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동해시의 서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삼화동은 남서쪽에 두타산(頭陀山 1357m), 청옥산(靑玉山 1404m)을 품고 있다. 두 산의 계곡을 배경으로 수많은 기암절벽과 폭포 등이 어우러져 천혜의 절경을 이루는 일명 ‘무릉도원 명승지’가 있다. 두타산은 동해시 삼화동,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에 걸쳐 있다. 삼화사(三和寺)와 천은사(天恩寺)라는 천년 고찰이 자리 잡고 있다. 삼척 여행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천은사는 고려 때 이승휴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다. 천은사는 동해시의 경계에 인접한 삼척시 미로면에 있다.두타산의 두타는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를 닦는다는 뜻이다. 두타산은 보통 무릉계곡(관리사무소)을 기점으로 등반한다. 왼쪽길(남서길)은 삼공암, 미륵바위, 베틀바위, 산성터, 12산성폭포, 다래나무 군락지를 거쳐 박달계곡에 이른다. 오른쪽길(북서길)은 가장 대중적인 길로 삼화사, 관음암, 학소대, 옥류동을 거쳐 얼레지쉼터를 지나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에 이른다. 더 가면 박달계곡에서 두 길이 만난다.조선 태종 14년에 산세를 이용해 쌓은 두타산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두타산성 아랫길이 바로 옥류동에서 쌍폭포와 용추폭포으로 향하는 길이다. 박달재(박달계곡)는 옛 사람들이 정선군 임계면(정선의 북동쪽)을 거쳐 서울로 가는 고갯길이었다. 참고로 전통 트롯트의 노래가사에 나오는 천등산 박달재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 사이에 있다.지난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베틀바위와 마천루 협곡 구간이 2020년과 2021년 차례로 개방돼 탐방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두타산에는 눈누난나 힐링 코스, 야경일품산책코스, 베틀바위 산성길, 두타산 오름길 코스 등 다양한 트레킹 길이 조성돼 자신의 체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계곡을 건너면 길은 베틀바위 산성길과 용추폭포길 두 갈래로 나뉜다.A구간 :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1.5 km/편도 1시간 30분)B구간 :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 – 미륵바위(회양목 군락지) - 두타산성 쉼터(2.7km/편도 2시간 30분)C구간: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 – 두타산성 쉼터 - 마천루 협곡(12산성 폭포-다래나무 군락지-수도골 석간수 구간: 최고봉에 마천루 전망대 위치)- 선녀탕-쌍폭포 - 용추폭포(4.7km/편도 3시간)베틀바위 산성길은 줄곧 오르막과 가파른 돌계단길이다. 30분 정도 오르면 서서히 첫 시야가 트이면서 산 아래 리조트와 주차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컴컴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두 눈앞에 커다란 소 엉덩이처럼 푸짐한 산세에 털이 벗겨진 듯한 바위들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 계곡도 보인다. 허연 바위가 드러난 산들은 얼핏 보아도 거칠고 방문객에게 쉽게 곁을 내어 줄 것 같지 않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를 지나고 회양목 군락지도 지난다. 산세는 점점 더 험악해지고 도저히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느껴질 즈음 눈앞에 뾰족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드디어 베틀바위 전망대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수정처럼 날카롭게 깎인 바위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푸른 나무들이 바위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 기이할 정도다.해발 550m에 위치한 이 뾰족바위들은 베틀처럼 생겨서 ‘베틀바위’라고 불린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베틀릿지', '두타산의 소금강'으로도 통한다. 베틀바위에는 하늘나라 선녀가 벌을 받아 인간 세상으로 쫓겨나 비단 세 필을 짜고 개과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베틀바위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마천루 협곡으로 향한다. 베틀바위를 조금 지나면 미륵바위(회양목 군락지)가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약 2km 구간 끝에는 12산성폭포가 기다리고 있다.베틀바위부터 12산성 폭포에 이르는 구간은 가히 ‘한국의 장가계( 張家界)’라고 할 만하다. 중국 후난성 북서부의 장가계의 옛 지명이 무릉이었으니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듯하다.바위산들이 이중삼중으로 주름처럼 겹쳐 있고 짙은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며 피어오르는 모습은 순간 인간계가 아닌 선계에 들어온 듯하다. 주변은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이요, 하늘과 경계를 이룬 듯 서 있는 병풍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갑자기 계곡에서 긴 수염을 기른 신선이 나타나 ‘웬 놈이냐?’라고 호통이라도 칠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바위 끝에 매달린 잔도길을 내려오면 쌍폭포의 끝자락이 보인다. 쌍폭포는 두타산 정상과 박달계곡(두타산과 청옥산의 가운데 정상 지점), 청옥산과 고적대(高積臺) 물이 한곳으로 모여 형성된 폭포이다. 쌍폭포에서 50m 위쪽에 용추폭포가 있다. 신선봉 아래 3단으로 떨어지는 용추폭포는 주변의 반석과 어우러져 천하 절경을 빚어낸다. 한여름에는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용추폭포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쌍폭포에서 삼화사 방향으로 내려오면 이번에는 학소대(鶴巢臺)가 모습을 드러낸다. 청옥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너른 바위를 따라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곳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부른다. 양사언과 김시습의 글이 새겨진 무릉반석 … 토포사에 눌린 백성들의 恨 무릉반석을 지나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을 지나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에 이르는 구간을 두타산 무릉계곡이라 한다. 깨끗하고도 풍부한 물, 폭포, 기암괴석, 아름다운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여름 피서지로 최고이고 가을 단풍관광으로도 그만이다. 이 14km의 계곡길은 너무나 아름다워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경이 됐다.두타산 무릉계곡은 설악산 천불동 계곡, 포항 내연산 보경사 계곡, 오대산 노인봉·청학동계곡·소금강 등과 함께 동해안 4대 명승지로 꼽힌다.약 5000㎡(약 1500평)에 달하는 무릉반석은 그 자체로 절경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반석마다 어떤 생명체들이 꿈틀거리는 듯 수많은 묵객들이 새겨 놓은 글과 이름들이 빼곡하다. 돌에 새긴 글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또렷하고 정갈한 글씨체들이 더욱 감탄을 자아낸다.그 중에는 조선 전기 4대 명필가로 꼽히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초서체로 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글귀가 단연 눈에 띈다. 이 글씨는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 시(1571~1576) 무릉계곡을 방문했을 때 쓴 글씨라고도 하고, 옥호거사 정하언(玉壺居士 鄭夏彦)이 삼척부사 재직하던(1750~1752) 중 1751년(신미년)에 썼다는 설도 있다.무릉반석에는 단종의 폐위 이후 천하를 떠돌던 매월 김시습의 글도 있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이름들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들 속에는 조선시대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이들을 잡으러 나선 토포사들의 이름도 상당수라고 한다. 신해 3년 또는 계미 3년 등 연도와 이름을 함께 새겨 넣었다.토포사(討捕使)는 조선 후기 도적이나 화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특정 수령이나 진영장이 겸했던 특수 관직으로 명종 때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는 남치근이 이 직책에 임시로 임명된 적이 있다. 토포사가 제도화된 것은 인조 16년(1638)년 이후이다. 토포사들의 추적 대상에는 화적이나 도적뿐만이 아니라 탐관오리나 양반들의 폭정을 견딜 수 없어 달아난 선량한 백성들도 포함됐다. 이름들의 정체를 알고 나니 무릉도원은 한순간 으스스한 귀곡산장 같은 느낌으로 다가선다.실제로 두타산 무릉계곡은 임진왜란 때는 수천수만의 화살이 강물에 떠 흘러 ‘화살내’를 이루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고여 ‘피쏘(피로 물든 연못)’가 생겨났던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량학살이 일어나 7개의 커다란 피범벅 구덩이가 있었고 5000명이 한날한시에 총살당했다고 한다.1980년대 초 무릉계곡을 방문한 시인 김지하는 이곳에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의 피비린내 나는 아우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가 들었던 피와 고통의 소리는 시집 ‘검은 산 하얀 방’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중에 ‘너럭바위’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한 노인을 만났는데 가라사대사람은 손을 손으로 저울질할 일이다라고 하더라두타산은 일곱 개의 피복창이 있었다고 하더라오십 개의 우물 터가 있었다고 하더라오천 명이 한날한시에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사멧골 제사는 모두 한날한시라고 하더라피쏘 한복판에 물 못 들어가는 큰 구멍 하나 있다 하더라그 구멍 속에 한 여자가 발 거꾸로 해 지금도 떠있다 하더라돌아오는 길에피쏘 너럭바위 위에아로새겨진토포사! 토포사! 토포사!<김지하 ‘너럭바위’> 번득이는 것이왜 빛뿐일까요번득이는 것이 왜 눈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햇빛뿐일까요 하늘에 가득 찬 총알 총알 총알 그 구리의 빛은 찢어진 왼쪽 다리 끌며 당신 찾는데(......)가물거리는 마지막 생각가물거리는 마지막 눈 그 속에 타고 있는 삼화사 촛불 마지막 들리는 삼화사 독경소리 마지막 보이는 삼화사 쇠 부처님 아 아 물방울. <김지하 ‘피쏘’ 중> 무릉계곡 반석 초입에는 금란정(金蘭亭)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금란정은 1947년 삼척 유림들이 삼척 북평동에 건립한 정자인데 195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삼척 유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삼척향교'를 폐지했다. 이에 유림들은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 후인 1947년 금란정을 건립했다. 정자의 12기둥에는 '양사언이 붓을 휘두른 곳이고 '이승휴가 불경을 열파한 곳이다'와 같은 주련들이 새겨져 있다.금란정 앞쪽에도 초서체로 쓰인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암각 반석이 놓여 있다.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희미해지고 마모되자 1995년에 만든 복제품을 이곳에 두었다.후삼국의 화합 기리는 천년고찰 ‘삼화사’ … ‘고려망국 원혼’ 달래는 수륙재 도량 무릉반석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천년고찰 삼화사가 반긴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두타산과 청옥산의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삼화사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삼화사는 "서쪽 봉우리는 봉황이 춤추고 학이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며 남쪽 기슭은 용이 어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형세"라는 말이 전해온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흥덕왕 4년(829)에 창건됐다는 설도 있다. 삼화사는 경문왕 4년(864)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중창하여 삼공암이라고 하였다. 이후 측연대, 중대사로도 불렸다. 고려 태조 원년에 삼창되면서 세 나라(후삼국)를 하나로 화합한 영험한 절이라는 뜻으로 삼화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삼화사는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다. 또 조선 개국 당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추종세력을 삼척 앞바다에 수장했는데 그 원귀를 달래는 수륙재(水陸齋) 도량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전소돼 효종 때 몇 차례에 걸쳐 중건됐다. 현재 삼화사는 적광전(대웅전)을 비롯해 약사전, 극락전, 삼성각, 비로전, 범종각 등의 전각과 두타선원, 적묵당 등의 당우로 가람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로는 통일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제작된 적광전의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과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이 있다. 삼화사에서는 10월이면 국행 수륙재가 열린다. 수륙재는 정처 없이 떠도는 고혼(孤魂)과 아귀(餓鬼)의 천도(薦度 : 이승의 업을 소멸하고 극락으로 보내는 것)를 위한 의식을 말한다. 삼화사 수륙재는 조선 전기의 국행 수륙재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국가무형문화제 제125호로 지정돼 있다. 숨겨진 백두대간 트레킹로 ‘원방재’ ‘백복령’ 길 … 옛날 소금장사 넘던 고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트레킹 길로는 동해시 신흥동(행정동인 삼화동의 일부) 관촌마을과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로 넘어가는 원방재다. 원방재( 720m)는 백두대간에 걸쳐 있다. 정선군 임계면과 삼척시 하장면을 임도는 길이가 100km에 가까워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선호한다. 원방재에서 정선으로 향하면 부싯돌을 생산하던 ‘부수베리’가 나온다. 원방재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북상하면 백복령에 이른다. 남하하면 상월산, 이기령 구간이다. 백복령을 경유하는 42번 국도는 동으로는 강릉시를 거쳐 동해시에서 끝나고, 서로는 정선 평창 횡성 원주를 지나 여주 이천 용인 수원 안산 시흥 인천에 이른다. 백복령과 원방재는 삼척 강릉으로 소금을 사러 나갔던 소금장수들이 굽이굽이 지게를 메고 넘어다니던 눈물고개다. 백복령(白伏嶺) 일대에는 한 때 군사들이 많이 주둔해 군대(軍垈)로도 불린다. 동해시의 바다는 묵호항 외에 망상해수욕장과 추암촛대바위(추암동, 법정동은 북평동), 경복궁 근정전의 정동쪽에 있다는 대진마을(대진항) 등이 대표적이다. 대진항은 어달동 회타운과 망상해수욕장 사이에 있다. 대진동, 망상동(일부), 어달동은 모두 법정동으로는 묵호동이다. 촛대바위의 일출은 방송에 나오는 애국가 영상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22-09-17 22:21:19
동해시는 1980년 명주군의 묵호읍과 삼척군의 북평읍이 합쳐진 강원도 4번째 도시다. 춘천,원주, 강릉에 이어 인구가 네 번째로 많다. 그 다음 강원도 도시들이 속초, 삼척, 태백 등이다. 영동에서는 강릉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이름은 바로 접한 동해바다에서 따왔다.묵호읍을 동해시에 뺏긴 명주군은 군세가 급격이 약화돼 1995년 지방자치제 본격화에 따라 강릉시에 통합돼 소멸됐다.동해시는 동으로는 푸른 바다와 접하고 서쪽은 태백산맥에 기대고 있다. 바다와 산, 계곡, 천연동굴 등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1936년부터 무연탄을 실어 나르던 작은 항구에 불과했던 묵호항은 1941년 국제 무역항으로 개항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석탄 하역시설과 부두, 방파제 등이 보강됐고 쉼 없이 석탄과 무연탄, 수산물 등을 실어 날랐다. 석탄이 주요한 땔감이었던 시절, 묵호항은 석탄을 실어 나르는 배들과 선원들로 항상 붐비고 활기찼다. 그러나 석탄 산업의 쇠퇴와 함께 묵호항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항만 기능은 노후화되고 사람들은 떠나갔다. 묵호 출신의 작가 심상대는 ‘묵호를 아는가’에서 묵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예전의 목호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산꼭대기까지 다닥다닥 판잣집이 이어졌고, 아랫도리를 드러낸 아이들은 오징어 다리를 물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붉은 언덕은 오징어 손수레가 흘린 바닷물로 언제나 질퍽하였다. 그때가 참다운 묵호였다. 가까운 바다에서도 풍성한 어획고를 올렸고 밤이면 오징어배의 불빛으로 묵호의 바다는 유월의 꽃밭처럼 현란하였다. 아낙네들은 오만 가지 사투리로 욕설을 해대며 오징어 가랑이에 겨릅대를 끼웠고 아이들은 수없이 끊어지는 백열전구를 사러 산등성이를 오르내렸다.묵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한 오징어와 조미공장에서 흘러나온 오징어 다리를 빨아야 하였다. 지독하게도 물고기를 먹어대던 시절이었다. 어느 집 빨랫줄에나 한 축이 넘거나 두 축에서 조금 빠지는 오징어가 만국기처럼 널려 있었고, 집집에서 피워 올린 꽁치 비늘 타는 냄새가 묵호의 하늘을 뒤덮었다. 후미진 구석마다 쌓여 있던 생선 내장의 악취, 비 온 다음 날 시뻘겋게 상한 오징어, 건조한 바닥에서 떨고 있던 개, 양동이로 머리를 후려치며 싸우던 공동 수도의 아낙네들, 욕설과 부패, 묵호의 모든 것이 그랬다.”묵호항 뒤편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꼬불꼬불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오르면 작가가 묘사했던 묵호를 만날 수 있다.비린내와 고단함 묻어나던 논골담길 … 이젠 벽화로 새 단장 2014년 겨울 처음 묵호를 찾았던 때 묵호에서는 소설 속 풍경처럼 비린내가 났다. 어쩌면 진짜 비린내가 아닌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비린내였을지도 모르겠다. 묵호(墨湖)의 바다는 심상대의 말처럼 소주처럼 투명한데 해저의 검은 바위가 다 드러나보이고 검은 물새떼들이 모여들어 묵호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검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논골마을의 비좁은 골목들은 막다른 골목인 듯싶다가도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졌다. 골목 끝에는 어김없이 꽁꽁 닫힌 대문이 있다. 절대로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은 대문이지만 놀랍게도 그 문에서 사람이 나왔다. 묵호의 논골담길은 묵호항과 묵호등대를 연결하는 비좁은 골목길이다. 계단마다 절망과 퇴락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했다. 빈곤과 고단함과 비린내가 뒤섞인 삶의 우울한 풍경이었다. 피난민들과 전국에서 몰려온 가난한 사람들이 언덕배기에 하나둘씩 다닥다닥 집을 짓고 살면서부터 만들어진 풍경이었다. 2018년 두 번째 찾은 묵호는 첫 방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4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여전히 논골담길을 구경삼아 어슬렁거리는 일은 불편했다. 비린내 진동하는 짐 보따리를 들고 힘겹게 오르는 할머니 옆을 카메라를 들고 벽화가 그려진 가난한 집들을 기웃거리며 지나거나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은 생각보다 곤혹스러웠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가끔 묵호가 궁금하고 찾아보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2월의 꽃샘바람이 부는 날, 삶이 뒤엉켜 심하게 외로움이 느껴지는 날, 그런 날들에는 오징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는 묵호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산등성이 논골담길 골목마다 푸근한 삶의 이야기들이 가득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의 고단한 노동을 막걸리 한 잔에 녹여내고 다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성실함과 바다에 나간 아버지와 자식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과 내 처지와 너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를 걱정해 주는 공동체의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22년 다시 찾은 묵호에서는 삶의 비린내가 진동하는 과거의 묵호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논골담길의 벽화 속에서 과거의 묵호를 어렴풋이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2010년 동해문화원이 주관한 ‘어르신생활문화전승사업’의 일환인 ‘논골담길’ 프로젝트의 결과, 지역주민들과 예술가들의 손길을 거친 논골마을의 골목들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2011년 하반기에는 묵호의 전성기를 표현한 벽화가 논골담길 마을에 그려졌다. 논골 1길에는 묵호를 밝혔던 일하는 사람들과 생업과 관련된 이미지가 풍부하며 논골 3길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화를 표현한 이미지들을 만나볼 수 있다. 논골마을 탐방은 한편으로는 골목마다 진솔하고 푸근한 삶의 스토리를 만나볼 수 있는 최고의 감성여행이 될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의 발전 과정을 만나볼 수 있는 역사탐방이 될 것이다.묵호 등대공원 … 푸른 바다와 늦여름 오징어잡이배 불빛묵호동 산 중턱에 위치한 논골담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길은 묵호등대로 향하게 된다. 묵호 등대에 서면 저 멀리 푸르디푸른 동해 바다와 묵호항 일대와 묵호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 절경 덕분에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인기를 끈다. 등대를 중심으로 조성된 ‘등대공원’에는 등대의 역할과 역사를 알 수 있는 ‘등대 홍보관’과 휴게시설이 연중 개방돼 관광객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묵호 마을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상설 사진전과 전국의 아름다운 ‘등대 사진전’이 열리기도 한다. 바다가 어스름에 잠기는 여름날 저녁 묵호 등대에 올라 눈을 감고 앉아 있노라면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또 저 멀리 오징어잡이 어선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불빛들 속에서 옛 묵호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논골마을 아래쪽 해안가에는 루프탑을 갖춘 세련된 카페들과 묵호의 명물 ‘도깨비빵’을 판매하는 소형 빵집, 온갖 도자기 공예품을 갖춘 개성 넘치는 카페 등이 늘어서 있다. 거리는 길지 않지만 느긋하게 걸어볼 만하다. 동해 익스트림 1번지 ‘도째비골 스카이밸리’와 ‘해랑전망대’ 최근 동해 관광에서 가장 핫한 곳은 단연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라고 할 수 있다(도째비는 도깨비의 방언). 2021년 6월에 묵호등대와 월소택지(--宅地, 묵호동의 일부, 해발 50m의 구릉지) 사이 도째비골에 설치된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전망 시설인 ‘하늘산책로’와 스카이 사이클(와이어를 따라 공중을 달리는 자전거), 대형 미끄럼틀(자이언트 슬라이드) 등 각종 익스트림 체험 시설을 갖추고 있어 전 연령층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바다를 향해 난 ‘하늘산책로’는 주요 지점이 메쉬망과 투명 유리로 돼 있어 마치 바다를 향해 허공을 걷는 듯한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다. ‘해랑전망대’는 묵호 앞바다에 설치한 해상 교량 전망대로 동해 바다 위 파도 너울을 발아래서 느껴볼 수 있다. 묵호항의 역사와 묵호 마을의 정취를 가득 느끼고 싶다면 묵호 마을에서 하룻밤 숙박을 권한다. 민박집으로 개조한 묵호 마을 숙소들은 전망 하나만은 최고급 호텔 부럽지 않다.
