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과 선운사, 모양성, 고인돌, 운곡저수지의 고창 … 복분자술에 풍천장어
2020-11-27 21:49:04
선운사의 동백, 꽃무릇, 단풍 … 꼭 봄과 가을이 아니어도 눈이 부시게 푸르는 날에 가보고 싶은 곳
전북 고창은 선운사와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장이다. 서정주는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 곳에서 서당을 다니다 1924년 부안의 줄포로 이사가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했다.
미당의 부친은 인촌 김성수의 마름이었다. 그의 시 <자화상>의 ‘애비는 종이었다’는 소작농으로부터 악착 같이 소작료를 거둬들여 지주에게 갖다 바치고 비굴하게 공생 또는 기생해야 했던 굴곡진 마음이 느껴진다. 따라서 그의 친일 행적과 과거 군사정권에 대한 동조도 서글플 수밖에 없었다.
‘언어의 마술사’ ‘전라도 방언의 요리사’란 수식어처럼 무슨 주제를 갖다놔도 말장난처럼 그에 맞는 최고의 표현을 하며 언어를 유희한 미당에게 이런 아픔이 시를 깊이 있게, 상처 속에 꽃피는 진주를 낳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젊은 시절 하도 ‘시하면 미당’ 하길래 식상함을 거부하던 필자는 일부러 멀리 했는데 나이 들어 가끔 읊조리다 보면 과연 그래서 미당이라고 했겠구나하는 것을 느낀다.
진마마을은 선운사에서 인천강(주진천과 고창천)으로 북동쪽으로 차로 10분쯤 달리면 있다. 이 마을은 미당이 어렸을 적 바닷물이 넘어오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미당의 외할머니는 어부인 남편을 바다에서 잃은 트라우마에 시달렸지만 미당은 바닷물이 넘쳐 마당으로 밀려들어오면 거기서 망둥이나 새우를 잡느라 할머니의 마음을 미쳐 헤아리지 못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진마마을의 미당시문학관은 미당 사후 11년이 지난 2011년 11월 폐교가 된 선운분교를 리모델링해 세워졌다. 문학관 뒤의 마을에 그의 생가가 있고 마주 보이는 건너편 마을 뒤 언덕에 그의 묘지가 있다. 미당의 아우인 서정태 선생과 후손들이 4000여 점의 유품을 이 기념관에 기증해, 그의 시 세계와 일생을 살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미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미당문학관에는 이런 변명이 적혀 있다. “나에게 친일 문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43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최재서가 경영하던 ‘인문사’에서 일본어 잡지 ‘국민문학’ 편집일을 하는 동안 당시 총독부 산하에 소속된 조선국민 총력연맹지부의 요구대로 작품을 쓴 일이 있다.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젊은 그 시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 시절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온다. 친일문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며 깨끗하게 청산되어야 마땅하다. 당시 나의 정신의 실상을 세상을 뜨기 전에 꼭 글로 남기겠다.”
미당이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고 이듬해 1주년 기념 학생 시위를 주모한 혐의로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기도 했으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과 관련 친독재적 행보를 남긴 것을 보면 친일 행적이 꼭 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 같은 심증이 굳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토속적 언어로 빚은 우리네 정서를 담은 명시들과 그 구절구절들을 어찌다 폐기하고 오염된 문인의 배설물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살수록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은 범인으로서 더욱 그렇다.
그의 시에 나오는 질마재는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오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서정주는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유년시절 고향 사람들이 겪었던 촌락 사회의 전통을 산문시로 담아 보통사람의 흥미진진한 삶을 신화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재능을 입증해보였다.
지금은 ‘고인돌질마재따라100리길’이란 관광 둘레길의 한 코스로 자전거를 타거나 도보로 트래킹하는 사람들의 길로 친숙해졌지만 민초들의 심정과 서정주의 삶을 음미해본다면 겨울을 앞둔 시점에서 ‘국화 옆에서’처럼 인생을 성찰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고창의 선운사(아산면 삼인리)는 백제 위덕왕 시절(577년) 검단선사가 창건했다. 조계종 24교구의 본사로 한 때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을 거느린 대가람이었다. 하지만 정유재란 때 본당을 제외하고 화마에 소실됐다. 지금의 만세루, 영산전, 명부전, 대웅전 등은 1613년 광해군 때 다시 지은 것이다. 선운사에는 지장보살좌상, 금동보살좌상 등 보물 5점 등이 있다.
