이오파마 동향을 파악하다보면 수백억원은 기본이고 수조원에 이르는 제약회사 간 인수합병 소식을 흔히 접하게 된다. 천문학적 금액에 처음엔 믿기지 않았지만 최근 다국적 제약사에 부는 인수합병 광풍을 보면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스위스 노바티스가 지난달 말 기준 주가에 24% 프리미엄을 얹혀 11조원에 미국 더메디신컴퍼니(메드코)와 인수 거래를 체결했다. 미국 머크(MSD)는 지난 9일 107% 프리미엄을 주고 미국 아큘을 27억달러(3조원 육박)에 사들였다. 프랑스 사노피도 같은 날 172%에 이르는 높은 프리미엄을 얹혀 25억달러에 미국 신톡스를 매수했다. 이밖에도 올해 초 미국 BMS가 경쟁사 세엘진을 약 87조원에, 지난 6월 화이자는 어레이바이오파마를 12조원에 인수했다.
이같은 빅딜의 핵심은 신약후보물질, 일명 파이프라인의 확보다. 빅파마는 바이오벤처를 사들여 파이프라인을 획득하고 법적 권한도 갖게 된다. 시장조사업체 이밸류에이트파마에 따르면 현재 연간 144조원 수준인 전세계 항암제 시장 규모는 5년 뒤 2024년엔 배 가까이 커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 2020년 전후로 글로벌 상위 매출액 15개 바이오의약품들 대부분은 특허 만료를 앞두고 있다.
화끈하다 못해 광적인 빅파마들의 파이프라인 확보 투자는 성공 가능성은 불투명하지만 블록버스터급 신약 하나가 창출하는 이익이 엄청나기에 위험성이 높아도 안정적인 주수입원을 확보하겠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의약품 시장조사 기관 아이큐비아(IQVIA)에 따르면 작년 기준 미국에서 임상 1상부터 식품의약품국(FDA) 승인까지 신약 개발에 걸린 기간은 평균 12.5년으로 집계됐다. 2017년보다 6개월 더 길고 2010년 이후 약 26% 늘어났다. 지난해 신약개발 성공률도 11.4%로 전년보다 낮아졌다. 2008~2018년 평균 신약개발 성공률은 13.8%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D 투자는 늘리고 있다. 글로벌 상위 15개 다국적 제약사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율은 20%에 가깝다. 이에 비해 신약으로 얻는 영업이익률은 25%다. 리스크가 있어도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지 않고 가만히 팔짱만 끼고 있다는 게 불안하고 성공하면 수 년 또는 십 수년간 안정적인 매출이 보장되기 때문에 투자처를 찾을 수밖에 없다.
월스트리트 투자분석가들은 더메디신컴퍼니의 심장질환 siRNA치료제 ‘인클리시란’, 신톡스의 IL-2 억제제 ‘THOR-707’ 등 긍정적인 임상결과가 충분치 않은데 거액의 인수합병이 이뤄진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패한 투자결정으로 인한 손실의 책임은 누가 지나? 미국·유럽의 경우 배임죄에 대한 죄목이 없거나 미미한 수준의 처벌이 내려지기 때문에 최고경영인(CEO)의 결정과 추진에 별 부담감이 없다. 그 와중에 프로젝트와 관련 연구인력의 구조조정이 수시로 이뤄진다. 스위스 로슈 같은 경우는 분기별로 가망성 없는 파이프라인을 버리는 컷 아웃(Cut out) 작업을 벌인다. 사노피의 경우 당뇨병 관련 연구를 축소하고 암·면역질환으로 연구중심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연구인력의 해고와 이동이 예상된다. 승승장구하는 암젠도 안주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며 오랜 창업 전우들을 솎아내고 항시적인 연구 프로젝트의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연구인력은 그나마 회사에서 잘려도 갈 데가 많다. 이름값이 있으면 소용이 있는 데로 전직하면 되고, 이름값이 없으면 그레이드를 낮춰서라도 갈 데가 넘친다. 관리직·마케터들은 부평초처럼 떠도는 파리 목숨이고 희망퇴직의 위로금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다.
신약개발 성공률이 낮아진 것은 심장혈관계·내분비계·신생아·생식 관련 부작용을 조기포착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높아진 임상시험 윤리, 까다로워진 FDA 등 규제기관의 심사 문턱 등이 원인이다. 반면 정치·외교·사회·문화·보건 등을 지나치게 ‘돈의 관점’에서 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희귀난치성질환에 대한 패스트트랙 적극 적용 등 신약 심사 기간을 단축하고 신약 허가를 늘리라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미국 보험회사들도 신약 치료에 대한 보험처리에 관용적이다. 이로 인해 가입자가 내야 할 보험료는 날로 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신약후보물질이라 하면 획기적인 치료법일 것으로 기대하지만 최근 등장하는 항암제는 단일요법으로 효과를 명료하게 보이는 것은 거의 없고 기존 치료제(표준요법)에 신약후보를 추가하는 2제, 3제, 4제 병용요법 등을 진행해 무진행 생존기간을 수 개월 또는 기껏해야 1년 남짓 늘리는 데 불과하다. 암환자가 아닌 사람이 보기엔 미미한 개선인데 한 사이클 치료에 수백만~수천만원이 들어간다. 결국 의료보험 가입자들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환자와 그 가족들에겐 한줄기 희망일 것이다.
최신 약들은 무슨 수용체에 음성 또는 양성, 기존 치료제가 듣지 않는, 원래 A암인데 B란 기관이나 장기로 전이된 등등 적응증에 붙는 단서조항도 길어지고 복잡해졌다. 약리기전 상 특정 수용체를 막으면 다른 수용체로 우회해 암이 퍼지고 또 부작용이 초래되고 내성이 형성되는 등 생리학적·분자생물학적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맞춤치료를 통해 환자의 병리 상태에 가장 부합하는 항암제를 골라서 치료받는 것도 맞다. 한계도 이해되고 명분도 그럴싸한데 과연 이게 환자들을 위한 진심에서 우러난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제약바이오 산업적인 차원에서 일선 바이오벤처들이 대박을 꿈꾸며 열심히 연구하는 프론티어정신, 기업가정신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이들이 직접 신약을 시판하든지, 빅파마에 거대한 몸값을 받고 유망 파이프라인이나 회사를 넘기는 것도 기업 생태계의 선순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가만 있으면 망한다는 불안감 속에서 광적으로 저지르는 최근 수년간의 빅파마-바이오벤처 간 인수합병 투자는 ‘돈 넣고 돈 먹기’식 노름판이나 과열된 한국의 아파트 투기처럼 보여진다. 특히 임상 증상 개선 효과가 뚜렷하지 않아 시판허가가 거절된 치매 신약후보물질을 갖고 한번 더 허가해달라고 떼를 쓰는 글로벌 B업체나, 이렇다할 효과가 없어보이는 데도 허가 논리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잘 포장해서 임상시험 허가를 통과하려는 국내 H벤처는 눈에 거슬릴 정도다.
과연 누구를 위한 신약개발인가. 거기엔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인류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휴머니즘이 사라졌다. 환자의 절박함을 바탕으로 고가 신약을 떠안기려는 상혼만 보인다. 제약사 간 파이프라인 확보 전쟁을 자제하고, 가치 있는 신약개발을 위해 지구의 모든 제약사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봐야 할 때다.
송인하 기자 tortasettevelli@heal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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