2022-09-15 08:51:21
강원도 태백에는 201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백산(太白山 해발 1567m) 외에도 많은 험산준령과 휴양림, 야생식물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 한가운데 자리한 연화산(1171m)를 중심으로 함백산(1573m), 매봉산(1303m), 대덕산(1307m), 금대봉(1418m), 은대봉(1442m), 두타산(1353m), 구룡산(1345m), 면산(1245m), 백병산(1259m), 응봉산(998m) 등에 둘러싸여 있다. 태백산은 태백시의 남서쪽에 해당하고 강원도 태백시, 영월군, 정선군, 봉화군의 경계를 이룬다. 태백산에서 약간 북서쪽에 위치한 함백산은 해발이 오히려 태백산보다 더 높다. 함백산은 정선군과 태백시의 경계에 있고 남한에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계방산(홍천군 내면, 1577m)에 이어 6번째로 높다. 태백산에서 함백산으로 향하는 만항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에 위치한 도로로 멋진 드라이브 코스다. 함백산 정상에서 백두대간과 태백 시내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일출은 물론 일몰을 조망하는 장소로도 최고의 자리다.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이 특수훈련을 할 때 다니는 대한체육회 선수촌 태백분촌도 함백산 자락에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추전역도 함백산의 줄기다. 만항재에서 정선군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의 하나인 정암사(淨巖寺, 정선군 고한읍)를 둘러볼 수 있다.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주장자(拄杖子, 지팡이를 꽂은 게 나무로 변함), 적멸궁, 수마노탑을 답사하면서 속세의 때를 벗겨낼 수 있다. 태백시 금대봉은 태백과 정선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동쪽은 매봉산, 남쪽은 함백산, 북쪽은 대덕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금대봉 하부능선 해발고도 920m에 위치한 천연 석회동굴인 용연동굴은 국내 최고 지대에 자리한 석회동굴로 약 3억~1억5000만년 전에 형성됐다고 한다. 여름엔 서늘한 냉기를 느끼고도 남는다. 한강의 오리지널 시원지라는 제당굼샘(제당궁샘)과 명색 상 한강의 시원지라는 검룡소도 다 금대봉에서 유래한다. 금대봉 정상을 꼭지점으로 남쪽으로는 두문동재, 동쪽으로는 매봉산, 북쪽으로는 분주령을 거쳐 대덕산에 닿는다. 두문동재에서 매봉산 정상을 거쳐 분주령에 이르는 능선길은 야생화 꽃구경을 원없이 할 수 있는 길이다. 양지꽃, 개별꽃, 피나물, 미나리아재비, 제비꽃, 산괴불주머니, 홀아비바람꽃, 얼레지 등이 5월이면 능선을 누빈다. 산괴불주머니와 얼레지가 이 중 가장 눈여겨 볼 꽃이다. 분주령에서 검룡소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체력이 달리고 꽃구경을 할 만큼 했다면 검룡소로 내려가는 것도 아쉬울 게 없다. 매봉산 북쪽 경사지에는 광대한 고랭지 채소 재배지가 펼쳐져 있다. 해발 1303m 지대에 이렇게 넓은 경작지가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초대형 풍력발전기들도 이런 풍경을 압도한다. 매봉산의 이런 정경을 ‘바람의 언덕’이라고도 한다. 대덕산은 봄보다는 초여름에 꽃이 장관이다. 범꼬리풀, 하늘나리, 노루오줌, 꿀풀, 여우오줌, 흑쐐기풀, 짚신나물, 선학초, 사상초, 일월비비추, 산꿩의다리, 현호색, 큰산장대꽃 등이 6월말부터 7월초에 능선을 장악한다. 대덕산 야생화 트레킹로는 환경부자 지정한 생태관광보존지역이다. 일년 중 2월 15일~5월 15일, 11월 1일~12월 15일은 트레킹로가 폐쇄된다. 태백고원자생식물원 ‘해바라기 축제’와 태백고원자연휴양림의 계곡 캠핑 태백고원자생식물원은 소 아홉 마리가 배불리 먹고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길지(吉地)인 구와우(九臥牛) 지역에 위치해 있다.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삼수령(피재) 아래, 해발 800~900m 높이의 분지다. 12만평 넓이의 식물원에 사라져가는 우리꽃 3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이 중 약 5만평이 매년 해바라기 꽃밭으로 조성돼 환하게 빛난다. 8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해바라기축제가 열린다. 식물원이란 명색에 걸맞게 연보랏빛 배초향, 연붉은빛 홑왕원추리, 보랏빛 꽃창포 등 여름꽃들이 화려한 색조와 세련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고지대답게 산비장이, 참취와 같은 가을꽃도 눈에 띈다. 고원자생식물원이 태백 도심에서 약간 북쪽의 황지동에 있다면 자연휴양림은 남동쪽 철암동에 있다. 휴양림은 2005년에 개장했으며 초입에서 끝까지 1.3km의 차갑고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항상 예약이 꽉 차 공실을 잡을 수 없다는 게 흠이다. 휴양림 계곡보다 한적하고 물 맑은 곳으로는 봉화쪽으로 20km를 따라가다 만나는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 계곡, 삼척시 가곡면 청옥산 자락의 가곡자연휴양림(삼척, 태백, 봉화 경계선의 꼭지점에 위치), 가곡면 풍곡리의 덕풍계곡 등을 추천할 수 있다. 삼척의 계곡들은 1급수로 버들치, 꺽지, 산천어, 꾸구리, 퉁사리\, 연준모치, 민물참게 등이 산다.
2022-08-29 09:13:20
태백에는 ‘권춘섭짚압’이라는 버스정류장 이름이 있다.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상사미마을의 버스정류장을 말한다. 버스승강장 인근에는 권상철씨가 사는 집밖에 없어서 과거에는 ‘권상철집앞’ 버스승강장이라고 불렀다. 정류장 인근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은 권상철 밖에 없었다. 처음 권상철집앞 승강장이 만들어진 것은 1999년이었다. 갑자기 암 진단을 받은 아내가 통원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버스승강장이 멀어 걸어다녀야 하는 상황이어서 권상철씨가 당국에 지속적인 요청을 한 것.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 권상철씨의 이름을 따서 권상철집앞이라는 버스승강장이 세워졌다. 권상철 옹이 2010년에 사망하자 지금은 집을 물려받은 장남 권춘섭 씨의 이름을 따 ‘권춘섭집앞’이라는 버스승강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곳에서 태백 시내로 가다보면 오른편 산길 끝에 나오는 샘물이 바로 한강의 시원이라는 ‘검룡소’다. 개인의 이름을 따 명명한 정류소 이름은 왠지 훈훈하고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감자바우’의 순박함이 느껴지는 황지자유시장 … 8월엔 감자·옥수수 지천 낙동강의 시원이라는 ‘황지연못’에서 100여 m 거리에는 태백 전통시장인 ‘황지자유시장’이 있다. 1970년 4월에 개장한 이 시장은 해발 902m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시장이다. 특별히 살 것이 없어도 느긋하게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자. ‘감자바우’들의 순박함과 정겨움이 느껴진다, 8월엔 갓 수확한 감자와 옥수수가 지천이다. 할머니들이 새벽부터 일어나 빚어 쪄낸 감자떡과 인절미도 맛볼 수 있다. 시장 안에는 각종 생활용품과 과일, 나물 등을 판매하며 태백 한우를 밤새 우려낸 소머리국밥 등 푸짐한 먹거리 상가가 있다. 고단한 시대의 ‘잿빛 감성’ 태백 철암탄광역사촌 삼척이나 경상도 북쪽 사람들은 구문소 너머에 이상향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게 지금의 태백이고 1960년대 이후 20여년간 탄광촌으로 부와 사람이 몰린 역사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구문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간이 멈추어 버린 철암역과 ‘철암탄광역사촌’이 있다. 옛 광부들의 생활 터전으로 그들의 고된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태백시가 본격적인 탄광 사회가 된 것은 1936년 단일 탄광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장성 탄전의 석탄이 그 동쪽인 ‘철암리’(현 철암동)로 운반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철암이란 지명은 마을 북쪽의 백산과 경계 부근의 철도변에 높이 20m, 너비 30m의 큰 바위가 쇠 성분을 많이 함유해 ‘쇠바위’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옛 마을 이름도 ‘쇠바위마을’이었다. 1940년 새뜨리(새터) 부근에 기차역이 생기면서 본래 쇠바위마을을 웃철암(상철암)으로 부르고, 기차역과 그 부근을 철암, 철암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철암역은 석탄산업과 맥을 같이 한다. 장성에서 생산된 석탄은 철암역을 통해 전국으로 실려 나갔다. 광부의 꿈을 안고 전국에서 몰려들던 사람도 철암역을 거쳤다. 강릉역 역무원이 28명이던 시절 철암역 역무원은 300여 명에 달했을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지금은 아주 드물게 석탄을 가득 실은 화물열차가 오갈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철암역은 한 시간이 지나도 이용객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한산하다. 매점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매점 주인은 손님 응대보다는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삶느라 더 분주했다. 2013년부터 운행되기 시작한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철암역의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철암역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철암탄광역사촌’이 있다. 건너편 철암천변에는 낡은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당장 내일 허물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건물들에는 단란주점, 대성사, 현덕건설, 진주성, 대성식당, 제일당, 호남슈퍼 같은 온갖 간판들이 생기를 잃은 채 걸려 있다. 한때는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상가에는 이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이방인들이 두리번거리며 분주하게 건물들 사이를 들락날락 할 뿐이다. 이곳은 과거 탄광촌이었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사람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빈 건물만 남았다. 빈 건물을 두고 철거와 보존을 두고 의견들이 엇갈렸지만 결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 두기로 했다. 탄광촌이 역사촌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순대국밥과 소고기국밥을 팔던 경북식당 입구 벤치에는 광부가 혼자 앉아 있다. 갤러리가 된 호남슈퍼에서는 지역 화가의 전시회가 열린다. 자료와 전시품을 통해 애잔한 파독 광부들의 삶도 접할 수 있다. 채굴 작업을 마친 광부들은 기름기 많은 돼지고기와 술로 작업 중 들이 마신 탄가루를 씻어내고 다음날 또다시 수백m 땅속으로 들어가는 고단한 생활을 연속했다. 그 고달픔이 그림과 전시물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당시 종교계에서는 탄광촌을 ‘대낮부터 취한 주정뱅이 도시’라고 꾸짖고 계몽하려 했지만 어디까지나 타인의 뭣 모르는 시선일 뿐이다. 오늘날 저질과 타락의 끝을 ‘막장 드라마’ ‘막장 국회’라고 하는데 막장의 어원이 ‘탄광 갱도의 막다른 끝’이라는 설이 유력하니 광산촌 민초의 실상을 폄훼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 뒤편 철암천변으로 가면 ‘까치발건물’을 볼 수 있다. 까치발건물은 천변 위에 바닥에 목재나 철재 지지대를 덧붙여 주거 공간을 넓힌 주거 형태를 말하는데 지지대 모양이 까치발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철암 탄광촌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건물 구조이다. 철암천 건너편 산등성이에도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폐광촌 허름한 집들에 지금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탄광촌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전망대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 아흔 살이 넘었다는 할머니를 만났다. 30대에 광부 남편을 만나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단다. 남편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등졌다. 왜 혼자 이곳에 남아 있냐는 필자의 질문에 할머니는 ‘떠나고 싶어도 어디로 가냐?’며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이곳은 60년 동안 뿌리를 내린 삶의 터전이다. 평생 애증이 얽힌 곳이다. 떠나려도 떠날 수 없는. 전망대에 오르니 국가등록문화재 21호인 장성광업소의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太白鐵岩驛頭 選炭施設)이 훤히 보인다. 선탄시설은 탄광에서 채굴한 원탄을 1차, 2차, 3차로 선탄하고 이물질을 분리하고 가공 처리한다. 1935년에 철근 콘크리트와 강재를 이용해 만든 근대적 공법의 구조물이다. 지금도 가동 중이다. 시티투어를 신청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2024년 가동 중단이 예고돼 있다. 장성광업소가 멈추면 태백시 지역경제와 주민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질 것이다. 철암천과 맞은편 검은색 선탄시설에 노란색 햇살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근래에 만난 도시 중 가장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잿빛 탄광에 대비되는 총천연색 상장동 벽화마을 상장동 벽화마을은 150여명의 주민 대부분이 광부 출신인 태백선 문곡역 뒤쪽의 마을이다. 상장동은 함태광업소 사택촌이었다. 2011년 잿빛 탄광촌에 하나 둘씩 벽화가 그려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험난했던 기억을 지워버리느니 그림으로 보여주는 게 태백이 살 길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벽화를 남기게 했다. 고단했으나 행복한 시절 일상이 그림에 담겨 있다. 채탄 작업을 하는 광부, 골목 모퉁이에서 광부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녀, 진폐증을 앓다 하늘로 간 할아버지(고 김병태) 무르팍에 앉은 손자, 광부 청년과 처녀의 사랑, 만원짜리를 입에 문 강아지, 고참 광부들에 골탕을 먹는 신입 광부(일명 햇돼지) 등이 그림에 살아 있다. 죄다 가슴먹먹한 이미지들이다. 똑같은 탄광촌이어도 철암동에는 잿빛의 침울함이 남아 있다면 상장동은 어두운 커튼을 걷도 빛을 맞아들이는 분위기다. 외지인에게는 동일 시간대에 상이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들이다.
