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별산대놀이마당(양주시 유양동 262)에서 2km 떨어진 곳에 양주의 진산인 불곡산(佛谷山 해발 468.7m) 자락에 백화암(白華庵)이 자리 잡고 있다. 불곡산은 불국산으로도 불리며, 산은 별로 높지는 않지만 암릉과 경사진 능선이 많아 오르락내리락 산타는 재미가 있어 당일치기 근교 산행지로 인기가 높다. 유양초등학교나 양주시청에서 올라갈 수 있다. 불곡산은 양주를 거쳐 한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고대 교통로가 지났던 곳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봉우리와 능선의 정상부에는 많은 보루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불곡산은 평지인 양주시청에서 능선을 일으킨 뒤 서서히 고도를 더해 가다 백화암 뒤쪽에서 상봉(468.7m, 또는 투구봉)이라는 암봉을 형성한다. 그 뒤 상투봉(403.6m)를 지나며 고도를 낮춘 암릉은 다시 고개를 들어 임꺽정봉(450m)이란 암봉을 만들며 동북쪽에서 달려온 한북정맥을 만난다. 백운산, 국망봉, 운악산을 지나며 기세를 자랑하던 한북정맥은 도봉산, 북한산이라는 필생의 작품을 빚어내기 위해 몸을 낮추고 불곡산이란 시험작을 만들어낸다. 주말마다 인파가 몰려드는 북한산, 도봉산을 피해 호젓한 등산을 하고 싶다면 불곡산을 택해도 좋다. 정상서 바라보는 도봉산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느껴진다. 다만 바위산이니 미끄러지지 않는 릿지화를 신는 게 권장된다. 유양초등학교를 지나 안내판을 따라 숲길을 따라 오르면 20여 분 만에 백화암에 닿는다. 불곡산 상봉 오른편 남쪽 기슭에 위치한 백화암은 898년(신라 효공왕 2)에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창건 시기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나 자료는 없으나 '신라 말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연화사각대좌와 주초석이 전해져 온다. 절의 원래 이름은 불곡사였으나 ‘동국여지승람’ 간행 이후 어느 시기에 백화암으로 바뀌었다고 한다.한국전쟁 중에 전소된 것을 1956년 성봉화상이 복원했다. 이후에도 꾸준한 불사를 통해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중건됐다. 대웅전 입구를 지키듯 수령 350년의 우람한 느티나무 보호수가 서 있으며 그 옆에는 1841년(헌종 7년)에 세워진 양주목사 서염순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대웅전에서 숲길을 따라 10여 분 정도 오르면 2004년 보인스님이 조성한 마애삼존불이 있다. 양주시의 대표적인 관음도량으로 많은 신도들이 찾아오지만 평소에는 조용하다. 봄이면 벚꽃과 영산홍이 절집을 화려하게 수놓고 가을이면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단풍나무들이 단풍 맵시를 뽐낸다.유양초등학교에서 백화암으로 오르다보면 오른편(동쪽)에 임꺽정 생가터가 있다. 임꺽정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도적이 된 뒤 한때 기세를 올리며 평등을 구현하려는 무리를 통솔했다. 생가터는 의외로 전망 좋고 아늑한 곳이다. 양주목(牧) 관아와 향교가 있던 곳에서 불과 1㎞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모반을 꿈꿨다니 새삼스럽다. 수원백씨 집성촌의 전통문화 자존심 양주매곡리고택(백수현전통가옥)양주시 남면 매곡리에 수원 백씨 집성촌인 맹골마을이 있다. 맹골은 ‘매화’라는 뜻으로 매화나무가 많아 ‘맹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맹골마을에 위치한 25사단 신병교육대 담장에 매화나무가 그려진 것도 이러한 이유다. 남면이라 양주의 남쪽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는 양주의 가장 북쪽에 있다. 마을길을 따라 넓게 논이 펼쳐지고, 산봉우리들은 꽃봉오리처럼 소담스럽다. 꽃술처럼 감악산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듯한 맹골마을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파주시와 양주시에 걸쳐 있는 감악산((紺岳山, 해발 675m)은 검푸른 바위산이란 뜻을 갖고 있다. 산세가 검고 험하며 정상에 오르면 개성시가 보일 정도로 북한과 인접해 있지만 맹골마을에서 보는 감악산은 온순해 보이기만 하다.맹골마을은 2006년부터 접경지역 체험마을로 지정돼 장 담그기, 한지 제작 등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치즈 만들기 등 유가공 체험도 이뤄진다. 마을 주민의 60%가 수원 백씨다. 구성원들 사이에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고 제사 문화가 굳게 이어져 오고 있다.여전히 전통양식의 집들도 많이 눈에 띄는데 그 중 국가민속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된 백수현가옥이 유명하다. 이 가옥은 1870년대 만일의 경우 명성왕후가 피신해 있기 위해 서울의 고택을 옮겨다 지은 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명성왕후가 기거한 적은 없다고 한다.ㅁ자 모양의 가옥으로 사랑채와 안채와 행랑채 및 별당채의 지대석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다. 석재의 크기나 가공 수법, 기둥 등 목재의 크기나 치목 수법 등에서 궁궐 건축의 특징을 엿볼 수 있어 볼 만하다.개명산 자락 물가에 쉬는 호랑이 느낌,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나는 심플하다’, ‘나는 술 먹은 죄밖에 없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이런 말을 남긴 화가 장욱진은 박수근, 이중섭과 더불어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꼽힌다. 1917년 충청도에서 태어났고 1939년 일본의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를 다녔다.평생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동화적이고 간이한 표현과 독창적인 색채를 선보였던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심플’로 표현된다. 그는 평소에도 '심플'을 작품 활동의 모토로 삼았다.그의 모토처럼 그의 작품은 무척이나 간단하고 화폭은 매우 작다. 작은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골마을의 나무와 동물, 까치, 집에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가족이 있는 따스한 삶을 동경하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디 작가뿐이랴. 모든 인간의 동경의 대상이 유년의 동화다. 그러나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어린 시절이기에 장욱진이나 박수근의 그림 앞에 서면 슬퍼지는 것이다.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개명산(開明山 정상 형제봉 546.8m) 기슭에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이 2014년 문을 열었다. 유족들과 장욱진미술재단에서 기증한 장욱진 그림 230여 점이 모태가 됐다. 미술관은 건축물 자체도 작품이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다. 미술관은 입구를 지나 실개천에 놓인 긴 다리를 건너 계단이 놓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한다. 개명산 아담한 산세에 둘러싸인 하얀색 건물과 실개천, 너른 조각공원을 한 프레임에 담으면 퍽이나 근사한 공간이 나온다. 멀리서 보면 마치 개천을 사이에 두고 현실세계와 가상공간으로 나눠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미술관 외관은 마치 컨테이너나 네모난 깡통을 대충 얽어 매 놓은 듯 엉성하고 밋밋해 보인다. 그러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정은 180도 달라진다. 벽마다 시원하게 뚫린 통창을 통해 변화무쌍한 외부 풍경을 미술관으로 끌어들여 다채롭게 빛난다.건축물은 ‘최 페라이라’ 건축에서 설계했다. 2014년 제22회 김수근 건축상을 수상하고 한국건축가 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7’에 들었다. 또 영국 BBC가 선정한 '2014 위대한 8대 신설 미술관에 들었다. 항간에는 장욱진 화가의 호랑이 그림 '호작도'와 집의 개념을 모티브로 지었다는 말이 있지만 짓고 보니 물가에 쉬는 호랑이를 연상시킨다는 말이 와전된 것뿐이란다.마치 그리스 여행 사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하얀색 계단이 지하 1층과 지상 2층을 연결시켜준다. 지하 1층은 수장고로 사용되고 1층과 2층이 주요 전시실이다. 1층에서는 주로 기획 전시가 열리고, 2층에는 장욱진 화가의 상설전시가 열린다. 크기, 모양, 색깔이 모두 다른 전시공간은 작가와 작품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2층에는 관람객들이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체험공간이 마련돼 있다. 오브제 방에는 작가가 생전에 사용했던 개인용품들이 전시돼 있고 작품집과 관련 서적들을 볼 수 있는 아카이브 라운지가 있다. 1층에는 아트숍과 음료를 파는 카페가 있다. 장욱진 화가의 작품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기념품 - 머그잔, 플레이트, 노트, 메모장- 등을 구매할 수 있다.
2023-02-18 22:03:32
경기도 ‘양주(楊州)’라는 지명은 고려 현종 임금이 이 지역에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고을이라고 하여 지었다는 말이 전한다. 고구려 때에는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매성군(買省郡), 혹은 창화군(昌化郡),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내소군(來蘇郡)으로 불렸다. 고려 태조 때 내소군은 견주(見州郡)으로, 한양군(漢陽郡: 서울 강북 일대, 구리시, 남양주 상당 부분)은 양주군(楊州郡)으로 바뀌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양주와 견주를 합쳐 양주목으로 승격됐다. 그러나 현종 9년(1018년) 12목이 8목과 여러 도(道)로 개편되면서 견주(오늘날의 양주군과 의정부)는 양광도(楊廣道: 경기도 양주와 광주의 머리글자)에 속하는 견주현으로 격하됐다. 경주와 평양을 오가는 중심지가 양주에서 개경으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고려 문종 21년(1067)년 양주의 중심지를 남경으로 정하니 그 중심지가 지금의 서울시 광진구 일대였다. 남경을 둘러싼 게 양주목이고 양주목은 한양군, 견주군, 풍양현(남양주 진접읍), 행주현(고양시 행주동), 사천현(동두천)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지명이 됐다.요컨대 지금의 양주는 견주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의정부시가 떨어져 나간 형국으로 존재한다.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양주는 교통이 편리하고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고대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의 각 쟁탈전이 치열했던 지역이다.신라와 고구려 군의 최후의 대규모 전투인 이른바 ‘매초성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양주 지역이었다. 당시 매초성의 위치는 양주시의 불곡산, 천보산,칠봉산에 둘러싸여 있는 양주시 회천동, 양주동 일대로 추정된다.조선시대에 이르러 양주군은 양주부-양주도호부를 거쳐 양주목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인 연산군 10년(1504년)에 경기 북부 지역에 국왕의 무예 연마를 위한 수렵장을 조성하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는 금표가 설치되면서 한때 양주목이 소멸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중종 때 다시 양주목이 부활됐고 유양동 일대에 동헌과 향교, 사직단, 객사 등이 건립되면서 유양동을 중심으로 한 양주 시대가 열렸다.애초에 양주 지역은 지금의 양주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지역이었다. 현재의 의정부시, 동두천시, 남양주시, 구리시, 연천군 전곡읍뿐만 아니라 서울시 동북부 일대의 노원구, 도봉구, 중량구, 광진구와 고양시 일대가 모두 양주목에 소속됐었다.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고양군이 떨어져 나가고, 전곡은 연천군으로 넘어갔다. 이어 1963년 서울 대확장 시기에는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일대가 서울로 편입됐고, 의정부읍이 의정부시로 독립했다. 1980년에는 남양주, 구리 지역이 남양주군으로 분리됐다. 1986년 남양주군 구리읍이 구리시로 승격했다. 남양주군과 미금시가 1995년 통합돼 남양주시가 됐다. 1981년 양주군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승격 분리되었다.팔다리를 다 떼어주고 몸통만 남은 꼴이 된 양주시는 도락산 불곡산을 잇는 능선을 중심으로 두 지역으로 크게 나뉜다. 서쪽에는 신천 주변으로 백석읍, 광적면, 남면, 은현면 등이 펼쳐지고 동쪽은 회암천과 청담천이 흐르며 덕정역, 덕계역을 중심으로 양주 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다. 송추계곡과 장흥관광지로 유명한 장흥면이 의정부시 남쪽과 이어져 있다. 양주시는 대부분이 농촌지역인데다 군부대가 많아 발전이 더디다. 최근에는 농촌지역 깊숙이 섬유, 화학 등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중소공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환경오염 문제도 심각하다.그럼에도 양주시 회암동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조선 전기 최대 사찰로 알려진 회암사와 회암사 박물관이 있으며, 유양동에는 양주객사가 복원돼 양주향교와 더불어 과거 양주목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장흥면에는 장흥아트밸리, 남경 수목원, 장욱진미술관 등 볼거리가 넘쳐난다. 그런가 하면 양주 나리공원 일대에서 펼쳐지는 ‘양주나리공원 천일홍축제’는 대표적인 가을 축제로 각광받고 있다.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수 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조선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 승려 3000명, 262칸에 기거 … 문정왕후 때 절정양주시 천보산 남쪽 기슭에는 조선시대 최대 사찰로 알려진 회암사(檜巖寺)의 폐사지인 회암사지가 있다. 회천동(법정동) 낸 회암동 21번지다. 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 왕사로서 조선 초기 전국 최대 규모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폐사지 방문은 역시 해질 무렵이 최적의 시간이다. 뉘엿뉘엿 연갈색으로 사그러져 가는 빛 속에서 폐사지는 쓸쓸함과 외로움, 인생무상의 정서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회암사지 전망대에 오르면 폐사지의 전체적인 모습을 더 잘 조망할 수 있다. 비록 폐사는 되었지만 가람의 형태는 온전하게 보존돼 있음을 알 수 있다.1997년부터 시작된 회암사지 발굴은 2015년까지 무려 10여 년 동안 1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70개소에 달하는 건물지가 확인됐다. 이중 35개소 이상에서 다양한 시설의 구들이 확인됐다. 구들의 구조 및 배치, 처리 기법 등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회암사지의 구들 시설은 우리나라 최대 온돌 유적으로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배수로와 화장지 등이 발견돼 당시의 위생시설 수준을 가늠케 한다.회암사는 창건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2세기 금나라 사신이 들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12세기 중엽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 인도의 고승 지공의 제자 나옹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고 그의 제자 무학대사가 주지로 재임하는 동안 더 크게 번창했다. 태조는 왕위 양위 후 이곳 회암사에서 기거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불도에 전념했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확장했고, 명종 때 문정왕후의 입김을 얻어 조선 전기 전국 최대의 사찰로 번성했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색의 ‘목은집’에는 승려의 수가 3000여 명, 건물은 모두 262칸, 높이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을 모셨다는 기록이 보이인다. ‘건물이 크고 웅장하여 동국 제일이며, 중국에서도 이러한 사찰을 보기 힘들 것’이라고 적혀 있다. 문정왕후 사후 회암사는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1566~1595년 이후 유생들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회암사지에서 건물 터뿐만 아니라 청기와, 용봉 문양 막새, 잡상 등 수많은 유적들이 출토됐다. 이들 유물은 ‘회암사지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부처님 진신사리 추정 회암사지 사리탑(보물 제2130호)천보산 기슭 바로 아래쪽에 ‘회암사지 사리탑’이 홀로 외롭게 서 있다. 사리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 층마다 용과 말, 연당초문(蓮唐草文: 연꽃과 당초의 무늬가 연달아 이어짐) 등의 조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기단부에 남아 있는 용마상은 무척이나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회암사지 사리탑은 탑의 규모와 조각 수법 등이 조선 초기의 양식을 계승한 탑으로 왕실 불교예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어 가치가 매우 높다. 2021년 6월 24일 보물 2130호로 지정됐다.출토 유물 전시하는 회암사지박물관 … 무학대사 승탑 옆 새로 지은 회암사회암사지박물관에는 회암사에서 발굴된 유물들의 대부분이 전시되고 있으며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전돼 보관 중이다.1층에는 상설전시실과 영상 체험실, 방문자 센터와 회암사 대가람실이 있다. 회암사의 창건, 관련 주요 인물 등 회암사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물들로 꾸며져 있다.영상체험실에서는 출토된 유적과 학술자료 등을 통해 고증된 회암사의 모습을 3D 영상으로 구현한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다. 사찰의 구조와 구들 시설, 배수 시스템 등이 영상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현돼 회암사의 과거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회암사는 종교적 공간과 정치적 공간이 혼용돼 있는 게 특징이다. 전면의 보광전, 설법전과 같은 종교적 공간이라면 후면의 정청이나 동서 방장은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됐다. 궁궐의 편전이나 침전의 배치 형식을 고려한 독특한 건물 배치는 회암사가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왕실의 집무공간으로도 사용됐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전시실 중앙에는 태조 이성계가 회암사를 방문하는 어가 행렬이 미니어처로 재현돼 있다.2층 전시실에는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기와, 용두토수(龍頭吐首), 잡상들과 불화 등이 전시돼 있다. 왕실에서만 사용되었던 백자나 분청사기 및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용 문양과 봉황 문양 기와, 청기와, 용두 등을 통해 회암사의 높은 지위를 실감할 수 있다.회암사지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회암사지 그리고 양주” 특별전을 열고 있다. 오는 3월 26일까지이다. 회암사지의 발굴 및 정비의 역사를 도표와 사진, 도면 등으로 만나볼 수 있다. 문정왕후가 남긴 불화 복제본 5점도 전시돼 있다. 특히 회암사가 명문으로 드러난 최초의 유물인 청동 금탁의 진본을 만나볼 수 있다. 그동안 진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회암사지박물관에는 사본이 전시돼 있었다. 회암사지와 박물관까지 둘러보았다면 이번에는 회암사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의 사리탑들을 찾아보자. 회암사지에서 차로 5분 정도 천보산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아담한 절집 회암사가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 지어진 회암사가 아닌 최근에 지어진 절집이다. 대웅전과 관음전, 조사전, 삼성각, 요사채 등의 전각을 갖추고 있으며 천보산과 어우러져 그윽한 절집 향취가 물씬 풍긴다.이 절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조금 오르면 무학대사 승탑(보물 제388호)과 그 앞의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지공선사의 승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49호), 나옹선사 승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50호)이 세워져 있다. 이들 석조 유물들을 통해 당시 회암사에 주석했던 승려들의 면면과 회암사의 위상을 새삼 짐작할 수 있다. 양주향교, 450년된 느티나무 … 흥선대원군 사위 조정구 양주소학교 세워향교는 조선시대 국가가 세운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중·고등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시와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배우는 경학이 주 교육내용이었다. 유교의 성립과 발전에 공을 세운 중국과 한국의 선현들에 대한 제를 올리는 곳이기도 했다.조선시대 양주에도 조선 태종 원년(1401년)에 건립된 향교가 남아 있어 조선시대 교육 및 제사 문화를 살피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제를 지내고 봄가을로 일년에 두 번 유림들이 모여 석전제를 지낸다. 청소년 예절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양주시 유양동에 위치한 양주향교는 양주시청에서 차로 약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인근에 양주 관아와 양주 별산대 공연장이 있어 두루두루 ‘전통’을 체험할 수 있다.향교 앞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우람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전소될 때에도 살아남았다. 그 뒤쪽으로 향교의 출입문인 외삼문이 있다.양주향교는 향교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인 ‘전학후묘’ 양식을 따라 앞쪽에 명륜당이 있고 뒤쪽으로 내삼문 안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다. 내삼문은 ‘동입서출’라 하여 반드시 동문으로 들어가고 서문으로 나와야 한다. 성조(聖朝)라 적힌 중문은 신도(神道)라 하여 제물과 제주만 출입할 수 있다.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중국 5성과 송조 2현(정호, 주희),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 정몽주, 조선 우암 송시열, 김장생, 김진, 조광조, 이황, 이이 등 우리나라 18선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태종 원년인 1401년에 세워진 양주향교는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됐다. 인조 때 재건됐으나 한국전쟁 때 또다시 전소됐다. 지금의 향교는 유림들에 의해 대성전은 1958년에, 명륜당은 1984년에 각각 재건됐다.1896년 9월 양주향교에 근대식 양주공립소학교가 개교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양주군수 조정구가 명륜당 앞마당에 심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조정구(趙鼎九, 1860~1926)는 흥선대원군의 사위이자 고종의 매부로 홍문관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1899~1902년에 양주군수를 맡았다. 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내린 남작 작위를 거부하고 자결을 기도하기도 했다. 7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차남 조남익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해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에서 기거하다 노환으로 별세했다. 아들 조남승과 조남익, 딸 조계진을 두었다. 딸 조계진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 규학과 혼인해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을 낳았다. 순종이 사망 직전 한 유언을 구술 받아서 신한민보에 공개한 사람이다. 양주별산대놀이, 중요 무형문화재 2호 … 밤10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에 끝나 양주향교에서 5분 거리에 양주별산대공연장이 있다. 한양과 인접했던 양주에는 조선시대의 한양권 전통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양주 상여소리와 회다지, 양주별산대놀이가 대표적인 예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2호로 지정됐을 정도로 문화적,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다. 매년 5월 양주별산대놀이 정기 공연이 있다. 공연 중에는 주민들에게 떡도 나눠주고 탈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행사와 먹거리 장터가 열려 주민들의 흥겨운 잔치 마당이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는 통영오광대와 제11-2호로 지정된 평택 농악공연 등이 함께 진행되기도 해 우리나라 전통놀이 공연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대축제의 장이 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의 한 분파로 녹번, 아현, 구파발, 사직골, 송파 등지의 본산대와 구별하여 별산대로 부른다.약 250여 년 전부터 백정, 상두꾼, 건달로 구성된 한양 딱딱이들을 불러 놀게 하였는데 지방 공연 관계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잦아지자 아예 양주골 사람들이 직접 딱딱이패를 본떠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한 게 양주별산대의 시작이다.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한가위에 주로 연희됐다. 기타 대소 명절, 가뭄 때의 기우제에도 공연됐다. 연희는 한번 시작되면 대체로 밤 10시를 넘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놀이는 길놀이로 시작된다. 별산대 깃발과 영기를 앞세우고 연희자들이 풍물을 올리며 마을을 돈다. 낮에는 주로 부잣집에 들러 춤과 덕담을 베풀어 흥을 돋우다가 밤에 탈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탈고사’를 지낸다. 놀이 전 고사에는 삼색 떡과 과일, 소머리, 돼지다리 등이 올라온다. 제물과 제주를 음복해 취기가 돌면서 본격적인 놀이가 시작된다.산대놀이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사당(社堂: 오늘날의 연예인), 무당, 기타 늙고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해 현실 폭로, 풍자, 호색, 웃음과 탄식을 보여주는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서민 탈춤극이다.양주별산대는 모두 8과장 8경으로 구성돼 있고 사미승, 어린 중, 옴중(옴·피부병이 옮은 중), 상좌, 먹중, 팔먹중 등이 등장한다.모두 배역에 맞는 탈을 쓰고 나와 음악 반주에 맞춰 춤과 노래, 재담(대사)을 구사하는 종합예술이다. 각 배역의 재담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절로 흥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노골적인 음담패설에 민망해지기도 한다.등장인물이 쓰고 나오는 탈 모양도 매우 흥미롭다. 옴중은 옴이 옮은 중으로 검은 점을 얼굴 전체에 그려 넣는다. 원숭이, 애사당, 노장, 취발이 등의 모습도 흥미롭다.
