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7 12:02:51
삿포로 중심 남동부를 감아도는 도요히라강(豊平川)
일본 북부 홋카이도(北海道)는 설경이 아름답지만 여름의 지평선이 보이는 풍경과 꽃의 향연도 고즈넉한 낭만으로 다가온다. 중심인 삿포로, 오타루 등지의 대도시적인 매력과 비에이, 후라노 등 인근 전원도시의 감성적 여유를 다 갖춘 게 홋카이도만의 강점이다. 양질의 수산물과 농산물 등 식재료가 넘쳐나다보니 도쿄, 오사카 등 다른 일본 대도시보다 음식의 양도 많고 다양성과 다이나믹함에서 우월하다.
여전히 유럽지향적인 해외여행 마인드가 지배하는 가운데 유난히 더웠던 올해의 지난 여름에서 도피하고자 홋카이도를 택했다. 무엇보다도 돌을 갓 넘긴 늦둥이(생후 14개월) 아들과 함께 하려면 거리상 홋카이도가 적당했다. 지난 8월 27~30일의 홋카이도 여행은 최근 수년간의 해외여행 치고는 가장 느긋한 일정이었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분주하지 않았고 슬슬 걸었다. 현지 가이드도 올 여름엔 유난히 많은, 평년의 2~3배쯤 되는 한국 관광객이 폭염을 피해 홋카이도로 몰리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빴고 덕분에 수입도 크게 늘었다고 기뻐했다.
여행 첫날 오전 10시10분에 이륙하는 국적기를 타고 2시간 40분을 비행하니 홋카이도 신치토세(新千歲)공항에 이르렀다. 지도를 보면 서울에서 일본 최남단인 오키나와나 일본 북단인 홋카이도나 비슷하게 멀다. 1시간이면 김포를 떠서 오사카에 내린다고 표현하는 일본여행의 편이함과는 차이가 난다.
공항버스를 타고 숙소인 도미인프리미엄삿포로호텔에 내렸다. 참치회, 연어회, 연어알이 풍성한 아침 뷔페식과 온천욕장, 저녁이면 야식으로 제공되는 요나키소바(간장라멘)로 인기를 얻고 있는 체인형 비즈니스호텔이다. 다만 토요일 밤을 끼면 숙박비가 평일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해 지출이 컸다는 게 아쉽다. 어쩔수 없이 휴일을 이용해 여행가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토요일밤을 피하고 평일에 다녀오는 게 낫다. 다행히 3박으로 할인한 숙박권을 어렵사리 구해 호텔에 안착하니 6평도 못되는 좁은 객실이 답답하다. 말이 더블 침대지 혼자 자기에도 작아보인다. 여장을 풀고 답답한 호텔에 나와 시내관광에 나섰다.
공원 끝에 1967년 설치된 높이 147.2m의 텔레비전타워는 삿포로의 랜드마크다. 90m 높이엔 전망대, 레스토랑, 기념품점이 운영된다. 일몰 이후 켜지는 조명이 도심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인근에는 1878년 미국 목조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탑이 자리하고 있다.
1972년에 열린 삿포로 동계올림픽은 삿포로의 극적 변화에 화룡점정했다. 해마다 2m가 넘게 쌓이는 겨울철의 골칫덩이 ‘눈’을 관광자원화하는 계기가 됐다. 삿포로 맥주축제나 후라노의 7~8월 라벤더축제가 세계화되는 데 삿포로올림픽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해가 지려하고 쌀쌀한 기운이 더해지며 배가 출출해지자 내친 김에 맥주 한잔하고 저녁식사도 할 겸 삿포로맥주박물관을 찾았다. 창립자들은 1876년 독일에서 라거맥주 공법을 배워와 시내 근교에 공장을 세웠고 현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3가지 타입의 맥주를 시음해봤다. 클래식, 블랙라벨, 카이타쿠시(Kaitakushi) 등으로 나뉘는데 카이타쿠시는 최초의 맥주공법 레시피 그대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역시나 클래식이 가장 무난하다. 3가지 타입마다 미묘한 차이가 나지만 모두 뒷맛이 개운하다. 귀국할 때 신치토세공항에서 구입한 24캔짜리 삿포로클래식 맥주는 며칠간 서울의 무더위를 이기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박물관 내부엔 오래된 스테인리스 발효탱크가 자리하고 있고 주위의 계단으로 관람객이 오르내린다. 삿포로맥주의 역사와 브랜드변천사를 담은 기록물과 포스트 등이 걸려져 있다. 삿포로맥주의 붉은 별 브랜드는 근대화 당시 붉은 벽돌건물과 북극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근처엔 삿포로맥주 관계사가 운영하는 양고기구이 야외 레스토랑이 있다. 입장하면서 레스토랑 표를 구했으면 충분히 시간이 났을 텐데 그것을 모르고 퇴장할 때 티켓을 구하려니 줄이 너무 길다. 가성비가 높아 양고기를 포식하는 데에는 최고지만 둘이 먹기엔 헤비한 양의 양고기가 나오는 데다 고기굽는 연소가스가 아기에게 해를 줄까봐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온다면 양껏 양고기구이(일명 징기스칸)와 이곳만의 프리미엄 생맥주(별 5)를 흡입해볼 수 있으련만….