2022-08-22 08:43:54
강원도 태백시는 그 이름만으로 신령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태백이라는 지명은 단군신화에서 유래됐다. 태초에 하늘나라 하느님(환인)의 아들인 환웅천왕이 우리 민족의 터전을 잡은 곳이 바로 ‘태백산 신단수 아래’였다. 사람들은 태백산이 하늘과 바로 통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통로라고 생각했다. 신단수 아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성스러운 산으로 여겼다.사람들은 신화의 태백산(원래 북한의 백두산)과 가장 비슷한 산을 찾아 ‘태백산’으로 부르고 옛 풍습대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런 곳 중 하나가 태백시 태백산(太白山 해발 1567m)이다. 201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백산 정상에는 천제단(天祭壇)이 있어 매년 개천절인 10월 3일 천제를 올린다.태백시는 태백산 외에도 한가운데 자리한 연화산(1171m)를 중심으로 함백산(1573m), 매봉산(1303m), 대덕산(1307m), 금대봉(1418m), 은대봉(1442m), 두타산(1353m), 구룡산(1345m), 면산(1245m), 백병산(1259m), 응봉산(998m) 등에 둘러싸여 있다. 원래는 삼척군 장성읍, 황지읍이었으나 1981년 7월 1일 인구 과밀 해소와 국토 균형 발전 정책에 따라 태백시로 승격됐다.장성이라는 지명은 마을의 수호신을 의미하는 장승, 장생의 다른 이름으로 태백산 천제단으로 향하는 길목에 장생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연못이다.한때 태백시는 지나가는 강아지도 만원짜리 지폐를 입에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호황을 구가했었다. 장성에 탄광촌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반부터이다. 그전에는 화전을 일구고 콩이나 옥수수 등을 재배하던 곳이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로 인해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리자 태백에는 검은 돈이 몰렸다. 장성과 황지 인근에 크고 작은 석탄 광산이 마흔다섯 개나 있었다. 탄광 일대에서 영업하던 유흥업소가 500개가 넘었을 정도였다. 시로 승격한 1981년 도시 인구는 13만명에 육박했다.그러나 태백시가 호황을 누렸던 시간은 불과 20여 년에 불과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석탄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문을 닫는 탄광이 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89년 비경제적인 탄광은 정리한다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발표됐고 그와 동시에 태백, 정선, 영월, 삼척이 폐광 지역으로 결정됐다.이후 이들 시군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80년대 13만에 달했던 태백시 인구는 급격히 줄어 2022년 6월말 기준 4만85명에 불과하다. 마흔다섯 개에 달했던 탄광은 모두 폐광되고 장성광업소, 태백광업소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장성광업소마저 2024년 폐광될 예정이라 지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이 우려되는 상황이다.민족의 영산, 태백산태백산은 한강(검룡소)와 낙동강(황지)의 발원지다. 민족의 영산이고 살집 두툼한 육산(肉山)이며 후덕하고 큰 밝음이 있는 산이다. 등산로는 가파르지 않고 편안하다.조선시대 화가 이인상(1710∼1760)은 1735년 겨울, 사흘 동안 눈 쌓인 태백산에 오른 뒤 “태백산은 작은 흙이 쌓여 크게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고, 차차 높아져서 100리에 이른다. 결코 그 공덕을 드러내지 않으니, 마치 대인의 덕을 지닌 것과 같구나.”라고 말했다.태백산 등산은 사길령매표소, 유일사매표소, 백단사매표소, 당골매표소, 석탄박물관 등에서 시작하는데 어디서든 오르는 데 2∼3시간, 내려오는 데 2시간이면 충분하다.가장 무난한 게 유일사 코스다. 8분 능선을 따라 봄에 철쭉꽃이 만발하고 겨울엔 주목나무에 핀 눈꽃이 황홀한 평전(平田)을 지나 정상을 향하면 된다. 초중반이 약간 가파를 뿐 깔딱고개 같은 곳이 없다. 유일사 매표소가 이미 해발 890m이니 꼭대기 장군봉(1567m)까지는 677m만 더 올라가면 된다. 태백산 정상 부근엔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천제단이 3곳이나 있다. 가운데 천왕단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 장군단, 그 아래 하단이 있다. 천왕단이 가장 규모가 크다.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앞뒤 폭 8.26m. 보통 천왕단을 태백산천제단이라 부른다. 천제단은 본래 신라의 왕이 천신, 즉 단군과 산신을 모셧던 것이다. 신라의 삼신오악 중 북악에 해당하는 게 태백산이었다. 불교국가 고려 땐 태백산신령을 주로 모셨다. 유교국가 조선은 전기에 산신을 뺀 단군을 천왕(天王)으로 모셨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년) 이후 조선 후기에는 천신(天神)으로 다시 격상시켰다. 국세가 기울자 단군할아버지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강화도 참성단(塹星壇)이 국가의 공식 제천의례 장소였다면 태백산 천제단은 지방의 벼슬아치나 백성들이 중심이 된 제천 장소였다. 구한말에는 평민 의병장 신돌석(1878∼1908)이 백마를 잡아 천제단에서 제사를 올렸고 동학 등 신흥종교들이 ‘민족의 종산(宗山)’으로 떠받들며 태백산 아래로 모여들었다. 태백산은 오늘날 단군신화와 민간신앙이 혼재된 성지로, 이곳저곳에 촛불을 켜고 소원을 바라는 치성 기도처가 많다.태백산은 한반도 등뼈인 백두대간의 허리다.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으로 ‘한반도의 명치’다. 허리나 명치나 다치면 편히 살 수 없다. 두 곳 모두 ‘한민족의 혈처(穴處)’다.태백산 정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단종비각이 있다. 이 곳에서 망경사, 반재쉽터를 지나 백단사 매표소로 내려오는 길이 있다. 해발 1470m의 망경사(望鏡寺) 용정(龍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이라고 한다. 한강의 시원지, 금대봉골 검룡소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10분 간 달리면 삼수령이 나온다. 삼수령(三水岺, 해발 920m)은 한강, 오십천(五十川, 삼척시와 태백시 경계인 백병산(白屛山, 1259m)에서 발원해 동해안으로 흐르는 하천), 낙동강 물이 갈라진다는 곳이다. 북으로 흐르면 한강, 남으로 흐르면 낙동강. 동으로 흐르면 오십천이 된다고 한다.검룡소(儉龍沼)는 한강의 시원지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창죽동) 금대봉골의 분출수로 대덕산과 함백산 사이에 있는 금대봉 자락의 800m 고지에 있는 소다. 실제는 금대봉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검룡소보다는 1.5km 상류에 있는 제당굼샘(제당궁샘)이 한강의 시원이지만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 때문에 검룡소를 시원지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다.제당궁샘은 졸졸 흘러나오는 샘물인 반면 검룡소는 석회암반을 뚫고 하루 2000t가량의 지하수가 웅장하게 솟아나와 용틀임하며 바위를 적시니 가히 적장자라 아니할 수 없다. 9도의 냉천수가 사시사철 나오고 작은 폭포를 이룬다. 깊이 3m의 검룡소에 흘러나온 물이 1300리를 돌고 돌아 한반도를 적시고 곡식을 살찌운다는 게 경외스럽다. 검룡소에는 서해바다에 살던 이무기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최상류인 이 곳에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무기가 검룡소에 들어가려고 몸부림을 친 흔적이 폭포라는 얘기도 전해온다. 새벽녘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 소가 빠져 죽자 마을주민이 검룡소를 돌로 메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지금의 검룡소는 1989년 주변 재정화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과거에는 한강의 발원지가 평창 오대산의 우통수라고 알려졌으나 국립지리원의 조사 결과 우통수와 검룡소 물줄기의 합류지점인 강원도 정선군 나전(羅田)삼거리에서 측정해보니 검룡소 물줄기가 31km 더 긴 것으로 나타났다. 1987년 이후 국립지리원은 검룡소 물줄기를 한강의 시원으로 인정했다. 낙동강의 시원지, 황지연못모든 유기체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며 발전하듯 도시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런데 태백이라는 도시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듯하다. 1960년대 이후 생성된 ‘탄광도시’라는 관념은 2020년대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필자에게 오래된 상품의 태그처럼 따라다닌다. 그래서 태백시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산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태백시에 들어서는 순간 그동안의 관념들이 얼마나 낡고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 데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길동무가 되어준 수려한 풍광의 산세와 맑은 공기는 얼토당토하지 않게 ‘알프스 기슭의 아름다운 관광 산악도시’를 떠올리게 했다. 그 느낌은 황지동의 황지(黃池)연못에 오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제일 먼저 찾아 나선 황지연못은 낙동강의 발원지란 거대한 수식어에 비해 너무도 소박했다. 차를 가지고 갈까 하는 고민조차도 필요 없을 정도로 숙소에서 지척이었다. 태백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도 5분 거리다.크고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공원은 도심의 근린공원보다도 규모가 작다. 주민들과 관광객은 공원을 산책하고, 벤치에 앉아 대화하고, 아이들은 황지천에서 물놀이를 한다. 너무도 평화로운 시골마을의 저녁나절 풍경이다.황지 입구에 세워진 ‘낙동강 천삼백리 예서부터 시작되다.’라고 쓰인 거석만이 이곳이 낙동강의 발원지임을 알리고 있다.황지는 상지, 중지, 하지 등 크기가 제각기 다른 연못 3개로 구성돼 있다. 가장 큰 상지의 경우 둘레 100미터, 중지의 경우 50m, 하지는 약 30m 남짓의 아담한 연못이다.상지의 남쪽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수굴이 있고, 이 수굴에서는 하루 5000t 이상의 맑고 차가운 물이 솟아난다. 이 물은 황지천을 이루고 낙동강과 합류하여 경상남북도와 부산을 거쳐 남해로 흘러든다.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 등 옛 문헌에 황지가 낙동강의 근원지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동국여지승람에는 “황지가 낙동강의 근원지로서 관아에서 제전을 두어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올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매년 7월에 낙동강 발원제가 열린다.황지 연못에는 ‘황부자의 전설’이 전한다마을에 매우 인색하고 괴팍한 황씨 성을 가진 부자가 있었다. 하루는 한 노승이 황부자 집을 찾아와 시주를 청했다. 황부자는 시주 대신 쇠똥을 주었다. 이를 본 황부자의 며느리는 노승에게 대신 사죄하고 몸에 묻은 쇠똥을 닦아 준 후 쌀 한 바가지를 시주했다.노승은 “이 집의 운이 다하여 곧 큰 변고가 있을 것이니 살고 싶거든 나를 따라 오시오. 그러나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되오.”라고 일렀다. 며느리는 노승을 따라나섰다. 이들이 삼척군 도계읍 구사리에 이르렀을 때 뇌성벽력이 치며 황부자의 집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그런데 며느리가 노승의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황부자는 이무기로 변했고 며느리는 바위로 변해버렸다.이후 황부자의 집터는 황지가 되었고 며느리는 삼척시 도계읍 구사리에 미륵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연못의 한 귀퉁이에 황부자 집터라는 푯말이 보인다.황지연못 옆으로는 복원된 황지천이 흐르고 천변의 태백 중앙로 상점가에서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황부자 며느리 야시장’과 프리마켓이 열린다. 청년들이 운영하는 야시장에서 태백시 물닭갈비, 수제 버거, 태백 한우 등을 맛볼 수 있다.바람을 타고 오는 음식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와 파도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 여름밤을 기분 좋게 수놓는다.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작은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해발 900m의 고원에서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선율은 마법처럼 태백을 천상의 도시로 만들어 놓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에도 가을처럼 선선하다.구문소, 한반도 고생대 지질 변화의 타임머신 태백 도심에서 경상북도 봉화군으로 가는 31번 국도변 구문소동에는 구문소(求門沼)라는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신비한 지형이 있다. 구문소는 ’구멍’, ‘굴’의 고어인 ‘구무’와 늪을 뜻하는 ‘소’가 합해진 말로 산을 뚫고 흐르는 강의 모습을 볼 수 있다.강은 산을 넘을 수 없다고 했지만 구문소는 강이 산을 뚫고 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진귀한 지형이 아닐 수 없다.구문소는 이른바 ‘도강산맥(渡江山脈)’인데, 황지에서 발원한 물이 흐르며 석회암을 녹여내고 마침내 바위까지 뚫은 것이다. 황지천과 철암천이 구문소의 단층선을 따라 침식작용을 하다가 지하에 생성되어 있던 동굴과 관통돼 황지천이 흘러들면서 기어히 산맥을 뚫고 흐르는 것이다.높이 20~30m, 폭 30m의 거대한 무지개 모양의 석회암으로 이뤄진 구문소의 풍경이 이채롭다. 구문소 위의 크고 작은 삼형제 폭포는 으르렁대며 물살을 쏟아낸다.세종실록지리지 등 고문헌에는 구멍이 뚫린 하천이라는 뜻의 ‘천천(穿川)’으로 기록돼 있으며, 강이 산을 뚫고 흐른다 하여 ‘뚜루내(뚫은 내)’라고도 부른다.구문소 남쪽에는 자개문이라는 거대한 바위문이 서 있는데 이 길을 통해 봉화, 영주 등을 오갔다고 한다.황지천이 머물렀다 가는 구문소에는 효자 엄씨의 용궁 전설이 전한다. 예언서 ‘정감록’에는 이상향의 마을로 들어가는 석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중국 하나라 우왕이 단군에게 치수를 배우면서 구문소의 산을 칼로 찔렀다는 전설, 황지천의 백룡과 철암천의 청룡이 낙동강 지배권을 놓고 다투다가 백룡이 기습하면서 바우를 뚫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암벽을 뚫어놓은 도로가 나지 않았을 시절에는 구문소는 신비의 땅이자, 신선들이 사는 무릉도원으로 여겨졌다.구문소 위쪽으로는 구문소공원과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등이 조성돼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석고혼, 생혼 구조, 습곡 구조 등 황지천변의 다양한 지질 유형을 관찰할 수 있다.구문소 일대는 하부고생대에서 상부고생대의 부정합 관계를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석회암 층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퇴적 구조와 삼엽충 등 고생대 화석들이 잘 보존돼 있다. 한반도 고생대(약 5억~3억 년 전)의 퇴적 환경과 생물상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지역이다. 이러한 가치가 인정돼 구문소는 천연기념물 제417호로 지정돼 있다.
2022-08-17 10:42:41
삼척 여행에서 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우수해수욕장으로 선정한 삼척해변(갈천동)은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송림을 보유한 단일 규모로는 삼척 최대 해변이다. 파란집으로 회자되는 삼척 쏠비치 산토리니 리조트와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광을 자랑한다. 최근에 조성된 모래조각 공원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맹방해변은 삼척 시청에서 남쪽으로 약 12㎞ 떨어져 있다. 하맹방해변, 상맹방해변, 한재밑해변을 통칭하며 백사장의 길이가 4㎞에 달해 삼척 해변 중 가장 길다. 맹방해변 남쪽 끝 초당동굴에서 담수가 흘러나와 소한천에서 바닷물과 만난다. 담수목욕과 해수목욕을 동시에 즐길 만한 곳이다.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미항 장호항도 삼척에 있다. 장호항의 절묘한 해안선과 기암괴석을 한눈에 보려면 삼척해상케이블에 탑승하면 된다. 장호 탑승장과 용호 탑승장을 오가는 삼척 케이블카는 설악케이블카나 다도해 케이블카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푸르디푸른 동해 바다와 해안가를 빼곡하게 채운 신비로운 기암괴석이 발아래로 스르륵 지나간다.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 투명 카누를 즐기며 여름을 만끽하는 휴양객들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게 만든다. 용호역에는 갈매기공원과 전망대 및 카페 등이 조성돼 케이블카에서 내려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초곡용굴 촛대바위길장호항에서 울진 방향으로 더 내려가면 초곡용굴촛대바위길이 있다. 구렁이가 승천한 장소라는 전설을 가진 초곡 용굴 일대에는 촛대바위, 거북바위, 사자바위 등 신기한 형상의 바위들이 즐비해 탄성을 자아낸다. 일찍이 해금강으로 불렸던 곳으로 과거에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으나 2019년 초곡용굴촛대바위길이 개장됨에 따라 걸어서도 신비로운 동해 바다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잔뜩 기대를 안고 갔건만 2022년 7월 안전성 검사에서 탈락해 올 말까지 통행이 금지된 상태라 초입에서 발걸음을 돌려야만했다. 그럼에도 동해 절벽길을 걸으며 동해바다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휴가철 북적대는 해수욕장을 피해 한적한 초곡항 산책도 나쁘지 않다. 환선굴덕항산 자락의 석회암 동굴인 환선굴(幻仙屈)은 장님굴새우 등 희귀동식물이 자라고 아름다운 석순과 종유석이 있다. 오래 전 수도승이 기거하던 온돌터와 아궁이도 남아 있다.굴피집, 너와집신기면 대이리에는 굴피집과 너와집이 있다. 굴피집은 굴참나무껍질로, 너와집은 얇은 소나무 판으로 지붕을 올린 집이다. 굴피집(중요민속자료 223호)는 300년 전에 지어졌다. 너와 채취에 어려움을 겪자 1930년대 이후 굴피집이 주류를 이뤘다. 대이리 너와집(중요민속자료 221호)는 350년 전에 지어졌다.척주동해비( 陟州東海碑)와 평수토찬비(平水土贊碑)죽서루에서 정라진(汀羅津) 사이의 정상동에는 두 비석이 있다. 육향산이라는 작은 동산에 우암 송시열과 예송논쟁을 벌인 미수 허목이 쓴 글을 새긴 비석이다.1661년(현종 2년) 삼척부사로 재직하던 당시 태풍과 해일이 잦자 동해를 예찬하는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만리도 바닷가에 세우니 풍랑이 진정됐다고 한다. 그래서 퇴조비(퇴조비)라고도 한다. 신라시대의 피리 ‘만파식적’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 영조 때 학자인 홍양호(洪良浩)는 “지금 동해비를 보니 그 문사(文辭)의 크기가 큰 바다와 같고, 그 소리가 노도와 같아 만약 바다에 신령이 있다면 그 글씨에 황홀해질 것이니, 허목이 아니면 누가 다시 이 글과 글씨를 썼겠는가”라고 감탄했다.평수토찬비는 척주동해비와 같은 내력을 지닌 비석으로 규모·양식은 같다. 허목이 중국 우제(禹帝)의 전자비(篆字碑)에서 48자의 글씨를 모아 거친 파도가 삼척부내에 미치지 말라는 내용을 담아 새겼다. 허목은 남인의 리더로 가장 과격하게 서인과 맞섰다. 젊어서 벌을 받아 과거를 치르지 못했으나 그러고도 정승 반열에 오른 신묘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선 수령을 맡아서는 백성과 함께 실질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부터 실학이 태동했다는 시각도 있다. 허목은 당시에 가장 전서(篆書)를 잘 쓴 서예가이기도 했다. 그의 글씨에는 신비주의가 엿보인다는 평가다. 현 비석은 1710년(숙종 36년)에 삼척부사 박내정(朴來貞)이 유실된 비석의 탁본을 떠 옛 비석과 같은 비석으로 지금의 자리에 다시 만든 것이기에 진짜 허목의 글씨와는 차이가 있다. 풍랑에 의해 또는 정적에 의해 원래 비석이 훼손됐다는 설이 전한다. 삼척 공양왕릉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는 공양왕릉이 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의 공양왕릉과 구분해 삼척공양왕릉이라고 한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고 마지막 유배지이자 사사지(賜死地)인 삼척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가 죽은 고갯길을 지금도 살해재라고 한다. 고려왕조가 망한 지 2년 뒤인 1394년 그가 죽었다. 삼척사람들은 의리를 강조하며 바다에 어룡제를 올릴 때마다 공양왕 제사를 지낸다. 삼척 공양왕릉은 왕자 두 왕자, 시녀 혹은 왕이 타던 말의 무덤 등 총 4명이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태종때 공양왕으로 추존하고 왕과 왕비의 쌍릉을 고양에 조성했다. 삼척사람들은 공양왕의 목만 잘려 고양에 모셔져 있을 뿐 몸체는 삼척에 있다고 애써 믿으려 한다.
2022-07-27 14:21:39
삼척시 성내동 죽서루를 지은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천은사’에 가 멈추게 된다. 두타산 동쪽 자락에 자리 잡아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한 마을 여러 개를 지나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천은사(天恩寺)로 향하는 길은 마치 세상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마을이 끝나고 절 자락이 나올 즈음 문득 아주 깊은 산속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산이 깊은 탓일까. 천은사로 오르는 길은 햇빛 한 자락도 인색하기만 하다. 계곡은 깊지만 물이 적어 마른 계곡이고 푸른 이끼가 푸른 멍처럼 바위들을 뒤덮었다. 계곡에 가득한 음산한 기운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하지만 일주문을 지나 절로 향하는 들머리 길은 울창한 숲, 특히 쭉쭉 뻗은 침엽수림과 수백 년 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숲이 일품이다. 천은사는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두타삼선이 백련(白蓮)을 가져와 창건한 절로 백련대로 불렸다. 흥덕왕 4년에 대웅보전을 건립한 후 절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들머리를 올라 절에 도착해 마주한 천은사는 두타산 천년고찰이란 수식에 비해 훨씬 아담하고 소박해 보였다. 중심 전각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약사전, 설선당, 삼성각, 보광루, 범종각 등이 있다. 극락보전에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이 봉안돼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7호이다. 대나무, 소나무, 매화나무 등 문살 모양이 고운 약사전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8호인 ‘삼척 천은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 모셔져 있다. 삼성각에 올라 천은사를 굽어보니 천은사가 얼마나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절인지 실감할 수 있다.이곳에서 고려시대 이승가 10여 년 동안 기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했다. 고려 고종 11년에 태어난 이승휴는 12세에 원정국사의 방장에 들어가 신서(申諝)를 스승으로 모시고 좌전과 주역 등을 익혔고, 고종 39년(1252)에 과거에 급제해 두루 관직을 섭렵했다. 과거 급제 다음 해에는 홀어머니가 계신 삼척현에 갔다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혀 두타산 구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기도 하였다.경흥부서기, 도병마녹사, 감찰어사, 우정언 등 관직을 거치며 국왕과 측근들의 전횡을 직언하다 여러 차례 파직 당했다. 충렬왕 6년(1280)에 파직 당한 후 삼척현 구동, 지금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이라는 초막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며 제왕운기를 집필했다.충렬왕 13년(1287)에 저술한 제왕운기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읊은 역사서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중국인과 다른 천(天), 즉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으로 기술하며 단군신화를 한국사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며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로 바라본 관점은 기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차별화된다. 제왕운기는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강조해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이승휴는 언덕 위에 용안당을 짓고 생활했다. 용안당 남쪽에 우물을 만들어 표음정이라 불렀으며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보광정이라 불렀다. 보광정 아래에는 연못을 만들어 지락당이라고 불렀다. 현재 용안당 자리에는 천은사 주지스님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연못 맞은편에 동안거사를 모신 사당이 있다.천은사 경내 숲속 곳곳에 보이는 나무판자와 굴피를 엮어 만든 움집은 ‘통방아’이다. 통방아는 물을 이용해 작동시키는 방아로 과거 천은사 일대가 삼척현 구동마을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최근 복원했다.천은사를 떠나기 전 처사님에게 준경묘와 천은사의 관계를 물었더니 “옛날에 천은사에서 준경묘 제사 지낼 때 쓰이는 제물을 준비했어요.”라는 말과 함께 “시간 되시면 한번 들러 보세요. 볼만합니다. 소나기가 올 것 같으니까 비옷과 우산도 챙겨 가시고요.”라는 말을 덧붙였다.준경묘는 천은사에서 거리상으로 14km 남짓으로 10여 분이면 도착하지만 묘역까지 2km에 달하는 산길을 올라야 한다기에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시간이 오후 3시가 다 되어 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런데 처사의 적극적인 권유 한 마디에 내 마음은 벌써 준경묘로 향했다. 처사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준경묘가 위치한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는 활을 쏘던 곳이라 하여 활터 또는 활계라고 불리던 곳이다. 활기리의 인적 없는 도로를 따라 달리니 옛날 유배 가던 선비의 심정이 이랬나 싶다. 끝도 없는 망막함이라고나 할까. 사람도 차도 없는 도로를 달려 활기리에 도착하여보니 마을이 제법 번듯하다. 준경묘 앞에는 관광안내소가 설치되어 있고, 문화 해설사까지 두고 있다. 하늘은 맑았지만 천은사 처사의 말이 떠올라 작은 우산을 챙겨 준경묘로 향했다.준경묘로 향하는 임도에는 차단기가 내려져 있어 차량 운행이 불가능하다. 죽으나 사나 산길을 올라야 한다. 누군가의 산소로 향하는 길은 어찌 됐든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은 아니다. 하물며 인적 없는 깊은 산길이라면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발 빠른 사람에게는 왕복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필자처럼 다리가 무거운 사람에게는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정비도 안 된 오르막 숲길을 오르면 평평하게 다져진 시멘트 길이 나오고 다시 오솔길로 이어진다.묘역에 도착할 무렵 단정하게 지어진 목조건물이 나오는데 뜻밖에도 화장실 건물이다. 역시 한국의 화장실 문화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도 남는다. 화장실을 지나면서부터 송림은 더 울창해지고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솟구치는 듯하다. 붉은색을 띠는 곧고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들이 마치 묘역을 감싸고 있다.준경묘 소나무들은 금강송 중에서도 특히 황장목(黃腸木)이라고 불리는 최고의 소나무들로 조선 후기 경복궁 중수 때 목재로 사용됐다. 화재로 전소된 남대문 복원 때에도 쓰였다. 금강송은 ‘백두대간 금강산에서 경북 영덕에 걸치는 산악지대에 주로 자라는 질 좋은 소나무의 한 품종’이라고 정의돼 있지만 크게 보면 육송에 속한다. 육송은 국내에서는 해송(곰솔)에 비해 적통으로 여겨진다. 강송, 홍송, 적송 등이 금강송의 다른 말이다. 황장목은 금강송과 같은 말이다. 누런 창자저럼 목재 속이 황금빛처럼 누렇다는 의미다. 금강송, 강송, 적송, 홍송, 춘양목, 조선소나무는 일제 강점기에 붙은 이름이라 최근엔 황장목으로 순화하자는 의견도 있다. 지역에 따라 경북 봉화에서 나면 춘양목, 울진에서 나면 울진송, 충남 태안 안면도에서 나면 안면송이라 부르는데 모두 육송 계열의 적송들이다. 2001년 산림청 임업연구원은 충북 보은군 정이품송을 복원할 가장 우량한 형질의 소나무를 5그루 찾았는데 이 중 준경묘에서 2그루, 울진군 소광천에서 2그루, 강원도 평창에서 1그루가 선발됐다. 이들 소나무가 국내 최고의 미인송인 것이다. 준경묘와 가까워질수록 소나무들은 더 촘촘하게 서 있다. 그 모습에 넋을 잃고 있는데… 갑자기 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늘게 시작된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은 빗방물로 변했다. 천은사 처사의 말을 듣고 혹시나 하고 챙겨 온 우산을 펴면서 야릇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홍살문이 보이고 이내 넓고 편편한 대지가 펼쳐진다. 묘역까지는 홍살문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했는데 일대는 마치 울창한 숲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새로운 땅이 돋아난 듯했다.준경묘(濬慶墓)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인 이양무 장군(李陽茂, ? ~ 1231년, 고종 18년)의 묘다. 예전에는 이 무덤의 위치를 몰랐으나 세종대에 사람들의 전하는 말과 기록을 참고해 1899년(조선 고종 3년)에 묘소를 구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세우고 준경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이미 성종 때 이곳에 묘를 조성하려 했으나 여러 논란 끝에 중단된 바 있다. 성종대에 이어 고종대에 두 차례 성역화 작업이 이뤄졌기에 준경묘는 원시림 상태의 금강송 숲을 유지할 수 있었다.이성계 조상의 실묘 중 남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묘이다. 그러나 학계에서 사후 668년이 지나서야 공인된 준경묘의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천하의 명당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조의 4대조인 이안사는 전주에서 아전으로 지내다 산성별감과 기생을 사이에 두고 다투다 삼척으로 피신했다. 삼척으로 이사 온 지 1년 만에 부친상을 당한다. 일화에 따르면 이안사가 아버지의 묏자리를 찾아 헤매다 지쳐 나무그늘에 쉬고 있는데 도승과 어린아이가 나타나 ‘길지로다. 대지로다’하는 소리를 엿듣게 된다. 이어 도승이 ‘소 100마리를 잡아 개토제를 지내고 널을 금으로 하면 5대손 안에 임금이 날 것’이라고 하는 것까지 죄다 들었다. 살림이 넉넉지 못한 이안사는 고심 끝에 소 100마리를 잡는 대신 흰소(백우) 한 마리를 잡고 금관 대신 황금빛 귀리 짚으로 널을 만들어 묻었더니 뒤에 이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목조는 산성별감이 삼척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추종자 170명과 함께 함경도로 이주(도주?)했다. 세월이 흘러 익조, 도조, 환조, 태조가 태어났다. 제실 앞에는 “준경묘 진응수’가 흐른다. 땅의 생기가 넘쳐흘러 지상으로 분출되고 있는 진응수를 마시면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진다고 한다. 주변에 소나무 숲을 보며 크게 호흡하고 진응수도 한 바가지 퍼 올려 꿀떡꿀떡 삼킨다. 필자는 삼척 여행 후 크게 몸살을 앓았으니 명당의 기운도 받을 준비가 된 자에게만 베풀어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빗속에서 준경묘를 방문하고 내려오니 거짓말같이 하늘이 갠다. 이래저래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준경묘에서 4km 떨어진 미로면 하사전리에는 삼척 이씨 이강제(李康濟) 장군의 딸이자, 이양무의 아내이자, 목조의 모후를 모신 영경묘(永慶墓, 강원도 기념물 제43호)가 있다. 하사전리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200m쯤 올라가면 영경묘가 나온다. 능 아래에는 목조가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다.준경묘와 영경묘 일원의 숲은 2005년 제6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100년 이상된 금강송이 20~30m 높이로 장대하게 서 있는 풍경은 가히 선계(仙界)라 아니할 수 없다.