2023-02-15 23:37:32
경기도 구리시는 북쪽으로 남양주시, 서쪽으로 서울시 광진구·중랑구·노원구, 남쪽으로는 한강 너머 서울 강동구와 접한다. 마한의 영토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차례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에 속했다. 구리는 조선시대에 양주군에 속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대개편 때 구리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했다. 양주군 구지면(九旨面)과 망우리면(忘憂里面)의 글자를 따서 구리면이라 했다. 1973년 읍으로 승격됐고 1980년에는 양주군에서 분리된 남양주군에 속했다가 1986년 남양주시에서 분리돼 구리시로 승격됐다. 구리시는 전국 지자체 중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도시다. 경기도 면적의 0.33%에 불과하지만 경기도 정중앙에 위치해 있어 수도권 제1외곽순환도로를 비롯해 중부고속도로, 북부간선도로와 연결되는 사통팔통 교통의 요지다. 동구릉과 아차산을 제외하면 특별한 문화유산이나 유적지는 없는 편이지만, 아차산 일대에서 다량의 고구려 보루(堡壘)와 유물들이 출토됨으로써 국내 최대 고구려 유적지로 주목받고 있다.남쪽 향해 솟은 야트막한 아차산과 테뫼식+포곡식의 山腹式 아차산성경기 구리시에 서울 광진구와의 경계 지역에 야트막한 아차산(阿且山, 峨嵯山, 阿嵯山 등으로 혼용)이 있다. 남쪽을 향해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라고도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려사에 처음 ‘아차산’이란 명칭이 등장한다.중랑구 면목동, 망우리동, 중곡동의 능선을 따라 흐르는 용마산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아차산은 해발 296m 남짓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많은 시민들이 찾는다. 정상까지 40분~1시간이면 충분하다. 아차산은 험하지 않으면서도 전망이 뛰어나 더 많은 사랑을 누리고 있다. 북쪽으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손 닿을 듯 솟아 있고, 아래로는 중랑천과 왕숙천이, 멀리 한강까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아차산 정상부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아차산성(사적 234호)이 있다. 구리시 아천동에서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걸쳐 있다. 산성의 대부분 지역은 광진구에 속하며, 성벽 북쪽과 장대지 등 일부가 경기도 구리시에 속한다. 아단성, 장한성, 광장성으로도 불린다.아차산성은 아차산의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중앙부에 축조됐다. 산봉우리(정상부)를 둘러싸며 쌓은 테뫼식과 산골짜기를 포함하여 쌓는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된 산복식(山腹式)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1km에 달하고 성 내부의 면적은 2만5000평 정도다. 성 안에는 우물과 배수구도 있다.아차산과 아차산성은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시대의 치열한 패권 다툼의 현장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286년 백제 책계왕(責稽王) 때 축성됐고,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475년 개로왕 때 거대한 궁궐 개축 공사로 백제가 위태로워진 틈을 타 고구려가 쳐들어오자 개로왕이 성 밖으로 도망쳐 나가 항복했다. 고구려 장수 걸루는 개로왕에게 세 번 침을 뱉고 죄목을 물어 아차산 아래서 처형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보루를 쌓는 등 적의 침략에 대비했지만 결국 신라에 패하고 말았다. 한편,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였던 온달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재탈환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아차산성 아래서 전사했다는 설도 전한다.아차산 일원에는 고구려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약 20여 개 보루가 집중 분포돼 있는데 이 중 17개 보루가 사적 제455호로 지정돼 구리시에서 관리하고 있다.보루는 둘레 100~300m 정도의 작은 규모의 성으로 10~100명의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다.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토기, 화살, 궁궐 축성에 사용된 기와 등 다양한 삼국시대 유물이 출토됐다. 이들 유물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 신라와 백제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한강 유역의 패권을 상실하기까지의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특히 10개의 고구려 보루는 남한에 분포하는 고구려 관련 유적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고구려대장간마을’ … 현무를 숭상하는 거믈촌, 난방 및 취사 겸한 고구려 온돌방구리시 아천동 우미내마을에 조성된 고구려대장간마을은 고구려 벽화와 아차산 보루군 중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대장간 등을 바탕으로 2006년에 재현한 구리시 공립박물관이다.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과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야외전시장은 대장간마을과 야외공연장, 산책로 등으로 꾸며져 있다. 대장간마을에는 나무로 지어진 목조 가옥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데 얼핏 봐도 건축 양식이 특이하다. 우리네 농촌마을에서 볼 수 있는 농촌가옥과도 다르다. ‘이 마을은 고구려 벽화 속에 나오는 집 구조를 바탕으로 상상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라는 설명을 읽고 나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대장간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성격 급한 사람은 10분이면 휘리릭 다 둘러볼 수 있고, 아무리 찬찬히 돌아봐도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비록 상상을 더하긴 했어도 고구려의 가옥 형태나 문화 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은 고구려 유적으로 진지하게 관람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잠시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고대 고구려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가옥 입구에는 이름과 간단한 설명이 곁들여 있다. ‘담덕채’에는 방 중심에 온돌이 있고, 온돌 주변으로 생활공간이 있다. 마치 우물처럼 보이는 온돌은 오늘날처럼 방 전체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방 안에서 불을 지펴 일부분을 데우는 ‘쪽구들’ 형식이다.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온돌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설명해준다.‘연호개체’에서는 고구려인들의 기본 실내공간 활용 방식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언제든지 말을 타고 나갈 수 있는 입식 생활을 선호했으며 쪽구들을 놓은 공간, 의자를 놓아 접대할 수 있는 공간, 평상이 놓인 공간 등으로 구분했다. 회의 장소였던 ‘경당’도 있다.‘대장간’에는 아차산 4보루에서 발견된 간이대장간 시설을 바탕으로 상상을 더해 만든 공간으로 풀무, 모루 등 대장간의 가장 중요한 상징들을 볼 수 있다.‘거믈촌’에는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 등 4신 중 현무를 숭상하는 마을을 뜻한다. 현무는 거북과 뱀이 합쳐진 상상의 동물로 냉철함과 지혜를 뜻한다.다수의 TV 드라마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드라마 ‘태왕사신기(2007)’가 대표적이다. 고구려 왕자 담덕이 광개토대왕으로 등극하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판타지 사극으로 야외공연장 뒤편에 모형 ‘광개토대왕비’와 ‘담덕상’이 세워져 있다. 이밖에 시크릿가든, 선덕여왕, 바람의 나라, 자명고, 쌍화점, 쾌도 홍길동, 계백, 신의, 역린, 사임당 빛의 일기, 안시성 등의 영화가 그 뒤를 잇는다.‘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에는 아차산 보루군에서 출토된 유물과 아차산 4보루 모형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고구려대장간마을에는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대장간마을에서 놀자’는 고구려 역사문화 체험 프로그램으로 풀무질 체험, 와당문양찍기, 활체험, 탁본, 보루 완성하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유아에서부터 성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지역사회 연계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아차산의 명물, 큰바위얼굴 … ‘욘사마’ 배용준이 ‘태왕사신기’ 촬영하다 발견 대장간마을 옆쪽으로 아차산 등산로 입구가 이어진다. 작은 시냇물을 건너면 곧바로 숲길로 이어진다. ‘아차산 4보루, 큰바위얼굴, 3층석탑’ 안내판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큰바위얼굴’이 나온다. 눈, 코, 입의 모양이 선명하다. 영락없는 사람의 얼굴이다. 장군의 얼굴처럼 위엄이 가득하다. 이 바위는 2007년 드라마 ‘태왕사신기’ 촬영 당시 배우 배용준이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배용준의 인기가 하늘 모르고 치솟을 때 ‘욘사마’를 보려고 찾아온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계속 등산로를 따라가면 작은 암자 ‘대성암’이 나온다. 대성암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수도를 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종각 등이 있다. 일반 가정집처럼 커다란 철제문이 세워져 있는 것이 갈 때마다 특이한 느낌을 갖게 한다.대웅전과 삼성각 뒤에 ‘쌀바위’라고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쌀바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많은 대중들이 의상대사를 보기 위해 절로 찾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을 공양할 곡식이 필요했는데, 이 바위틈에서 쌀이 나와 공양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는 법. 바위틈이 넓어지면 더 많은 쌀이 나올 거란 생각에 사람들은 바위틈을 넓히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때부터 잘 나오던 쌀은 나오지 않고 쌀뜨물과 타버린 쌀만 수삼일 동안 나오다가 그마저도 아예 나오지 않게 됐다고 한다. 많은 욕심이 언제나 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들은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나 예수가 아닌 인간인지도 모르겠다.쌀바위 근처 의자에 앉아 한강을 바라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느긋하게 보인다.동구릉, 조선왕릉 중 최대 규모 9기 … 태조, 문종, 선조, 현종, 영조, 헌종까지 묻혀구리시 검암산 자락에는 조선시대 왕릉 중 최대 규모인 동구릉(東九陵)이 자리하고 있다. 면적이 약 59만평에 달한다.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다. 고려 공민왕릉인 현정릉을 본 따 조성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과 세종 때 완성된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만든 현릉(문종의 릉), 전쟁의 피해가 능에도 영향을 미친 목릉(선조의 릉)에 이르기까지 조선 왕릉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왕릉군이다.9기의 왕릉이 모셔진 곳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명당 중의 명당이다. 마지막으로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를 모신 경릉이 조성되면서 동구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북방의 억새만 쓸쓸히 나부껴 - 태조의 건원릉9개의 왕릉 중에 가장 방문객이 많이 찾는 곳은 태조 이성계의 묻혀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태조는 자신의 계비인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희망했지만 태종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고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태종은 ‘조선 개국의 시조이자 아버지인 태조를 궁에서 너무 먼 함흥에 묻을 수 없다’며 동구릉에 안장했다. 그러고는 마음에 걸렸는지 함흥에서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태종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을 파헤치고 지금의 정릉 자리로 이장했다. 이장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은 광통교의 기단으로 사용되거나 야산에 버려지기도 했다. 정릉을 묘로 격하시키기도 했다.건원릉에는 벌써 푸른 억새가 수북하게 뒤덮여 있다. 억새가 과연 태종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의 발로였는지 여전히 의구심이 남는다. 그러나 역사는 어떤 가정도 허용치 않는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실체는 억새일 뿐이다. 억새는 가을에 봐야 제맛이다. 늦가을 하얗게 휘날리는 태조 능의 억새는 기이하면서도 장관이다.두 여인의 비극적인 삶 – 선조의 목릉건원릉 홍살문 옆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묻힌 목릉(穆陵)이 있다. 목릉은 선조와 그의 원비 의인왕후 박씨와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같은 언덕에 정자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묻히는 형태의 동원이강릉(東原異岡陵)으로 동구릉에서 세 번째로 조성됐다.원비 의인왕후 박씨(1555~1600)의 능에는 병풍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능침의 규모도 왕릉에 비하면 훨씬 적은 편이다. 석물들 사이에 푸른 이끼도 많이 끼어 있고 비바람에 의한 마멸도 심해서 석물들의 윤곽이나 조각이 많이 흐릿해진 상태다.의인왕후는 선조 2년에 15세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 성품이 온화하여 후궁들이 낳은 아이를 자신이 낳은 아이처럼 보살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후궁인 인빈 김씨와 피난을 떠나고 박씨는 혼자서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선조의 박대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병을 얻어 소생 없이 4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삶이 쓸쓸해서일까. 유택마저도 더 쓸쓸해 보인다.인목왕후 김씨(1584~1632)는 1602년(선조 35년)에 계비로 책봉됐다. 당시 김씨의 나이는 열다섯 살로 선조와는 32살이나 차이가 났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실권을 장악한 대북파에 의해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이 살해당하고, 자신 또한 폐서인되어 서궁(경희궁)에 유폐되는 비운을 겪었다.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로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됐고 국정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여인으로서의 삶은 다분히 비극적이다. 조선왕릉은 조선 여인들의 삶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복원된 외금천교 홍예 … 43번 국도 넓히려 철거, 옛 감흥은 없어져 동구릉에는 다른 왕릉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동구릉을 들어서면 산책로 옆에 동구릉 석물 부재와 복원된 외금천교 홍예가 전시되고 있다. 원래 동구릉 입구에는 왕릉과 속세 공간을 구분하는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는 ‘외금천교’와 물길이 모여드는 ‘외연지’가 있었다. 외금천교는 43번 국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철거됐다. 당시 철거돼 보관하던 부재의 일부를 사용해 외금천교의 일부인 홍예가 복원돼 전시 중이다. 그런데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홍예는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탐방객들로부터도 외면을 받는 모양새다.보물로 지정된 건원릉, 목릉, 숭릉의 정자각들동구릉에는 건원릉, 목릉, 숭릉(崇陵, 현종과 현종비의 릉), 의 정자각이 보물로 지정됐다. 정자각은 봉분 앞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J자 모양으로 지은 건물이다. 건원릉(보물 제1741호) 정자각은 ‘조선 건국자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조선왕릉 조성 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물로서 가치가 크다’는 점이 인정됐다. 목릉(보물 제1743호)의 정자각은 조선시대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로 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栱包, 처마를 지탱)를 배열한 건축양식이다. 살미(山彌)의 형태나 구조가 장식화 되기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전체적으로 17세기 초에 재건된 문묘 대성전 포의 구성과 유사하다.숭릉(보물 제1742호)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한 팔작지붕으로 숙종 즉위년(1674)에 창건된 이래 처음의 형태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일 년에 두 번 개방하는 ‘왕릉 숲’문화재청은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로 평소에는 폐쇄되어 있던 왕릉숲을 개방한다. 이에 따라 동구릉도 6월 말까지 원릉(元陵,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에서 휘릉(徽陵,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까지 이어지는 숲길 1400m와 경릉(景陵)에서 자연학습장까지의 1300m 구간을 일반에게 개방한다. 왕릉 숲 입장 시간은 오후 4시 30분까지로 제한된다. 시간 엄수가 필수다.일 년 중 숲이 가장 아름다운 6월은 왕릉 숲 개방과 맞물려 왕릉의 방문객들도 증가한다. ‘신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왕릉 숲에서 휴식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2022-06-28 10:02:24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국밥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의미의 생태 수목원 ‘화담(和談)숲’이 자리하고 있다. LG상록재단의 창업자인 고 구본무 회장이 평생을 걸쳐 가꾼 숲이다. 우리 숲의 식생과 자연의 지형을 최대한 살리고, 국내외 자생 및 도입 식물을 식재해 각각 개성 있는 17개의 테마원으로 꾸몄다. 화기와 음식은 물론이고 자연과 환경에 해가 되는 물품은 반입이 일절 금지돼 있다. 카메라 삼각대까지도 반입을 불허할 정도로 수목원 관리가 엄격하다.수목원의 면적은 41만평에 달하며 그 중 인공 조성된 것은 16만5365㎡(약 5만평) 정도다. 서식하고 있는 자생 및 외래 식물의 종류는 4300종이나 된다. 2006년 4월 수목원 조성 승인을 받고 조성사업이 시작됐으며, 2010년 임시 개장했다가 휴지기를 거쳐 2013년 6월 정식 개장했다. 17개 테마원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이끼원을 비롯해, 1000여 그루의 자작나무가 식재된 자작나무숲, 분재원, 소나무정원, 암석원, 수국원, 탐매원, 특이형태나무원, 추억의 정원, 철쪽·진달래원, 반딧불정원 등이 있다.철쭉만 210종, 약 7만 그루 정도 된다. 짙붉은 산철쭉부터, 한라산 참꽃나무, 단풍철쭉, 일본 원산의 영산홍과 자산홍 등이 5월이면 입구부터 산 정상(330m)까지 절정을 이룬다.여름에는 수국과 산수국이 한창이다. 수국은 6월, 산수국은 6월부터 7월 중순까지, 나무수국은 7월부터 9월까지 핀다. 수국원, 이끼원, 탐매원, 분재원, 색채원 일대에서 다채로운 색깔로 손님을 맞는다.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원앙새 40여 마리가 노니는 원앙호수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고목 사이로 이끼원이 나온다. 이곳엔 솔이끼, 돌솔이끼, 비꼬리이끼, 서리이끼 등 30여종의 이끼가 약 3000평 규모에서 자란다. 이밖에 드라마에 나와 유명해진 ‘약속의 다리’와 물레방아, 자작나무 숲을 지나면 나오는 미선나무숲, 수령이 200년이 넘는 단풍나무가 있는 단풍나무숲, 매화·사과·배꽃을 감상할 수 있는 탐매원, 바늘 잎에서 금빛이 감도는 분재원 등이 있다. 자연보존하고 걷기 힘들어 전부 구경하려면 모노레일 이용해야화담숲을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건강한 두 다리로 한발 한발 숲길을 거닐며 숲에서 자라는 나무와 생물들을 만나는 것이다. 숲을 둘러보기 전에 전체 조망도를 보고 동선을 짜는 것이 좋다. 두 번째는 모노레일을 타고 숲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는 것이다. 모노레일은 전 구간 순환 코스를 비롯해 일부 구간만도 탑승할 수가 있으니 적절히 안배하면 좋다.지조와 기품을 상징하는 1300그루 화담 소나무정원화담숲 ‘소나무정원’은 이름 그대로 소나무가 주인공인 정원이다. 소나무 1300여 그루가 심어진 국내 최대 규모의 소나무 숲이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는 지조와 충절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고 구본무 회장 역시 기상과 기품이 넘치는 소나무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설립자의 말처럼 화담의 소나무숲에서 기품과 고아함이 넘친다.소나무정원의 연못가 비석에는 창업자 ‘화담 구본무’ 회장에 대한 헌사가 새겨져 있다. 화담은 구본무 회장의 아호이기도한데 ‘생명존중’을 추구한 구 회장이 20년에 걸쳐 조성한 숲에 그의 아호를 붙인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생전에 그는 “내가 죽은 뒤라도 ‘그 사람이 이 숲만큼은 참 잘 만들었구나’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양수경 작가가 쓴 ‘화담’이란 시비도 눈을 끈다.“서두르지 말게나한 걸음씩 한 걸음씩 지그시이 땅을 밟아가며 걸어보시게나”시 구절처럼 화담숲은 지그시 땅을 밟아가며 옆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거닐어야만 할 것 같다. 화담숲은 한 사람의 철학과 가치가 후대에 물려준 위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혹시 화담숲을 방문한다면 잠시라도 화담을 추모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2022-05-31 09:21:24
