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8 09:40:17
3백만년전 발생한 세월의 풍화작용이 터키의 한 지역을 불가사의하게 만들었다. 이후 고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슬람 왕조의 침공을 피해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이곳의 기이한 바위에 구멍을 뚫고 지하도시를 건설해 살았다. 과거의 아픈 흔적과 인내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 바로 카파도키아다. 용암으로 형성된 암석들의 변모된 모습에 ‘마르코폴로 동방견문록’에도 등장할 정도로 특색 있다. 유명한 영화 ‘스타워즈’의 배경이 될 만큼 낯선 풍경이며, ‘개구장이 스머프’를 완성 할 만큼 동화 속 같은 풍경이기도 하다.
터키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꼭 방문한다. 국내의 대표적 여행사는 짧은 일정의 여행상품에도 카피도키아를 빼놓지 않는다. 그만큼 상품화가 많이 된 도시다. 카파도키아의 특이함은 괴뢰메 마을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돼 있다. 카파도키아를 포함한 투어상품으로는 레드투어, 로즈벨리투어, 벌룬투어, 그린투어 등 다양하다. 평소 투어를 선호하지 않는 나는, 이 도시에서 나만의 여행법으로 투어에서 체험할 수 없는 것들에 도전해보려 했다. 소심한 성격의 여행자라면 글을 읽고 한번쯤은 자유와 일탈을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앙카라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6시간을 달려 동이 틀 무렵 카파도키아에 도착했다. 뻐근함에 기지개를 피는 순간 눈앞의 장관에 정신이 번쩍 든다. 기괴한 바위들을 배경으로 먼 발치에 벌룬 무리가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닌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름답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 레드투어 : ATV를 타고 새로운 지도를 그리다
대부분의 패키지 투어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차를 타고 이동하며 포인트를 구경하는 것이다. 관광명소에 도착하면 사진을 찍고 기념품 가게에 들르는 것이 정석이다. 개인적인 견해로 투어상품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마치 다 차려진 밥상에 앉아 입만 벌리고 있는 격이다. 직접 반찬을 만들고 요리하는 것이 좋다. 구속받고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도 하나의 이유다. 물론 가이드 투어가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다닐 경우, 그만큼 많은 정보를 사전 공부해야만 한다. 가이드가 주는 알찬 정보들을 모두 무시할 순 없기 때문이다.
괴뢰메 마을에 머무르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2~3일 일정으로 투어를 나누어서 한다. 마을 자체는 크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걸으면 금방 둘러볼 정도다. 이곳에 도착한 첫날 나는 나만의 여행법으로 레드투어 코스를 구상하려 했다.
레드투어는 데브란트(상상의 계곡)-파샤바계곡(스머프마을)-아바노스(도자기마을)-야외박물관-우치히사르(3개의 요새)-피존밸리(비둘기계곡)등을 들르는 하루짜리 코스다. 당초 계획은 스쿠터를 빌려 이곳을 탐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운전 경험이 전무한 나에게 렌탈숍 주인은 당연히 대여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안을 찾다 생각난 것이, ATV, 즉 4륜 오토바이이다.
가격적인 면으로 볼 때 스쿠터의 두 배 가격 (2013년 당시 3시간에 한화로 8만원 수준)이다. 가난한 백패커임을 연신 강조하며 6시간에 8만원이라는 가격으로 네고(협상)에 성공했다. 숙소에서 지도를 챙겨들고 출발한다.
마을을 빠져나와 2차선 도로를 질주한다. 묵직한 바퀴를 달고 강렬한 엔진음을 내는 그 놈의 간지(분위기나 감각을 뜻하는 일본어 속어)는 도로를 압도할 만하다. 손잡이 레버를 돌려 속도를 올릴수록 엔진소리는 더욱 요란하다. 속도감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선택은 탁월했다. ATV는 산악지형에 적합하지만 일반 도로라고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다. 아스팔트 도로를 질주하는 ATV의 낯선 동양인 모습이 신기한지, 맞은편에서 오는 운전자들이 자꾸 쳐다본다. 속도를 올려 강한 바람이 피부를 스쳐갈 때마다 묘한 쾌감은 배가된다. 카파도키아의 도로 사정은 아주 좋다. 심플한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관광지를 알리는 정갈한 갈색 표지판이 나온다. 그것을 따라 가면 그만이다.