2022-07-26 09:33:58
7월 중순 흐리긴 했어도 멀쩡했던 하늘이 대관령 터널을 지날 즈음에는 하늘은 시커메지고 천지가 짙은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개 터널을 빠져나가자 거짓말같이 하늘이 개이고 푸른 바다가 눈앞에서 일렁인다. 동해시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동해 휴게소를 지나면 이내 아름다운 푸른 물결이 푸른색 명주실처럼 이어지며 푸른 도시 삼척시가 펼쳐진다. 강원도 동남단의 삼척은 동해시와 경상북도 울진군 사이에 있다. 동쪽에는 맹방 등 아름다운 해변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서쪽 땅은 백두대간이 너무 높아 잠시 머무르기에는 좋지만 오래 머무르며 살 곳은 못된다고 할 정도로 험준한 산맥이 펼쳐진다. 그런가 하면 ‘논에 종자 한 말을 뿌리면 40말을 거둔다’고 할 정도로 기름진 땅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삼척은 신라 파사왕 때 신라에 병합됐고 경덕왕 때 삼척군이 됐다. 조선 태조 2년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의 처가가 있던 고을이라 하여 부로 승격됐다. 태종 3년에 군정의 중심이자 오늘날 특례시에 정도에 해당하는 도호부가 됐다.지금의 동해시와 태백시는 과거에 모두 삼척군에 속했으나 1980년 삼척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이 통합하여 동해시로 떨어져 나갔다. 1981년에는 삼척 장성읍과 황지읍이 합해져 태백시로 분리됐다.삼척시 도계읍 구사리 백산 근처 큰덕샘에서 발원한 하천이 장장 60km를 흘러 근덕면 정상리 동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백두대간 발원지에서 동해까지 무려 50여 회를 휘돈다 하여 오십천이라 부른다. 이 오십천은 보물 213호로 지정된 죽서루(竹西樓) 아래를 휘돌며 못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삼천포가 되어 동해로 흘러든다.오십천이 휘돌아가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죽서루가 우아하게 서 있다. 관동팔경 중 제1경이다. 관동은 대관령의 동쪽을 말하고, 관서는 금강산 북쪽 끝자락인 철령의 서쪽을 뜻한다. 관북은 철령의 북쪽으로 이른 바 함경도 지역이다. 관남은 조령관의 남쪽을 말하는데 흔히 영남이라 한다. 영남은 고개의 남쪽이란 뜻으로 문경새재가 조선팔도의 대표적 고갯길로 각인돼 있어서다. 관동팔경은 삼척 죽서루를 비롯해 고성군 간성읍 청간정(淸澗亭), 강릉시 경포대, 고성군 삼일포(三日浦), 북한 강원도 통천군 총석정(叢石亭), 양양군 낙산사(洛山寺),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越松亭), 울진군 근남면 망양정(望洋亭)을 말한다. 월송정 대신 통천군 흡곡면(歙谷面)의 석호인 시중호에 인접한 시중대(侍中臺)를 꼽기도 한다. 관동팔경 모두 바다와 근접해 있으나 죽서루만이 바다와 직접 면하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에 “죽서루는 객관 서쪽에 있다. 절벽이 천 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날아갈 듯한 누각을 지었는데 죽서루라 한다. 아래로 오십천에 임했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어서 영동 절경이 된다.” (신정일의 택리지에서 재인용)개장을 십여 분 앞둔 죽서루는 정적이 감돌았지만 10여 년 전 겨울 찾았다가 실망감만 안고 돌아섰던 죽서루가 아니었다. 입구에는 널찍한 주차장을 갖추었고 관광안내소도 설치돼 있었다. 어엿한 관광 명소의 면모를 풍기고 있었다.기억 속에 남아 있는 죽서루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듯한 남루한 정자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의 죽서루는 문헌의 기록이 걸맞게 단장했다.우선 죽서루를 감싸고 있는 울창한 숲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된 나무들이 연륜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 죽서루 입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회화나무 세 그루는 수령 350년이 넘어 보호수로 지정됐다. 관동팔경 중 바닷가에 접하지 않는 유일한 정자인 죽서루는 정면 7칸에 측면 2칸으로 지어졌다. 규모 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죽서루는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처음 지었다. 이승휴는 고려 충렬왕 때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원의 횡포와 왕의 실정을 비판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성, 삼척 등을 전전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삼척(지금은 동해시) 두타산 아래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집필했다.그 뒤 조선시대 태종 3년(1403년)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중창하였다. 죽서루를 세울 당시 죽죽선(竹竹仙)이라는 기생이 살던 집이 누각 동쪽에 살아 죽서루라 이름지었다 한다. 또는 누각 동쪽에 절집인 죽장사(竹藏寺)가 있어 죽서루라는 설명도 있다.죽서루는 여러 면에서 압도적이다. 규모가 그러하고, 누각을 올릴 때 자연 암반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기둥을 ‘그랭이질’하여 암반에 맞추고 위치에 따라 길이를 달리 한 점 등 건축적 솔루션도 단연 돋보인다. 한국 건축의 모든 것이라고 극찬한 책도 있다. 암반 위를 조심스럽게 올라 누각 앞에 서면 불현듯 펼쳐지는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오십천 물길이 그지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비 갠 봄날의 풍경은 우화등선한 듯 신비감을 자아낸다. 누각 안에는 수많은 묵객들이 남긴 현판 등이 눈길을 끈다.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를 비롯해 율곡 이이(1536~1584), 송강 정철(1536~1593), 미수 허목(1595~1682) 같은 쟁쟁한 문인의 글이 걸려 있다. 남인의 영수였던 허목이 쓴 ‘제일계정(第一溪亭)’, 이성조가 쓴 ‘관동제일루’, 이규헌이 쓴 ‘해선유희지소’ 등의 현판이 돋보인다. 죽서루 오른편에는 ‘관동별곡’을 남긴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송강은 전남 담양의 식영정(息影亭)에서 ‘성산별곡’을, 이곳 죽서루에서 ‘관동별곡’을 지었다. 이규헌은 1835년(헌종 원년)부터 1839년(헌종 5)까지 5년 동안 삼척부사로 재직하면서 백성들의 세 부담과 요역 감면을 위해 노력했으며 유학을 장려했다. 죽서루 아래 방수제를 쌓고 ‘빙월루’, ‘원풍루’ 등의 현판을 써서 걸었다. 죽서루 앞 동헌 터에 그의 ‘흥학비’가 남아 있다.죽서루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화가인 겸재 정선이 1738년에 그림으로 남겼다. 뿐만 아니라 단원 김홍도, 표암 강세황이 50년 뒤인 1788년에 죽서루를 그렸다. 다만 단원의 그림은 후배 화가가 모사한 것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당시 그림에는 누각 좌우에 가히 높이 10m쯤 되는 회화나무로 추정되는 두 거목이 버티고 있다. 당시 그림 속 좌우의 부속 누각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죽서루의 왼편 대나무 숲 인근 선사시대 암각화와 용문바위 등도 놓쳐서는 안 될 볼거리이다. 보통 해안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기묘묘한 바위가 넓게 분포돼 신비스럽기까지 하다.죽서루 용문바위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생겨난 바위라고 한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켰는데 어느 날 오십천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가면서 바위에 구멍이 뚫린 것이 지금의 용문바위다. 그 후 용문바위는 장수와 다복, 다산을 비는 기원처가 되어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그런가 하면 용문바위에 여성 생식기 모양의 구멍을 새겨 넣은 성혈(性穴)이 남아 있다. 성혈은 선사시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원시 신앙의 한 형태인데 조선시대에는 아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 구멍에 좁쌀을 담아 놓고 치성을 드린 다음 그 좁쌀을 한지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기자(祈子) 민간신앙이 성행했다고 한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월칠석은 이런 이벤트가 성황을 이뤘다. 죽서루 암각화에는 직경 3~4cm, 깊이 2~3cm크기의 성혈 10개가 남아 있다.죽서루 주변은 삼척 도호부 관아 유적지 복원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 다소 어수선하다. 공사 현장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삼척읍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 천천히 둘러보기 좋다.기록에 따르면 삼척읍성은 고려 시대에 토성으로 축성됐고,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민가 건축 등으로 흔적이 많이 훼손되어 원형 파악이 쉽지 않다. 2010~2012년 죽서루 주변 복원사업 과정에서 삼척읍성의 토성과 석성이 확인되었다.
2022-07-25 09:47:04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 코로나19)의 장기화로 비대면 여행지들이 각광을 받으면서 강원도 양구, 화천, 홍천, 인제 등이 핫한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고산준령과 큰 강과 호수 등이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 경관과 청정한 생태환경을 자랑하는 지역들이다. 서울에서 2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어 당일치기 여행지로 인기다.홍천은 가리산 자연휴양림과 삼봉산 자연휴양림, 팔봉산 유원지 등 자연 속에서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들이 넘쳐난다. 이밖에 미약골, 가령폭포, 공작산 수타사 용소계곡, 살둔계곡, 가칠봉 삼봉약수 등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명산을 품고 있다.산림청 100대 명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공작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천년 고찰 수타사(壽陀寺, 동면 덕치리)에서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족적을 살펴볼 수 있다. 왕이 직접 편찬한 단 한 권의 불교서적인 ‘월인석보’(月印釋譜, 보물 745호)도 만날 수 있다.또 내촌면 백암산 남쪽 자락에는 강원도 내 단일 유적지로는 최다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물걸리사지’(物傑里寺址)가 있어 즐거운 답사 여행이 될 것이다.홍천은 우리나라 나라꽃인 ‘무궁화’의 고장이자 동학농민운동 및 독립운동의 기운이 서린 고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인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 1863~1939 선생은 홍천 서면 모곡리에 터를 잡고 모곡학교를 세우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무궁화 보급에 앞장섰다. 홍천군에 조성된 전국 최초의 무궁화 테마 수목원인 ‘홍천 무궁화수목원’ 방문은 나라꽃 무궁화의 아름다움과 의의를 새삼 깨닫는 여행길이 될 것이다.바야흐로 계절은 가을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이 아름다운 홍천으로 길을 나서보자.한국 100대 명산에 공작산, 계방산, 응복산, 가리산, 팔봉산 등 5개나 이름 올려강원도의 중서부 태백산 서쪽에 위치한 홍천군은 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동서 300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서로 길게 늘어진 지형이다. 실제 남북은 39.4km에 불과한 반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는 96.1km에 달한다. 동서로 지형적 특성 등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태백산맥 서쪽 경사면에 면한 홍천의 동쪽은 계방산(1,577m), 응복산(1,360m), 가리산(1,051m) 등 해발 고도 1000m가 넘는 고산준령들이 즐비하다. 서쪽으로 오면서 산세는 점차 완만해져 팔봉산(327m)처럼 낮은 산들이 자리하고 있다.홍천의 산들은 한국의 100대 명산에 다섯 개나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가리산은 ‘강원 제1의 전망대’로 불릴 정도로 눈앞에 펼쳐지는 연봉과 소양강의 어우러짐이 절경이다.계방산은 희귀한 식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공작산은 아름다운 계곡과 가을 단풍, 생태숲 등으로 명성이 높다. 홍천강이 휘돌아 나가는 서쪽의 팔봉산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절경을 자랑한다.이밖에 홍천강의 발원지이자 깨끗한 용천수가 40리를 흐른다는 미약골,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10km 이어지는 용소계곡, 천연기념물 어름치와 열목어가 서식하는 1급 청정수가 흐르는 살둔계곡 등이 홍천 9경으로서 비경을 자랑한다. 하루에 다 방문할 수 없으니 순서를 정해야 한다.홍천 무궁화수목원 … 민족 대변한다며 상징 꽃 핍박한 건 일본이 세계 유일 사례홍천군 북방면 능평리에는 국내 최초로 무궁화를 테마로 조성된 ‘홍천 무궁화수목원’이 있다. 총 6.7ha 규모의 부지에 조성된 수목원에는 무궁화품종원을 비롯해 억새원, 장미원, 향기원, 단풍나무과원, 암석원, 무궁화미로원, 전나무원 등 16개의 주재원이 있다. 무궁화품종원에는 112개 품종, 총 8000여 그루의 무궁화가 심어져 있다.무궁화(학명 Hibiscus syriacus)는 아욱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으로 7~9월 사이에 핀다. 태양과 함께 꽃을 피우고 다음날에도 다시 같은 모습을 반복해 ‘태양의 꽃’으로 불린다.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과 달리 석 달 여름 내내 피고 지고를 되풀이한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는 우리 민족을 상징해왔다. 일제는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동일시해 무궁화 묘목을 불태우고 무궁화 씨를 말리려고 했으니 우리 민족의 수난사가 곧 무궁화의 수난사였다. 전 세계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특정식물이 가혹한 수난을 겪은 일은 무궁화가 유일하다고 한다.오늘날 홍천이 ‘무궁화의 고장’으로 알려진 데에는 홍천 출신인 남궁억 선생의 영향이 지대하다. 대한제국 말의 사상가,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로서 독립협회 수석총무, 황성신문사 초대 사장 등을 역임했다.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홍천으로 낙향한 남궁억은 1918년 모곡학교를 세우고 학생 실습지에 무궁화 묘목을 재배, 전국 각지에 보내어 무궁화 심기 운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33년 ‘무궁화 사건’이 터졌다. 일제가 불온한 사상을 퍼뜨린다며 남궁억을 비롯한 교직원, 친척들까지 모두 체포하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운 사건이다. 이 무궁화 사건 취조 중 기독교 비밀결사 십자당이 발각돼 남궁억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1935년 병 보석으로 풀려난 남궁억은 이후 건강이 악화돼 1939년 눈을 감았다. 그가 마지막 남긴 유언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 나는 독립을 못 보고 너희는 볼 것이니.”무궁화 사건은 무궁화가 민족의 꽃, 민중의 꽃, 나라의 꽃으로 더 확고하게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한서남궁억광장’에는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동상 뒤로는 다양한 품종의 무궁화 묘목이 내년 7월 꽃을 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홍천 무궁화수목원에는 중앙광장의 대형 무궁화 조형물과 무궁화 지도를 비롯해 화장실 옥상에 설치된 ‘무궁화 모자이크’, ‘동트는 홍천’과 같은 무궁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예술작품 등이 설치돼 있다.이밖에 어린이 놀이터와 체험관, 카페 등 휴식과 체험 공간을 갖추고 있어 어린 자녀들과 함께 방문하기에 좋다. 지난 10월 초에는 ‘숲속 도서관’이 개관해 자연과 독서를 동시에 즐길 수 있게 됐다. 도서관 옥상 전망대에서 보는 파노라마 풍경과 입구에 세워진 ‘무궁화집’도 놓치지 말자. 유럽의 작은 예배당을 연상시키는 흰색 건물이 인상적인 ‘무궁화집’은 봄 가을로 코스모스와 청보리 등을 심어 주변 경관도 아름답다. 새로운 포토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여백이 아름다운 폐사지, 홍천 물걸리사지누군가 그랬다. 폐사지에는 여백이 있어 좋다고. 그리고 그 여백을 나름의 상상으로 가득 채울 수 있어 좋다고. 수백 년 혹은 천년의 세월을 기다려 결국에는 존재를 드러내고야 마는 폐사지의 미학은 바로 여백과 기다림이 아닐까.태백산맥의 서쪽 홍천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 절터가 남아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그 절터에 다섯 개나 되는 보물이 있다는 사실 역시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한다.물걸리사지는 정확한 사명이 아니다. 절터에서 아무런 명문이 발견되지 않아 절 이름도 내력도 밝혀진 게 없다. 단지 통일신라시대의 홍양사 절터(洪陽寺址)라고 추정할 뿐이다. 그래서 절터의 이름도 마을 이름을 따서 물걸리사지라 부른다.1967년 이곳 민가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해 1971년 발굴 조사를 통해 발견된 철불 조각, 수막새 및 암막새 기와, 토기, 조선시대 백자 조각 등으로 미뤄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지된 사찰로 보고 있다.첩첩산중 강원도 홍천 산골에서 금동불상을 비롯하여 석조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상 등 거대한 석조 유물들이 발견되자 당시의 놀라움과 흥분은 밀림 속에서 앙코르와트 유적을 찾아낸 것에 못지 않았다.물걸리사지에서 발견된 3층 석탑(보물 제545호)을 비롯해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41호), 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제542호), 불대좌 및 광배(보물 제544호) 등은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드넓은 터에 혈혈단신 3층 석탑이 서 있고 나머지 불상들은 모두 보호각 안에 보호되고 있다. 거칠고 단단한 불상에서는 온화함과 자애로움이 배어 나오는 듯하다. 불상들은 대부분 온전한 형상을 갖추지 못하고 마모가 심하지만 규모나 조각 수법의 화려함이 압도적이다. 3층 석탑과 불상들은 모두 9세기 중엽 통일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다.물걸리사지에 대해서는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가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의 흔적과 연결 고리를 발견해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것은 후대인의 일일 뿐이라는 듯 물걸리사지 유적들은 말이 없다.삼부인 전설로 유명한 홍천 제1경 팔봉산 … 얕다고 우습게 알면 큰코 다쳐홍천군 서쪽 끝 서면 홍천강가에 자리한 팔봉산은 이름 그대로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해발 고도 327m의 나지막한 봉우리들이 잇달아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꽃봉오리처럼 곱다. 그러나 봉우리마다 암벽과 기암괴산을 품고 있어 절대 호락호락한 산이 아니다. 홍천군을 휘감듯 흐르는 홍천강과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이루며 홍천 9경 중 1경으로 꼽힌다.반짝 추위가 있었던 지난 주말 홍천 팔봉산을 찾았다. 