경기도 남동부에 위치한 광주(廣州)는 동쪽으로는 양평군과 여주시, 서쪽으로 성남시, 남쪽으로 용인·이천시, 북쪽으로 하남시, 남양주시와 접하고 있다. 특히 양평, 하남, 남양주와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광주산맥에 둘러싸인 분지형 지역으로 도시 면적의 대부분이 산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경안천이 동서를 관통하며 흐른다. 택리지에서는 광주 땅을 ‘예부터 한수 남쪽의 토양이 기름진 곳’이라 했으며 고려말 문신 유백유는 ‘빼어난 기운은 정기를 저장하여 준걸을 낳았으니 조선 인물의 빛이 있구나’라고 노래한 바 있다. 오늘날 광주는 시 승격 20주년을 넘기며 인구 40만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초대형 포곡식 산성 … 수어장대의 위용, 청량당 ‘이회 장군의 恨’‘강화로 피난길을 잡았던 인조의 어가 행렬은 청군에 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 행선지가 남한산성이란 말을 듣고 임금을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은 제 살 길을 찾아 우왕좌왕 흩어졌다. 그날 조선의 임금은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남한산성으로 숨어 들어갔다. 정묘호란 이후 9년 만의 일이다.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살기 위해 숨어드는 조선 임금의 입성은 참담했다.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 안에서 45일 동안 혹독한 겨울을 버텼다. 그 기간 단 한차례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전투도 없었다. 유일한 전투에서 군사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척화와 화친으로 나뉜 대신들은 끝없이 서로를 물고 뜯었다. 병자년 이듬해인 정축년에 영의정 김류와 이조판서 최명길의 화친이 이겼다.임금은 홍예가 낮은 서문으로 허리를 굽혀 나와 들길을 걸어 서울시 송파구의 삼전도로 갔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청나라의 칸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정축년 1월 30일의 일이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 등이 청의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갔고 임금은 다시 한양의 궁으로 돌아갔다.잘려나간 병사들의 목이 성 안에 걸렸다. 떨어져 나간 팔다리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제 짝을 찾기도 어려웠다. 봄이 되자 성채에는 이름 모를 꽃들과 잡초가 무성했다.참혹하고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되는 병자호란의 현장인 남한산성은 1963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1년 도립공원이 되었다. 2014년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도시계획이 이뤄졌고 군사유산이라는 점, 지형지물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 전술의 시대적 층위가 결집된 초대형 포곡식(包谷式, 성 안의 계곡을 둘러싼 능선에 성을 축조) 산성이라는 점 등이 세계적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오늘날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도읍을 정하고 성을 쌓았다는 설이 있기도 했으나 발굴된 토기 등을 근거로 신라 문무왕 12년( 672)에 쌓은, 당시 동양 최대의 주장성(晝長城) 이라는 설이 힘을 받고 있다.남한산성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개축된 것은 인조 2년(1624년)의 일이다. 그 해부터 2년 4개월간 본격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성벽 둘레 8 km,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춘 거대한 성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성안에는 광주부의 읍치(邑治, 읍성)를 옮기고 행궁과 함께 관아 건물도 들어섰다. 이후 정조 시대에도 대대적인 증개축이 이뤄졌다. 그러나 1907년 일본군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 오늘날까지도 복원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의 외곽을 수비하던 남한산성의 규모는 성벽 길이 12.35km, 성 내부 면적은 212만㎢에 달한다. 순조 때까지 산성 안에 각종 시설이 정비돼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가장 완벽한 성으로 꼽히며 1914년까지만 해도 50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을 두고 있는데 그 중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문은 성곽의 서남쪽에 위치한 남문이다. 정조 3년에 개축하고 자하문이라 불렀다. 아름다운 홍예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문루를 갖추었다. 1976년 문루가 복원됐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해 제작한 ‘자하문’ 현판이 걸려 있다.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어가 행렬은 자하문을 통해 성 안으로 피신해 들어갔다. 1637년 1월 30일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홍타이지) 앞에 무릎 꿇고 항복했다. 이날 인조는 곤룡포 대신 남색옷을 입고 한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예를 갖춰 성 밖으로 나와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의 예를 행한다’는 항복 문서에 합의했다. 이날 산성에서는 곡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청 태종은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서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수어장대’(守禦將臺)로 향한다. 장대란 전투 시 장수의 지휘 초소를 말한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장대가 있다.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진 수어장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수어장대는 단층 누각으로 서장대라고도 했다. 영조 27년에 2층 누각으로 증축하며 내편은 ‘무망루’(無忘樓)라고 명했다. 청나라에 8년 동안 볼모로 잡혀 있다 돌아온 봉림대군(효종)의 원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겨 있다. 영조와 정조는 여주 영릉(寧陵)의 효종 묘를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무망루에 들려 그날의 치욕을 되새겼다고 한다.그 옆 청량당(淸凉堂)은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회(李晦, 1567~1625)는 당시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다. 그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축성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남지방으로 떠났던 부인 송씨는 돌아오던 길에 남편의 처형 소식을 듣고 투신자살한다.이회는 죽는 순간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며 “매 한 마리가 날아오면 내가 죄가 없음을 알라”고 했는데 정말로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후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았던 공사가 가장 잘 된 공사임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사당을 지어 주고 이들 부부의 넋을 위로했다. 남한산성은 워낙 거대해서 한 번에 둘러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산성 안에 조성된 역사 테마길(국왕의 길, 장수의 길, 옹성의 길, 산성의 길)을 참고삼아 구간별, 테마별로 탐방 계획을 세워보는 것도 좋다. 광주시 목현동에서 남한산성까지 12km 구간 숲길에는 조선시대 관원들의 군사정보 전달과 지방 선비들의 과것길을 따라 ‘한양삼십리 누리길’이 조성돼 있다.구불구불 이어지는 남한산성의 성곽길은 주봉인 청량산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치욕의 역사’는 역사책에서만 존재할 뿐이다.남한산성 축조한 승려들 기거한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남한산성을 개축할 때 벽암(碧巖) 각성대사(覺性大師, 1575~1660)를 도총섭(都摠攝, 승려의 우두머리)에 명하고 전국 팔도의 승군을 동원했다.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해 축성 전부터 있던 망월사와 옥정사 외에 장경사, 개원사, 한흥사, 국청사, 천주사, 동림사, 동단사 등 7개의 절을 새로 지어 동원된 승군들을 머무르게 했다. 장경사는 인조 16년에 지어진 절로 대웅전,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망월사는 산성 축성 이전부터 있던 절로, 남한산성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절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있던 장어사를 허물고 그 안에 있던 불상과 금자 화엄경과 금솥 등을 옮겨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때 모두 파괴되었고 현재의 망월사는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망월사 대웅보전 옆에 서 있는 13층짜리 탑에는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에게서 직접 받아 온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장경사와 망월사 모두 동문 쪽에서 진입하는 것이 좋다.조선 후기 광주부윤이 건립한 연못 섬 위의 ‘지수당’남한산성 행궁사거리에서 동문 방향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지수당’(池水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차를 타고 지난다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으니 행궁 관리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보는 것이 좋다.지수당은 연못 속에 유유히 떠 있는 듯하다. 네모난 모양의 연못 속, 작은 섬 위에 지어진 지수당은 무엇보다도 시원스러운 건물이 인상적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정자 건물이 매우 날렵하다.정면에서 보면 정자 뒤로 연못이 있는 듯 보이나 실제론 연못 위에 있다. 건립 당시에는 세 개의 연못이 있었으나 한 개는 매립돼 논밭이 되었고, 두 개만 복원되었다. 연못이 지수당을 감싸고 있는 듯한 모양새인데 옆에서 보면 한글의 ‘ㄷ’자를 연상시킨다.지수당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광주부윤 이세화(李世華 1630~1701)가 현종 13년(1672)에 지은 정자이다. 부윤은 지금으로 치면 시장이다. 고려시대 광주산성에서 벌어진 몽골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광주부사(副使) 이세화(李世華, ?∼1238)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이세화는 서인으로서 조선 숙종 15년(1689)에 계비인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정주로 유배를 갔다가 풀려났다. 인현왕후의 복위 후 세자 빈객(賓客, 정2품 관직, 스승)과 공조·형조·병조·예조 판서 등을 지냈다. 청백리로 선정되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이유로 무산군 풍계면의 충렬사에 배향됐으며, 고향인 파주시 문산에 충신 정문(旌門)과 묘지가 세워졌다. 시호는 충숙, 호는 쌍백당(雙柏堂)이며 저서로 ‘쌍백당집’이 있다.지수당 동쪽에 이세화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부윤 이세화의 청덕민 선정비’, 뒷면에는 ‘숭정후 87년 갑오년 3월 일립(崇禎後 八十七年 甲午年 三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지수당 건너편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네모난 모양의 연못 안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섬에서 향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이곳에도 순조 4년(1804년) 김재찬(金載瓚)이 지은 ‘관어정(觀魚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관어정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석만이 세워져 있다.지수당은 봄, 여름, 가을 어느 계절이나 아름답다. 눈 내린 하얀 겨울날 꽁꽁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푸르게 솟아 있는 향나무와 소나무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옛 선비의 곧은 기상을 떠올리게 된다.물안개, 철새, 연꽃의 향연 … 경안천 습지생태공원퇴촌면 정지리 경안천변 습지에 ‘경안천습지생태공원’이 조성돼 있다. 경안천 습지는 1973년 팔당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대 농지와 저지대가 물에 잠기면서 형성되었다. 하얀 목책을 따라 2 km 이상 이어지는 수변 산책로에는 봄이면 버드나무, 왕벚나무, 감나무, 소나무 등이 우거지기 시작한다. 여름이면 연꽃 명소로 변신하고 가을에는 갈대 군락지들이 멋을 더한다. 산책로 중간중간에 설치된 철새 조망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날아드는 새들을 관찰할 수도 있다. 경안천에 사는 새와 곤충, 자생식물 등이 궁금하다면 정성스럽게 준비된 자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이른 아침 경안천에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모습과 겨울철 눈 내리는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겨울철에는 겨우살이를 위해 날아든 고니를 비롯한 철새들을 촬영하려는 사진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경안천은 참으로 고요하다. 여름날 해질 무렵 경안천변에 나가 물새가 차올리는 물소리에 귀 기울여 봐도 좋을 만큼 말이다. 높은 산을 온 몸으로 품고도 넉넉하게 흘러가는 강기슭에서 잠시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팍팍한 삶에 지친 마음에 휴식이 필요할 때, 넉넉한 자연의 품에서 힐링하고 싶을 때 계절과 상관없이 경안천생태공원은 따스한 안식처가 될 것이다.공원 입구에 주차장과 화장실 및 탐방객을 위한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카페나 레스토랑 등 휴게시설은 없으니 음료나 돗자리 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곤지암 소머리국밥거리 … 깊은 국물 자랑하는 40년 전통의 노포들 운집‘소머리국밥’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곳이 곤지암이다. 삼도와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광주, 특히 곤지암은 삼도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산이나 과것길에 오른 선비들은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길목이었다. 그 길목에 자연스럽게 하나둘 국밥집이 생겨 나중에는 주막거리가 됐다. 실제로 해동지도 광주부에는 곤지암이 곤지암 주막으로 표기돼 있을 정도로 국밥집이 많았다고 한다.오늘날 ‘곤지암 소머리국밥거리’에는 10여 개의 국밥집들이 영업 중이다. 곤지암에 지금의 국밥거리가 생겨난 것은 1980년대 이후 곤지바위 일대에 최미자 국밥이 문을 열면서부터이다. 배연정 국밥, 최미자 국밥, 원조골목집국밥 등이 유명하다. 배연정 국밥은 홈쇼핑 진출과 해외 진출까지 모색했지만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는 모양새다. 식당 간판마다 ‘원조’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그만큼 맛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일 거다. 국밥거리에 있는 식당들은 대부분 40년 전통을 자랑한다. 어느 식당을 들어서더라도 깊은 국물 맛과 쫄깃한 식감의 고기가 듬뿍 들어간 국밥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소머리국밥은 가마솥에 밤새 한우 사골을 우린 국물에 소머리 고기를 넣고 한 번 더 진하게 끓여 내는 전통적인 서민음식이다. 사용하는 고기의 부위나 조리시간 등에 따라 국밥의 맛이 달라진다. 고기의 누린내와 잡내를 제거하는 것이 맛의 관건으로 인삼이나 무를 넣기도 한다. 밤새 사골을 우려내고 기름기를 걷어내는 국밥은 정성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음식이다. 쉬운 듯 보이지만 손이 많이 간다. 점점 입맛은 패스트푸드화되고 고깃값은 치솟는 요즘 국밥이 언제까지 서민의 음식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힘든 국밥 장사를 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행히 아직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맛난 국밥을 먹을 수 있다.뜨근한 곤지암 소머리국밥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면 곤지암의 유래가 되는 곤지바위와 ‘신립 장군의 묘’가 인근에 있으니 함께 둘러보면 좋다.
2022-05-26 13:56:39
화성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융건릉과 용주사를 꼽을 수 있다. 융릉(隆陵)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합장묘이고, 건릉(健陵)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합쳐서 융건릉이라 부르며 화성시 안녕동과 화산동에 나란히 붙어 있다. 내밀하고 지엄한 왕실 공간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왕릉은 조성부터 관리까지 철저하고 엄격한 규율과 법도에 따라 이뤄져왔다. 지금이야 편안하게 관람하러 다니지만 조선 왕조 500년간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됐다.조선왕릉은 국왕과 왕비 등 왕실의 무덤은 ‘궁궐에서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왕실 규범집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조성됐다. 오늘날 조선왕릉들이 서울의 외곽지역인 고양, 남양주, 구리, 화성 등 경기도 일대에 분포돼 있는 이유다. 다만 폐위돼 유배지에서 죽음을 당한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만 예외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현존하는 조선왕릉은 모두 42기로 태조 이성계의 원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齊陵)과 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인 후릉(厚陵) 2기가 북한 땅 개성에 있고, 나머지 40기는 모두 남한 땅에 있다. 40기는 일괄적으로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500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던 덕에 조선왕릉은 어디라 할 것 없이 주변의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오랜 세월이 빚은 명품 숲에 둘러싸여 있다. 울창한 숲과 붉은 홍살문과 정자각과 재실 같은 전통적인 목조 건축물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편의 사극에서 으레 보는 풍경을 연출한다. 가을철엔 단풍 여행 코스로 조선왕릉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문화재청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통제되고 있던 왕릉 숲길을 한시적으로 개방하고 있어 조선왕릉의 명품 숲길을 탐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조선왕릉 숲길 9개소가 개방된다. 개방되는 숲에는 화성 융릉과 건릉 숲길도 포함돼 있다.정조의 효심 덕분에 사도묘→수은묘→영우원→현륭원→융릉으로 격상 융건릉 매표소를 지나 능역으로 들어서면 두 개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융릉이고 왼쪽으로 가면 건릉이다. 10월 말 융건릉 숲은 이미 가을빛이 완연하다. 누런빛이 감도는 소나무와 전나무 숲길을 따라 융릉으로 향한다. 숲속에는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들이 그대로 수북하게 쌓여 있어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숲속 벤치에서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들의 모습에서도 고즈넉함이 묻어나고 있다.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묻혀 있는 융릉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한 맺힌 그리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는 것도 억울한데, 눈앞에서 뒤주에 갇혀 죽었으니 그 한이 오죽했으랴.영조는 1762년 아들을 추도한다며 사도묘(思悼墓)라고 했다가 자신의 허물을 자인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1764년 수은묘(垂恩墓)로 바꿨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제일 먼저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상하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拜峯山, 현 서울시 동대문구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아버지의 수은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개칭하고 아버지를 모신 사당인 수은묘(垂恩廟)을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했다. 경모궁은 지금의 대학로(연건동) 서울대 의대 교내에 있다. 참고로 묘(墓)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을 모신 무덤을 말한다. 반면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묻힌 곳이다. 또 묘(廟)는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하는데 주로 묘 근처에 비각이나 작은 집처럼 세워져 있다. 廟는 혼(魂)을 모신 사당을, 墓는 백(魄)을 모신 무덤을 뜻한다. 혼은 정신적 에너지이고, 백은 육체적 기본물질을 말한다.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했든지 정조는 즉위 13년 째인 1789년 영우원을 수원부 용복면에 있는 화산(수원부 관아가 있던 곳,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으로 천장하고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했다. 1815년(순조 15년) 혜경궁 홍씨가 사망하자 이듬해인 1816년 합장했다. 1899년(광무 3년)에 장헌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현륭원은 융릉으로 추증됐다. 화산은 원래는 풍수에 능했던 윤선도가 조선 17대 왕인 효종의 묫자리로 추천했던 길지인데다 지명까지 용이 엎드린 형상이란 뜻의 ‘용복’이어서 정조는 주저 없이 이곳을 아버지의 새 안식처로 결정했다고 한다. 양주 배봉산에서 이 장식을 지켜보던 정조는 신하들 앞에서 ‘이제야 제사 음식을 드리고 의장에 필요한 물건을 갖추는 데 성의를 보일 수 있게 됐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조성하기 위해 수원부 관아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행궁을 설치했다. 또 화산 인근에 살던 주민들을 팔달산 자락으로 옮기게 했다. 이주인에게는 10년 동안, 수원부 백성에게는 1년 동안 부역을 면해 줬다고 한다.화산과 관련하여 ‘송충이’에 얽힌 유명한 얘기가 전한다. 아버지 묘역을 조성하고 화산(花山)을 둘러 본 정조는 이름에 걸맞게 꽃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좋겠다 하여 융릉 주변 40리에 걸쳐 대량으로 나무와 꽃을 심게 했다. 그런데 나무가 많다 보니 송충이가 극성이었다. 송충이로 인해 피해가 커지자 나라에서는 송충이를 잡아오는 자에게는 포상금을 주고 잡아 온 송충이들은 화산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서쪽 바다에 있는 빈정포(濱汀浦, 지금의 매송면 야목 4리)에 갖다 버리게 했다고 한다. 