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갯벌, 갈색 자연의 부안 … 내소사 전나무숲·석정詩·줄포습지 염생식물
2019-10-31 13:47:04
하얀 곰소염전, 쌍계재서 바라보면 白眉 … 적벽강·채석강·솔섬의 일몰 아름다워
깊은 가을, 전북 부안은 이맘때쯤 가면 가장 좋다. 총천연색 자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단풍이 물든 대지는 새색시마냥 곱고 푸르디푸른 바다는 보면 볼수록 정겹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색창연한 문화재는 방문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먼저 읍내 석정문학관(부안읍 선은리)에 들러본다. 부안이 낳은 신석정(辛夕汀 1907~1974)은 한 세기의 절반을 교육자이3 시인으로 살았다. 일찍부터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많이 썼으며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한용운, 이광수, 정지용, 김기림, 서정주, 박목월, 이병기, 조지훈 같은 문인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다.
2층으로 된 문학관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세미나실, 문학교실 등으로 나뉘어 있다. 석정의 소개 자료와 대표시집, 유고시집, 수필집, 전집, 묵서필, 고가구 등 유품들이 상설전시실에 놓여 있다. 석정의 시대별 시와 함께 가족과 지인 사진, 스승과 선후배 동료와의 친필 서한 등은 기획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입장료 무료. 문학관 맞은편에는 석정 선생의 대표작인 ‘촛불’과 ‘슬픈 목가’ 등이 탄생한 옛집(청구원)이 복원돼 있다. 문학관에서 10여 분 거리에 선생의 묘소(행안면 역리)가 있다.
외변산 풍광 수려한 바람모퉁이 … 모세의 기적 ‘하섬’
읍내에서 부안의 서쪽 방면인 새만금방조제 쪽으로 가다 만난 바람모퉁이. 푸른 서해와 널따란 갯벌이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준다. 바람모퉁이는 바닷물이 드나들 때마다 바람이 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바람모퉁이에서 해안길을 따라 조금 가면 부안댐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부안댐은 외변산이 둘러싸고 있어 풍광이 수려하다. 전망대에 오르면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외변산과 그 아래로 물이 가득 담긴 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다시 돌아 나와 해안길을 따라 계속 가면 해수욕장이 있는 고사포에 이르게 된다. 고사포 해변 앞에 떠 있는 하섬은 매달 음력 1일과 보름 썰물 때면 2㎞에 걸친 바닷물이 갈라져 모세의 기적을 연출한다. 하섬은 새우(鰕) 모양을 한 작은 섬으로 바다에 떠있는 연꽃 같다고 해서 연꽃 ‘하(遐)’자를 쓰기도 한다.
고사포를 지나 만나게 되는 변산면 격포리의 적벽강(赤壁江)은 시인 소동파가 노닐었다는 곳으로 일명 사자바위로 불린다. 붉은 색을 띠는 바위 절벽이 수성당(水城堂)이 있는 용두산을 돌아 2㎞가량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위도와 칠산바다(부안 고창 영광을 아우르는 오목한 연안)는 한 폭의 그림으로 우리 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해넘이 또한 장관이다. 좀 번잡한 채석강에 비해 한결 호젓하게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다. 수성당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파도 철썩이는 바다와 갯바위를 마주하게 되는데, 문득 발에 밟히는 몽글몽글한 갯돌의 감촉이 더없이 좋다.
적벽강 단애 위에 올라앉은 수성당은 부안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단칸 기와집 건축물로 절벽 주변에는 동백나무와 시누대가 무성하다. 전설에 의하면 수성당을 지키던 수성할머니(海神)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신당 인근 어부들은 오랜 세월 해신과 그의 딸 8자매신을 정성껏 모시고 있는데 매년 음력 정초에 음식을 차려놓고 궂은 일이 없고 무사안녕하길 기도를 드린다.
부안여행 1번지 채석강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채석강(採石江). 변산 안내지도 한 끄트머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곳이다. 해안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고서적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처럼 생겨 탄성을 자아낸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은 채석강을 더욱 빛나게 한다. 햇살과 노을, 해무(海霧)와 파도가 빚어내는 사중주는 자연의 속살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렇다고 언제나 채석강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때가 안 맞으면 일부만 볼 수 있으니 자연의 심술이라고 해야 할까?
채석강과 붙어 있는 격포항에 들어가 본다. 격포진이 있던 옛 수군의 근거지로 일직선으로 뻗는 방파제와 그 옆으로 닭이봉의 기암절벽이 볼만하다. 수십 척의 어선이 물살에 동동거리는 풍경하며 방파제를 거닐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이어진다. 인근의 30번 해안도로에서 전북학생해양수련원 앞 바다에 위치한 솔섬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일몰 풍경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사진작가들은 이곳의 일몰이 채석강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물이 빠지면 길이 70m 정도의 솔섬에 걸어갔다 오는 재미도 누릴 수 있다.