강가에서 한 가족이 수제비 뜨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가을 햇살이 강 수면 위에서 하얗게 부서지고 갈대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홍천강 풍경이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강 건너편에는 봉우리의 윗부분만 똑똑 떼어낸 것 같은 야트막한 산들이 떡 버티고 서서 강기슭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잠시 후 내가 오를 팔봉산이다.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산행을 시작한다. 입구에 나무로 만든 남근목이 시선을 끈다. 팔봉산의 음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입구를 통과하니 곧바로 오르막 오솔길이 시작된다. 길이 아닌 곳에 억지로 길을 낸 모양새다. 이제 첫발을 디뎠을 뿐인데 잡목들이 우거진 컴컴한 숲에서는 서늘하고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 으스스하다. ‘이런 것이 음기일까’ 생각하며 계속 산길을 오른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돌로 된 좁은 길을 걷어야 하는 만만치 않은 길이다.10여 분 정도 지나 도달한 제1봉은 조금 실망스럽다. 제2, 3봉으로 갈수록 숲이 열리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동시에 봉우리도 점점 험악해진다. 거의 암벽 등반에 가깝다. 기다시피하여 겨우 제2봉에 오르니 삼부인당으로 불리는 제당이 나온다. 팔봉산에 전하는 삼부인 전설의 주인공들을 모시는 제당이다. 팔봉산에는 시어머니 이씨, 딸 김씨, 그리고 며느리 홍씨가 살고 있는데 질투심이 강해 시집가는 가마가 떨어지지가 않아 새색시들이 옷을 벗어 걸어 놓은 뒤에야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제당에서는 3월과 9월에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가 치러진다고 한다. 입구에서 본 남근목은 바로 이들 삼부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세운 것이다. 혹여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크기로 제작됐다고 한다.3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말 그대로 암벽 타기다. 등산 경험이 거의 없는 이들에게는 거의 ‘초죽음’ 코스다. 바위에 박힌 징을 밟고 기다시피 올라야 한다. 바위에 박힌 디딤대와 난간에 의지에 겨우 도착한 3봉은 지금까지의 고생을 순식간에 잊게 해 준다. 굳이 왜 드론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홍천강과 주변 일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동물의 등을 연상시키는 숲이 우거진 산을 사이에 두고 한쪽으로는 홍천강이 휘돌아 나가고 또 한쪽에는 자그마한 마을이 안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조금 더 멀리에는 첩첩 산에 둘러싸인 옹색하지만 황금빛 논과 들판이 펼쳐진다. 살짝 엉덩이를 틀어 앉으면 방금 차를 대고 올라온 주차장 일대가 들어온다. 팔봉산을 홍천 제1경으로 꼽는 이유를 알 것 같다.자리를 털고 일어나 ‘해산굴’이 있는 4봉으로 향한다. 해산굴을 생략하고 돌아서 갈 수도 있지만 4봉의 진수는 해산굴이라는 말에 시도해 보기로 한다. 해산굴은 어린아이도 빠져나가기 힘든 좁은 바위 틈을 비집고 나오는 어려움이 출산의 고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 굴을 통과하면 젊어진다고 하여 ‘장수굴’이라고도 불린다. 먼저 해산굴을 통과한 사람들이 뒤이어 굴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순산이요”하고 외쳐대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난다. 필자도 용기를 내어 해산굴을 통과했는데 굴을 빠져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잔뜩 힘이 들어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옆에서 재밌다는 듯이 ‘순산이요’하고 외쳐댄다. 주말이면 회춘과 장수를 바라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이어진다고 한다.이어지는 봉우리들도 모두 암벽이나 8봉은 특히 더 험하다. 노약자나 여성분들은 7봉에서 하산을 권고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하산하여 강가를 따라 다시 매표소로 나오면 된다.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팔봉산은 오르는 것이 힘든 만큼 보상도 확실한 산이다. 짙은 물색의 너른 홍천강이 휘어져 돌아 흐르고 그 넉넉한 물길 따라 사람들의 삶이 지속되는 가슴 뭉클한 풍광이 보고 싶다면 팔봉산을 오르라고 말하고 싶다. 단 필자 같은 등산 초보들은 기어서라도 오르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300m밖에 안 된다고 얕보다간 큰코다친다.공작산 수타사 … 생태숲과 산소길의 계곡 비경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듯 공작산 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천년 고찰이 있으니 바로 홍천 수타사이다. 신라 성덕왕 7년(708)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40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터에 조선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발발) 공잠스님이 중창했다.수타사란 이름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수타사 교각 아래 큰 물인 덕치천이 흘러 물이 두들긴다는 뜻으로 물 수(水)자와 떨어질 타(墮)자를 써서 수타사라 하였다. 그런데 매해 절 뒤에 있는 깊은 소에 승려들이 빠져 죽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승려가 이 모든 일은 이름 탓이라고 하자 목숨 수(壽)자와 아미타불에 쓰이는 타(陀)자를 써서 수타사라고 바꾸었다고 한다.공작산에서 발원한 덕치천에 놓인 수타교를 건너 천왕문을 들어서면 사천왕상이 반긴다. 봉황문이라고도 불리는 수타사 천왕문에는 수타사 소조사천왕상(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1호)들이 있다. 수타사 소조사천왕상들은 진흙을 바닷물에 적셔 6개월 동안 숙성시키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수타사에는 다수의 문화재가 전하는데 ‘월인석보 17, 18권’(보물 제 745-5호)과 ‘수타사 동종’(보물 제11-3호)이 대표적이다. 월인석보는 세조가 1459년(세조 5년)에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을 합해서 만든 불교서적이다. 왕이 직접 쓴 유일무이한 불교서적이자 최초의 한글 불교서적으로 한글의 변천을 알 수 있어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월인석보는 1957년 사천왕을 수리하는 중에 지국천왕의 복장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수타사 동종은 1670년(현종 11년)에 승려인 사인비구(思印比丘)와 장인 태행(太行)이 공동으로 완성한 조선 중기의 종이다. 몸통 밑 부분에 연호가 적혀 있어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조기법이 독특해 범종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중심 법당 대적광전의 닫집은 황룡, 풍령, 극락조, 악기 등으로 장식돼 보기 드물게 화려하고 장중해 눈여겨볼 만하다. 이 닫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됐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 월인석보, 후불탱화 등은 모두 수타사 보장각에 모셔져 있다.수타사는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와도 인연이 깊은 왕실사찰이다. 수타사가 공작산 자락에 조성된 정희왕후의 태봉(胎峯)을 관리하는 원찰이 됨으로써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왕문을 봉황문이라 부르는 것, 대적광전 지붕 위의 청기와 두 장 등은 모두 수타사와 왕실의 관계를 보여준다.수타사는 사찰뿐만 아니라 주변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 가을이면 수타사가 들어선 용담계곡은 넓은 암반과 기암절벽, 그리고 숲이 하나로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광을 선사한다. 굳이 숲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계곡 초입만 들어서도 만추홍엽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2021-10-23 22:47:59
화천군의 숨은 비경에는 곡운구곡(谷雲九曲)이 있다. 화천군 사내면의 15km에 이르는 아홉 구비는 제각각 이름이 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서 우리나라에서도 강원도 동해시 무릉구곡이나 충북 괴산군 화양구곡 등 이른 바 구곡으로 이름붙은 곳이 6곳이나 있고 곡운구곡도 그 중 하나다. 송나라 말 주자는 무이산 깊은 계곡에 배를 띄워 감상했다. 자연이 곧 정원이었고 도가에서 말하는 무릉도원이란 선경을 구곡으로 의념화하면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입신(入神)의 길을 꿈꾸었다. 곡운구곡은 안동김씨이자 서인인 곡운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1670년에 만들었다. 그보다 2년 전 강원도 평강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춘천을 거쳐 이곳을 지나가던 김수증은 일찍이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화악산 자락에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본래 시비를 꺼리고 산수를 좋아하는 김수증은 평강현감을 그만두고 다시 찾아와 농수정사를 짓고 머무르면서 빼어난 경치 9곳에 이름을 붙인 게 곡운구곡이 됐다. 1675년 겨울에는 아예 서울의 가족들까지 이주시켜, 띠집을 짓고 곡운정사(화음동정사의 이칭) 현판을 달았다. 김수증은 숙종 재위 당시의 당파싸움에 환멸을 느꼈다. 당시 양대 정파였던 서인과 남인은 갑인예송(甲寅禮訟, 며느리상에 대비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으로 치열하게 대립했으나,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서인은 실각했고, 성천부사였던 김수증은 벼슬을 내놓고 곡운구곡으로 은둔한다. 하지만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 남인인 영의정 허적이 허락없이 왕실의 장막을 사용한 문제)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김수증은 화양부사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게 되고 가끔 곡운구곡에 들른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지정하려는데 남인은 찬성하고 서인은 반대)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면서 서인의 거두 송시열과 김수증의 두 동생 김수흥 김수항이 죽게 된다.피를 부르는 정쟁과 끝없이 물고 물리는 정치 현실에 염증을 느낀 김수증은 곡운구곡으로 돌아가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둔한다. 이후 숙종이 지난날을 후회하며 폐비된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서인 역시 재집권 했으나, 김수증은 벼슬을 마다하고 곡운구곡을 떠나지 않았다. ‘나아가서는 백성을 다스리고, 물러나서는 학문의 도야에 힘쓰고 가르치는’ 성리학자의 길을 실현하고자 했던 김수증에게 곡운구곡은 은둔처요, 보금자리며, 이상향이었다.12세기 주자는 중국 무이산 아홉 굽이의 절경을 이루는 곳에 구곡을 설정하고, 무이정사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고려 말에 들어온 성리학은 조선시대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아, 선비들은 주자의 생활을 교과서로 삼았다. 그래서 풍광이 좋은 곳에서 구곡을 설정해 음미하기를 즐겼다. 김수증 역시 곡운구곡을 설정한 뒤 곡운정사기를 송시열에게 부탁하여 쓰고, 화가 조세걸에게는 곡운구곡과 농수정을 포함한 실경을 열 폭 비단 위에 담채로 그리게 했다. 김수증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지 지도했다고 한다. 이는 조선 후기 겸재 정선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의 토대가 됐다. 이전의 그림은 중국의 산수화를 보고 그린 모사로 진정 우리의 산수는 아니었다. 곡운구곡의 지금 위치를 찾은 것도 곡운구곡도를 참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곡운구곡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다가 지금은 춘천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300년전의 풍광을 그림으로 보며 지금의 모습과 비교할 수도 있고 자연세서 구원을 찾으려는 옛사람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 곡운구곡은 방화계(傍花溪 1곡), 청옥협(靑玉峽 2곡), 신녀협(神女峽 3곡), 백운담(白雲潭 4곡), 명옥뢰((鳴玉瀨 5곡), 와룡담(臥龍潭 6곡), 명월계((明月溪 7곡), 융의연(隆義淵 8곡), 첩석대(疊石臺 9곡)으로 이뤄져 있다.방화계는 춘천시 사북면 신포리에서 화천군 사내면 삼일리로 진입하는 56번 국도 초입해 있다. 꽃이 만발하는 계곡이란 뜻이다. 청옥협은 깊은 물이 옥색처럼 푸른 골짜기란 뜻이다. 높게 솟은 봉우리에 계곡물이 흐른다. 신녀협은 하곡의 딸 신려의 골짜기란 의미다. 계류는 잔잔히 흐르며 얕고 넓게 드러난 평탄한 바위와 벼랑의 소나무가 높다. 당시 신녀협 언덕인 수운대(水雲臺)를 매월대(梅月臺)라고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보고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백운담은 비온 뒤 물이 많아지면 물안개 흰구름처럼 부서지는 것을 말한다. 돌빛은 청색에 아주 깨끗하고 반석이 넓게 깔려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다산 정약용은 묘사했다. 곡운구곡 중 가장 기관(奇觀)이라고 평했다. 지금도 일반인의 눈길을 가장 많이 끄는 곳이다. 화음동정사가 있었던 곳이 백운담 인근이다. 여행객은 군부대 앞 4곡(백운담)으로부터 3곡, 2곡, 1곡으로 관람할 수 있다. 또는 4곡에서 5곡부터 9곡까지 답사하게 돼 있다. 명옥뢰는 옥비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여율 또는 작은 폭포를 말한다. 백운담보다 못하고 맑고 온화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정약용은 ‘곡운기’에 적었다. 용이 숨은 깊은 물이란 뜻의 와룡담(臥龍潭)은 김수증이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던 구곡의 중심 되는 곳이다. 농수정사는 시끄러운 여울물로 세속의 번거로움을 피하는 선비의 집을 말한다. 김수증은 농사정사를 완성하고 농수정도 지었다.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어 농수정사나 농수정을 복원하는 게 쉽지 않은 상태다. 명월계는 계류가 잔잔히 흐르는 평탄한 지형이다. 융의연은 제갈량의 김시습의 절의를 기리는 깊은 물이다. 지금은 산 아래 식당이 자리잡아 경관을 해치고 있다. 첩석대는 바위들이 층층히 쌓여 있어 수석의 아름다움이 빼어난 곡이다.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나 지금은 큼직한 몇 개의 바위만 남아 근대에 들어와 무분별하게 자행된 채석으로 인해 옛 경관이 망가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강과 화천읍이 한눈에 보이는 화천향교와 칠성루화천의 파로호, 평화의 댐, 곡운구곡까지 섭렵했다면 화천읍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화천읍 시외버스터미널에 서서 고개를 둘러보면 화천을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동산 같은 서화산(西華山)이 눈에 들어온다. 서화산 기슭에 화천향교와 칠성루(화천읍 상승로1길 48-16)가 세워져 있다. 읍내 마을에서 서화산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이내 향교 홍살문이 보이고, 뒤를 돌아보면 북한강과 화천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풍광에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 마냥 즐겁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 앞쪽으로 푸르디푸른 북한강이 넉넉한 품처럼 흐른다. 지금껏 본 향교 중에 최고의 전망이다. 홍살문에서 향교 입구까지 벚나무 터널이 이어진다. 벚꽃 명소로 이미 명성이 높은 곳으로 벚꽃이 날리는 봄날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는 곳이다.향교 바로 옆에 향교지기 집이 있고 향교지기 집을 통해 향교로 들어갈 수 있다. 마침 김칫거리를 다듬고 있는 향교지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향교로 들어선다. 명륜당 앞에 서니 입구에서 봤던 풍경이 더 시원하게 펼쳐진다. 강을 따라 산 쪽으로 오목하게 파인 작은 분지에 자리 잡은 화천읍의 모습이 참 정겹게 보인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선현에 대한 제사와 후대를 위한 교육공간을 만든 화천읍 사람들의 정성이 돋보이는 위치가 아닐 수 없다.화천향교는 유감스럽게도 6.25전쟁 중에 모두 파괴돼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1960년 대성전과 내삼문이 세워진데 이어 1974년 전교 박제묵의 주관하에 명륜당과 외삼문이 세워졌다. 그 후로도 단청 작업과 보수 작업이 이어졌고 1982년에 홍살문이 세워졌다.대성전의 문을 살짝 열어보니 중앙에 중국 5성의 위패가 있고 양옆으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나뉘어 세워져 있다. 얼마 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돗자리가 돌돌 말려 있다. 지금도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는 등 이 두메산골에도 유교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그렇다 해도 마을 어디쯤에 이렇게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장소가 한 곳쯤 있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향교에서 내려오다 보면 병사들을 위한 사찰이 있으니 가볍게 둘러보면 좋다.화천읍에 위치한 화천시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 시장이다. 북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화천군 지역에 머물러 살게 되면서 1953년 개설됐다. 화천시장의 역사는 길다. 이미 조선 시대에 화천읍에 ‘읍내장’이 개설되었다는 기록이 ‘동국문헌비고’에 등장한다. 그러나 상권이 크지 않아 폐지됐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개설됐다. 1940년대 광산 개발과 화천댐 완공 등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잠시 활기를 띠지만 6.25전쟁으로 다시 폐지됐다. 전쟁이 끝난 후 피란민들을 중심으로 새로 개설된 화천시장은 1959년 상설시장이 됐다. 상설장 외에도 3, 8일엔 오일장이 겹쳐서 열린다. 화천시장은 인근 장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시장답게 제법 북적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건만 화천읍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오일장이 열리지 않는다는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현대화된 화천시장은 다른 지역의 재래시장과 외관상 큰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특별한 기대를 안고 찾는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화천시장의 명물인 옥수수로 만든 음식들- 올챙이국수, 올챙이 묵, 옥수수 인절미-도 눈에 띄지 않아 한 상인에게 물어보니 오일장이나 서야 인근 지역 할머니들이 집에서 만들어 나와 파는 정도라고 한다.옥수수 인절미와 옥수수 국수를 먹지 못한 아쉬움을 메밀전을 만들어 파는 할머니가 달래준다.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메밀전을 잘 만드는 사람이라고 입담이 대단하다. 색색으로 만든 메밀전과 할머니의 입담에 넘어가 냉큼 한 팩을 집어 들었다. 평소 메밀전을 즐기지 않아 맛을 극찬할 수는 없고 메밀전병 피의 고운 빛깔과 얇게 부친 솜씨는 인정하고도 남을 솜씨였다. 화천시장에 가면 옥수수 국수가 없다고 실망하지 말고 ‘대한민국 최고의 메밀전 명장’에게서 메밀전을 사 드시라. 강원도 특산품인 취떡 수리취떡도 한 번쯤은 먹어볼 만하다.