그 후로는 ‘빈정포’라고 적힌 부적만 붙여도 송충이가 죽었다고 한다.융릉에 도착하니 홍살문 입구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마침 제향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융릉의 제향일은 4월 둘째 주이지만 올해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연기돼 지난 10월 26일 거행됐다.조선왕릉 융릉 제향은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융건릉 봉향회 주관으로 열리는 행사로 이번 제례는 장조의 259주기,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 206주기가 되는 해라고 한다. 뜻밖의 행운에 좋아했던 것도 잠시. 행사 관계자들이 홍살문에서 출입을 제한하는 통에 행사 참관을 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제향에 종헌관으로 참석한 화성시 의장의 ‘화성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전통 문화행사가 돼 자라나는 어린 세대에게 우리의 귀중한 정신문화인 효를 배우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발언과는 다른 현실에 씁쓸함을 느끼며 건릉으로 향했다. 11월 25일에는 건릉의 제향이 열리며 융릉 제향과 달리 시민들의 참관도 가능하다고 한다.융릉의 동쪽에 있다가 풍수지리 이유로 서쪽에 옮겨진 건릉융릉에서 건릉으로 이르는 길은 완만한 산의 경사를 따라 다양한 모습의 숲 길이 조성돼 있다. 100년 이상 된 향나무, 소나무 등이 어우러진 숲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 것.건릉은 정조대왕과 효의왕후가 묻혀 있는 능이다. 살아생전에 ‘내가 죽거든 현륭원 근처에 묻어 달라’고 한 정조의 뜻에 따라 현륭원 근처에 묻혔다. 건릉은 처음에는 현륭원의 동쪽에 조성됐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건릉이 풍수지리 상 불길하다는 설이 제기됐고 순조 21년(1821년)에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처럼 융릉의 서쪽에 이장돼 합장릉으로 조성됐다. 사도세자 위패 모신 원찰, 용주사 … 정조 때 중창융건릉에서 5분 정도 떨어진 화성시 송산동에는 융릉의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가 자리하고 있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염거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병자호란 때 불이 타 폐사가 된 것을 1790년(정조 4년)에 중창불사하고 용주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해서 절 이름이 용주사가 됐다.용주사에도 송충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융릉 참배를 마친 정조가 능역 주변을 거닐다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송충이마저도 아버지를 괴롭힌다고 생각하여 송충이를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고 한다. 그 후 송충이 구제 작업을 벌여 용주사 일대의 송충이를 모두 없앴다고 한다.용주사의 특이함은 절집 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천왕문을 지나서 특이하게 홍살문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 왕릉이나 서원 또는 관아나 향교에 세우는 홍살문이 용주사에 있는 까닭은 용주사 내에 호성전(護聖殿)을 짓고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재를 올렸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용주사에서는 일 년에 여섯 번의 제를 지냈으나 1907년 이후로 중단됐다고 한다. 2008년 100년 만에 사도세자 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했다. 그러나 호성전은 작년 8월 20일 전소돼 탄 목재만 남아 현재 복원에 난항을 겪고 있다.홍살문을 지나면 삼문이 나온다. 삼문 네 기둥의 상단부는 목재를, 하단부에는 석재를 사용했다. 네 기둥에는 용주사불을 첫 글자로 한 글귀들이 적혀 있다.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근대 서화가 죽농 안순환(竹濃 安淳煥 1871~1942)이 쓴 ‘용주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창건 당시의 것으로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삼문 앞에는 화마를 물리친다는 해태상이 놓여 있다.삼문을 통해 절집 마당에 들어서면 웅장한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천보루와 오층석탑, 그리고 마당 한 켠에 종각이 서 있다. 용주사 오층석탑은 1702년 숙종 2년에 고승 성정이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천보루를 지나면 대웅보전이 나온다. 용주사 대웅보전에는 석가여래와 함께 동방 약사여래, 서방아미타여래 등 목조 삼세불 좌상이 모셔져 있으며, 정조가 직접 쓴 현판이 남아 있다. 삼세불의 후불탱화는 한때 일반적인 불화 기법이 아닌 음영법과 원근법 등 서양화법이 적용된 불화로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 했으나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에 의해 민관 등 25인이 그렸다는 게 밝혀졌다. 대웅보전은 현재 보물 제1942호로 지정돼 있다.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은 고려 전기에 제작된 동종으로 신라시대 동종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종신은 하늘로 승천하는 비천상과 결가부좌한 채 두광을 갖추고 합장해 승천하는 3존상으로 장식했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보호각을 세워 자세히 볼 수 없는 점이 아쉽다.용주사 효행박물관에는 정조가 하사한 부모은중경판이 보관되어 있으나 현재는 코로나19로 휴관 중이다. 용주사 들머리 길에는 조지훈의 ‘승무’시비가 있다. 10월에 용주사에서는 승무제가 열리는데 조지훈의 시 ‘승무’의 배경이 됐다고 한다.시멘트벽 활용, 범상찮은 문화 재생공간 시립 ‘소다미술관’ 융건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성시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소다미술관이 있다. 오랫동안 방치돼 왔던 찜질방 건물을 리모델링해 디자인 및 건축 미술관으로 문을 연 문화재생공간이다. 회색빛 시멘트 벽을 그대로 드러낸 벽면을 활용한 디자인 감각이 눈에 띈다. 새로운 시도를 담은 작가들의 전시회가 꾸준하게 열린다. 정원사와 조경 전문가들이 정성껏 꾸민 야외 정원 역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정원만을 보러 방문하는 사람도 꽤 많다. 창문처럼 뻥 뚫린 시멘트 벽면과 그 벽면들이 만들어 낸 공간 속에 오롯이 전시돼 있는 예술 작품들, 하늘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그러나 넝쿨과 나무로 뒤덮인 천장이 모두 예사롭지 않다. 미술관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2021-11-04 02:33:37
경기도 화성(華城)은 수도권에 가까이 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저 수원의 위성도시 정도로 취급되고 제부도와 바지락칼국수를 떠올리는 게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구릉지 형태의 농경지와 공장지대가 있고 바다도 끼고 있다. 외지인들이 보기에 농경지로서의 화성보다는 시화방조제와 화옹방조제 건설로 육지가 된 끝 간 데 없는 너른 갯벌이 오히려 강렬할 수도 있다. 화성은 정조대왕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경기도 서남부에 위치한 화성은 북쪽으로는 안산시, 동북쪽으로는 수원시, 동쪽으로는 용인시, 남쪽으로는 오산시와 평택시 등과 맞닿아 있고 서북쪽으로는 시화호를 사이에 두고 시흥시와 접한다. 참고로 대부도는 안산에 속하고 제부도는 화성에 들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당성군이었고, 서신면에는 백제 및 신라의 대외무역항이던 당항성이 있었다. 고려 충선왕 때 남양도호부가 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유지됐다. 도호부는 원래 중국(당나라)의 군정기관이었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 규모가 제법 큰 ‘특례시’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고종 32년 남양군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영흥면, 대부분이 부평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수원군에 병합됨으로써 남양군이라는 지명은 없어졌다. 이후 1949년 수원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수원군은 화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2011년 화성시로 승격됐다. 경기 남부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화성은 광주산맥과 차령산맥 사이에 위치해 있어 동북쪽은 산세가 깊고 서쪽은 완만한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다. 화성 중심부를 관통해 남쪽으로 흐르는 황구지천과 발곡천을 따라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또 바다와 면한 서쪽 해안은 남양만과 군자만을 끼고 있다. 군자만은 시흥과 화성의 경계이며 시화호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왔다. 군자만의 폐염전은 아스라한 향수를 자극한다. 남양만은 남양읍을 중심으로 움푹 들어간 곳이다.화성이 바다를 안고 있음은 전곡항과 궁평항을 통해 새삼 알 수 있다. 궁평항은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국가어항이다. 2008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됐다. 해당지역은 물론 인근 섬의 어선들이 정박하고 하역할 수 있는 필수적인 항구란 말이다. 서신면 궁평리에 있는 궁평항은 제부도, 대부도, 전곡항 등과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바다 끝에 설치된 전망대 데크에서 바다낚시도 즐길 수 있고 대형 수산시장이 있어 각종 해산물을 즐길 수 있다. 모터보트·낚시·갯벌, 오토캠핑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가 들어서 있다. 일몰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서신면 전곡리의 전곡항은 ‘수도권 요트의 천국’으로 불린다. 2009년 요트가 정박할 수 있는 수도권 첫 마리나로 뜨거운 관심 속에 개장했다. 이후 세계 3대 요트대회인 월드매치레이싱투어(WMRT)를 비롯해 경기국제보트쇼, 전국해양스포츠제전 등 굵직한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요트를 체험할 수 있지만 꼭 타지 않더라도 고급 요트 수백 척이 즐비한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러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낡은 고기잡이배가 둥둥 떠 있던 작은 어항이 지금은 서해안을 대표하는 인기 마리나로 변신했다. 원래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은 배가 드나들기에 용이하지 않지만 화성시 서신면과 안산시 대부도를 잇는 방파제 덕분에 전곡항은 일정한 수심을 유지할 수 있다. 요트는 선체 아래 바람에 밀리는 것을 막아주는 센터보드가 있어 수심이 1.5m 이상 확보돼야 하는데, 전곡항은 밀물과 썰물 때 모두 3m 이상이어서 마리나가 들어서기에 적합하다. 전곡항은 궁평항보다 북쪽이어서 섬 둘레를 따라 깎아지른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제부도가 한눈에 보인다. 맞은 편 안산 탄도항의 풍력발전기, 해넘이 명소로 꼽히는 누에섬을 요트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바다 갈라짐 현상으로 유명한 제부도는 석양이 아름다운 해변과 드넓은 갯벌이 매력적이다. 제부도아트파크라는 전시 공간을 시작으로 감각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워터워크, 다양한 벤치 등이 들어섰다. 탑재산을 끼고 제부항까지 돌아보는 제비꼬리길은 웅장한 해안 절벽과 서해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어 꼭 한번 걸어볼 만하다.전곡항에서 서쪽으로 몇 십분 이동하면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천연기념물 414호)가 멀지 않다. 중생대 백악기 퇴적층에서 공룡 알 화석 180여 개가 발견된 곳이다. 공룡 알 화석을 관찰하고, 약 1.5km 산책로 양쪽에 펼쳐진 광활하고 이색적인 염습지를 즐길 수 있다. 시화방조제 건설로 너른 갯벌은 물론 파도를 불러들이던 우음도, 어도, 형도 같은 섬들이 죄다 육지에 갇혀 버렸다. 한때 바다였던 갯벌과 섬들은 이제 송산그린시티 같은 대규모 택지가 되가고 있다. 육지가 돼서 띠풀과 갈대의 초록으로 뒤덮여 가고 있는 중이다. 옛 우음도 섬 한쪽에 우뚝 솟은 송산그린시티전망대에서 우음도와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 시화호 주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화성에는 41개의 섬이 있고 이 중 유유인도는 세 곳에 불과하다. 시화방조제가 놓이기 전에는 유인도가 다섯이었으나, 우음도, 형도가 육지가 되면서 남은 섬은 서신면의 제부도, 우정읍(남양만을 사이에 두고 서신면의 남쪽)의 국화도,입파도 등 3개뿐이다. 국화도와 입파도는 궁평항에서 배를 타고 건너갈 수 있다. 국화도에서 썰물 때마다 열리는 길을 딛고 해안이 온통 흰 굴껍데기로 뒤덮인 무인도로 건너가면 고즈넉한 평화를 느낄 수 있다.
2021-10-29 19:48:57
양평에서 양수리와 세미원을 빼놓고 논한다면 ‘팥 앙금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가을 남한강변은 길가에 올망졸망하게 피어 있는 작은 들꽃 한 송이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고 지난 봄여름에 감사하며 남은 계절의 무사안녕을 넉넉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만든다. 아직은 이른 낙엽이 뒹구는 작은 들꽃 오솔길을 걸으며 여름 내내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옛 시절 ‘황포돛배 영화’ 뒤로하고 그리움과 연꽃세상의 아름다움 펼치는 양수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하나의 물줄기로 되는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의 두물머리 포구는 남한강 최상류인 강원도 정선군과 평창군에서 발원한 물길이 충북 단양과 충주를 거쳐 경기도 여주를 거쳐 닿는 곳이다. 또 강원도 금강군(북한)에서 발원해 화천, 춘천, 가평을 거치는 북한강물이 여기서 합류한다.예부터 강원도나 충청도에서 나오는 목재가 곡식 등이 종착지인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까지 이어질 때 마지막 중간 정착지로 역할을 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1973년 양수리보다 하류인 지점에 팔당댐이 건설되고 일대가 상수원 보호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수로는 육로로 대체되었고 포구를 오가는 길손들도 뜸해졌다. 나루터에 묶여 힘없이 떠 있는 황포 돛배 한 척이 과거의 영화를 기억할 뿐 흐르는 듯 멈춰 선 듯한 고요한 물줄기와 400년 넘은 늙은 느티나무는 인간사에 무심한 듯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다만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정비 공사가 끝난 두물머리 일대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두물머리 둘레길이 조성되었고 느티나무 주변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쉼터와 포토존이 생겨났다. 강가에 사각 프레임 하나 설치했을 뿐인데 프레임을 통해 보는 두물머리는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경기도 두물머리 나루터'라는 표지석과 함께 겸재 정선이 화폭에 남긴 두물머리 풍경도 감상할 수 있다. 강가 카페 루프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이 되어 깊어가는 가을을 느껴볼 수도 있다. 두물머리에서 ‘배다리’를 건너면 세미원(洗美苑)이다.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水洗心 觀花美心)는 의미의 세미원은 경기도로부터 100억원을 지원받아 한강 상류에서 떠밀려 내려온 쓰레기 매립장이나 다름없던 지역을 정비하여 만든 자연정화공원이다.전통적인 정원 양식에 6개의 연못을 조성했다. 한강물의 중금속과 부유물질을 정화해 팔당댐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역할도 한다. 연 50종, 수련 120종 등 270여 종의 수생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2019년 경기도 제1호 지방정원으로 지정됐다. 1만9000평의 이 곳 땅주인은 건설교통부다.연꽃이 피어나는 6~9월 세미원은 온통 수련과 연꽃 세상이 된다. 특히 밤에만 피어난다는 빅토리아 연꽃을 보기 위해 사진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연에 대한 예찬은 예부터 끊이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 자라도 때묻지 않고, 맑은 물에 씻기었어도 요염하지 않다. 속(연꽃대)은 비었어도 곧게 자란다. 연꽃은 일제히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지 않는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번갈아 핀다. 연과 달리 수련(睡蓮)은 잎이 수면에 붙어 있다. 개구리가 추운 물속에 나와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한자 이름도 ‘물 수’가 아니라 ‘졸릴 수’다. 오후 2~4시가 되면 잎을 오므리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수련의 빛깔은 흰색을 기본으로 분홍색, 연분홍, 빨강, 노랑색, 보라색 등 다양하다. 화가 모네는 시간과 물빛에 따라 달라지는 수련의 모습을 담기 위해 평생을 보냈다. 양수리의 상춘원에는 석창포 등 수생식물이 심어져 있는 석창원(石菖園), 수레형 정자인 사륜정(四輪亭), 정조 때 창덕궁 안에 있던 온실, 세종 때 강화도에 설치했던 온실 등이 재현돼 있다. 사륜정은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가 설계만 해 놓고 정작 만들지 못한 것을 문헌에 따라 복원해 놓은 것이라 한다. 상춘원의 세미원의 일부다. 배다리를 건너면 세한정 송백헌(歲寒亭 松柏軒)을 먼저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양서면 용담리에 속하고 유료 입장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과 함께 세한도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세한도의 사람들’에서는 세한도를 그린 추사와 그의 제자 이상적, 일제강점기 때 세한도를 지킨 서예가 손재형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을 오갈 때마다 스승을 위해 신간 서적을 구해와 스승에게 전해 주었다. 책을 갖고 무려 두 번이나 유배지인 제주를 찾았다. 의리를 지키는 제자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표현한 것이 세한도이다. 집 한 채와 소나무 세 그루가 그려져 있고 발문이 적혀 있다. 발문에는 겨울이 와야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해 제자의 신의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손재형은 대표적인 한국 근대 서예가로 ‘서예’라는 용어를 처음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추사를 연구하던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는 인사동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발견하고 구입하게 된다. 후지스카가 1943년에 세한도를 갖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 사실을 안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동경으로 그를 찾아가 끈질긴 설득 끝에 1944년 세한도를 한국으로 되찾아왔다. 세한도의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세한정은 세한도 속 정원을 본 따 만든 것이니만큼 서로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세미원은 세한정 외에도 열대수련연못, 빅토리아연못, 홍련지, 굽이굽이 물길에 찻잔을 띄어 풍류를 즐기는 유상곡수(流觴曲水), 청계천의 수표교의 수표(수위를 재던 돌기둥)를 본 따 만든 분수대, 장독대 모양의 분수대, 창경궁에서 바람의 방향을 살피던 풍기대(風旗臺), 유리온실인 세계수련관, 연꽃박물관, 연꽃빵집, 한반도 모양의 연못에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백수련을 심은 나라를 생각하는 뜰이란 의미의 국사원(國思園), 모네의 수련 그림을 본 따 아치교가 놓인 ‘모네의 정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이처럼 세미원은 왕과 귀족들의 연꽃 또는 식물가꾸기의 취미와 글로벌한 수생식물 정원의 여러 형태를 응축해놨다. 세미원은 연꽃이 한창이 7~8월에 가야 한다. 지금은 늦어서 연꽃을 볼 수 없으니 아쉬운 마음을 내년 여름으로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양평군은 세미원을 발판으로 연을 군의 상징이자 먹거리로 발전시켜 나가려 하고 있다. 연으로 만든 과자, 빵, 술, 차, 레시피 등을 개발 중이다. 연이 양평군을 먹여살리는 효자가 될지 모른다. 토종 야생화 200종, 남한강변과 어우러지는 ‘숨은 보석’ 양평들꽃수목원중앙선 오빈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양평읍 오빈리의 양평들꽃수목원이 있다. 남한강변에 조성된 들꽃이 소박하고 가을 햇살처럼 포근한 수목원이다. 시골 동네 어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들이 이 수목원의 주인이다. 강변의 정취와 꽃들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수목원 구석구석에 설치된 코끼리 상, 그네 타는 오누이, 연주단, 책 읽는 소녀상들이 수목원의 단조로움을 깨고 자잘한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다양하게 수목원을 꾸미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자연생태박물관에는 생태계의 표본과 실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허브 및 야생화 정원에는 멸종돼 가는 토종 야생화 200여 종이 전시돼 있다. 각종 허브 50여 종이 아로마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밖에 수생습지, 관목과 덤불로 기하학적 모양을 내는 토피어리(Topiary)정원, 열대식물원, 야외정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이외에도 사계절 썰매장, 쿠키 체험장, 자전거 대여점 등 체험 공간과 놀이 공간이 많아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에게 좋다. 지금은 코로나19 유행으로 체험장을 유동적으로 운영하니 방문 전에 꼭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수목원과 자전거도로가 연결돼 있어 시원한 가을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려봐도 좋겠다. 성인 기준 8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양평의 별미, 황해도 피란민이 빚은 옥천냉면마을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는 6.25 전쟁 당시 황해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모여 냉면을 만들어 팔면서 형성된 옥천냉면마을이 있다. 현재 20여개소가 성업 중인데 가격은 물냉면이 8000원으로 아직까지는 착한 가격을 받고 있다. 다소 두껍고 쫄깃한 면발, 기름기를 뺀 편육, 큼직한 동그랑땡 모양의 완자가 별미다. 평양냉면에 가깝지만 조금 더 간이 배고 메밀향이 더 진하고 구수하다. 돼지고기로만 육수를 내어 담백한 국물 맛이다. 평양냉면 스타일에 너무 익숙해진 사람은 입에 맛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만족하는 사람이 대체로 많다.