‘피존밸리’에 도착했을 때, ATV의 진가가 드러났다. 많은 투어 관광객들은 사진 포인트에 모여 사진을 찍고 있다. 나와 동행한 친구는 동시에 눈빛 교환을 한다. 그 의미는 운명처럼 저 계곡 사이를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오프로드를 달리는 ATV는 이제야 제 옷을 입은 듯이 힘이 넘쳐난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천 년 전 누군가 다녀간 이후 사람의 발자취가 끊긴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늪이 보일 정도로 우거진 숲속까지 들어왔다. 야생 날파리의 괴롭힘에 흥분감은 이내 불안감으로 바뀐다. 머리를 돌려 숲을 빠져나온다. 마치 우리 일행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마냥 어린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조금 전 기억을 되짚어 본다.
이런 식으로 여러 관광지를 돌아다닌다. 한적한 도로가 나오면 멈춰 여유도 즐겨보고 고함도 질러본다. 마치 이것과 함께라면 세상 어느 곳도 다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낙타형상 바위로 유명한 ‘데브란트’에 도착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장 높은 곳을 찾는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에 올라간다면 광활한 이 장관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예상은 적중했다. 오프로드를 한참 달려 언덕길을 오르니 압도적인 장관이 눈앞에 보인다. 아래쪽 투어 관광객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모습에 우월감마저 든다. 아름다운 모습과 행복해 하는 지금 이 순간이 교차돼 기억장치의 최고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 벌룬투어
해가 채 뜨지 않은 새벽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투어를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나갈 준비하고 있다. 오늘 아침은 날씨가 맑다. 지난 며칠간 좋지 않은 날씨 탓에 벌룬 투어를 미뤄둔 여행자들의 표정도 밝아 보인다. 서둘러 옷을 입고 카메라를 챙겨 숙소 밖을 나온다. 대기하고 있던 여행사 버스에 올라탄다. 잠깐의 시간 동안 졸았나보다. 마을 외곽에 있는 여행사에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드디어 투어를 한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해가 뜰 때까지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다 다시 차를 타고 외곽의 넓은 공터로 이동한다. 그곳엔 공기가 빠진 많은 벌룬이 널부러져 있다. 기념사진을 찍고 벌룬과 연결돼 있는 4개의 바구니 중 하나에 올라탄다. 모든 인원이 다 타자, 굉장한 광음으로 불을 붙인다. 조금씩 지상과 멀어진다. 하늘로 향할수록 다른 곳에서 들리는 관광객의 환호성은 커진다.
주행은 평균 45분에서 길게는 1시간을 한다. 주행 시간 중 절반은 낮은 고도에서 비행하고 나머지는 높은 고도에서 한다. 낮은 주행을 할 때는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들 사이를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여유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나의 파일럿은 베테랑인가보다. 고도를 높여 갑자기 급상승한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가히 일품이다. 저 멀리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모습이 50여개는 족히 되 보이는 형형색색 벌룬 모습과 조화되어 환상적이다. 감동의 순간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한참 셔터를 누르던 나는 잠시 그것을 내려놓는다. 이 아름다운 모습은 사진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나의 기억 속 감각세포들이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높게 치솟던 벌룬은 어느 새 지상으로 내려와 안전하게 착륙한다. 감격의 순간은 도착 후 샴페인을 마시고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지속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벌룬투어는 내가 추구하는 형태의 여행은 아니다.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비용을 지불하고 가만히 경치구경만 하기 때문이다. 가격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소 부담이 될 수 있다. 2013년 기준으로 10만~15만원이 들었다. 하지만 자연이 주는 장엄하면서 황홀하기까지 한 아름다운 풍경에 비한다면 전혀 아깝지 않다.
#. 그린투어 : 현지인의 뜻하지 않은 초대
그린투어는 카파도키아 외곽 지역을 돌아보는 투어다. 대표적인 코스가 데린쿠유 지하도시, 셀리메 수도원(스타워즈 촬영지), 파노라마 포인트, 으흘라라 협곡 등이 있다. 포인트 간의 거리는 차로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이 걸린다. 능동적으로 투어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을 하다 생각난 것이 렌터카다. 레드투어 코스를 ATV로 다녀온 것도 선택에 한몫했다. 렌터카 가격은 수동 90리라(한화 54,000원), 자동 150리라(90,000원-2013.04기준)다. 협상을 통해 130리라에 협의를 본다. i30을 닮은 흰색의 연식이 보이는 차량이 우리를 반기러 왔다. 비용 절감을 위해 숙소에서 1일 렌트 투어를 홍보해 2명의 여행자를 모집한 상태다. 터키 외곽지역 지도를 하나 챙겨들고 차에 탑승한다. 운전은 가장 경험이 많은 내가 하기로 한다. 운전대를 잡은 일일 여행가이드는 2명의 여행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여행의 목적은 자유입니다. 운전을 하다 어디든 끌리는 곳이 있으면 가자구요!’