2021-10-19 17:05:13
경기도 가평을 지나면서 산세는 현저하게 달라진다. 산들은 하늘을 가릴 만큼 높고 서로 겹쳐진 듯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산이 높아 계곡도 깊고 산그늘도 깊다. 남쪽의 산들이 방실방실 웃으며 여행객을 반기는 듯한 반면 강원도 화천 지역의 산들은 철갑을 두르고 방문객에게 길을 내주지 않으려는 듯 삼엄하기가 이를 데 없다.강원도 서북부에 위치한 화천은 대부분 지역이 산이다. 북한 금강산 비로봉에서 발원한 물은 금강산댐을 지나 28선을 넘고 화천 파로호를 거쳐 춘천호, 의암호에 이르며 북녘의 다른 줄기에서 출발하는 인북천의 물줄기를 이어받은 소양강과 합류한다. 서울에서 132 km, 휴전선에서 22km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경기도 포천군, 가평군, 강원도 철원군과 맞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양구군, 남쪽으로는 춘천시와 옆 동네처럼 가깝다.화천은 강원도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로 통한다. 농사지을 땅이 없어 산의 나무를 베어 화전을 일구고, 땔감을 팔아 먹고 살았고, 산속의 약초나 나물 등을 깨서 연명했다. 6.25전쟁 때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채 여기저기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떠나와서도 안쓰러움이 오래도록 남는 곳이다.파로호 100리 산소길과 낭만적인 수변데크 ‘숲으로 다리’화천군의 최대 명소인 파로호는 1944년 화천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인공 호수로 주변의 높은 산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광복 이후 북한 지역에 속했다가 6.25전쟁 이후 수복지구가 되었다. 6.25전쟁 당시 이곳에서 유엔군과 중공군 간의 전투에서 중공군 3만여 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남진이 저지됐다. 1955년 11월 이곳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오랑캐를 크게 무찔렀다는 의미로 ‘파로호’(破虜湖)’라 이름 붙였다. 파로호로 불리기 전 일제강점기 때에는 ‘대붕호’(大鵬湖)로 불렸고, 북한 영토에 속했을 때는 ‘화천호’라고 불리기도 했다.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파로호를 자꾸 대붕호로 바꿔 부르라고 우리 정부에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현지 주민이나 민족정기를 중시하는 다수의 국민들은 굳이 익숙해진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다며 난색을 피하고 있다. 화천 북한강을 따라 파로호 100리 산소길이 조성되어 있다.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실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산소길이라 명명했다. 북한강변을 따라 약 42km에 걸쳐 조성된 파로호 산소 100리 길은 최고의 자전거 라이딩길로 꼽힌다. 자전거길은 본격적인 북한강이 시작되는 지점인 화천읍 붕어섬에서 시작된다. 붕어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입구에서는 연인들의 동상이 방문객을 반기고 자전거 대여점이 있다. 붕어섬 일대에서 7월 중순에는 붕어섬 일대에서 쪽배 축제가 열리고 겨울에는 산천어 축제가 열린다. 카약 체험장과 대규모 강변 물놀이장 등이 있다. 붕어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면 축구장, 족구장, 테니스장, 수변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어 레포츠와 자연 휴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겨울 산천어 축제는 세계적으로 이름값을 얻었다. 산천어는 1급수에만 사는 연어과 청정어종이다. 수온이 20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 깊은 계곡에 산다. 연어가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깊은 산 계곡물에 적응해 변화된 어종이라 한다. 유선형의 잘 빠진 몸매, 등과 옆구리의 점 모양의 파마크(par mark), 회로 먹어도 굽거나 훈제로 먹어도 담백하면서도 흙냄새가 나는 맛 등이 낚시꾼을 당긴다. 붕어섬에서 동쪽으로 약 6km 떨어진 간동면 구만리에 ‘숲으로 다리’가 있고 그 중간쯤에 대이리 ‘미륵바위’가 있다. 미륵바위 주변에는 식당과 펜션 및 정자 쉼터가 갖춰져 있어 자전거 라이딩을 하거나 차량 여행객들이 잠시 쉬어갈 만하다. 도로변에 정자와 함께 5개의 화강암으로 된 미륵바위 5개가 나란히 서 있다. 과거에 절이 있었다고만 전할 뿐 미륵바위의 내력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지만 대이리 주민들은 미륵바위에 소원을 빌고 매년 9월 9일에 미륵바위에서 정성껏 제를 올린다.‘숲으로 다리’는 물 위에 설치된 1.2km 수변데크로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이 지어준 이름이다. 수변데크가 끝나는 지점에서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전거가 아닌 차량으로 ‘숲으로 다리’를 방문할 때에도 미륵바위 쉼터에서 출발하면 된다. 이 다리는 지난해 8월 700㎜의 폭우가 쏟아지고, 화천댐이 수문 16개를 모두 열면서 유속이 거세져 유실됐는데 오는 11월 다시 개통한다고 한다. 숲으로 다리 개설에 맞춰 인도교도 개통한다. 이 다리는 화천읍 대이리와 간동면 구만리 사이 북한강을 가로지른다. 총 길이 290m, 폭 3m로 사람과 자전거만 통행할 수 있다. 2018년 설계용역에 착수한 후 교량 디자인과 공법 선정, 각종 인허가 절차를 거쳐 3년 만에 준공하는 것이다.나무상판에 타르칠을 한 꺼먹다리 … 6.25전쟁 때 서로 차지하려 격전2009년 개설된 화천 산소길은 북한강을 따라 원시림과 북한강의 물줄기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길이다. 산소길 구간을 따라 여러 볼거리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꺼먹다리와 구만교이다.구만교는 일제강점기에 다리의 기초가 놓이고 소련과 북한이 교각을 놓았다.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 6.25전쟁이 터져 다리는 완성되지 못했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화천군이 남한 영토로 수복된 이후 화천군이 상판을 올려 완성했다. 민족 분단의 애환이 서린 다리이다.구만교에서 북한강 상류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인가도 없고 인적도 드문 곳에 상판이 까만다리가 외로이 놓여 있다. 1945년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인 화천댐을 가동하기 위해 세운 화천읍 대이리의 ‘꺼먹다리’다. 철근 콘크리트 기둥에 철제와 나무 상판을 올려놓은 꺼먹다리는 부식을 막기 위해 검은 타르를 칠해 꺼먹다리라고 부른다.꺼먹다리는 분단의 상처의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다리다. 6.25전쟁 당시 꺼먹다리 인근은 중동부 전선을 연결하는 꺼먹다리와 화천 수력발전소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교각에는 총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영화 ‘전우’와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가 이곳에서 촬영됐다.꺼먹다리는 구만교가 놓이면서 1981년 폐쇄된 후 침목이 훼손되는 등 방치되어 있던 것을 2007년 문화재청의 승인을 얻어 복원됐고 현재 등록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다.차에서 내려 다리 위로 걸어가 보았다. 꺼먹다리 한가운데 서니 앞을 봐도, 뒤를 봐도 강물이 흐르고 산 밖에 없다. 물새들만 북한강을 온통 독차지하고 유유자적 물놀이하다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시 강 속에 쌓인 모래톱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따금 차량이 지날 뿐 적막하기 그지없다. 앞뒤로 꽉 막힌 시커먼 산이 답답해서 이내 다리를 건너왔다.꺼먹다리에는 누가 만든 것인지 이야기 하나가 전한다. 입대를 앞둔 연인이 양 끝에서 걸어와 가운데서 만나면 남자가 군에 있는 동안 여자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않는다고 한다.불쑥 떨어져 여름에는 물놀이 캠핌장이 되는 ‘딴산’ 꺼먹다리에서 멀지 않는 곳에 화천의 또 다른 명소인 간동면 구만리에 ‘딴산’이 있다. 따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딴산이라 불린다. 마치 커다란 산에서 한 귀퉁이가 떨어져 물에 쓸려 내려온 것처럼 물가에 불쑥 솟아 있다. 산 아래로는 작은 하천들이 흐르고 여름에는 물놀이와 오토캠핑장으로 변한다.화천 거례리 북한강 사랑나무 화천군 간동면 및 하남면과 춘천시 사북면 경계에 있는 해발 877.8m의 용화산에서 화천 읍내로 진입하는 초입에는 북한강변에 하남면 거례리가 있다. 거례리는 춘천에서 지방도 407번 도로로 30분 거리에 있는 지역으로 북한강 줄기와 자전거 도로가 연계돼 있다. 화천군은 거례리 화천강변(동안)에 철마다 꽃밭을 조성해 관광객을 유인하고 있다. 7~8월에는 온통 노란 해바라기로 뒤덮이고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구절초가 가을 분위기를 연출한다. 특히 인근에 아를테마수목공원과 파크 골프장이 조성돼 있다. 수목원 강가에는 5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특별한 풍광을 선사한다. 일명 ‘화천 사랑나무’로 불리면서 이 일대가 관광명소가 되는데 기여했다. 동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골프장을 조성할 때 서울 사는 사람이 사랑나무를 옮겨 가 심으려고 했단다. 그런데 나무뿌리 너무 깊고 넓게 퍼져서 나무를 파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북한강 풍경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은 골프장 관리하는 분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나무 아래에서 땀방울을 식히며 감자떡으로 참을 즐기는 풍광이 더없이 정겹다.해산령 구불구불 길 넘어 ‘평화의 댐’ 딴산에 조성된 인공폭포를 지나 계속 북쪽으로 달리면 평화의 댐이 나온다. 거리상으로 27km이지만 해발 1140m의 해산령을 넘어야 하는 힘든 여정이다. 화천 읍내 카페의 젊은 여사장이 평화의 댐 여행에서 ‘구토가 나올 정도로 꼬불꼬불했던 산길’만 기억에 남는다고 할 정도로 가파른 고개를 숨 가쁘게 넘어야 한다. 가다 보면 육지 속의 섬 ‘비수구미’ 마을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비수구미 마을은 한국 전쟁 직후 북쪽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한때 100가구가 넘었지만 지금은 몇 가구만 남아 있다. 해산터널 앞에서 비수구미까지 6km 길이의 트레킹 코스가 유명하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청정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고 원시림과 계곡에 싸여 있는 비수구미 마을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로 유명하다.1986년 아시안게임을 기념하기 위해 1986m로 만들었단 해산터널을 지나면 해산 전망대가 나온다. 해가 다른 곳보다 먼저 떠올라 일출 풍경이 아름다워 해산이라고 불린다. 민간통제구역이었던 만큼 숲이 울창해 호랑이가 출몰하기도 하여 호랑이산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전망대 조형물도 호랑이 형상에서 착안해 만들어졌다.평화의 댐은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와 양구군 방산면 천미리에 걸쳐 있는 댐으로 길이 601m, 높이 125m, 총 저수량이 26억3000만t에 이른다. 1987년 2월 착공, 1989년에 1차, 2002년에 2차 준공했다. 2005년 10월에 최종 완공됐다. 북한의 금강산댐(임남댐)이 방류할 경우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하여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다. 어린아이들이 돼지 저금통까지 깨서 성금을 낼 정도로 전 국민의 지지와 성금으로 완공됐다. 그러나 정부의 금강산 댐 관련 발표는 거짓과 과장으로 드러나고 전두환 정권의 정권 안정을 위한 대국민 사기임이 밝혀졌다. 현재는 건천(乾川) 댐으로 운영되며, 홍수 조절 전용 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평화의 댐 저수량은 소양강댐과 충주댐에 이어 세 번째로 많으며, 금강산댐보다 1000만t이 많다.평화의 댐 인근에는 세계 평화의 종 공원을 비롯해 비목공원, 물문화관, 상설 야외공연장 등이 조성돼 있다. 비목공원은 6.25전쟁 당시 희생된 젊은 용사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가곡 ‘비목’의 탄생 비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작사가 한명희는 1960년대 중반 백암산 비무장지대에서 군 복무를 하다가 녹슨 철모와 돌무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돌무덤이 자신과 같은 또래라는 생각에 그를 위로하는 노랫말을 짓게 된다. 그 후 작곡가 장일남이 곡을 붙여 국민가요 비목이 탄생하게 된다.필자가 평화의 댐을 찾았을 때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시설이 운영 중단된 상태라 둘러볼 수 없어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댐 위로는 460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2021-10-13 23:21:01
국내 최초의 한국자생식물원 … 토종 식물 중 3분의 1 자라 강원도의 중남부를 차지하는 평창은 자연생태를 탐방할 명소도 많다. 한국자생식물원, 대관령 목장, 백두대간 선자령, 봉평 메밀밭(이효석 문학관) 등이다. 월정사에서 약 1km 떨어진 해발 800m 오대산 중턱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식물원인 한국자생식물원이 있다. 외래종과 원예종이 범람하는 시대에 한국의 자연과 토양에서 자생하고 있는 꽃과 나무들을 연구하고 보호하고자 세워졌다.1983년 경기도 마석에서 에델바이스 재배로 처음 농장을 연 이 식물원은 1984년 평창으로 이전했다. 현재 자생식물 4500여 종 중 1500여 종을 수집해 증식하고 있다. 환경부가 지정한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다가오는 유전자원 전쟁 시대에 대비하고 있는 식물 유전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뜨거운 햇빛이 바로 머리 위로 쏟아지는 한여름 식물원 탐방은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오대산에서의 희귀한 야생식물 탐사는 분명 추억이 될 것이다. 8~9월이 야생화가 군락을 이루며 가장 볼 것이 많은 적기다. 세부적으로 희귀멸종 식물원, 동물명칭·사람명칭 식물원, 독미나리 보존원, 우리꽃 그림전·사진전·새집 전시전 등이 열리는 솔바람갤러리, 북카페도 운영되고 있다.봉평 메밀밭과 평창 문학기행 … 이효석 문학관평창은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가 이효석이 태어난 곳이다. 평창 봉평읍에 그의 생가와 문학관 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9월 중순이면 메밀꽃 축제가 열린다. 가산 이효석(可山 李孝石)은 1907년 평창군 봉평면 창동 4리 남안동에서 태어났다. 13세까지 평창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이효석은 1925년 경성제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28년 처녀작 ‘도시와 유령’으로 등단했다. 도시 유랑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다룬 이 작품으로 이효석은 사회주의 계열인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진영으로부터 호평을 듣고 ‘동반작가’ 호칭을 듣게 됐지만 문단의 평가는 썩 좋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경향문학(傾向文學 사상이나 주의를 선전하는 문학, 주로 사회주의 문학) 작가로 비슷한 계열의 작품을 발표하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31년 결혼 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일본인 은사의 도움으로 총독부 경무국에 취직했으나 주위의 지탄을 받고 그만뒀다. 이후 처가가 있는 함경도 경성으로 이주해 영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이후 평양 숭실전문대,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이때부터는 그의 문학도 경향문학에서 순수문학 쪽으로 바뀌게 된다.1936~1940년 무렵은 이효석의 작품 활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다. 대표작 닫‘메밀꽃 필 무렵(1936)을 비롯해 장편 ‘화분’(1939), ‘벽공무한’(1940), ‘산’ ‘들 ’ ‘메밀꽃 필 무렵‘(1936), ‘석류’(1936), ‘성찬’(1937), ‘개살구’(1937), ‘장미 병들다’(1938), ‘해바라기’(1938), ‘황제’(1939), ‘여수’(1939) 같은 대표적 단편들이 모두 이 시기에 집필됐다. 1940년 아내와 둘째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를 여행하다 병에 걸린 이효석은 1942년 36세의 나이로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다. 아내와 함께 평창군 진부면에 묻혔다. 그러나 1972년 고속도로 건설로 장평면으로 이장했다가 현재는 파주 경모공원에 묻혀 있다.‘메밀꽃 필 무렵‘은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평단의 인정과 대중적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이 작품 하나로 봉평과 이효석이라는 이름이 영원히 후대에 각인됐다. 이효석의 생가터가 있는 ‘효석문화마을’(창동리)에는 소설에 등장한 물레방아, 주막 등이 재현돼 있다. 키 큰 돌배나무가 들어서 휴식하기 좋은 ‘가산공원’도 있다. 그 옆 무이리에는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한 평창무이예술관은 그림, 조각, 서예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9월에 열리는 메밀꽃 축제는 소설에서 묘사됐듯 ‘소금밭’처럼 눈부시다. 기왕이면 보름달이 뜬 날에 야경을 즐기면 좋은데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이전에는 ‘인산인해’라 괴로울 수 있고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한 차례 쉬었다. 올해 백신 접종 인구가 늘어나면 재개될 가능성이 있다. 평창 봉평 오일장이효석 문학관에서 10분 거리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된 ‘봉평 오일장‘이 열린다. 전국 각지의 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돌뱅이 허생원과 그의 아들일지도 모를 동이가 처음 만난 곳이 바로 봉평장이었다. 지금도 2일과 7일에 열리지만 상설장도 운영되니 특산품인 메밀국수, 메밀루틴빵 등을 즐기며 소설의 내용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일대서 가장 높은 태기산과 봉평 허브나라농원봉평 오일장에서 10분 거리에는 태기산(泰岐山) 흥정계곡 깊숙이 허브나라농원이 자리잡고 있다. 시원한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초록빛 다리를 건너면 허브나라가 펼쳐진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예쁜 집들과 조형물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허브향에 순간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봉평을 관통하는 흥정계곡은 흥정산(1278.5m)과 회령봉(1309m) 사이에서 발원해 봉평면의 흥정리, 원길리, 창동리, 평촌리를 거쳐 용평면 백옥포리까지 이어진다. 울창한 숲과 협곡 사이로 사시사철 물이 풍부하다. 불발령(1052m)은 흥정계곡이 시작되는 가장 위쪽에 위치해 있다. 계곡을 따라 불발령에 오르는 임도는 차마고도를 연상케 한다. 불발령 정상에서 길은 남쪽 평창군 봉평면, 북쪽 홍천군 내면, 서쪽 홍천군 서석면 등 세 갈래로 나뉜다. 흥정천과 무이천이 만나는 지점에는 붓꽃섬(원길리)이 있다. 수령이 40년 넘는 잣나무가 울창하고 인기 절정의 캠핑장이 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섬이었으나 지금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해발 1261m 태기산은 횡성군, 평창군, 홍천군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다. 원래는 덕고산(德高山)이었으나 삼한시대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신라군과 마지막 격전을 치른 곳이라 하여 태기산이라 부른다. 산 중턱에는 태기왕이 신라군에 대비해 쌓은 길이 1km의 태기산성 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정작 신라군은 산성이 있는 남쪽이 아닌 홍천 방향에서 공격해 왔다니 안타까운 일이다.태기산 정상부에는 20여 기의 풍력발전기가 운영 중인데 추가 건립을 두고 소음공해를 호소하는 지역민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산 정상에는 한국통신의 중계기가 설치돼 정상까지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자동차로 정상까지 쉽게 갈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운해와 일몰, 겨울의 상고대, 한밤의 은하수 풍경들이 더없이 아름다워 사진가, 연인들, 캠핑족들이 선호한다. 최근에는 차박의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대관령 양떼목장과 선자령 트레킹코로나19로 위축된 마음을 털어내고 싶다면 대관령 목장이 제격이다. 해발 700~1400m 대관령 고지의 수 백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초록빛 초원을 보는 순간 뭉쳐 있던 마음이 한순간 툭 터져 버리는 듯하다. 시원하게 돌아가는 하얀 풍차를 배경삼아 목책 따라 걷는 길은 우리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국적이며 낭만적이다. 대관령 양떼목장, 대관령 삼양목장, 하늘목장 등이 있으며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4계절 개방되는데 5~6월과 9월이 기후로 볼 때 가장 관광하기에 좋다. 겨울이면 눈썰매장이 운영된다.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관령 삼양목장은 걸어서 올라가기에는 너무 넓고 너무 높다. 가끔 젊은 사람들이 걸어서 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입구에서부터 운행되는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5~6군데의 정류장 중 마음에 드는 곳에서 내리면 된다. 대관령과 동해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지없이 시원하다. 목장 정상부에 설치된 동해전망대에서는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파란 하늘 위로 솜사탕처럼 떠도는 뭉게구름을 만나는 날은 그야말로 계 탄 날이다.하늘목장은 트랙터 마차를 타고 하늘마루 전망대(해발 1000m)에 도착할 수 있다. 이어 ‘너른풍경길’을 따라 왕복 1시간이면 대관령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높은 선자령(仙子嶺 해발 1157m)을 다녀올 수 있다. 반면 양떼목장은 유치원생, 초등생의 탐방코스로 유명하며, 상대적으로 규모가 아담하다. 선자령은 선녀들이 자식을 데리고 내려와 놀았다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거대한 풍력 발전기와 멀리 동해의 풍광이 장관이다. 하지만 풍력 발전기가 경관을 해치는 게 아니냐는 반감도 든다. 백두대간의 능선을 따라가는 선자령 풍차길은 총 길이가 12km로 걸어서 편도로 4시간 정도 걸린다. 다만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초보자도 무난하게 완주할 수 있다. 대관령 휴게소에서 시작해 선자령을 돌아내려 오는 트레킹길이 있다. 트레킹이 부담스럽다면 버스를 타고 목장에 도착하면 된다. 하이얀 샤스타데이지가 만발한 ‘육백마지기 천상의 화원’ 평창군 미탄면 회동리 해발 1200m 청옥산 기슭에는 ‘육백마지기’에 ‘천상의 화원’이 조성돼 있다. 요즘 평창 여행에서 가장 핫한 곳이다. 드넓은 초원에 새하얀 샤스타데이지 꽃들이 융단처럼 깔려 있는 광경은 그야말로 천상의 풍광이다. 입소문과 SNS를 타고 몰려드는 인파와 차량으로 인해 주말에는 극심한 혼잡을 이루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동강 트레킹은 강원도 영월과 정선에서 주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평창의 동남부로 두 군과 맞닿은 미탄면 마하리(어름치마을) 진탄나루나 절매나루에서도 가능하다. 정선에서 급하게 달려온 동강은 진탄나루에서 편안한 느낌을 준다. 동강은 평창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과 정선군 북부 조양강이 마하리에서 합류하고 영월로 향한다. 진탄나루에서 오른쪽(남쪽) 동강을 보며 4km 정도 들어가면 문희마을이 나오고 그 뒤편으로 칠족령 트레킹길 1.4km가 이어진다. 초반 3분의 1은 길이 가파르지만 이후에는 편안해진다. 칠족령 전망대에서 동강의 그 유명한 구불구불한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문희마을에서 동강 절벽을 따라 조금 헤매다보면 중간에 천연기념물 206호인 백룡동굴이 있다. 백운산의 백자와 동굴을 발견한 정무룡 형제의 룡자를 따서 지은 종유동굴이다.