격포항에서 오른쪽(남쪽) 해안도로를 타면 궁항(弓港·격포리)에 닿게 된다. 궁항 근방에 있는 궁항전라좌수영 세트장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계단식 촬영지로 동헌, 군관청, 수루 등등 총 21동의 건물이 어우러져 있다. 이곳에서 감상하는 낙조도 근사하다.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등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됐다. 요트 동호인들의 요람인 궁항요트장도 인근에 있다. 국가 대표급 선수들도 여기서 훈련하는데 각종 요트대회에서 상위권 성적을 거두고 있다.
여기서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선을 따라 남동쪽 줄포 방면으로 가면 작고 소박한 어촌 마을, 모항(茅項)이 나타난다. 어선 십여 척이 정박해 있는 모항 앞 바다는 천혜의 갯벌지대. 검붉은 개흙이 주황빛 햇살에 반짝이는 저녁 무렵, 모항에서는 누구나 시인이 된다. 마을 뒷산에는 천연기념물인 호랑가시나무 군락과 100년을 넘긴 팽나무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모항해변은 작고 아담한 해안선에 둘러싸여 있어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모항해변 뒤편 해나루가족호텔 옆으로 난 나무 데크 산책로를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푸른 솔밭과 산책로 너머 시원스럽게 펼쳐진 바다 풍경에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청신한 전나무숲길 내소사 … 곰소·줄포 개펄습지
모항에서 다시 해안도로를 타고 서쪽 석포 삼거리에 이르면 내소사 가는 길이 열려 있다. 절 들머리, 껑충한 전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이어지는 600m의 전나무숲길은 언제 찾아도 청신하다. 시멘트길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에게 흙길이 주는 편안함과 푹신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소사(來蘇寺)는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창건된 진서면 석포리의 작은 절집이다. 쇠못 하나 안 쓰고 지었다는 대웅보전(보물 제291호)은 화려하면서도 수수하고, 새가 그리고 날아갔다는 단청과 예쁜 꽃문양 창살은 바라볼수록 은근한 멋을 풍긴다. 절집 뒤로 난 산길을 따라가면 직소폭포를 지나 낙조 포인트인 월명암으로 갈 수 있다.
길은 다시 곰소만을 끼고 왕포(진서면 운호리)를 지나 곰소에 이르고 다시 우동-영전(보안면)을 거쳐 줄포에 닿는다. 한때 번성하던 줄포항이 사라지고 바다를 막아 곰소항을 새로 만들면서 원래 해변과 항구 사이의 공간에 생긴 게 곰소염전이다. 바둑판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천일염전은 여름엔 여름대로 겨울엔 겨울대로 운치가 있다. 모항에서 곰소 염전까지는 15㎞(변산 마실길 6코스)이다. 국립변산자연휴양림을 출발해 곰소염전까지 걸어가는 쌍계재 아홉구비길은 20km 조금 넘는 거리로 5시간 남짓 소요된다. 곰소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쌍계재는 이 길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줄포는 개펄습지도 잘 보존돼 있다. 람사르 협약 습지로 등재될 만큼 상태가 우수하다. 곰소는 일찍이 젓갈산지로 이름을 날렸던 곳이다. 지금도 마을 왼쪽 편 곰소항 뒤쪽에 젓갈단지가 있다. 가게마다 갈치속젓,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청어알젓, 황석어젓, 개불젓, 토하젓 등 30여 가지의 다양한 젓갈들을 내놓고 판다. 보기만 해도 입맛이 살아난다. 김장철을 앞두고 요즘 외지인의 발길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줄포면 우포리에는 바다와 습지가 만들어 놓은 줄포만갯벌생태공원이 펼쳐져 있다. 염분을 없애고 생태연못을 비롯해 갈대숲길, 야생화단지, 잔디광장을 꾸며놓았다. 아이들을 둔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바닷게와 함초, 해국 등 다양한 염생식물을 볼 수 있다.
줄포에서 가까운 반계서당(보안면 우동리)에도 들러본다. 조선 후기 실학파의 비조인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후학들을 가르치며 은거했던 곳이다. 발 아래로 줄포만이 훤히 내려다보여 풍치가 무척 아름답다. 복원된 학당과 선생이 생전에 쓰던 우물이 남아 있다.
인근에 작고 소박한 절집, 개암사(開巖寺· 상서면 감교리)가 있다. 호수를 끼고 들어가는 진입로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그윽하다. 능가산 골짜기에 들어선 개암사는 이렇다 할 볼거리는 없지만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절 뒷산의 울금바위는 개암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울금바위까지는 700미터 남짓한 거리에 20분 정도 걸린다. 울금바위 아래에는 신라 고승 원효가 암자를 지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원효굴이 있다. 가을의 끝자락, 푸른 바다와 유서 깊은 문화재, 그리고 총천연색 산이 있는 부안이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김초록 여행작가 rimpyung74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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