2021-10-01 20:32:34
경기도 양평은 동쪽으로 원주, 횡성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 여주와 붙어 있으며 북으로는 가평, 홍천으로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남양주, 하남, 광주와 연접해 있다. 양평에 관해 이중환의 택리지는 “산이 어지럽게 솟아 있고 골이 깊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못 되며, 기후도 싸늘하고 시내 또한 메말라 낙토가 아니다”고 적었다. 그러나 강원도 지방과 한양을 오가는 가장 길목에 위치한 남한강변의 양평 양근나루(양평읍 양근리)는 수량이 풍부해 1930년대까지도 강원도에서 서울로 들어가기 전의 가장 큰 포구로 번영을 누렸다.칡미 또는 칙미포구로 불렸던 양근나루를 통해 강원도 일대에서 나는 메밀, 콩, 수수, 감자, 옥수수 같은 밭작물 곡류와 나무그릇, 꿀 등이 남한강을 따라 내려와 서울 마포나루로 실려 나갔다. 그러나 산업철도인 중앙선이 깔리고 신작로가 놓이는 등 육로 교통이 발전하면서 포구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용문산, ‘경기도의 금강산’ ‘양평이 의지하는 산’ 양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용문산(龍門山) 관광단지와 용문사이다. 해발 1157m의 용문산은 웅장한 산세와 기암괴석이 많아 예부터 ‘경기도의 금강산’이라 불리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양평이 용문에 의지한다고 표현했다. 1971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용문산 일대는 거듭된 정비를 통해 잔디광장과 분수대, 야외공연장 등이 들어선 휴식과 문화 공간으로서 연중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용문산은 예나 지금이나 산나물이 유명하다. 봄이면 용문산 일대에서 산나물 축제가 열린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국은 용문의 산나물을 선물 받고 답례로 시를 한 수 지어 보냈다고 한다. 산나물 향기롭고 연하긴 용문이 그만인데그것으로 손님 대접하면 후의 있음을 알리라방장(方丈)의 고량진미를 어찌 부러워하리요한 바구니 속에 부귀영화도 저버리라 하였다. 방장은 절의 살림을 맡는 책임자 승려를 말한다. 산나물이 얼마나 맛있으면 잘 차려진 사찰음식보다 낫고, 부귀영화도 저버린다고 하였을까.용문사 입구에는 용문산 지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한국군 6사단(철원 주둔 청성부대)은 중공군 제63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방어선을 지켜냈다. 이 용문산 전투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가장 큰 성과를 올린 대접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발 1000m 넘는 큰 산, 아름다운 용문사 숲길과 천불천탑 탑곡용문사 들머리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숲길은 아름답다. 일주문을 지나 주 통행로에서 계곡쪽으로 내려서면 ‘탑곡’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돌탑들이 가득한 계곡의 모습이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진심을 담아 하나씩 올려 놓아 쌓은 돌탑이 계곡에 지천이다. 천 가지의 마음이 이룬 천불천탑이다. 자연스럽게 전남 화순의 운주사나 전북 진안 마이산의 돌탑을 떠올리게 된다. 용문사 탑곡의 탑들은 저마다 바라는 것이 다른 듯 탑의 모양도 2층탑, 3층탑, 다층탑, 모전석탑 등 각양각색이다. 사람의 모습을 닮기도 하였고, 석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탑도 보였다. 한 사람이 돌 하나를 올리고 뒤에 오는 이가 탑이 쓰러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또 돌 하나를 얹어 이루어진 탑곡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 오르는 길은 저절로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길이다. 용문사의 자랑, 천년의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30호)탑곡이 끝나면 이번에는 천 년 넘은 은행나무가 기염을 토한다. 한눈에 봐도 높이가 어마어마하다.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 나무 끝가지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이 대단한 은행나무는 높이가 60m, 가슴높이 둘레는 12m에 달하며 수령은 1100~1300년으로 추정된다. 동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용문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돼 있다. 가을날 은행나무가 노랗게 단풍이 들면 일대는 일순 황금산으로 변하고 나무 아래에는 은행나무 열매가 수북하게 쌓인다. 더 이상 무거운 가지를 지탱할 수 없어 여기저기 지지대를 세워 놓았다. 또 벼락이 맞지 않도록 90m 철탑을 세우고 피뢰침을 박아놨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으며 내력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의 고승인 의상대사(625~702)가 지나다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이 스승인 대경대사를 찾아와서 심었다는 설도 전한다. 개경에서 숨을 거둔 경순왕은 시신마저도 고향산천 경주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낯선 임진강변에 묻혀 있다. 일설에는 경순왕의 아들이자 신라 마지막 세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가는 길에 심었다고도 한다. 그 때문일까. 가지마다 이파리마다 멸망한 왕조의 한과 비통함이 서려 있는 듯하다. 나라를 잃고 왕궁에서 쫓겨나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마의태자는 무슨 마음으로 은행나무를 심었을까. 마의태자는 금강산에서 베옷을 입고 초근으로 연명하다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는 조성 세종 때 정3품 이상 벼슬인 당상 직첩을 하사받아 벼슬을 하기도 했다. 1907년 군대해산에 저항해 일어난 정미년 의병봉기 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울 때에도 은행나무는 화를 면했다고 하여 천왕목(天王木)으로도 불린다. 누군가 나뭇가지를 자르려 하자 나무에서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내리쳤다고 한다. 이외에도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에는 어김없이 ‘윙’하는 소리를 내며 길흉을 알려 주었다. 고종황제가 승하했을 때에는 멀쩡했던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고도 하니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참으로 신묘스러운 나무다. 용문사 스님들이 나무를 대하는 태도도 각별하다. 아침마다 부처님께 문안하듯 은행나무 주변을 쓸고 그 아래에서 기도를 드린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단풍을 보려면 10월 말에서 11월 첫 주 정도에 첫 서리가 내리기 전에 방문해야 한다. 천년산사 용문사, ‘마테호른’ 백운봉 조망이 최고, 용문산 풀코스는 12km에 7시간 용문사는 신라 진덕여왕(647~654) 때 원효대사 창건설, 신라 신덕왕(912~917) 때 대경대사 창건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 창건설 등이 전하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1907년(순종 원년)에 의병의 은거지로 사용되다가 일본군에 의해 전소된 것을 1909년 주지 김취운 스님이 재건했다. 다시 6.25 전쟁으로 크게 소실된 것을 1982년 주지 이선걸 스님이 대웅전, 범종각, 지장전 등을 조성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4세기 제작된 용문사 금동 관음보살좌상이 보물 제1790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본 떠 판각한 것이다. 추사의 또 다른 호인 ‘완당’이란 낙관이 찍혀 있다. 용문사는 은행나무 잎과 나무 모양을 새겨 넣은 종을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울리고 있다. 사찰 내 전통찻집과 템플 스테이는 도시인의 휴식공간으로 인기다. 템플스테이에서는 양평의 특산물인 연잎, 연실, 팽이버섯, 도토리가루, 두부 등을 활용한 친환경 자연음식을 만드는 체험행사도 한다. 등산을 위해 용문사 은행나무에서 조금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서쪽)길은 능선을 따라 상원사에 이르는 다소 평탄한 능선길이다. 오른쪽(북쪽)길은 계곡을 올라 마당바위를 지나 용문산 정상(가섭봉)에 이르는 용문사 기준 4.4km 코스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탄다. 마당바위는 스무 명 정도가 편히 쉴 수 있는 평범한 너럭바위다. 마당바위에서 가섭봉까지는 경사가 급해 일부는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 한다. 정상에서 동쪽과 남쪽 전망은 강과 산으로 볼 만하지만 서쪽과 북쪽은 황량하다. 용문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장군봉-함왕산성(함왕봉)-백운봉-백운암을 거쳐 연안마을(용문면 연수리)로 내려오는 코스는 용문사 기준 장장 12.1km에 7시간이나 걸린다. 백운봉에서 세수골(양평읍 백안리)로 직선으로 내려오는 다소 편한 코스도 있다. 또 장군봉에서 상원사, 연안마을로 내려가는 절충적인 코스도 있다. 산행에 욕심을 부리면 몸이 고달프고 자칫 사고도 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백운봉은 양평군 옥천면과 양평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940m로 남쪽 능선에서 가장 높다. 하늘을 향해 솟은 듯한 모습이어서 ‘용문산의 마테호른’으로 불린다. 경치는 가섭봉보다 한길 위다. 남으로는 남한강 줄기, 서쪽으로는 유명산과 청계산(양평군 양서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험악한 용문산 사나사, 조계종 정립한 원증국사 보우스님의 탑과 묘비 용문사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옥천면 용천리 용문산 자락에는 고려시대 사찰 사나사(舍那寺)가 있다. 대한 조계종 제25교구인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서 923년(고려 태조 6년)에 왕건으로부터 국정자문을 받은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 862~929)이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세웠다고 전해진다. 1367년(공민왕 16년)에 태고 보우(太古普愚) 스님에 의해 중건됐으나 임진왜란과 정미년 의병운동, 6.25전쟁으로 인해 모두 불타 없어지고 1990년 이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주문을 지나 석조여래상을 지나면 대적광전과 삼층석탑, 삼성각, 조사전, 석조여래상 등이 일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각들은 최근에 지어졌으나 의외로 고즈넉한 멋을 풍긴다. 곳곳에 한국 전쟁 당시 생긴 총탄 자국이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데 특히 원증국사승탑과 승탑비, 고려시대 삼층석탑에 유난히 총탄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사실 사나사를 주목하는 이유는 원증국사승탑과 승탑비 등이 있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우 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이 종조로 선종구산(禪宗九山)을 통합하고 고려 후기 타락한 불교의 개혁을 위해 애썼던 고려 말의 승려다. 원증국사(圓證國師)는 보우가 입적한 뒤 고려 우왕이 내린 시호다. 충남 홍성(옛 홍주)에서 태어나 13세 때에 양주 회암사에서 출가한 보우 스님은 1346년(충목왕 2년)에 원나라에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 임제종의 19대 법손이 됐다. 4년 후 귀국하여 충목왕, 우왕 등의 왕사, 국사가 되었으며 사나사를 중건하고 가평군 설악면 설곡리 소설암(小雪庵)에서 입적했다.경기도 유형문화재제 제72호로 지정돼 있는 원증국사탑은 커다란 종 모양의 탑으로 4각 기단 위에 탑신과 탑정을 얹은 모습이며, 탑신의 표면에는 아무런 조각이나 문양도 없이 검박한 모양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石鐘碑, 廟塔碑)는 화강암으로 된 지대석을 파서 비 몸을 끼워 세운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원증국사탑과 석종비는 모두 제자 달심이 세웠다. 사나사는 작고 특별한 문화재는 없지만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인 보우대사의 탑비와 영정이 모셔져 있으니 한번 들러볼 만하다. 중미산과 유명산, 중원계곡 … 천문대, 휴양림, 야영장, 물놀이에 그만 양평에는 용문산 외에 중미산과 유명산이 손꼽히는 산이다. 중미산(仲美山)은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서종면과 가평군 설악면 경계에 있는 산이다. 용문산이 양평의 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면 중미산은 양평의 북서쪽 경계에 있다. 중미산 정상(해발 834m)과 인근의 천문대는 옥천면 신복리에 속한다. 천문대는 1999년 3월에 개관했으며 자연휴양림 안에 있다. 서울 근교에서 가장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중미산 정상은 양수리로 흘러가는 남한강 줄기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며, 울창한 숲과 계곡의 맑은 물이 발길을 이끈다. 주계곡 3단 폭포는 시원함을 더해준다. 번잡한 용문산 관광단지와 달리 상가도 별로 없고 휴양림과 야영장이 조성돼 가족 단위 캠핑에 적합하다. 중미산에서 선어치(서너치) 고개를 사이에 두고 남동쪽에 위치한 게 유명산(有明山 해발 862m)이다. 양평군 옥천면과 가평군 설악면 경계에 있다. 두 산은 차로 10분 거리다. 유명산은 기암괴석과 맑은 계곡물로 우리나라 자연휴양림 1호로 지정됐다. 잣나무와 낙엽송이 빼곡하다. 유명산-중미산-선어치고개-용대산-서종면 정배리-서종면 문호리로 이어지는 북한강변길은 아름다운 드라이브로 코스로 유명하다. 용문면 중원리(中元里), 용문산 동쪽의 중원산(780m)과 도일봉(842m) 사이에 있는 중원계곡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이다. 6㎞에 이르는 계곡 곳곳에 폭포와 소(沼)·담(潭) 등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계곡 입구에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마주하는 첫 번째 폭포가 계곡을 대표하는 중원폭포로서 높이 약 10m의 3단 폭포가 시원하게 떨어진다. 기암절벽에 둘러싸여 경관이 빼어나다. 중원폭포를 지나 울창한 숲길 아래에는 치마폭포가 있다.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생기는 하얀 포말이 치마를 펼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폭포 아래에 맑은 소가 천연 수영장을 이루고 있다. 계곡길을 걷다 보면 매와 독수리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매둥치봉과 수리봉이 나온다. 중원계곡으로 들어가는 용문면 조현리 길목에는 양평군이 운영하는 야영장 겸 휴식처가 있다. 넓은 개울가에서 물놀이하기 좋다.
2021-09-30 20:26:19
수원은 화성과 행궁 말고도 보고 먹고 즐길거리가 많다. 전통시장과 통닭거리는 외지인들도 즐겨찾는 먹자골목이다. 화성행궁에서 팔달문에 이르는 500m정도의 행궁동 공방거리는 수원의 인사동이라 불린다. 공예품점 30여 개소와 맛집, 카페, 갤러리 등 50여 개소가 모여 있다. 수원 팔달문 인근 전통시장들 ‘왕이 만든 시장’ 팔달문 주변에는 팔달문시장, 지동시장, 영동시장, 통닭거리 등 전통시장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 시장은 ‘왕의 시장’으로 불린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팔달문시장은 1796년 처음 문을 열었다. 정조는 화성을 완성하고 “부국강병의의 기초가 상업에 있다”며 팔달문에 시장을 열고 전국의 유명한 상인을 불러 모았다. 정조는 신분계급제로 인해 정체된 조선을 살릴 방법으로 상업을 택한 것이다. 정조는 해남에 터를 잡고 무역업을 하고 있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을 수원으로 불러 들이는가하면, 이들에게 갓과 탕권을 만드는 말총(말의 갈기와 꼬리) 전매권과 인삼 유통권 등을 허가하는 등 상업 번창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폈다. 팔달문을 중심으로 남쪽 넓은 터에 자리잡은 게 팔달문시장이다. 팔달문 오른쪽(동쪽)에 맞닿아 있는 게 영동시장이다. 한복 특화 시장으로 유명하며 포목, 커튼 등의 거래도 활발하다. 수원의 최고 먹거리인 ‘수원갈비’는 1940년대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화춘제과를 경영하던 이귀성씨가 8·15 광복이 되면서 ‘화춘옥’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출발했다. 경기도, 충청도의 우량한 소가 수원에 집결했고 양이 많고 양념을 잘 재워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신문에 소개되고 박정희 대통령도 자주 찾아 더욱 소문이 났다. 지금은 수원 구도심보다는 아주대병원 인근에 더 규모가 큰 맛집들이 모여 있다.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영동시장 건너변에 있는 지동시장은 100여년 전 보부상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발달했다. 야채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고 패션과 먹거리 등도 즐비하다. 1층 순대타운에는 20여 개의 순대 전문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수원화성의 통닭거리는 2019년에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에 등장하면서 더 유명해졌다. 1970년대 수원천 남수교 북쪽 일대에 통닭 가게가 하나 둘씩 생기면서 ‘수원통닭거리’로 특화되었다. 팔달로를 따라 100m거리에 융성통닭, 장안통닭, 중앙치킨타운, 남문통닭 등 10여 개의 통닭 전문점이 있다. 이 골목에서 하루 팔리는 통닭의 양이 평균 1500마리라고 한다. 신선한 닭을 대형 가마솥에 튀겨 내어 식감이 바삭하고 양이 많다. 어린 시절 술이 불콰하게 오른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기름 묻은 종이 봉투, 그 안에서 풍기던 고소한 기름 냄새는 지금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소환한다. 그 시절의 아버지가 그립다면 당장 통닭거리로 달려가라. 수원 화성 인근의 상권을 ‘화세권’(화성 역세권)이라 한다. 장안문 근처의 ‘정지영커피로스터스’는 낡은 2층 양옥을 개조한 공간미로 인기다. 화서공원 부근의 ‘카페원모어’는 화성 근처에 높은 건물이 없는 점을 활용해 옥상에 ‘루프탑’ 형태로 꾸며졌다. 성곽길과 야경을 조망하기에 좋다. 행궁이 화성의 가운데라면 여기서 북동쪽으로 수원천변에는 하얀색의 행궁동사진관이 있다. 가족과 커플 사진의 명소로 꼽힌다. 한달에 한번 아날로그 방식의 사진 촬영 및 현상, 인화 이벤트를 한다.수원의 박물관과 미술관, 나혜석 거리 수원을 대표하는 수원화성박물관은 팔달구청과 매향교 사이에 있다. 매향교를 건너면 화성행궁이다. 화성성역의궤 등 문화재와 화성을 담은 멋진 사진작품 등이 전시돼 있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연극 등 각종 공연이 열린다. 이 안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여성화가 나혜석의 대표작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나혜석 기념관도 있다.화성행궁에서 나와 화성어차 매표소를 지나면 신풍초등학교 옛 교문이 남아 있다. 1896년에 세워진 수원 최초의 공립학교이다. 지금은 영통으로 이전하고 옛 교문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초등학교 교문을 따라 화성의 옛 모습을 담은 담벼락 갤러리가 있다. 사진에 담긴 오래 전 화성의 모습과 지금 달라진 화성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 있다. 담벼락 갤러리가 끝나고 화서문로를 걷다보면 나혜석 생가터가 나온다. 화성행궁의 북서쪽 모퉁이다. 이어 오른쪽으로 행궁동 벽화마을이 이어진다. 나혜석(1896~1948)은 여성운동가이자 작가이며 화가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신교육을 받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다. 여성에게만 순결과 정조를 강요하는 조선 남성들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했고, 자신을 옭아맨 식민지 조선의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어머니와 아내도 아닌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삶을 꿈꿨다. 한때는 촉망받는 젊은 여류 화가로서 전도유망한 젊은 외교관 김영우와의 결혼, 국내 최초의 세계일주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그러나 최린과의 불륜이 문제가 돼 이혼했다. 당시 그녀는 여성의 정조만을 문제시하는 남성 중심의 위선적인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여 충격을 던졌다. 그녀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12월 10일 길거리에서 객사했다. 생가터에는 이를 알리는 푯말과 벤치 하나만 덜렁 놓여 있다. 그녀의 죽음만큼이나 쓸쓸한 풍경이다. ‘여자도 사람이다’를 외쳤지만 너무 일찍 외쳤던 나혜석의 삶을 생각해 본다. 북수동성당과 수원성지, 한국전쟁 때 사라진 옛 수원성당행궁 동편의 종로 거리를 걷다보면 북수동성당과 수원성지가 있다. 수원교구는 2000년 화성 전체를 천주교 순교 성지로 선포했다. 정조 사후 천주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받아 수원유수부가 관할하던 한강 이남 지역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천주교 신자 2000여명이 화성으로 끌려와 처형당했다. 북수동성당 일대는 신도들을 처형하던 토포청과 심문을 하던 이아(貳衙, 제2청사)인 화청관(華請館)이 있던 곳으로 당시 사용된 형틀과 고문기구들이 야외와 실내에 전시돼 있다. 북수동성당의 제2 주차장 자리는 수원 최초의 본당인 옛 수원성당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파리외방전교회의 데시데라도 폴리(한국명 심응영, 일명 심뽈리) 신부는 아름다운 고딕식 건물의 수원성당을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심하게 훼손되어 헐렸다. 폴리 신부는 전쟁 중 성당을 지키다가 인민군에 끌려가 순교했다. 최근 복원이 진행 중이다. 북수동성당 옆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은 원래 가톨릭계 소화국민학교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뽈리 화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1934년 문을 연 소화국민학교는 원래는 나무 건물이었으나 불이 나서 타 버렸고, 1952년 현재의 벽돌건물로 다시 지었다. 소화국민학교(소화초등학교)도 신풍초등학교처럼 수원시 영통구로 이사를 갔다. 북수동성당을 지은 프랑스인 뽈리 신부의 이름을 따서 뽈리화랑이라고 부른다. 삐걱거리는 복도를 따라 오래된 나무교실에는 천주교 박해 때 사용되었던 형구와 성당 관련 귀한 사진들이 상시 전시되고 있다. 근현대 한국천주교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물이 풍부한 수원의 수변공원들, 광교산과 백운산 등반코스 수원은 물이 많다보니 아름다운 유원지가 많다. 영통의 광교호수공원은 광교산과 옛 원천저수지 및 신대저수지의 자연미를 살려 아름다운 국내 최대의 도심 속 호수공원으로 조성됐다. 장안구 송죽동의 만석공원과 만석거(萬石渠, 일왕저수지)도 아름다운 수변과 산책로, 무지개빛 음악분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정조 19년에 축조됐으며 지금도 식수원으로 쓰인다.또 화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호로 불려지는 축만제(祝萬堤)는 1799년(정조 23년) 정조대왕이 가뭄을 대비해 축조했다. 호수 남쪽 항미정은 순종황제가 방문한 곳으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풍광은 수원팔경 중 하나인 ‘서호낙조’로 부른다. 만석거와 축만제는 모두 풍요를 기원하는 열망을 담고 있는 이름들이다. 수원 화성을 멋지게 보려 수원시는 기구를 타고 관람하는 ‘플라잉수원’을 만들었다. 최대 20명이 탈 수 있는 헬륨풍선이다. 10분간 70~150m 상공을 유영한다. 화성 동문인 창룡문 부근에서 운영 중이다. 수원의 등산 코스로는 광교산과 백운산이 있다. 백운산은 출발점이 광교공원이지만 광교저수지 서쪽을 차지하고 있다. 그 정상은 의왕에 있고 용인을 포함, 3개 시에 걸쳐 있다. 광교산은 저수지의 동쪽을 차지한다.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과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에 걸쳐 있는 비교적 완만한 코스다. 형제봉(해발 448m)에서 수원시 전경을 조망하기에 좋다. 정상은 시루봉(582m)으로 한남 금북정맥의 주봉이다. 등산 마니아들은 광교산에서 시작해 북서쪽의 백운산을 거쳐 고분재 바라산 우담산 원터마을 국사봉 어수봉 석기봉을 거쳐 서울 청계산의 정상인 망경대(618m)까지 총 26km를 종주하기도 한다.