2021-07-03 00:30:24
가지와 나뭇잎이 하늘을 가리고 고개를 한껏 쳐올려도 그 끝이 보이지 않게 시원스럽게 쭉쭉 뻗은 나무들. 그런 나무들이 1000m 가량 이어진 멋진 숲을 만나고 싶다면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을 찾을 일이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은 월정사 일주문에서 금강교까지 약 1km 정도 이어진다. 숲은 하루 중 어느 때라도 싱그러움과 그윽함이 가득하지만 이른 새벽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숲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새들조차도 아직 깨어나지 않은 고요함과 적막감이 지배하는 시간 마침내 빛은 어둠을 뚫고 하늘을 뒤덮고 있던 나무 잎새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다. 어두운 숲 속에 서서히 빛이 퍼져나가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새벽 숲에는 나뭇가지 위로 햇빛이 살포시 내려앉는 소리, 나뭇잎 사이로 들고 나는 바람소리,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 … 숲의 주인들이 내는 소리만이 있다. 숲 속에서는 그 누구라도 숲의 고요함을 배울 일이다. 월정사 전나무 숲을 이루는 전나무들의 평균 수령은 85년 정도다. 가장 오래된 나무의 수령은 450년 혹은 350년이다. 월정사 숲은 애초 전나무 숲이 아니라 소나무 숲이었다. 후에 전나무 숲으로 바뀌었는데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고려 말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가 부처님에게 바칠 공양에 소나무에 쌓인 눈이 떨어졌다. 눈을 떨어 뜨려 공양을 망친 소나무를 못마땅하게 여긴 산신령이 소나무를 꾸짖고 대신 전나무 아홉 그루가 절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아홉 그루의 전나무가 소나무 숲과 자리를 바꾸어 지금은 1700여 그루의 울창한 전나무 숲이 된 것이다. 월정사의 전나무 숲은 단원의 ‘금강사군첩’ 권1에서도 찾을 수 있다. 220년 전 관동 9개군의 명승지를 편력하며 그림을 그려 정조 임금에게 바쳐야 했던 단원 김홍도의 이 화첩에는 중대사와 상원사와 더불어 울창한 전나무 숲에 파묻힌 월정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이렇게 봤을 때 월정사 전나무 숲의 역사는 600년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6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늠름하게 서 있던 나무도 벼락 한방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진 모습에서 자연의 경외스러움에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 중간쯤에는 2006년 벼락을 맞고 한 순간에 힘없이 쓰러진 나무가 있다. 이 나무를 보면 ‘나무처럼 아름답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에 백번도 넘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은 나무의 희생을 이 길에서 배운다. 월정사 전나무 숲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벌채와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렇게 무사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6년 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정사 전나무 숲에는 수령 40~135년의 가슴 높이 직경 20㎝ 이상의 전나무가 977그루 자라고 있으며, 직경이 1m 이상인 대경목도 8그루가 자라고 있다. 가장 큰 전나무는 직경 175cm, 수고 31m이다. 이 땅 어느 곳에서도 이런 전나무 숲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월정사 전나무 숲은 경기 포천 광릉 수목원 전나무 숲과 전북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으로 꼽힌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적광전의 아름다움을 찾아월정사 전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오대산(五臺山 1563.4m) 월정사(月精寺)가 있다. 태백산맥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차령산맥이 뻗어나가는 지점에 우뚝 솟은 봉우리마다 상원사, 월정사 외에 다섯 암자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이른바 우리나라 문수신앙의 성산으로 추앙되고 있다.오대산은 산도 높고 골도 깊지만 흙길이 넉넉한 육산(肉山)이자 덕산(德山)이다. 후덕하고도 푸근한 느낌을 준다. 골산으로서 장쾌함을 뽐내는 설악산과는 다른 느낌이다. 또 7개 절과 암자가 있는 불법(佛法)의 산이며, 울창한 숲을 이룬 거목의 산이다. 월정사는 643년(선덕여왕 12년) 중국의 오대산에서 우리나라 오대산에 만 명의 문수보살이 있다는 가르침을 받고 돌아온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지금의 월정사 터에 초암을 짓고 머무른 게 시발이 됐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 친견에 실패하고 태백산 정암사에서 입적하였다. 자장율사가 상원사를 창건한 다음 전망과 위치가 좋은 다섯 대(臺)를 골라 암자를 지은 게 오대산이라는 이름의 배경이 됐다. 중대 사자암, 동대 관음암, 서대 수정암, 남대 지장암, 북대 미륵암이 그것이다. 수정암은 그저 너와집으로 고즈넉한 정취가 쓸쓸하다. 조선시대 한강의 시원이 수정암에서 가까운 서대 장령(長嶺) 아래 샘물인 우통수(于筒水)다. 지금은 시원을 태백시 대덕산과 함백산 사이의 금대봉(金臺峰 해발 1418m) 검룡소(儉龍沼)로 잡고 있지만 말이다. 오대산은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호령봉(남서쪽), 상왕봉(북서쪽), 두로봉(상왕봉보다 북서쪽), 동대산(동남쪽)) 등 다섯 봉우리가 두툼하게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월정사는 한국 전쟁 중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국군에 의해 전소됐다가 1964년 이후 탄허(呑虛 1913~1983), 만화, 현해 스님 등에 의해 중창됐다. 유일하게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월정사 적광전 앞에 서 있는 팔각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이다.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꼽히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층층의 모서리마다 달려 있는 청동 풍경, 금동장식의 상륜부, 기단 위의 조각, 모서리의 휘어진 모양새 등이 무척 화려하다. 1970년과 1971년에 해체 복원되었으며 현재 국보 제48호로 지정돼 있다. 석탑 앞에 두 손을 모아 쥐고 공양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석조보살좌상은 보물 제139호다. 월정사 적광전은 남향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근대에 신축된 건물 중 으뜸으로 꼽힌다. 원래 이 자리에는 칠불보전이 있었으나 전소되었고 1969년 만화스님에 의해 중건됐다. 자재는 모두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를 사용했다. 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통례를 깨고 석굴암 불상의 형태를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그럼에도 적광전이라 부르는 까닭은 오대산이 화엄·문수도량이며 한엄, 탄허 선사가 주석(駐錫)하면서 불교 최고 경전인 화엄사상을 널리 퍼뜨렸는데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함께 모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5대 적멸보궁의 상원사 … 문수보살, 청량선원의 성지상원사(上院寺)는 신라 성덕왕 4년에 오대산에서 수행하던 보천과 효명 두 왕자에 의해 창건됐다. 창건 당시에는 진여원(眞如院)으로 불렸으나 후에 상원사로 바뀌었다. 상원사에는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치료를 위해 방문한 상원사에서 두 차례의 이적을 경험하게 된다. 참배를 마치고 물이 맑은 계곡에서 목욕을 하던 세조는 마침 가까운 숲에서 놀고 있던 동자승을 발견하고 등을 밀어 달라고 부탁하며 “사람들에게 왕의 몸을 씻겨 주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일렀다. 동자승은 “알겠습니다. 임금께서도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하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로 신기하게도 세조의 피부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세조는 감격에 겨워 화공을 불러들여 기억을 더듬어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이 그림을 토대로 보살상을 조각하게 했다. 그 보살상이 상원사 법당 청량선원에 모셔진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 221호)이다. 상원사 입구에는 세조가 목욕할 때 옷을 벗어 걸어두었다는 관대걸이가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이듬해에는 세조가 예불을 드리기 위해 상원사 법당에 오르려 하자 고양이가 세조의 옷을 붙들고 법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세조가 법당을 샅샅이 뒤지게 하니 법당 안에 자객이 숨어 있었다. 세조는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준 고양이를 잡아 죽이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사찰에 전답을 내려 치하하였다. 이를 묘전(고양이 밭)이라고 불렀다. 신라 성덕왕 24년(725년)에 높이 167cm, 지름 91cm크기로 조성된 상원사 동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이다. 신라 성덕대왕신종(국보 29호, 에밀레종, 봉덕사종)과 수원 용주사 범종(국보 제1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완전한 형태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가운데 하나이다. 본래 안동부 누문에 걸려 있던 것을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상원사 영산전(靈山殿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다는 데서 유래)은 오대산에서 가장 오래된 영산전이다. 영산전 안에는 석가 삼존상과 십육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영산전 앞마당에는 조성 시기가 확실하지 않은 투박한 석탑 한 기가 세워져 있다. 상원사 계곡에서 폐탑을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도 하고 영산전 옆에서 출토되었다고도 한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마모도 심하긴 하지만 탑신부 옆면을 장식한 불상과 복련(覆蓮 아래를 향해 엎드린 연꽃) 조각으로 화려한 멋을 풍긴다. 상원사가 유독 경건해 보이는 것은 상원사에 청량선원(淸凉禪院)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청량선원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스님과 수얼, 운봉, 동산 스님이 수행했다. 1982년 이후에도 한암을 비롯해 탄허, 석주, 효봉 스님 등이 수행의 발길이 끊지 않았던 북방 제일 선원으로 명성을 날렸다. 오대산의 옛 이름이 청량산이어서 선원 이름을 여기서 따왔다. 한국전쟁 때 국군이 작전상의 이유로 오대산의 모든 절을 불태웠을 때에도 상원사는 문짝 밖에 타지 않았다. 30년 동안 상원사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오로지 참선에만 열중했던 한암(漢巖, 본명 方重遠, 1876~1951) 선사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덕이다. 선사는 고요히 앉은 자세로 입적하셨다. 1983년 경제적인 이유로 닫혔던 선원은 2000년도에 접어들어 상원사 주지였던 퇴우 스님이 문수전 오른편에 150평 규모의 청량선원을 다시 건립하고 선객들을 맞이하면서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 있다. 상원사에서 약간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중대 사자암이 나온다. 오대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 중턱에 위치한 중대사자암은 문수보살이 타고 다녔다는 사자를 암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태종은 1401년(태종 1)에 상원사의 중건을 명하고 불상을 봉안하고 스님들의 거처로 사용할 3칸의 집과 2칸의 목욕소를 만들었다 한다. 그해 겨울 태종이 직접 상원사 사자암에 왕림해 성대한 법요식과 낙성식을 베풀었다고 전한다.다시 중대사자암에서 계단과 오르막 흙길을 600m가량 오르면 마침내 상원사 적멸보궁(寂滅寶宮)이 나온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정골이 봉안된 사찰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자장율사(590~658)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진신사리와 정골이 봉안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 정선 정암사,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 상원사 적멸보궁이다. 상원사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정골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리 안치 장소는 불명확해서 뒷산 어딘가에 모셔져 있다는 설만이 전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각 뒤편에 바위가 드러난 작은 언덕에 높이 50cm 정도 되는 세존진신탑묘를 세워 놓았다.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이어지는 깨달음의 옛길 ‘선재길’ 9.5km에 달하는 월정사와 상원사를 연결하는 옛길이 복원됐다. 이 길은 신라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상원사로 올랐던 길이다. 1960년대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446번 지방국도가 생기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2013년 국립공원공단은 옛길을 복원하고 화엄경에 등장하는, 문수보살의 지혜와 깨달음을 좆던 동자승 선재스님의 이름을 따서 ‘선재길’이라 명명했다. 선재동자는 53명의 현인을 만나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선재길은 곧 ‘지혜의 길’인 것이다. 고려말 나옹선사(1320~1376), 한암, 탄허 스님도 만행했던 오솔길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탐방객들이 선재스님이 되어 문수보살의 지혜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구도의 길 걷는다. 선재길은 여름이면 계곡물 소리와 새소리가 아름답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불탄다. 다만 오대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여러 차례 건너야 하기에 장마철이나 폭우가 쏟아질 때에는 통제된다. 길은 평탄해 느릿하게 걸어도 4시간이면 상원사에 도착하다. 다시 월정사로 돌아올 때에는 군내버스를 타면 된다. 상원사 발 마지막 버스가 5시 20분에 출발하므로 만약에 여행 일정상 오후 늦게 도착했다면 먼저 버스를 타고 상원사에 갔다가 월정사로 느긋하게 돌아오는 것도 방법이다. 선재길에는 진입로 부근이나 길이 좋지 않은 곳에 나무데크길이 설치돼 있을 뿐 인공조형물이 거의 없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숲 속의 오솔길이 있을 뿐이다. 오대천을 따라 소와 연못, 괴석들이 어우러지는 계곡과 작은 오솔길이 번갈아 나타나며 감탄을 자아낸다. 바닥은 모두 흙길이거나 울퉁불퉁 자갈길이다. 옛날 나무를 베어내고 화전을 일구며 살던 화전민이 살던 집터도 만난다. 걷다 보면 어느새 처음 길을 시작했을 때의 잡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때쯤이면 이미 상원사에 도착해 있다. 선재길은 상원사에서 끝나지만 탐방길은 중대사자암과 적멸보궁으로 이어진다. 선재길에서 나옹선사의 선시를 읇어보자. 법정 스님이 전파해 더욱 귀에 익숙한 선시다. 절로 참선이 될 것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2021-07-01 21:26:11
예전에 강릉으로 부임해 오던 벼슬아치들이 대관령을 넘으며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날 정도로 강릉 땅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는 얘기다. 또 도착해서는 웃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고 한다. 산과 바다에 둘러싸인 강릉 땅의 아름다움과 그 땅에 사는 이들의 소박한 인심과 선한 성정에 마음이 즐거워졌다는 이야기이다. 비록 지금은 반나절 만에도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강릉 땅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우면서도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미지의 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 초충도로 유명한 여류 화가 신사임당 및 그의 아들로 조선시대 최고 유학자인 율곡 이이가 태어난 문향의 도시가 바로 강릉이다. 강릉 영동지방의 중심지 … 놀기 좋아하고 과거급제도 제법 강원도의 이름은 강릉의 ‘강’자와 원주의 ‘원’자를 따서 지었다. 그만큼 강릉은 예부터 영동지방의 역사와 문화, 행정, 경제의 중심지였다. 서울에서 강릉 땅을 밟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대관령을 기점으로 강원도는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으로 나뉘는데 대관령을 과거에는 단대령이라고도 불렸다. 대관령을 처음 개척한 이는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강원관찰사로 부임하면서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관의 힘만으로 대관령 고개를 열었다고 전한다. 강릉 사람들은 ‘살면서 대관령을 한 번도 넘을 일이 없으면 복 받은 삶’이라고 했다는데 이는 대관령의 험준함을 빗댄 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강릉에서의 삶이 윤택하고 만족스럽다는 것을 뜻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강릉은 고려시대 대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강릉 즉 명주(溟州)는 본시 예(濊)의 고국(古國)으로 철국(鐵國) 혹은 예국(蘂國)이라고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다가 신라 진흥왕 때 신라 땅이 됐다. 고려 공양왕 때 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조선시대에 강릉부가 되었고 1955년 강릉시로 승격되었다. 강릉사람들에 대한 택리지의 기록이 흥미롭다. ‘강릉 사람들은 학문하는 것보다는 놀이하는 것을 좋아하고, 노인들이 기악(妓樂)과 술과 고기를 싣고 호수와 산을 찾아 흥겹게 놀며 이것을 큰일로 여긴다. 때문에 이름을 날린 사람이 적은데 오직 강릉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제법 나왔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강릉 사람들은 속된 말로 강원도 사람을 일컫는 ‘감자 바위’의 삶과는 다르게 생활 정도가 윤택하고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듯싶다. ‘문향의 도시’ 강릉은 이미 오래전부터 싹을 틔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경포대, 관동 8경의 최고 명승지 … 맑은 호수에 백두대간이 비쳐 강릉에는 가없이 넓고 멀리 펼쳐지는 푸른 바다와 울창한 소나무 숲, 바다와 맞닿은 듯한 호수 등 곳곳에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가 많았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를 세웠다. 경포대, 한송정, 석조, 석지, 문수대, 운금루 등이 강릉 최고의 명승지에 있던 정자들이다. 이중에서도 관동 8경에 속하는 경포대(鏡浦臺)는 오늘날까지 남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경포호 옆 야트막한 야산을 오르면 우거진 소나무와 벚나무 사이에서 경포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의 경포대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크다. 경포호 방향으로 단을 높여 마루를 만들고, 좌우로 한 단을 높여 누마루를 만들어 전체적으로 내부를 3단으로 구성한 점 등 일반 누정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율곡이 열 살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와 숙종의 ‘어제시’, 숙종~영조 때 문장가인 강릉부사를 지내며 경포대를 중수했다는 조하망(曺夏望)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들의 글이 걸려 있다. 누에 오르니 지척에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잔잔한 경포호 위로 백두대간의 연봉이 구름처럼 소리 없이 흘러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이다. 경포대는 물이 거울처럼 맑아 경포라 불린다. 경포대에서는 네 개의 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늘에 뜬 달이 하나요, 바다에 비친 달이 둘이요, 호수에 비친 달이 셋이요, 술잔에 뜬 달이 네 번째 달이다. 호수 한가운데 작은 바위섬 위에 또 하나의 정자가 보인다. 1958년에 지어진 월파정(月波亭)이다. 경포호수에 비친 달빛이 물결이 흔들리는 모습을 비유해 월파정이라 지었다. 경포대가 언제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고려 명종 때 문신 김극기가 남긴 ‘팔영’이라는 문헌에 처음으로 경포대에 관한 기록이 전할 뿐이다. 원래 있었던 경포대는 낡고 허물어져 고려 충숙왕 13년에 현 방해정(放海亭) 뒷산 인월사 옛터에 새로 건립됐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경포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포은 정몽주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전충사(全忠祠)가 있다. 후손 정기용이 1934년 개성 숭양서원에 봉안된 진영을 모사하여 강릉시 왕산리에 사당을 건립하고 봉향 다례를 행하다가 1968년 후손들과 강릉 지역 유림들이 함께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전 진영은 퇴색해 환봉하였고 현재 전충사 진영은 1969년 충렬서원에 있는 진영을 서울대 교수 서세옥이 모사한 것이다. 경포대에서 내려와 스카이베이호텔 방향으로 걷다 보면 아담한 누각 한 채가 보인다. 호숫가 평지에 있어 누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인 방해정은 원래는 삼국시대 ‘인월사’라는 절터에 조선 후기 문신 이봉구가 세운 누정이다. 조선 철종 10년 통천군수를 지낸 이봉구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객사의 일부를 헐어다 선교장의 부속 별장으로 지었다고 한다. 방해정은 온돌방과 마루방, 부엌 등을 갖추고 있어 살림집으로도 사용하였다. 옛날에는 집 앞까지 호수여서 대청마루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놀기도 하였으며 배를 이용해 출입하였다고 한다. 방해정 옆에는 금란정(金蘭亭)이라는 정자도 있다. 조선 후기 선비인 김형진이 지은 집으로, 경포호가 바라보이는 경포대 북쪽 시루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방해정 도로 건너 호숫가에는 관찰사 박신과 기생 홍장의 사랑 얘기가 전하는 ‘홍장암’과 두 사람의 조형물들이 늘어서 있다. 강릉 지역에 순찰을 온 순찰사 박신은 기생 홍장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다른 지역의 순찰을 마치고 강릉에 돌아와 홍장을 찾으니 홍장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강릉부사였던 그의 친구 조운흘이 그를 골려 주기 위해 일부러 홍장이 죽은 것처럼 일을 꾸민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박신은 병이 나 시름시름 앓아 누었다. 조 부사는 슬퍼하는 박신을 위해 경포대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경포호에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배 한 척이 홀연히 나타났다. 노인이 노를 젓고 배 안에서 한 여인이 춤을 추고 있었는데 영락없는 홍장이었다. 