결국 호텔로 가는 길에 JR(일본철도)타워 내 식당가에서 무난한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려 했다. JR타워엔 호텔, 다이마루백화점, 식당가, 전망대 등 복합시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한국 백화점 음식처럼 맛없거나 조금 괜찮아 보이는 곳은 줄이 늘어서 기다릴 수 없었다. 속이 빈 처량한 마음에 저녁이면 호텔에서 공짜로 제공하는 야식거리인 간장라멘을 먹었다. 호텔주변은 바로 니조(二?)시장이어서 수산물요리가 넘쳐나고 징기스칸 구이 냄새가 진동한다. 가격도 한국에서 동네횟집이나 고깃집을 가는 정도로 저렴하다. 여기에 일본 사케가 얹혀지면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결국 호텔옆의 스시선술에 들어가 회덮밥과 소라세트를 시켰다. 맨밥을 시켜 아기에게 밥알과 미소국물을 먹이니 허기가 조금 가신 듯하다. 하지만 해외여행인 탓인지 기력이 한국에서만 못하다. 아기가 칭얼거려 밥을 먹다말고 애를 다독거리려 잠시 음식점 밖으로 나왔더니 무전취식할까봐 노려보는 눈초리가 매섭다. 식대를 치르고 나오니 기겁을 하며 우리가 다 마시고 놓고 온 생수병을 다시 가져가라며 불쾌한 티를 역력히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음식점이라도 손님이 휴지나 생수병 등 자기 가게와 상관없는 쓰레기를 놓고 가면 안된다고 한다.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지라 지금도 떨떠름하다.
쌀쌀한 날씨, 허기, 비행기여행에 지친 아기가 부모 잘못 만나 고생한다 싶다. 내일 아침이면 음식의 양과 풍미에서 뛰어나다고 소문난 도미인프리미엄삿포로호텔의 메뉴를 골고루 먹여보겠다며 측은한 마음을 삭혀본다. 자기 전에 호텔 상층의 온천에서 아기와 함께 씻었다. 좁은 데다가 목욕물이 아기에겐 뜨거울까봐 탕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칭얼대는 아기를 대충 씻기고 나왔다.
홋카이도 여행 셋째날 아침엔 삿포로 시내를 전부 내다볼 수 있는 아사히야마 전망대와 과자테마파크 격인 시로이 코이비토 파크에 들렀다. 삿포로를 전망하는 명소로는 모이와야마, 텔레비전타워, JR타워전망대(T38) 등이 꼽힌다. 하지만 이들 명소는 혼잡하거나 돈을 내야 한다. 현지 가이드는 아사히야마는 한적한 데다 무료여서 자기는 가장 맘에 든다고 추천했다. 인근에는 고급주택가가 형성돼 있고 아침이라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여유층이 많다. 가장 유명한 모이와야마는 높이 531m의 얕은 산으로 원시림을 안고 있으며 케이블카(성인 왕복 1700엔)나 도보로 올라갈 수 있다.
시로이 코이비토는 ‘하얀 연인’이란 의미로 홋카이도의 대표 과자다. 프랑스어로 ‘고양이 혀’란 뜻의 부드러운 쿠기 ‘랑그 드 샤(Langue de Chat)와 진한 화이트 초콜릿이 간판 상품이다. 과자 생산공장과 과자만들기 체험장이 있다. 유럽의 중세시대 성을 모방한 듯한 외관에 어린이들 놀이터처럼 꾸민 정원은 다소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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