2021-07-16 01:28:17
전국의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오락가락하던 지난 7월초, 홍살문 하나가 전부인 화성행궁(華城行宮) 앞 광장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다. 간혹 오가는 사람들도 양산 아래 숨거나 연신 팔을 놀려 부채질을 하며 걷고 있었다. 세 시가 넘었지만 한여름의 땡볕은 수그러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관람객들로 늘 북적거리던 행궁 신풍루(新豐樓) 앞도 조용했다. 한 여름 땡볕이 내리 쬐는 날 그늘 한 점 없는 고궁을 관람하는 일은 고문에 가깝다. 그러나 잡다한 소음과 동선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면 뜨거운 햇살의 고문조차도 능히 견딜만하다.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 노거수 세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정조가 처음 행궁을 건립하기 시작한 것은 1789년(정조 13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을 다녀올 때 머물기 위한 궁이 필요해서다.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정식 명칭은 장헌세자 莊獻世子)는 정치적 모략으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정조가 열한 살 때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정조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정조는 1752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759년(8살) 때 세손에 책봉됐다. 1762년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했다. 이어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없다는 명분 아래 영조의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후에 진종(眞宗)으로 추존)의 양아들로 입적됐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25살에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정조의 일성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李祘)이다”였다. 이 한 마디에는 정조의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사랑과 그리움, 죄책감 그리고 회한 등 모든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제일 먼저 경기도 양주(지금은 동대문구)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아버지의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개칭하고 아버지를 모신 사당인 수은묘(垂恩廟)을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했다. 경모궁은 지금의 대학로(연건동) 서울대 의대 교내에 있다. 서울대병원을 별칭 함춘원(含春苑)으로 부른다. 1493년(성종 24년)에 창경궁의 동쪽인 이곳에 풍수지리설을 따라 후원(後苑)을 조성하고 잡인들의 출입을 막은 게 바로 함춘원이다. 함춘원엔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이 들어섰으나 한국전쟁 때 거의 소실됐다. 함춘원의 일부인 함춘문(含春門)과 경모궁의 일부였던 석단(石壇)만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정조는 함춘원의 일부에 경모궁을 조성한 것이었다. 영조는 1762년 아들을 추도한다며 사도묘(思悼墓)라고 했다가 자신의 허물을 자인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1764년 수은묘로 바꿨다. 수은은 은혜를 후대에 길이길이 전한다는 의미다. 묘(墓)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을 모신 무덤을 말한다. 반면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묻힌 곳이다. 또 묘(廟)는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하는데 주로 묘 근처에 비각이나 작은 집처럼 세워져 있다. 廟는 혼(魂)을 모신 사당을, 墓는 백(魄)을 모신 무덤을 뜻한다. 혼은 정신적 에너지이고, 백은 육체적 기본물질을 말한다.예컨대 효창원(孝昌園)은 5살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와 몇 달 후 죽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무덤이었으나 나중에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강제 이장당하며 지금은 효창공원이 됐고 김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 애국지사들이 안장돼 있다. 한편 조치원, 장호원, 이태원 등에 쓰이는 원(院)은 관리들이 지방 출장을 다니거나 서울로 공무를 보러왔을 때 머물던 역원(驛院)으로서 숙박시설이자 교통수단인 말을 갈아타는 곳이었다. 정조는 즉위한 지 13년째인 1789년에 배봉산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관아가 있던 지명)으로 옮겨 새 단장한 후 현륭원으로 이름을 바꿔 격상했다. 1899년 장헌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됨에 따라 현륭원은 융릉(隆陵)으로 추증됐다. 이 때문에 당시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팔달산 자락으로 이주해야 했고 수원 화성행궁과 화성의 건설이 시작됐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드리는 동시에 정조의 꿈인 개혁정치를 펼치려는 첫 걸음이었다. 건립 당시 576칸으로 지어진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고 일컬어진다. 정조는 행궁이 완성되자 “이제 화성은 나의 새로운 고향이다. 행궁의 정문은 신풍루라고 하여라”고 교지를 내렸다. 신풍이란 임금님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이다. 정조의 수원 화성에 얼마나 애정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부 관아로 사용되었고 임금의 원행(園行)이 있을 때에는 왕의 거처로 사용됐다. 그러나 정조의 꿈이 담긴 행궁은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됐다.일제는 정조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華寧殿) 건물에 자혜의원을 열었고 행궁의 정전이자 동헌의 중심인 봉수당(奉壽堂)을 병원 본관으로 사용했다. 1925년에는 봉수당을 허물고 2층짜리 벽돌건물을 세우고 병원 이름도 자혜의원에서 경기도립수원의원으로 고쳤다. 그나마 정조 당시 공식 행사나 연회장으로 쓰였고 이후 수원군청이 들어선 낙남헌(洛南軒)만이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았다.1789년 첫 삽을 뜬 화성행궁은 200년 후인 1989년에 복원이 시작됐다. 복원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토대로 진행됐다. 1단계 복원사업(1995년~2003년) 당시엔 전체 576칸 중 왕의 처소 등 482칸만 복원됐다. 올해 3월부터 2단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관리들이 묵던 우화관(于華館)과 융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물품을 관리하던 별주(別廚) 등 94칸이 건설된다. 2022년에 공사가 마무리되므로 완벽 복원에 무려 33년이 걸린 셈이다.수원시는 2030년까지 도시개발로 끊어진 화성 성곽도 모두 이을 계획이다. 창룡문(동문)에서 동남각루에 이르는 성벽을 복원·정비한다. 2013년에 지정된 지동문화재보호구역(1만3520㎡)와 연계해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축성 당시 지형을 복원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한옥 체험마을도 조성한다. 체험활동이 가능한 공공 한옥과 60여명이 숙박할 수 있는 한옥 13개 동을 지을 계획이다. 한옥 건축·수선 지원사업도 펼친다. 수원화성지구단위계획구역(2.24㎢) 내에 한옥을 신축하는 시민에겐 8000만원, 한옥촉진지역인 신풍동, 장안동 일대에 한옥을 지으면 최대 1억5000만원을 지원한다. 한옥 건축물 전면 수선비용도 최대 1억1000만원을 지원한다. 수원시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22채의 한옥에 보조금을 지원했다. 화성·화성행궁 복원은 수원시의 숙원 사업 중 하나다. 시는 1989년부터 지금까지 행궁 자리에 수원의료원을 지으려다 다른 곳으로 계획을 바꿨고, 116년 전통의 신풍초등학교를 동문과 학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광교신도시로 옮겼으며, 행궁 주변 주민들에 대한 보상도 마쳤다. 2003년에 1차 복원이 끝났으니 복원된 지 20여 년이 지난 행궁에서는 제법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신풍루를 들어서니 차례로 좌익문(左翊門)과 중양문(中陽門)이 나온다. 좌익은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內三門 궁궐, 읍성, 관아 등의 안쪽에 있는 정면 3칸짜리 출입문)인 중양문을 도와 행궁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좌익문 왼편에는 정조가 행궁에 머물 때 신하들을 접견하던 유여택(維與宅)이 있다. 평소에는 수원 유수가 거처하였으나 임금이 행차하면 신하들을 접견하고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듣는 곳이었다. 중양문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봉수당과 장락당(長樂堂), 복내당(福內堂)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화성행궁의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봉수당은 정조가 수원 행차시 머물렀던 곳이다. 정조는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정궁에 봉수당이란 이름을 붙이고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다. 봉수당에는 회갑상을 받은 어머니에게 절을 올리기 위해 정조와 왕비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재현돼 있다. 비록 모형이지만 늙고 지친 홀어머니와 그 앞에 선 정조 내외를 보니 한 나라의 국왕이기 전에 아들 이산으로서의 삶이 애잔해보인다. 혜경궁 홍씨(1735~1816)는 10세에 세자빈이 되었고 28세에 지아비를 잃었다. 정조는 성대한 회갑연을 베풀어서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남편을 앞세운 혜경궁 홍씨는 아들마저도 앞세우고(1800년 정조 승하) 한 많은 세월을 마감했다. 홍씨는 고종 때 헌경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됐다. 봉수당에서 화령전으로 가는 길목에 노래당과 낙남헌이 있다. 노래당(老來堂)은 정조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의 당호다. 출입문에는 젊음이 오래 가라는 의미로 난로문(難老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정조는 아들이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 노후 생활을 할 꿈을 꿨으나 1800년 6월 49세에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노래당에 잇대어 있는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건물이다. 과거시험(별시)과 같은 공식 행사나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는 61세 이상 수원부 백성들을 위한 양로 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일제의 폭압을 견뎌낸 낙남헌 기둥을 감싸 안으면 좋은 기운을 받게 된다는 속설이 전한다. 낙남헌을 지나면 화령전이 나온다. 순조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정조를 위해 1801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고 어진을 봉안했다. 정조의 초상화를 모신 운한각과 이안청, 복도각으로 구성된 국내 유일의 영전(影殿) 건축물이다. 행궁 신풍루 앞마당에는 ‘무예 24기’ 공연이 펼쳐진다. 매주 화요일~일요일, 오전 11시부터 30분간 진행된다. 무예 24기는 조선 전통의 무예와 중국, 일본의 우수한 무예로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돼 있다. 조선의 최정예 부대인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익혔던 24가지의 실전 무예이다. 화성행궁을 지키는 장용영의 수위의식(守衛儀式, 경계병 교대)과 장용영 군사들의 훈련을 보여주는 공연도 이곳에서 진행된다. 수위의식은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30분간(4~10월)에 펼쳐진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훈련 장면을 보여주는 공연은 저녁 시간에 한 차례만 열린다. 어둠이 내리면 행궁 일대는 어둠과 빛의 향연이 펼쳐진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은은한 불빛을 따라 궁궐 뜰을 사부작사부작 걷는 즐거움은 여름밤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팔달산 중턱에서는 서장대가 빛을 발하며 날렵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득 내가 서 있는 곳이 21세기 수원 한복판인지, 18세기 정조가 살아 있는 세상인지 헷갈린다. 아버지 향한 정조의 효심 그윽한 ‘융릉’ … 그 곁에 묻힌 아들의 ‘건릉’ 조선시대 왕족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사도세자(1735~1762)라 할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효심이 지극했던 왕을 꼽으라면 그 아들이 정조라 할 수 있다.사도세자 부부를 합장한 융릉과 정조대왕(1752~1800)과 효의왕후 김씨가 같이 묻힌 건릉(健陵)은 붙어 있다. 합쳐서 융건릉으로 부르는데 융릉은 오른쪽(동쪽), 건릉은 왼쪽(서쪽)에 있다.왕릉 중 아버지와 아들의 능이 같이 있는 것은 융건릉과 홍유릉(고종과 순종) 두 곳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한 아버지 근처에 묻히길 원했던 것은 그만큼 효심이 극진했기 때문이다.사도세자의 묘는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다시 말해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었다.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돼 아버지 영조의 명에 따라 무더운 여름날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죽었다. 비운의 아버지를 둔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군으로서 자질을 키워나갔다.할아버지 생전에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했던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며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혼백을 달래기 위해 당대 최고의 명당이라던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왕릉 사방 4㎞에는 큰 건물이 없어야 하는데 당시 이곳에는 수원부 관아와 마을이 있었다. 정조는 관아와 마을을 지금의 수원화성으로 옮겼다. 사도세자 내외의 묘는 정조 때 현륭원이 됐다가 고종 때 이르러 융릉으로 승격됐다. 또 고종 때에 비로소 사도세자는 장조로 추존됐다. 정조는 아버지의 능을 모란과 연꽃 무늬 병풍석과 기와 모양의 와첨석 등을 사용해 정성으로 아름답게 만들었어요. 물론 정조 당대가 문화가 빛나는 시절이기도 했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무덤을 그 어떤 왕의 무덤보다 잘 만들고 싶었던 정조의 효심이 담겨졌다.융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정조는 아버지 능을 꾸미면서 소나무 45만그루를 심었다. 하지만 당시에 소나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사그리 베어 가 지금 자라는 나무들은 이후에 심긴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능을 이곳으로 옮기고 가까운 곳에 원찰(願刹)인 용주사(龍珠寺)를 중창해 하루 6번씩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 절은 신라 말기인 854년에 廉巨和尙(염거화상)이 지었고, 원래 이름은 갈양사(葛陽寺)였다. 고려 때인 10세기에 확장됐다. 국보 제120호인 용주사 동종과 보물 1754호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 보물 1942호인 용주사 대웅보전이 있다. 건릉은 원래 융릉의 동쪽에 조성됐다. 그러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건릉이 불길하다는 설이 제기됐고 순조 21년(1821년)에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처럼 융릉의 서쪽에 이장돼 합장릉으로 조성됐다.
2021-07-15 01:32:21
팔방이 트여 옹색함이 없다는 팔달산(八達山)을 중심에 두고 있는 수원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이자 신도시이다. 해발 143m의 팔달산을 둘러싸고 있는 게 수원의 얼굴이자 상징인 화성(華城)이다. 수원 토박이인 소설가 김남일은 ‘수원을 걷는 일은 화성을 걷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지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빼면 수원에 대한 완벽한 묘사라는데 동의한다. 수원 여행은 화성에서 시작해 화성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성은 성곽 문화의 백미로 조선 18대 임금 정조대왕이 축조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심이 곳곳에서 묻어나 감회가 남다르다. 수원 화성은 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의미가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수원은 과거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었다가 삼국시대에 차례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토로 편입됐다. 고구려 때 수원은 매홀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수성군으로 바뀌었다. 매홀에서 매는 물, 홀은 고을을 뜻하니 매홀은 ‘물고을’이란 뜻이다. 수원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원종 12년(1271년)에 수원도호부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수주, 수성, 수성도호부 등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 수원시로 굳어졌다.고려시대에 지금의 경기도는 양광도로 불렸다. 그만큼 양주와 광주가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수원이 경기도의 중심이다. 수원은 본래 전라도로 가는 길목(일명 해남로)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 감염이 과거의 경주, 상주, 안동을 전전하다가 서쪽인 대구로 옮기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아우르는 통로가 됐다. 지리적으로나 말투나 정서적으로 수원은 안성문화권에 속하고 충청도와 가깝다. 수원은 서해를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활쏘기에 노력하는 무향(武鄕)이었다. 서울과 평양 다음으로 무과 급제자가 많이 나왔다. 화성 팔달산 서쪽 정상에 서장대를 세우고 동쪽 구릉에 동장대를 지어 사대(射臺 활쏘기 연습장)를 만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팔달산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한남정맥의 주산이자 수원의 진산(鎭山)인 광교산(582m), 백운산(567m), 서쪽에는 칠보산(236m), 여기산(105m)이 포진해 있다. 남쪽은 평야지대를 이룬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수원시를 관통해 오산시와 안산시로 흘러 서해로 빠져 나간다. 정조의 이상국가를 재현한 계획도시 수원은 정조 대왕의 도시다. 200여 년 전 정조가 쌓은 화성이 여전히 도시를 빙 둘러싸고 있고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푼 화성행궁 역시 그때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팔달문과 장안문을 통해 드나들고 있으며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팔달문시장(남문시장), 영동시장, 지동시장 등 이른바 ‘왕의 시장’도 그대로다. 수원만큼 과거의 모습과 정서가 온전하게 재생되고 있는 도시도 드물 것이다. 수원 화성이 복원됐을 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까지 복원해 놓은 셈이다. 마치 천년 고도 경주를 여행하는 듯한 아득한 시간의 아련함이 수원 여행에서도 느껴진다. 특례시 지정을 앞두고 있는 인구 백만이 넘는 거대도시 수원에서 시간여행을 한다는 게 언뜻 어울리지 않지만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다. 1794년 축성 시작 … 1975년 복원 착수, 1997년 완료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18년째인 1794년 1월 화성 축성을 시작했다. 도성을 방어하는 한편 자신이 상왕이 돼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머물기 위한 의도였다. 2년 9개월의 공사를 거쳐 1796년(정조 20년) 9월에 마무리됐다.정조는 화성의 설계를 최고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에게 일임하고 조심태, 정민시, 서유린, 홍원섭 등에게 실무를 담당케 했다. 반계 유형원도 설계 개념을 정립하는 데 관여했다. 정약용은 전통적인 건축기법에 서양의 기법을 활용해 단기간에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성곽 구조를 지닌 아름다운 성을 완성했다. 공사의 총책임자는 채제공이 맡았다. 완공된 화성의 규모는 둘레 약 5.7km, 성곽 높이 4~6m로 4개의 출입문과 41개의 시설물을 갖췄다. 지난 시대에 축적된 기술뿐만 아니라 거중기, 녹로, 유형거, 동차 등 최초로 선보이는 건축기자재 등 조선의 모든 건축 및 축성 기술이 총동원됐다. 이 덕분에 화성은 성곽 건축의 백미로 꼽히며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심하게 훼손됐다. 수원 토박이들조차도 오랫동안 풍문으로 성과 궁궐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 진짜로 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다. 마침내 1975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인 1997년 수원 화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성이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조가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이다. 기록을 중시했던 정조는 화성 축성 과정과 비용, 기간, 인부 수 심지어 인부들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성공적인 복원은 1997년 12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이어졌다. 위원회는 등재 결정문에 “성의 가치는 당시 공사 내용을 담은 '화성성역의궤'에 담겨 있다. 돌 무게가 얼마고, 어떤 목재를 사용했고, 심지어 공사비로 얼마를 지출했는지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설계와 시공 부분은 그림과 해설을 따로 붙여 놓았다. 화성성역의궤만 있으면 화성은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다. 화성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과학적이라는 이유다.”라고 적었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당시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해 고도로 발달한 과학적 특징을 골고루 갖춘 근대 초기 군사 건축물의 모범”이라며 “성곽은 이제 겨우 200년에 지나지 않지만 제각각 지닌 예술적 가치를 감안할 때 마땅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려야 한다”고 극찬했다. 화성의 4개 관문 둘러보기 화성을 둘러보는 방법으로는 직접 다리품을 팔아 연필을 꾹꾹 눌러 글씨를 쓰듯 구석구석을 두 발로 꾹꾹 밟아가며 살펴거나, 화성어차를 타고 성곽의 중요 지점을 둘러보는 두 가지다. 2인승 자전거인 ‘벨로택시’와 해설사와 함께 투어하는 5인승택시 ‘행카’가 지난 5월에 운영을 재개했는데 호불호가 갈린다. 어차를 타고 화성의 윤곽을 그린 후에 성곽을 따라 걷기를 추천한다. 화성어차는 순종 황제가 타던 자동차와 조선시대 국왕이 탔던 가마를 모티브로 제작됐다. 화성어차가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데 약 35~40분이 소요된다. 화성행궁에서 출발해 팔달문-전통시장-수원천-통닭거리-수원화성박물관–연무대-화홍문(방화수류정)-장안문-화서문-생태교통마을을 거쳐 다시 화성행궁으로 돌아온다. 수원 화성에는 모두 4개의 관문이 있다. 북문 장안문(長安門), 남문 팔달문(八達門), 서문 화서문(華西門), 동문 창룡문(蒼龍門)이다. 성문들은 모두 아치형의 홍예문이며 2층에는 적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는 누각이 설치돼 있다. 화성 순례는 팔달문에서 출발해 서장대를 거쳐 화서문, 장안문, 동장대(연무대), 창룡문으로 돌아오는 게 일반적인 코스다. 성곽길은 밖에서 보면 6~9m 높이지만 안에서 밖을 보면 어른 키만한 담장 정도다. 장안문과 팔달문이 가장 화려하고 장엄하다. 통상 성의 남문이 주 관문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북문인 장안문이 주요 관문이다. 그 이유는 정조가 서울에서 화성으로 행차할 때 가장 먼저 들어올 수 있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장안이란 서울로 통한다, 백성들이 행복하게 산다는 두 의미를 지닌다. 보물 제 402호인 팔달문은 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뜻을 지니며 수원 사람들은 ‘팔딱문’이라고 불렀다. 팔달문은 정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 지붕으로 전체적으로 수평을 이루다가 양옆에서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우아하게 들린 한옥의 전형적인 곡선미를 드러낸다. 장안문, 창룡문, 화서문도 이와 다르지 않은 아름다움을 갖췄다. 팔달문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도로 공사로 인해 성문만 남아 있다. 오직 팔달문 구간만 토지보상 등의 문제로 성곽이 복원되지 않았다. 팔달문 주변에는 수원천을 따라 팔달문시장을 비롯해 지동시장, 영동시장 등 전통시장이 형성돼 있다. 보물 제 403호인 화서문은 서북공심돈과 함께 서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둘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수원 화성 건축의 압권으로 꼽힌다. 이 두 건축물만이 정조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지붕 일부만 파손돼 복원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동쪽의 창룡문 아래로는 수지 풍덕천과 성남으로 이어지는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지난다. 인근에는 동장대(연무대)와 국궁 체험장 등이 있다. 4개 관문 외에도 비밀통로인 암문 5개, 수문 2개, 무기를 보관하거나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적대 4개,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공심돈 4개 등 모두 41개부대시설이 배치돼 있다. 공심돈,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특이한 구조물화성의 시설물들 가운데 가장 특이한 건축물은 공심돈(空心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공심돈은 비상시에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망루의 일종인데 이름 그대로 건물 안쪽이 텅 비어 있다. 밖에서 보면 단층 같지만 내부는 3층이다. 1층은 뜨거운 물을 부어 적의 접근을 막고 2층은 가까운 거리를 쏠 수 있는 화살과 총을, 3층은 먼거리를 쏘는 총을 배치하고 구멍을 뚫어놨다. 적의 눈에 띄지 않고 망루로 올라가기 위해 안쪽을 비우고 사다리나 계단을 설치했으니 그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로서도 전례가 없었고 지금까지도 공심대는 화성이 유일하다. 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 남공심돈 등 3개의 공심돈이 있으며 그 중 서북공심돈이 가장 아름답다. 성이 완공된 이듬해인 1797년 화성을 찾은 정조는 신하들에게 서북공심돈을 가리키며 “보아라. 