그제야 친구가 자신을 놀린 것을 깨닫고 두 사람은 재회의 기쁨을 만끽했다. 훗날 박신은 이날을 떠올리며 시 한수를 읊었다. ‘젊었을 때 관동의 관찰사 되어 경포대의 맑은 물 꿈속에 아련하네. 생각하니 경포대 및 아름답게 꾸민 배는 또 뜨련만, 홍장은 이 몸 보고 늙었다고 비웃겠지’홍장암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니 호수 한 가운데 둥둥 떠 있는 월파정과 물결치는 연봉이 참으로 아름답다. 경포호 앞에 우뚝 선 스카이베이에 오르면 바다와 호수가 한 번에 내려다보이는 것을 보면 지하에 묻힌 옛 사람들은 무엇이라 할 지 궁금하다. 선교장, 한국전통 가옥의 백미 경포대에서 경포동 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조선 후기 전형적인 상류층 양반 가옥인 선교장(船橋莊)이 있다. 선교장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한옥 중에 가장 원형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1703년도에 지은 99칸의 사대부 상류 주택이다. 그 후 10대에 이르도록 300년 이상을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동생에게 왕위를 내어준 효령대군은 ‘당상관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고, 하루빨리 한양을 떠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내번이 한양에서 강릉지방에 내려와 터를 잡았으니 조상의 유언을 잘 받든 것. 과거 경포호의 둘레는 지금의 4km보다 훨씬 넓어서 약 12km에 달하고 수량도 훨씬 많아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고 한다. 선교장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선교장은 안채를 비롯해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및 사당들로 이뤄져 있다. 지정구역 8399㎡, 보호구역 1만4970㎡에 달한다. 큰대문을 비롯해 총 12개 대문이 그대로 간직돼 있다. 솟을대문과 일자로 늘어선 행랑채가 23칸에 방이 20개나 있다. 길이로 치면 60여 m에 달한다. 이밖에 광 6개, 부엌 2개, 대문 2개가 딸려 있다. 규모 면에서나 가옥의 아름다움에서 한국 최고의 전통 가옥으로 손색이 없다. 선교장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연지(蓮池)와 이 곳에서 가장 멋스러운 활래정(活來亭)이 보인다. 1816년(순조 16년)에 이후가 지은 활래정은 조선 후기 정자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후에 증손인 이근우가 중건했다. 네모난 모양의 연못 속에 잠긴 돌기둥이 누마루와 팔작 기와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연못에 연꽃이 한창 피어나고 붉은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필 무렵이면 활래정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모양 좋은 소나무 한 그루는 사계절 활래정에 운치를 더한다. 활래정은 서쪽 태장봉에서 흘러나온 맑은 물이 연못을 거쳐 경포호로 빠져나가는 활수라는 의미라고 한다. 남자 주인이 전용하는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1815년(순조 15년) 이후(李厚)가 건립했다. 열화당’이라는 당우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형제(전주 이씨 집안사람끼리)가 늘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자’는 뜻을 담고 있다. 대청, 사랑방, 침방,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대청 앞에는 반 칸 정도의 툇마루가 있다. 정면에는 차양 시설(테라스)이 설치되어 있는데 러시아의 궁중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해 준 것이라 한다.선교장 안채는 안주인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1748년 배다리(선교)에 전주 이씨 가의 삶의 터전으로 정하면서 처음 지어진 건물이다. 동별당과 서별당과 연결되어 있으며 안채로 통하는 별도의 일각문이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안뜰과 부엌 등이 있다. 선교장의 곳간으로 사용되었던 곳간채는 1908년 영동지방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로 개조됐으나 몽양 여운형 선생이 영어선생으로 재직할 당시 일제에 의해 폐교됐다. 그에 앞서 선교장에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한다. 당시 강릉 관아를 점령하고 있던 동학군이 선교장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선교장 주인 이희원은 쌀과 돈을 동학군에 보내 안심시킨 후 민보군을 조직하여 강릉 관아로 쳐들어갔다. 이에 동학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대관령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그 후 이희원은 강릉부사로 임명돼 동학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선교장 뒤쪽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선교장을 중심으로 좌청룡 길, 우백호 길로 나뉘어 있으며 밤에는 조명이 어우러져 은은한 멋을 풍긴다. 주변 숲과 어우러진 한옥의 아름다움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2021-06-18 21:35:17
고성군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되는 과정에서 유엔의 신탁통치 결의안에 따라 북한에 편입됐다가 6.25전쟁 후 수복된 지역이다. 그러나 군내에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고성군도 남북으로 나뉘어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북한 땅과 맞닿아 있는 고성군 접경지역에는 긴장감이 흐르지만 가장 평화를 갈망하는 곳이기도 하다. 분단의 아픔과 평화를 향한 염원이 가장 선명하게 교차하는 곳이 바로 고성 통일전망대다. 전망대를 가려면 10km 후방에 위치한 통일안보공원 내 출입국 신고사무소에 들려 민통선 출입신고서 작성 후 출입허가증을 받고 안보 전시관에서 약 10분 정도의 영상을 보는 안보교육을 받아야 한다(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안보 교육은 생략되고 있다). 출입허가증을 지참하고 타고 온 차량으로 통일전망대로 이동한다. 중간에 DMZ 검문소에서 허가증을 제시하고 차량 탑승원들의 확인이 끝나면 차량 통행을 허가해준다. 검문소를 통과하면 곧 전망대가 나온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로 긴장감은 더해지고 분단은 실감난다. DMZ와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해발 70m 고지 위에 34m 높이로 건립된 통일전망 타워에 오르면 바로 눈앞에 북녘땅이 펼쳐진다. 금강산의 구선봉과 해금강이 지척이고 시야가 좋은 날은 육안으로 비로봉까지 조망할 수 있다. 발밑으로는 동해북부선 철도를 잇는 공사 장면과 2004년 12월 개통된 동해선 남북연결 도로가 보인다. 전망대에는 성모 마리아상과 설악산 신흥사에서 조성한 미륵불 및 실향민들을 위한 망향단이 배치돼 있다. 이밖에 통일전망대에서 시작되는 ‘DMZ 평화의 길’을 통해 금강산전망대 투어 코스와 생태 관광 등이 가능하다. 평화의 길은 통일전망대에서 시작해 해안 철책을 따라 2.7km 도보 이동 후 금강산전망대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 A코스와 통일전망대에서 금강산전망대까지 차량으로 왕복 운행하는 B코스가 있다. 홈페이지로 사전 신청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현재 코로나19와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평화의 길 출입은 중단된 상태다. 통일전망대 가는 길목에 위치한 DMZ 박물관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후 모습과 휴전선의 역사적 의미, DMZ 생태환경 등을 재구성해 보여주고 있다. . 통일전망대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내려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호인 화진포에 닿는다. 화진포 해변은 넓이가 무려 72만평에 달하며 호수 둘레의 길이는 16km 에 이른다. 사시사철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여름이면 분홍빛 해당화가 화사하게 피어나는 호수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와 같다.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화진포는 바다생물과 민물생물이 공존하고 있어 생태학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화진포(花津浦)라는 지명에는 유래를 설명하는 슬픈 설화가 뒤따른다. 화진포 열산이라는 마을에 이화진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성정이 온화하지 못하고 자비심이 부족한 이화진은 건봉사에서 나온 스님들에게 시주도 하지 않고 골탕을 먹이기 일쑤였다. 하루는 그의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스님을 찾아갔으나 끝내 보지 못했다. 며느리가 집으로 돌아와보니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겨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은 며느리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마을의 이름을 따서 열산호로 부르다가 지금은 못된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화진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왜 이토록 아름다운 호수에 못된 시아버지의 이름을 붙였는지는 의문이다. 호수 너머로는 푸르디푸른 동해바다가 펼쳐진다. 멀리서부터 거침없이 몰려온 파도가 거품을 일으키며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파도가 밀려 나간 앞바다 500m 전방에 거북이 형상을 한 금구도(金龜島)가 솟아 있다. 여간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이 모든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화진포의 성(城)’이 자리잡고 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김일성 별장’이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김일성 별장 외에도 이승만 대통령 별장과 이기붕 부통령 별장까지 모두 3채의 별장이 모여 있다. 해방 이후 격동기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했던 두 인물, 김일성과 이승만의 별장이 한 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도 흥미롭지만 하나는 바닷가 언덕 위에, 다른 하나는 호숫가 언덕 위에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때문에 화진포 여행은 우리나라의 현대사 답사길이기도 하다. 선교사 휴양소에서 김일성 별장으로 바뀌었던 화진포의 성 김일성 별장은 엄밀히 말하면 김일성 일가가 몇 차례 여름휴가를 왔던 곳이다. 애초에 이 건물은 1938년 캐나다 국적의 선교사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 부부가 독일로부터 망명한 건축가 베버(H.Weber)에게 의뢰해 해안 절벽 위에 지은 예배당이었다. 선교사들의 하계 휴양지로 이용됐다. 해방 이후 북한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휴양지로 이용되었으며 1948~1950년 2년 동안 김일성 일가가 이곳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다. 이후 김일성 별장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 훼손된 건물을 2005년도에 옛 모습대로 복원해 ‘화진포의 성’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해안가 절벽 위에 울창한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중세 유럽풍의 2층 석조건물은 보기에도 운치가 넘친다. 건물 입구로 이어지는 계단참에는 1948년 당시 6살이던 김정일과 동생 김경희가 나란히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은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당시 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처음 이 사진이 걸릴 당시 어린 김정일의 모습이 공개돼 되어 화제를 낳기도 했다. 1층에는 셔우드 홀 영상실과 화진포의 역사와 남북관계 변천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2018년 4월 27일의 문재인-김정은 남북정상회담 사진도 걸려 있다. 폐결핵 퇴치 의료선교사인 셔우드 홀 부부는 한국의 폐결핵 퇴치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들은 폐결핵 요양소를 세우고 운영비 마련과 결핵퇴치운동을 위해 1932년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기도 했다. 2층에는 김일성의 집무실과 침실 등이 배치돼 있다. 3층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산, 바다, 호수, 숲, 섬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김일성 별장에서 해발 122m 응봉까지 ‘화진포 소나무숲 산림욕장’이 이어진다. 산림욕장은 산림테라피원, 관목원, 습지원, 명상숲길 등 다양한 테마로 꾸며져 있다. 응봉에 오르면 화진포의 북호와 남호까지 조망된다. 2015년 12월 고성군을 방문한 싱가포르의 리센룽 총리 부부가 개인 SNS에 ‘응봉 가는 길에 본 화진포’ 사진과 ‘화진포는 아름다운 해변과 고요한 호수를 간직한 곳’이라는 글을 올린 이후 싱가포르 단체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김일성 별장에서 5분 거리 지척에 있는 이기붕 별장김일성 별장에서 5분 거리에는 이기붕 부통령의 별장이 있다. 이기붕 별장은 뒤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지고 앞쪽으로는 화진포가 내다보이는 소나무숲에 자리잡고 있다. 화진포와 송림이 어우러진 아늑한 풍광이 일품이다. 이 건물은 원래는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사택이었으나 해방 이후 북한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됐다. 휴전 후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 박마리아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했다. 1999년 7월 전시관으로 보수해 운영되고 있으며 내부에는 접견실과 집무실, 침실 등이 복원돼 있다. 해안가가 아닌 호숫가에 자리한 이승만 대통령 별장화진포의 성에서 차로 약 2분,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별장이 있다. 차를 타고 호숫가를 천천히 드라이브해도 좋고 이기붕 별장 관람 후 솔숲 길을 따라 걸어 가도 좋다. 진한 솔향을 맡으며 천천히 솔 숲 사이 오솔길을 걷다가 호숫가에 핀 성미 급한 해당화와 눈을 마주치고 갈대처럼 봄바람에 몸을 맡기며 두 발로 걸어가기를 추천한다. 화진포 호숫가 언덕 위에 위치한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소박한 단층 건물로 집무실과 침실, 벽난로가 놓여진 거실이 배치돼 있다. 1910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선교사를 만나러 화진포에 왔다가 화진포 풍광에 반한 이승만은 6.25전쟁 이후 화진포를 수복하자 1954년 선교사 집이 있던 자리에 별장을 짓고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1954년 27평 규모의 단층으로 지어졌으며 1960년까지 이승만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했다가 철거됐다. 이후 1999년 7월 육군에서 본래 모습으로 복원해 유품을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 별장에서 위쪽으로 20여 m 떨어진 곳에 육군관사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보수해 2007년 7월 개관한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 기념관’이 있다. 별장에 남아 있던 유품과 역사적인 자료를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 2013년 개관한 화진포 생태박물관에는 각종 동물의 박제와 골격, 화석류, 실물 모형, 영상자료 등을 통해 화진포와 관련한 생태계를 관람할 수 있다.입장권 한 장으로 화진포의 성(김일성 별장), 이승만 별장 및 화진포 기념관(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 생태박물관 등 총 4곳을 관람할 수 있다. 매표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동절기엔 4시 30분),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엔 오후 5시 30분)까지다. 아야진·가진·문암 ·백도 등 고성의 아름다운 해변과 항포구 고성군에는 동해안을 따라 27곳의 아름다운 해변이 자리잡고 있다. 해변은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덕분인지 유난히 물이 맑고 투명하다. 하얀 파도가 넘실대는 해변가에 서면 속마음까지 그대로 투영될 것만 같다. 화진포의 성에서 가까운 화진포 해변은 조개껍질과 바위가 부서져 만들어진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그 남쪽의 거진해변은 한쪽은 백사장이 또 다른 쪽에는 백섬을 중심으로 한 갯바위 해변이 끝없이 펼쳐진다. 바위가 많고 수심이 얕은 아야진해변은 최근 멋진 카페와 펜션이 많이 들어서서 방문객들이 급증하고 있는 ‘핫 플레이스’다. 이외에도 가진, 공현진, 교암, 대진, 마차진, 문암, 반암, 백도, 봉수대, 삼포, 천진 등 크고 작은 개성이 뚜렷한 해변이 많아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생선의 비릿함이 진동하고 팔딱거리는 물고기의 활기참이 가득한 항구 여행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거진보다 더 남쪽인 가진항에는 물회를 전국에 알리기 시작한 횟집들이 즐비하다. 거진항에서는 아침마다 생선 경매가 열리고 명태 식혜 등 고성군의 별미인 명태를 활용한 다양한 별미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화진포보다 북쪽인 대진항은 북방 어로한계선인 저도 어장에서 잡아 올린 문어가 유명하다. 생물인지 데친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살짝 데친 문어의 식감이 일품이다. 바다 한가운데로 난 전망데크와 너른 갯바위와 해안가를 따라 설치된 알록달록 무지개빛 레고형 조형물들이 감각적이다. 봉포항은 낚시꾼들과 스킨스쿠버족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규모는 작지만 주변에 콘도와 펜션단지와 가성비 좋은 횟집들이 많다.고성 역사문화 여행 … 금강산 자락의 건봉사·화암사, 동해의 풍류 청간정·천학정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금강산 끝자락 해발 900m 건봉산 기슭에 위치한 건봉사(乾鳳寺)는 고성 8경 중 1경에 해당한다. 민통선 안에 위치한 건봉사는 일반인의 방문이 통제됐다가 1992년에야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됐다. 6.25전쟁으로 완전 폐허가 되었으나 거듭된 중창불사를 통해 오늘날의 모습이 됐다.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때(520년) 아도화상에 의해 건립돼 원각사(圓覺寺)로 불리다가 고려 말 나옹화상이 중수하고 건봉사로 고쳐 불렀다. 조선 세조가 피부병 치료를 위해 건봉사를 들른 이후 조선왕실의 원당이 된 이후 건봉사의 위세는 절정에 달했다. 양양의 낙산사,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고성 화암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렸던 전국 4대 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건봉사가 신흥사의 말사가 됐다. 절 입구의 아담한 소나무 숲이 아늑한 느낌을 주며 너른 평지에 조성돼 관람하기가 좋다. 모든 전각이 6.25 전쟁 때 전소됐지만 불이문(不二門, 해탈문)은 전쟁의 화마를 피했다. 1920년대 지어진 건봉사 불이문 기둥에는 금강저(金剛杵, 아수라 무리를 처단할 때 쓴다는 무기이자 佛具)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조선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스승 해강 김규진(海崗 金圭鎭 1868~1933)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불이문을 통과하면 부도전과 범종각, 능파교(凌波橋)와 그 건너 대웅보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름다운 홍교(虹橋, 무지개 모양의 석교)인 능파교는 숙종 30~33년에 건립됐으나 영조 때 홍수로 유실돼 중수했다. 현재의 다리는 2005년에 복원됐다. 건봉사 적멸보궁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약탈당했다가 사명대사가 되찾아 온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다. 전 세계적으로 부처님의 치아 사리는 모두 15과에 불과한데 그중 12과가 건봉사에 모셔져 있으며, 나머지 2과가 스리랑카에 모셔져 있다. 대웅전 옆 만일 염불원에서 치아사리를 친견할 수 있다.고성군 토성면 신평리의 화암사(禾巖寺)는 금강산 남쪽 제1봉인 신선봉(神仙峰, 해발 1204m) 자락에 위치한 신라 천년 사찰이다. 신라 혜공왕 5년(769년) 진표율사가 창건했다. 6.25전쟁 때 전소돼 1986년에 중창하였다. 1991년 세계 잼버리 대회가 이곳에서 열려 약 1000여명의 신자가 이곳 대웅전에서 수계(受戒)를 받았다고 한다. 설악산에서도 멀지 않다. 가을철 설악산 단풍 인파를 피해 화암사로 발길을 돌려도 좋을 만큼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 푸른 물빛과 기암절벽, 울창한 송림 등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고성 앞바다에 풍류를 즐길 누각 하나 없으면 섭섭하다. 고성에는 고성 8경에 속하는 청간정과 천학정 등이 남아 있다. 토성면 청간리의 청간정(淸澗亭)은 청간천 하구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소나무가 그득한 들머리 길을 오르면 돌연 땅에서 솟은 듯 거대한 정자 한 채가 소나무 숲과 대나무 숲 사이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정자 가까이 다가설수록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에 넋이 나간다. 남과 북으로 청간천 하구와 기암절벽이 내다 보이고, 동서로는 동해안과 설악의 능선이 펼쳐지고 푸른 물결이 넘실대니 한 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일찍이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청간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고 김홍도의 ‘금강사군첩’, 정선의 ‘관동명승첩’, 허필의 ‘관동팔경도병’에도 청간정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강세황의 ‘풍악장유첩’, 현대화가 이의성의 ‘해산도첩’에서도 청간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청간정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20년 중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6.25전쟁으로 전소돼 1981년 복원되었다. 청간정에는 안밖으로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밖의 현판은 독립운동가 청파 김형윤(靑坡 金亨胤)이 1928년도에 쓴 것이며, 안쪽의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휘호했다. 독립운동가로 최고 권자에 올랐다가 부정부패와 독재의 오명을 쓰고 역사의 단죄를 받은 하야한 전직 대통령의 글씨가 한 자리에 걸려 있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고성군 토성면 교암리의 천학정(天鶴亭)은 교암리 마을 앞 조그만 산, 가파른 해안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1931년 지방유지 한치응, 최순문, 김성운 등이 뜻을 모아 정면 2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벽이 없는 단층건물이다. 남으로 청간정(淸澗亭)과 백도가 바라다보이고, 북으로는 능파대(凌波臺)가 가까이 있다. 주위에는 100년 이상이 된 소나무가 옛 정취를 느끼게 해주며 일출 명소다. 천학정 옆에는 교암리해수욕장, 백도해수욕장, 자작도해수욕장 일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와 문암포구, 어명기가옥 등 관광명소가 있다.
2021-05-25 19:5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