노래 볼륨이 높아질수록 우리의 기분도 한층 올라간다. 큰 음악을 틀고 거리를 누비는 스포츠카마냥 우리의 음악소리도 시선을 유도하기에 충분하다. 정해지지 않은 오늘 우리의 미래가 너무나 흥분된다. 숙소 부근에서 사온 케밥으로 허기를 달래며 한 시간 정도 주행을 한다. 4차선 고속도로 양 옆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녹색 벌판에서 풍기는 내음의 향기가 차창 너머로 스며든다.
얼마나 달렸을까? 카파도키아에서 상당히 멀리 나온듯하다. 어느 투어 포인트를 가볼까 고민하던 우리의 눈에 띈 것은 오른편에 보이는 큰 호수다. 차의 핸들을 주저 없이 돌린다. 호숫가에 앉아 잠시 여유와 사색을 즐기는 생각을 한다. 호수는 굉장히 크고 웅장하다. 조금 더 들어가다 눈앞 광경에 깜짝 놀란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무리가 비포장도로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 차에서 내린다. 이 모습을 본 양치기 할아버지가 멋쩍게 손을 흔들어 주신다. 우리도 덩달아 반가움에 손을 흔든다. 양의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우리에게 할아버지는 본인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할아버지 집이 있다. 양들을 모두 집 앞 마당으로 몰아넣는다. 할아버님 권유로 양 무리 속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새끼 양을 안아보고, 뿔을 만져본다. 특별한 경험이다. 양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집안에서 할머님 한분이 나오셔셔 우리에게 차를 마시고 가라는 제스처를 하신다. 여행 중 현지인 집에 초대를 받아 방문하는 것은 여행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다. 지금까지 만난 터키인들의 친절함을 우리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방은 좁고 허름하다. 산골에 살고 있는 할머니댁 같은 느낌이다. 바닥에 앉자, 둥그런 접이식 식탁과 보를 꺼내온다. 음식을 흘리지 않기 위함이다. 식탁 위에는 볶음밥과 감자, 양파, 곁들여 먹는 소스, 아이란이 있다. 이외에도 살구를 넣은 조금은 달짝지근한 음료, 이제 막 밭에서 캔 듯 한 숙주나물, 그리고 이것들을 넣어 먹을 탈리와 비슷하게 생긴 넓고 얇은 빵이 준비돼 있다. 진수성찬이다. 모든 음식이 자연에서 직접 구해 만든 것 같다. 케밥을 제법 먹어본 나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리법을 알고 있다. 볶음밥은 우리나라의 밥과 비슷한 느낌이고, 감자는 양파와 함께 특제소스를 발라 먹으니 달콤하다. 아이란은 지금까지 도심 음식점에서 사먹었던 맛과는 사뭇 다르다. 평소 느꼈던 밍밍함이 전혀 없이 상큼할 정도로 맛있다. 살구를 넣은 물도 초딩 입맛인 나에게 딱이다. 모든 음식들이 지금까지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꿀맛이다.
뜻하지 않은 곳에 와서 기분 좋은 초대를 받은 것에 대하여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드리고 싶어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손님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듯 강한 행동을 보이신다. 식사가 끝난 후 차이 한잔을 내주신다. 이쯤 되면 거절할 수 없다. 좁은 방에서 한 시간여 동안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어와 터키어로 완벽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문맥상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눈치껏 알 수 있다. 교감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한층 가까워진 것 같다. 호의에 감사함을 표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한다. 소정의 돈을 주면 분명 거절할 게 분명하다. 그들과의 추억이 담긴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얇은 종이 박스에 주소를 적어달라고 한다. 아들이 주소를 적는 동안, 할아버님은 무엇인가를 가져온다. 우리와 같은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무심코 방문했다가 사진을 남겨준 것이다. 사진 속에서 동양인은 없다. 우리가 처음이다.
이곳에 도착한지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아쉽지만 헤어져야 한다. 나가서 단체사진을 찍자고 제안 하자 할머님은 머리에 두르는 터빈을 새것으로 가신다. 귀여운 면도 있으시다. 사진을 찍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미련이 남아 끝까지 손을 흔들어 주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투어를 했다면 절대 경험하지 못한 뜻 깊은 시간이었다. 아쉬운 맘을 달래러 그린투어 유적지 몇 곳을 둘러보았지만, 오랫동안 가족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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