우리 동국 역사상 최초의 공심돈이다. 마음껏 구경하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서북공동심은 2011년 보물 1710호로 지정되었다. 200년이 지난 지금 서북공심돈 앞쪽에는 화서공원이 조성돼 있다. 평화로운 저녁 나절을 보내고 있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뒤편에 있는 서북공심돈과 화서문에 무심해 보인다. 화서공원은 서울의 하늘공원처럼 가을엔 억새 명소다. 작가 김남일은 “한참 있다 가도 화서문은 그 자리에 서 있다.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서 서문이다.”라고 썼다. 수원 사람들에게는 이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그저 늘 그 자리에 있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일 뿐이다. 단아하면서도 단단한 공심돈을 마주 하고 서니 나 역시 정조가 그랬듯이 힘껏 외치고 싶다. “맘껏 보아라. 동국 최초의 공심돈이다.”서장대와 동장대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豐樓)에서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던 화령전(華寧殿) 방향으로 가다보면 ‘생태교통마을’ 조형물이 보이고 ‘왕의 도로’ 안내판이 서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행궁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도심 길임을 실감하게 되는데 꼬불꼬불 이어지는 골목길에는 외국 유명 관광지를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작은 레스토랑, 양품점,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제각각 개성을 풍기는 매장들을 기웃거리다보면 어느새 화서문이다. 화성은 대체로 서쪽은 경사가 심하고 동쪽은 완만하다. 화서문 누각으로 올라 성곽길을 따라 600m 정도 오르면 화성에서 가장 높은 서장대(西將臺)에 당도하게 된다. 화서문과 서장대 중간쯤에 서북각루가 서 있다. 늘씬한 자태를 자랑하는 서북각루에 오르면 수원시의 서쪽 지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누각 사이로 탁트인 대로가 쭉 뻗어나가는 모습이 산자락을 휘돌아 나오는 바람만큼이나 시원하다. 서북각루에서 땀방울도 식힐 겸 풍경에 빠져 한참을 머물렀다. 가을에 서북각루에서 화서공원을 내려다보면 단풍이, 화서공원에서 서북각루를 올려다보면 억세가 물결 친다.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니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세로 날개짓을 하고 있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는 성곽 일대를 한 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군사시설로 보기에는 너무도 아름답다. 정조는 한낱 군 시설을 어쩌자고 이토록 아름답게 지었단 말인가. 세계의 그 어떤 나라에도 이렇듯 아름다운 지휘소는 없었다. 그것도 이 산꼭대기에 말이다. 서장대 주변의 소나무들도 장엄하다. 서장대 앞에는 첨성대를 반으로 잘라 놓은 듯한 노대가 서 있다. 노대는 다연발 화살인 쇠뇌를 쏘던 방어시설이다. 그러나 서장대와 노대는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성스러운 장엄함이 있다. 서장대에는 ‘화성장대’라는 정조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장대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아래쪽 행궁에서도 한 눈에 보인다. 서장대에서 더 서남쪽으로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 나중에 융릉으로 승격)을 바라보았던 서남각루(화양루)가 있다. 동장대(東將臺)는 병사들이 무예를 연마한 곳이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도 부른다. 지형은 높지 않으나 사방이 트여 있어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피기 좋은 장소이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연무대와 일대 풍경이 아름답다. 북수문(화홍문)과 방화수류정 & 남수문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곳에 북수문에 해당하는 화홍문(華虹門)이 세워져 있다. 반대로 흘러나가는 쪽에 남수문이 세워져 있다. 화홍문은 멋진 누각과 7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여름철 7개의 무지개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지는 물보라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으로 꼽는다. 화홍문 뒤편에 높은 언덕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 불리는 동북각루가 세워져 있다. 단 하나의 쇠붙이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만 지은 건물이다. 동북쪽 군사 지휘소로 만들어진 누각이긴 하나 정자에서 바라보는 풍광과 정자와 어우러진 주변 모습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방화수류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는 의미다.화홍문 일대가 군사들의 휴식처라면 방화수류정은 정조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화양각(서남각루)에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졌다면,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은 풍류와 함께 왕의 위엄을 내세웠던 포인트다. 방화수류정에는 왕위와 신선을 상징하는 구름 조각 모양의 ‘낙양’ 장식이 기둥 여기저기에 덧대어 있다. ‘’ 방화수류정 아래 인공적으로 조성한 용연(龍淵)이라는 불리는 연못이 있다. 방화수류정에는 4개의 달이 뜬다고 한다. 하늘에 뜬 달, 호수에 비친 달, 술잔에 담긴 달, 그리고 임의 눈동자에 어린 달이다. 방화수류정의 평면지붕 형태는 18세기에는 유례없는 뛰어난 건축기술로 밝혀져 역사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보물 제 1709호로 지정되었다. 이 외에도 수원 화성은 포를 발사하는 포루 5곳과 치성, 통신시설인 봉돈 등 군사시설을 갖추었다. 화성은 두 발로 걸어야 한다. 걷는 자와 걷지 않는 자가 느끼는 화성은 분명 다른 화성일 것이다. 화성어차 운행 시간: 오전 9시 4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점심시간 휴식, 정오~오후 12시반)요금: 성인 4000원, 군인 및 청소년 2500원, 어린이 1500원문의: 031-228-4683
2021-07-14 04:43:34
1980년 양주시에서 분리된 남양주시는 북쪽으로는 포천시와 의정부시, 동쪽으로는 가평군과 양평군, 서쪽으로는 서울시와 구리시, 남쪽으로는 광주시와 하남시와 맞닿아 있다. 남양주시 한가운데에는 해발 812m의 천마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사냥을 나온 이성계가 ‘이 산은 매우 높아 손이 석자만 더 길었다면 하늘을 만질 수도 있겠다’라고 하여 천마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또 조안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조안면 양수리 북서쪽에 위치한 운길산은 산세가 부드럽고 주변에 팔당호, 서울종합영화촬영소, 금남유원지 등이 있어 주말 가족 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밖에 축령산, 백봉산, 예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수려한 산과 계곡 및 이름난 수목원과 휴양림이 많다. 특히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풍경은 남양주시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유적지’ … 고향마을에 편히 잠들다남양주시는 다산 정약용이 얼이 서린 도시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는 ‘정약용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마재마을은 정약용의 생가가 남아 있고 다산이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해 75세에 생을 마치기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생가 뒤편 작은 언덕 위엔 다산과 그의 부인 홍씨가 합장묘에 평온하게 안장되어 있다. 여유당(與猶堂) 뒤편 동산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무덤 앞쪽에 조촐한 망부석이 세워져 있다. 당호인 여유당의 여(與)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하다’는, 유(猶)란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는’ 뜻이다. 당호인 여유는 1800년(정조 24년) 관직에서 물러나 가족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지은 것으로 겨울에 냇물을 건너 듯 조심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유배지였던 강진 귤동의 뒷산 이름이다. 조안(鳥安)은 새소리가 듣기 좋고 물이 맑아 편안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정약용 유적지에는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이 복원되어 있다. 또 다산과 부인의 묘역을 비롯해 기념관과 실학박물관 등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남양주 8경 중 1경에 해당된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 6월16일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과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남 윤씨는 송강 정철과 가사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고산 윤선도의 직계 후손이다. 다산은 이미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울 정도로 총명하였고 22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27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정조의 총애와 신뢰를 받으며 젊은 나이에 여러 관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며 정조를 도와 수원화성을 완공하는데 기여했다. 다산의 정치인생은 천주교와의 인연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청년시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벽을 비롯해 다산이 가장 사랑했던 둘째형 약전과 세째형 약종, 매형 이승훈이 모두 천주교 신자로 발각돼 처형되었다. 매형 이승훈은 한국인 최초로 중국에 가서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약용과 약전 형제도 한때 천주교 교리서를 읽으며 천주교 신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다가 후에 거리를 두었으나 순조 원년(1801년)에 일어났던 신유박해로 약전과 약용 형제는 신지도(완도군)와 장기현(포항사)으로 유배됐다가 다시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나주 율정점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진 게 약전과 약용 두 형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약전은 흑산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서적인 불후의 명작 ‘자산어보’를 남겼다. 다산은 57세 되던 해 강진에서의 17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리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75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학문과 집필에 전념하며 총 499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다. 그가 남긴 저서는 시문집에서부터 국가 개혁사상이 집대성된 <경세유표>, 토지개혁을 주장한 <여전론>, 치민에 대한 도리를 논한 <목민심서>,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한 책인 <흠흠심서> 등 분야 또한 매우 다양했다. 이 중 44권 15책만이 남아 있다. 그가 모든 저서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실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과 부국강병,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와 자세였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자 개혁가였다.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의 대홍수로 유실됐다가 1986년 복원됐다. 다산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실학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앞마당에는 중국 북경에서 복제해 온 것으로 실제로 발포가 가능한 홍이포와 기중기 등이 전시돼 있다.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명저들을 비롯해 우리나라 실학의 태동에서 발전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매년 다산문화제가 개최된다. 유적지 옆에는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조성된 ‘다산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운길산 수종사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 자랑’ 정약용 유적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운길산(雲吉山) 기슭에는 남양주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수종사(水鍾寺)가 있다. 비탈진 산길을 위태롭게 올라야 하지만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사찰이다. 수령이 500년이 넘는 장한 은행나무와 그 뒤편으로 펼쳐지는 두물머리 풍경이 압권이다. 조선 초기 문장가인 서거정은 수종사를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이라고 극찬했다. 수종사의 창건 연대는 전하지 않으나 경내에서 1439년에 세워진 태종의 다섯째 딸 정의옹주의 부도가 발견된 점을 보아 그 이전에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종사는 세조 4년에 크게 중창했으며 이때 18나한을 봉안하고 5층 석탑(1459)을 세웠다. 1458년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서 요양을 하고 돌아오던 중 지금의 수종사 근처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어디선가 은은하게 종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자 세조가 진원지를 찾으니 운길산 바위굴 속에 18나한상이 모셔져 있었다. 또 굴 속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을 알게 된 세조는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 부르게 하였다. 다산 정약용, 초의 선사, 추사 김정희도 이곳을 찾아 차를 마셨다고 한다. 특히 다산은 수종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유사종사기>를 짓기도 하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수종사에 지어진 다실인 삼정헌(三鼎軒)에서는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차를 대접한다. 시(詩), 선(禪), 차(茶)가 하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삼정헌에서의 차 한잔을 음미해 보자. 고요 속에서 한 잔의 차를 마시면 무겁게 싸들고 온 마음의 짐이 모두 한강물에 떠내려가는 듯하다. 수종사는 여러 차례의 중창하였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돼 1974년 다시 지었다.540년간 울울창창한 광릉숲과 천하명당 광릉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운악산 자락에는 조선 7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운악산(雲岳山)은 동쪽에 금강산, 서쪽에 구월산, 남쪽에 지리산, 북쪽에 묘향산을 두고 한가운데 위치한 산으로 예로부터 조선의 5대 명산으로 알려져 왔다. 이 산의 위치와 숲에 반해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묘자리로 찜해 두었다. 광릉 국립수목원은 포천시 소홀읍 직동리에 위치해 있지만 광릉과 광릉숲(유원지)는 남양주에 있다. 세종의 18남 4녀 중 둘째 아들인 세조는 생전에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고 안정적인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주홍글씨가 따라다녔다. 수많은 이들을 피비린내 나는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사람이라면 괴로워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 때문인지 그의 개인사는 흉사로 뒤덮였으며 평생 불치의 피부병으로 고생해야 했다. 맏아들 의경세자는 왕위에도 올라보지 못하고 19세에 요절하고(후에 성종에 의해 덕종 임금으로 추존된다), 둘째 아들인 예종도 즉위 1년 2개월 만에 세상을 등진다. 세조의 피부병에 관해 야사는 이렇게 전한다.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가 꿈에 나타나 세조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었다. 그 후 세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에 걸리게 되었다. 분노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관을 파내 유골을 바닷가에 버렸다고 한다. 야사의 진위 여부를 떠나 세조는 죽을 때까지 죄책감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업장(業障)을 녹이기 위해서일까, 피부병 치료를 위해서였을까. 어쨌거나 세조는 전국의 유명 사찰을 돌며 수많은 야사를 남겼으며 여러 측면에서 불교를 숭배하고 불교 융성의 치적을 보여준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는 세조와 문수동자의 이야기가 전하며, 충북 보은 법주사에는 세조와 정이품송의 이야기, 보은 복천암과 신미대사(信眉大師)를 통한 피부병 완치 일화 등이 전한다. 이밖에 수종사, 여주 신륵사, 화순 쌍봉사(전남 화순), 해인사, 양주 회암사, 강원도 고성 건봉사, 전남 영암 도갑사, 경기도 양평 용문사 등에 노비와 토지 등을 기증하고, 중수를 도왔으며, 승려들의 노역을 면제해주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세조는 마음이 편해졌을까.광릉(光陵)은 무엇보다는 울창한 숲으로 유명하다. 조선 왕조 540년 동안 어느 누구도 숲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덕분에 광릉숲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인 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의 효시가 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생물보전권으로 지정되어 있다. 광릉숲에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새 크낙새가 살고 있다. 광릉숲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최고의 명당에 조성된 조선 왕릉 중에서도 광릉은 최고의 명당으로 꼽힌다. 광릉은 원래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 집안의 선산이었으나 왕릉으로 택지 된 후 정씨 묘는 모두 이장하였다.광릉은 조선 왕릉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선 왕릉 변천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능이다. 즉 인접한 두 개의 언덕에 각각 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하고 하나의 정자각을 세운 왕릉 형식이다. 능제가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경계하여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풍석을 쓰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광릉의 진입로에는 조선 왕릉에 ‘하마비’가 남아 있고, 울울창창한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숲을 가득 메우고 있다. 광릉의 원찰이 된 천년고찰 운악산 봉선사운악산 봉선사(奉先寺)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당시의 이름은 운악사로 작은 절이었으나 예종 1469년 정희왕후가 광릉의 원찰로 지정한 후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로 이름을 바꿨다. 봉선사 입구에는 높이 20m, 둘레 5m가 넘는 수령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정희왕후가 손수 심었다고 전한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됐다. 봉선사는 명종 6년(1551년)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정책으로 교종의 우두머리 사찰이 되어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 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됐다. 명종 17년에는 교종 본산이 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1911년 일제강점기에 반포된 사찰령으로 31본산의 하나가 됐고 교종 대본산으로 지정됐다. 1950년 6.25 전쟁으로 14동 150칸의 전각이 모두 불타 없어졌고, 큰법당 등 대부분의 전각들은 1960년 이후 중창됐다. 봉선사 대웅전에 걸린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은 우리나라 사찰 중 최초의 한글 현판이다. 삼성각, 지장전, 조사당, 관음전, 운하당, 방적당, 범종루 등이 있으며, 삼성각은 한국 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당우이다. 봉선사 대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몇 안 되는 조선 전기 동종으로 보물 397호로 지정돼 있다. 예종 원년에 세조를 추모하기 위해 봉선사 중창 당시 주조된 봉선사 대종은 음통이 없고 종의 입구가 넓어지고 몸통에 두 가닥의 띠를 넣은 점, 조각 수법이 통일 신라 시대 이후의 범종 양식을 따르지 않는 점 등 조선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봉선사 부도전에는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춘원은 해방 이후 그와 친척인 운허 스님의 배려로 봉선사에 머무르면서 집필 활동도 하고 절에서 운영하는 광동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무정>, <유정> 등 한국 문학사에 기록될 만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지만 친일 행각으로 인해 문학작품 자체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봉선사 오채현 석조각 초대전 ‘해피 붓다, 해피 타이거전’봉선사 경내에서는 석가탄신일을 기념해 오채현 석조각 초대전 ‘해피 붓다, 해피 타이거전’이 4월 27일~8월 31일에 열린다. 이번 전시회에는 높이 3.5m의 거대한 사방불과 현묘탑을 비롯해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이 봉선사 연못과 정원 일원에서 선보인다. 우리에게 친근한 호랑이와 산신령 등의 조각들도 다수 전시되고 있다. 신록의 계절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가 가득한 봉선사 도량이야말로 코로나 19로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니 한번쯤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단종비가 묻힌 사릉과 구한말 두 임금 묻힌 홍유릉광릉에서 20km정도 떨어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는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1440~1521)가 묻힌 사릉(思陵)이 있다. 남편을 죽인 자와 죽어서도 지척에 누워 있는 정순왕후의 사후가 편할 지 걱정이다. 남편 단종은 강원도 영월 장릉(張陵)에 묻혀 있다. 정순왕후는 1457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함께 군부인으로 강등되었고 왕실 여인들이 출가해 살았던 ‘정업원’(淨業院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82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세상을 뜬 정순왕후를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시가인 양주군 묘역에 모셨다. 1698년(숙종 24년)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되자 함께 복위되자 사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사릉은 선정릉과 함께 2013년 CNN이 선정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40선’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사릉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홍유릉(洪裕陵)이 있다. 홍릉은 조선 26대 왕인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이고, 유릉은 조선 마지막 왕인 27대왕 순종과 그의 정비 순명효황후와 계비 순정효황후의 능이다. 또 영친왕과 의친왕,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묻혀 있다. 조선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부르게 되면서 최초의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묘역 역시 명나라 황제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성했다. 홍유릉은 규모도 크고 화려하지만 이전 왕릉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능침의 삼계(상계, 중계, 하계의 3계단)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拜展)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정사각형) 대신 일자형(직사각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향로를 따라 양 옆으로 문인석, 무인석과 말, 양, 사자, 해태, 코끼리, 기린, 낙타 등 그동안 묘역 조성에 등장하지 않았던 동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신흥무관학교 세운 이석영 광장과 REMEMBER 1910홍유릉 앞에는 남양주 역사문화 복합 공간인 ‘이석영 광장과 REMEMBER 1901’이 조성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 서거 111주년을 기념해 지난 3월 26일 개관한 은 남양주 화도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李石榮, 1855 ~ 1934)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유공과 넋을 기르고 민족의 아픔을 기억하고 새로운 시대를 다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한일합방이 강행된 1910년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세워졌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등 6형제는 오늘날의 가치로 약 2조원에 달하는 토지와 재산을 처분해 식솔 60여 명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석영은 북경에서 비참한 생활 끝에 생을 마감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이회영은 상하이에서 밀정에게 걸려 고문 끝에 옥사했다. 5형제가 옥사 또는 아사항렸다. 벽돌 하나하나에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적힌 계단을 내려오면 일제강점기의 고통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뤼순(여순)감옥과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받는 모습, 일제강점기 시대의 법정 등이 재현돼 있다. 독립운동 관련 영상이 상영되는 미디어홀과 컨퍼런스룸이 있다. 다만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설계한다는 공간에 입주한 대형 베이커리와 카페는 일제강점기의 고통스런 역사를 되새기려는 기념의 장소에 어울리는지는 의문이었다.
2021-04-30 20:32:15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힘들어지면서 이국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섬 여행이 각광받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2880여 개의 무인도와 470여 개의 유인도를 합쳐 3350여 개가 넘는 섬이 있다. 세계에서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에 이어 네 번째로 섬이 많은 나라이다. 인천시 앞바다에 위치한 옹진군은 백령도를 비롯해 덕적도, 연평도, 승봉도, 소이작도, 자월도 등 전체가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 앞바다의 섬 가운데 육지와 가장 가까운 섬은 국제공항이 있는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동의 영종도이다. 여기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옹진군 북도면(北島面)의 신시모도가 오늘 소개할 여행지다. 영종도는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2009년과 2000년도에 완공되어 배를 타지 않아도 되고, 영종도에서 배로 10분이면 닿는 신시모도는 2005년 연도교가 놓이면서 이웃 동네 마실 다녀오듯 당일치기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섬들의 공통점은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것과 섬인 듯 섬이 아닌 듯 묘한 매력이 풍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여섯번째로 큰 섬, 영종도 … 4개섬 간척, 두경승 사당인천광역시 중구에 속하는 영종도(永宗島)는 한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이다.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오늘날 대규모 섬이 되었다. 섬 면적의 절반이 인천국제공항 부지다. 간척사업을 벌이기 전에는 영종도, 신불도(薪佛島), 삼목도(三木島), 용유도(龍游島) 등 네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얕은 바다를 간척으로 메워 하나의 섬이 됐다. 인천경제자유구역 사업으로 영종국제도시와 영종신도시가 조성됐다. 영종도는 ‘고려사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서에는 제비가 많다고 해서 ‘자연도’(紫燕島)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 교류하는 거점이었고 사신들을 접대했던 ‘경원정’(慶源亭)이라는 객관이 있었다. 경원정은 1875년(고종 12년) 일본의 군함 운양호의 포격으로 파괴됐다. 영종도는 고려 무신정권 이의민(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에 이어 정권을 잡음)과 대적하던 두경승(杜景升)의 유배지였다. 두경승은 김제 만경현 사람으로 만경두씨의 시조다. 그의 사당과 무덤이 영종도에 남아 있다. 두경승은 학식은 보잘 것 없었으나 양심적이고 용기가 대단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해안 요새인 영종진과 왕의 행궁인 영종 행궁이 있었다. 섬 중앙에 솟은 백운산에는 신라 문무왕이 세웠다는 용궁사가 있으며,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선녀 바위로 이어지는 둘레길과 영종도 하늘정원이 유명하다. 인천국제공항 전망대에서는 세계 각국의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모습을 지척에서 지켜볼 수 있어 코로나19로 막혀 버린 해외 여행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북도면 3개 섬 일컫는 ‘신시모도’ … 강화도와 지척, 신도가 가장 넓어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북도면 장봉도 행 여객선을 타면 신도 선착장까지 10분이면 닿는다. 여름철에는 차량을 싣는데 만도 보통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지만 아직은 한산한 편이다. 승객들은 차 안에 머문 채 하선을 기다리지만 배 여행의 묘미는 역시 갑판에서 맡는 비릿한 바다내음과 갈매기들의 날갯짓을 감상하는 것일 테다. 신시모도는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등 각 섬의 머리글자를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일명 ‘삼형제섬’으로 2005년 건립된 연도교 덕에 도보나, 자전거, 승용차 등을 이용해 하나의 섬처럼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신시도모와 장봉도를 더한 북도면의 전체 면적은 17.64 ㎢이며 2016년 기준으로 약 2300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북도면에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까지 강화도에 속했다. 이후 조선시대엔 경기도 옹진군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이후 인천광역시 옹진군으로 편입됐다. 세 개의 섬 중에서 신도의 면적이 가장 크다. 북도면사무소, 파출소, 보건소, 우체국, 보건소, 농협 등 주요시설은 모두 시도에 있다. 선착장에서 빠져나오면 이내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편으로 가면 신도 1리, 2리로 빠지게 되고 왼편으로 가면 연도교를 건너 시도리로 가게 된다. 어느 쪽으로 먼저 향하던 신도 선착장으로 회귀하게 되니 마음이 끌리는 대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행정과 관광의 중심은 시도, 수기해변과 시도염전 신시모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시도는 고려 말 장수 최영과 이성계가 강화도 마니산에서 이 섬을 과녁 삼아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해서 살섬 즉, 시도로 불리기 시작했다. 시도의 대표적인 명소로는 수기해변과 시도염전이다. 고운 백사장이 넓게 펼쳐지는 수기해변은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해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이 몰려든다. 해변 뒤쪽으로는 소나무숲과 개질언덕이 있다. 하루에 두 번 썰물이 들 때에는 회색빛 갯벌이 드넓게 펼쳐져 갯벌 체험장으로도 인기가 높으며, 시도 어민들의 전통어업 방식인 ‘독살’이 그대로 드러나서 독특한 풍광을 선사한다. 갯벌에서는 망둥어, 조개 등이 많이 잡힌다. 수기해변은 오래전 방영된 TV드라마 ‘풀하우스’ ‘슬픈연가’ 등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이름값을 높였다. 해변과 개질언덕 입구에 촬영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지만 촬영장 세트는 이미 오래전에 철거되었다. 해안가 끝에 놓인 계단을 오르면 수기 전망대와 수기해안 둘레길로 이어진다. 수기 전망대에 오르면 멀리 강화도 마니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수기해변에는 20여 동의 방갈로가 해변을 따라 조성돼 있고 식수대와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차박지나 캠핑장으로도 인기가 높다. 수기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도염전이 있다. 시도 천일염은 풍부한 일조량과 해풍 속에서 생산돼 염도가 낮고 물에 잘 녹으며, 첫 맛은 짜고 뒷맛은 달아 인기가 높다. 바다와 논 사이로 펼쳐지는 염전과 천일염이 가득 쌓여 있는 소금창고는 도시인들에게는 색다른 볼거리이다. 1883년 제물포 개항과 함께 일제 강점기 항만이 건설되면서부터 인천에 천일염전이 조성됐다. 당시 소금 한 가마니 가격이 쌀 한 가마니와 같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 많던 인천의 염전은 거의 사라지고 석모도 삼량염전, 백령도 화동염전, 시도염전 등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모도, 배미꾸미 조각공원과 박주기 해변 모도는 어부가 그물을 쳤는데 고기는 한 마리도 안 잡히고 띠(벼과의 풀, 茅)만 낚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띠섬’(띠염)이라고도 하며 삼형제 섬 중에서 가장 작다. 배미꾸미 조각공원과 박주기 해변이 모도의 필수 코스다. 시도에서 처음으로 마을이 있던 노루메기 해변을 지나 시모도교를 건너 해당화 꽃길을 달리면 박주기 해변과 배미꾸미 해변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5분 정도 달리면 섬 끝자락에 ‘모도와 이일호’라는 커다란 비석과 함께 조각공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변의 모양이 배 밑구멍처럼 생겼다고 해서 배미꾸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각가 이일호 선생이 모도에 여행 왔다가 황량한 섬의 풍경에 반해 개인 작업실 겸 건물을 짓고 앞마당과 해안가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배미꾸미 조각공원’이 됐다. 어림잡아도 70~80점이 넘는 조각 작품들이 늘어서 있는 해변가는 낯설면서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배미꾸미 조각공원으로 인해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섬 모도는 아주 특별한 섬이 됐다. 인간의 성과 욕망 등을 표현한 초현실적인 작품들은 하나같이 독창적이다. 독창적이라는 수식어도 부족할 만큼 기괴하거나 보기에 민망한 작품들도 여럿이다. 작품명이 적혀 있지 않으니 느끼는 대로 감상하면 된다.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면 언덕 위 카페에서 작가의 작품해설집을 빌려볼 수 있다. 작품들은 물때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 만조 날 일몰 시간에 바다를 배경으로 했을 때 가장 돋보인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과 ‘버들선생’이다. 손 모양을 형상화 한 작품 ‘천국으로 가는 계단’ 끝에는 애초에 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계단이 없으니 결국 인간은 천국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삶의 문제를 던지는 듯하다. 바닷가로 성큼 나 앉은 큰 너럭 바위 위에는 철제로 만든 가지들을 길게 늘어뜨린 ‘버들선생’이 서 있다. 버들선생은 해신제를 지내는 신녀의 모습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머리를 풀어헤친 무녀를 닮은 듯도 하다. 만조가 들어 바닷물이 높게 차 오르면 물에 둥둥 떠 있는 듯, 물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듯 신비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석양 속에 붉게 물드는 버들선생을 담기 위해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는다. 코로나19로 사망한 김기덕 감독의 2016년도 개봉작 ‘시간’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외국인이 일부러 이곳을 찾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밀물 때에는 또 다른 조각공원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이 빚은 조각들은 사람이 빚은 조각에 비하면 모양도 현란하지 않고 색깔도 화려하지 않지만 은근한 멋은 이쪽이 한 수 위인 듯하다. 바위에는 인간의 손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시간’이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해안가 끝 계단을 오르면 울창한 소나무 숲과 아찔한 절벽과 해안의 조화가 절묘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절벽 끝에 놓인 벤치에 앉아 배미꾸미 해변 최고의 뷰를 감상할 수 있다. 모도 남쪽 끝뿌리에는 박쥐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박주기’라 불리는 아담한 해변이 있다. 모도 해변의 푸른 바다와 ‘Modo’ 조형물의 빨간색 대비가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모도 제일의 포토존이다. 신시모도의 추억을 가장 선명하게 남길 수 있는 곳이다. 영종도와 강화도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신도 구봉산 신도는 조선 왕조 말엽인 1880년 경부터 이곳에서 진짜 소금을 제조했다 해서 ‘진염’(眞鹽)이라 불리다가 1914년 강화군 제도면에 편입되면서 주민들이 순박하고 성실하여 믿을 만하다 하여 신도라 부르기 시작했다. 신도 구봉산(九峯山)은 해발 179 m로 북도면을 통틀어 가장 높은 산이다. 봉우리가 아홉 개라 구봉산이라 불린다. 봄이면 등산로가 벚꽃으로 뒤덮여 벚꽃산으로도 불린다. 경사가 완만해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서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위치한 구봉정에 오르면 멀리 영종대교와 인천대교까지 내다 보인다. 구봉산으로 오르는 길 양쪽에는 약 4km 에 걸쳐 700여 그루의 벚나무와 진달래가 심어져 4~5월이면 꽃들이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육지보다 봄이 한 달가량 늦어 신시모도에서는 5월까지도 벚꽃을 볼 수 있고 벚꽃이 지고 나면 해당화 물결이 일렁인다. 신도 고남리 해당화 꽃길, 시도 해당화 꽃길, 모도 띠염 해당화 꽃길이 유명하다. 1.4km에 달하는 시도의 해당화 꽃길은 특히 아름답다. 신시모도에는 9.5km에 달하는 대한민국 해안누리길 53번 노선인 인천 삼형제섬 길을 비롯해 수기 해안둘레길과 모도 해안둘레길 등이 조성돼 있다. 선반 운항 시간은 세종해운 삼목매표소 (032)751–2211, 한라해운 삼목매표소 (032)746-8020 등에 문의하면 된다.
2021-03-26 22:38:17
경기도 북단의 정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치우진 파주는 북으로는 임진강, 서로는 한강이 흐른다. 임진강은 공릉천, 문산천, 갈곡천, 비암천 등 크고 작은 지류로 흘러내리다가 오두산성 아래서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두 강의 하류에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진다. 동북쪽으로는 연천군, 동쪽으로 양주시, 남쪽으로 고양시, 남서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김포시와 맞닿아 있다. 파주라는 지명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증보문헌비고’ 다. 고조선 땅이었던 파주는 마한 땅이 되었다가 삼국시대에는 차례로 백제, 고구려(475년), 신라(신라 진흥왕)의 영토가 됐다. 조선시대 원평도호부였던 파주에 세조의 왕비(파평윤씨 정희왕후)의 친정이 있었기에 ‘목’으로 승격됐다. 파주(坡州)란 이름은 파평(坡平)에서 유래됐다. 6.25전쟁 이후 파주는 접경의 군사도시란 이미지가 강했으나 2003년 파주 운정 신도시 개발 이후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해 새로운 도시로 발돋움 중이다. 파주에는 임진강변의 반구정과 화석정을 비롯해 황희 정승 유적지, 율곡 이이 유적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보광사, 파주 삼릉과 등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다. 또 파주 출판단지, 프로방스, 신세계아웃렛, 헤이리예술마을 등 문화쇼핑공간,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과 도라산 전망대 등 안보 관광지, 감악산 흔들다리와 마장호수, 벽초지수목원 같은 대중적인 관광지를 두루 갖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매력적인 도시다. 더욱이 해마다 열리는 파주 북소리축제, 파주 포크페스티벌, 파주 장단콩축제, 파주 개성인삼축제, 파주 평화기원 마라톤대회 등 다양하게 열리는 문화행사와 축제는 파주가 흥의 도시라는 데 토를 달 수 없게 한다. 한마디로 파주는 4계절 언제 어느 때 찾아도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북한의 함경남도에서 덕원군 풍상면 용포리 마식령 산맥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장장 254km를 흘러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서 한강과 만난다. 임진강은 물살이 빠르고 강 절벽의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어 풍광이 유달리 아름답다. 많은 옛 선비들이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강변에 정자를 짓고 시와 학문을 논했다. 황희의 반구정 … 갈매기 한가롭게 날던 얕은 강변, 지금은 철조망에 갇혀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伴鷗亭)은 세종 때의 정승 황희가 지은 정자이다. 황희 선생 유적지 내에 있다. 벼슬길에서 물러나 말년을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겠다는 뜻으로 ‘반구정’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반구정 아래 임진강변에는 철조망이 처져 살벌하기 그지없다. 조선시대 최고의 정승도 훗날 나라가 두 동강 나고 산하가 철조망에 가로막히게 될 지는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희 정승은 조선 시대 최장수 정승이자 성품이 어질고 청백리로 이름 나 있다. 그의 청백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와 활약상이 전해져 온다. 그의 일대기가 궁금하다면 황희 정승 유적지 내에 있는 기념관을 찾아보면 좋겠다.반구정에는 조선 중기 문신인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쓴 반구정기가 걸려 있다. 허목의 무덤은 파주에서 멀지 않은 연천군에 있다. 반구정기에 ‘반구정은 파주에서 서쪽으로 15리쯤 떨어진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매일 조수가 나가고 펄이 드러나면 갈매기가 날아드는데 너무도 편편하여 광야도 백사장도 분간할 수 없고 9월이 되면 철새가 날아들고, 서쪽으로 바다의 입구까지 30리가량 된다’고 적혀 있다. 허나 지금은 갈매기도 철새도 보이지 않는다. 반구정 옆에는 앙지대라는 또 하나의 정자가 있는데, 1915년 원래 있던 반구정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지은 정자다. 반구정에서 내려와 비탈길을 내려가면 황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유적지 내에는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영당과 제사를 지내는 경모재(敬慕齋)가 있다. 화석정, 선조의 임진왜란 예견 … 피난길 오른 선조에 불태워져 길 밝힌 忠心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가 관직에서 물러나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화석정은 율곡마을 북쪽의 깎아지른 임진강변 절벽 위,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강 건너로는 장단평야가 넓게 펼쳐지는 곳에 세워져 있다. 화석정이 있는 곳은 한양과 평양 및 개성으로 건너가는 길목으로 명나라의 칙사(사신)였던 황홍헌(黃洪憲), 왕경민(王敬民)이 이이의 학문에 반해 이곳을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밖에 권람(權擥), 정철(鄭澈), 오억령(吳億齡) 등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원래 화석정은 이이의 5대조 이명신이 세종 25년(1443)에 지은 정자로 성종 9년(1478) 이이의 증조부인 이의석이 중수하고 주변을 꽃과 괴석으로 단장하고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 이이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율곡(栗谷)이라는 그의 호도 마을 이름인 율곡리에서 따 온 것이다. 화석정에는 그가 8살 때 화석정에 올라지었다는 ‘팔세부시’가 걸려 있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 드니 /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 서리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80년 이상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와 이후방이 현종 14년(1673)에 복원했다. 화석정 아래 임진나루에는 이이와 선조와 관한 일화가 전한다. 왜구가 침입해 올 것을 예견했던 이이는 틈나는 대로 화석정에 기름칠을 해 두었다. 이이가 죽고 난 뒤 8년 후에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 일행이 칠흑같이 깜깜한 밤 임진나루에 도착해 어찌할 바를 모르자 수행하던 이항복이 기름 먹인 화석정에 불을 질러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6.25전쟁 때 다시 파괴된 것을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고 1973년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오늘날 모습으로 정비됐다. 화석정에 오르면 휘돌아나가는 임진강과 너른 장단평야의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율곡 이이를 모신 자운서원, 성수침·성혼 부자는 파주서원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紫雲書院)과 율곡의 가족묘가 있다. 자운서원은 광해군 7년(1615)에 이이의 제자 김장생(金長生)에 의해 설립되었고 효종 원년(1650)에 자운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713년 김장생과 박세채를 추가로 배향했다. 고종 5년(1868년)에 흥선대원권의 사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지방유림 기금과 국비 보조로 17억원을 들여 복원했고 1975~76년에 보수했다. 서원 앞의 500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말없이 이곳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율곡의 가족묘에는 율곡의 부모와 율곡 부부의 묘 등 가족묘 13기가 조성돼 있다. 부모의 묘 위에 자식이나 후손의 묘를 조성하는 역장(逆葬)인 게 특기할 만하다. 자운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 중기 학자인 성수침(成守琛)과 그의 아들 성혼(成渾), 유학자 백인걸(白仁傑)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파산서원(坡山書院)이 있다. 보광사 곳곳에 영조의 흔적 … 생모 숙빈 최씨 사당 ‘어실각’과 영조가 심은 향나무 파주시 광탄면 고령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보광사(普光寺)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파주의 한계령이라 불리는 됫박고개를 넘어야 한다. 보광사는 사계절이 아름답고 고즈넉한 곳이다. 봄에는 주차장부터 대웅보전까지 목련과 벚꽃, 명자꽃이 만발한 꽃대궐로 변신한다. 가을에는 빨간 단풍과 은행나무가 알록달록 산사를 물들인다. 해탈문을 지나 계곡을 5분 정도 오르면 돌로 높게 쌓은 축대와 담장 위로 전각들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다. 축대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 경내로 들어서면 만세루와 높이 20m를 훌쩍 넘는 은행나무와 쌍사자 석등이 먼저 반기고, 곧이어 아담한 마당과 대웅보전과 원통전, 응진전, 지장전, 범종각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광사는 원래 파주와 양주의 경계를 이루는 고령산(高靈山, 高嶺山)의 이름을 따서 고령사(古靈寺)라 불렀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8년(894)에 임금의 명으로 도선국사가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고려 고종 2년(1215)에 원진국사가 중창했고 우왕 14년(1388)에 무학대사가 삼창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돼 광해군 4년(1612)에 설마와 덕인 두 스님이 법당과 승당을 복원했다. 보광사의 마지막 중창은 조선시대 고종 33년(1896)과 고종 38년(1901) 사이에 이뤄졌으며 당시 많은 궁중의 여인들이 불사에 동참했다고 한다. 보광사는 조선 21대 임금 영조와 친모 숙빈 최씨와 깊은 연관이 있는 절이다. 영조는 생모가 무수리라는 이유로 재위 내내 신분적 열등감에 시달렸다. 1724년 왕위에 오른 영조는 자신과 왕실의 지위 격상을 위해 묘제를 바꾸는 일련을 조치를 취했다. 그는 1753년 고령산 팔일봉에 있는 생모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묘를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상시키고 인근에 있던 고령사를 보광사로 개칭하고 소령원의 원찰로 삼고 어실각(御室閣)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어실각 옆에는 자주 찾아올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향나무를 심었다. 대웅보전 오른쪽 뒤편에 사방 한 칸짜리 어실각과 향나무가 서 있다. 영조는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대대적으로 중수했고 대웅보전의 현판을 직접 썼다. 영조가 보광사를 중수할 당시의 건물인 만세루는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상궁이나 부녀자가 불공을 드렸던 곳으로 추정된다. 만세루 툇마루에 걸려 있는 커다란 목어가 시선을 끈다. 몸통은 분명 물고기인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고 머리에 뿔까지 있는 것이 영락없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과 만세루는 6.25전쟁에도 타지 않고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보광사의 대웅보전은 다른 절집 벽들처럼 석회를 바른 회벽이 아닌 나무벽이다. 벽면마다 민화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범종각에는 인조 9년(1631)에 만들어진 범종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58호)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 뒤편 미륵전에는 최근에 조성된 거대한 미륵보살이 고령산과 보광사를 굽어 보고 있다. 가을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또 하나 보광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전나무 숲이다. 입구와 절 뒤편에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푸른 전나무 숲이 웬만한 휴양림 못지않다. 내친 김에 도솔암이나 정상인 앵무봉까지 올라도 좋다.파주 三陵 : 한명회의 셋째딸 넷째딸 묻힌 공릉과 순릉 … 사도세자 형님 부부는 영릉보광사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파주 삼릉이 있다. 보광사 관람 후 영조의 어머니가 묻혀 있는 소령원을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소령원은 허가를 받아야 관람이 가능하다. 파주 삼릉에는 공릉, 영릉, 순릉 등 3기의 왕릉이 있다. 공릉(恭陵)은 조선 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 조씨가 묻혀 있다. 한명회의 세째 딸인 장순왕후는 세조의 차남인 예종(睿宗 1450~1469)의 세자빈이 되었으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원자를 출산하자마자 꽃다운 열 일곱살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세자빈묘로 단출하게 조성됐다. 병풍석과 망주석 등도 모두 생략됐다. 1468 왕위에 올라 1년 만에 승하한 예종은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와 고양 서오릉 창릉에 묻혀 있다.순릉(順陵)은 성종(예종의 첫째형인 의경세자의 차남, 형은 월산대군)의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이다. 열한 살에 세조의 손자인 성종과 가례를 올리고 열세 살에 왕비로 책봉됐다. 성종 5년(1474)에 후사 없이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삼릉 중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순릉에 묻힌 공혜왕후와 공릉에 잠들어 있는 장순왕후와는 자매지간이다. 자매가 지척에 누웠으니 저승에서라도 덜 외로울까. 두 명의 왕을 사위로 맞이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의 칭호를 받은 한명회(韓明澮)는 어린 두 딸을 잃고 행복했을까. 참고로 한명회는 청주 한씨로 청주시 동부에 있는 상당구가 그의 뿌리다. 말년까지도 부와 권세를 누리다 사망했다. 그러나 이시애(李施愛)의 난 당시에는 반역에 공모했다는 혐의로 사돈인 세조에게 체포돼 신문을 당하기도 했고, 죽은 지 16년 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됐다 하여 부관참시의 형을 받았으니 세상의 권세와 부귀영화도 다 부질없어 보인다. 영릉(永陵)은 추후 진종(眞宗 1719~1728)으로 추존된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孝章世子)와 효순왕후 (孝純王后) 조씨(1715~1751)의 능으로 삼릉 중 유일한 쌍능이다. 효장세자는 사도세자의 형으로 1725년 왕세자로 책봉됐으나 10세 때 사망했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됐다. 서울서 개성 오가는 길목의 미륵불 모신 기도처, 용미리 마애이불입상파주 삼릉에서 7 km쯤 떨어진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 중턱에 고려 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龍尾里磨崖二佛立像)’이 있다. 석불의 크기가 17m에 달하며 얼굴 길이는 2.5m나 된다. 보물 제93호로 지정돼 있다. 용미리는 서울에서 개성을 오가는 길목으로 미륵댕이라 불렸으며, 이 지방 사람들은 이 거대한 석불을 쌍미륵이라 부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겼다.용암사(龍巖寺) 일주문을 지나 108계단을 오르면 소나무 숲 사이로 불상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거대한 천연 암벽에 새긴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머리 위에는 돌갓을 쓰고 신체 비율도 맞지 않는 등 그동안 보아왔던 정갈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마애불과는 달리 토속적이고 투박해 보인다. 지방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석상은 남상, 모난 갓의 석상은 여상이라 하는데 불상이 아니라 장지산을 지키는 수문장 같다.이 마애불상에는 고려 선종과 왕자 한산후(漢山候)의 탄생 설화가 전한다. 고려 선종이 후사가 없어 고민 하던 중 부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꿈에 두 스님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장지산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정말로 거대한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도승을 새기고 절을 짓고 불공을 드리니 그 해에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이 바위 불상은 득남을 원하는 여자들과 병의 완쾌를 바라는 이들의 효험 있는 기도처로 알려져 오늘날에도 많이 이들이 찾아온다.
2021-03-20 19:3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