선운사는 봄에는 동백, 늦여름에는 백일홍·상사화·꽃무릇(석산), 늦가을에는 단풍으로 관광객을 반긴다. 동백나무 군락은 3000여 그루로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은 600살을 넘겼다. 겨울에 피어 동백이지만 선운사의 동백은 아주 늦어 3월이 넘어야 만개한다.
미당은 ‘선운사 동구’(禪雲寺 洞口)란 시에서 <禪雲寺 고랑으로 / 禪雲寺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읍디다.> 라고 읊었다. 작년에 핀 꽃과 오래돼 쉰 목소리가 막걸리 한 사발에 버무려지는 기묘한 배합이 구성지다.
흔히 상사화와 꽃무릇을 같은 꽃으로 생각하는데 완연 다르다. 둘 다 수선화과에 속하지만 상사화는 통상 8월 초에 분홍색 꽃을 피운다. 짙붉은 꽃무릇은 9월 20일경이 절정이다. 모두 잎이 진 뒤에 꽃이 피고 꽃이 진 뒤에 잎이 나기 때문에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해서 같이 상사화로 불리지만 빛깔과 개화 시기, 꽃잎 모양이 엄연히 다르다.
선운사 앞 극락교 너머에는 차밭이 있다. 차 중 가장 알아주는 게 청명(4월 5일)과 곡우(4월 20일) 사이에 따는 우전차(雨前茶)다. 하지만 너무 여리고 양도 적어 보통 입하(5월 5~8일) 이전에 딴 세작(細雀, 참새의 혓바닥)을 흔히 즐긴다.
선운사를 품은 산이 도솔산(선운산)이다. 선운(禪雲)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兜率)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을 의미한다. 예부터 불도를 닦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기운이 좋은 땅으로 알려져 있다. 해발은 336m로 나지막해 힘들지 않다. 도솔암까지는 거의 평지이고 도솔암에서 천마봉까지는 약 1km로 30분이면 충분하다.
조선 말 선운사의 고승 백파(白坡)는 전통적인 선 수행의 대가였다. 이에 반기를 든 게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草衣禪師)였다. 추사 김정희는 동갑인 초의선사와 맘이 통해 19살이나 위인 백파를 유교적인 시각에서 험악한 말로 폄하했다. 이에 백파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비는 꼴”이라며 가볍게 넘겼다. 훗날 둘은 화해했고 추사는 백파의 묘비에 大機大用(대기대용)이라는 휘호와 비문을 남겼다.
추사는 만년에 선운사의 백파를 찾아 석전(石顚)이라는 아호를 주면서 ‘누구 주고 싶은 사람 있거든 주라’고 했다. 이 아호는 백파 사후 일본 식민지 시절 박한영(朴漢永)이란 스님에게 전해졌는데 석전 박한영은 대종정이 돼 일본의 한일불교 합방에 저항해 끝까지 한국 불교를 고수하는 데 앞장섰다.
도솔암에는 선운사의 보물 중 하나인 마애불이 있다. 높이 20m의 거대한 바위를 가득 채운 마애불은 전남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해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다소 딱딱한 느낌이지만 한껏 치켜 올라간 눈꼬리, 우뚝 솟은 코, 양감이 두드러진 입 등이 특징적이다.
선운산은 전북 서해안권 국가지질공원도 품고 있다. 일몰이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진 선운산의 낙조대와 천마봉 일대는 화산암 중 하나인 유문암으로 구성돼 있다. 유문암은 주변의 응회암보다 단단하고 치밀해 풍화에 강한 특성을 보인다. 이 때문에 유문암이 수직에 가까운 암석 절벽을 이루고 뚜렷한 입체감을 나타낸다.
고창은 전남 화순, 인천 강화도와 함께 3대 고인돌의 고장이다. 이들 지역은 2000년 11월 29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대부분 3000년 전부터 1000여년 동안의 청동기시대에 조성됐다. 국내에서 고인돌을 무덤으로 확인하고 연구한 것은 100년 밖에 안 됐다. 그런데 전세계 고인돌 약 15만기 중 우리나라에 10만기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 중 국립중앙박물관은 약 1700기의 고인돌을 발굴해 기록해놓고 있다.
고창 아산면 상갑리, 고창읍 죽림리 일대엔 고인돌 유적지가 잘 정돈돼 있다. 좁은 지역에 밀집돼 있고 다양한 게 화순이나 강화보다 압도적이다. 이 곳 447기의 고인돌 중 250기가 남방식이다. 남방식은 작은 굄돌에 육중한 큰 바위가 얹혀져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탁자 형태의 북방식은 3기밖에 없고, 45기는 지상석곽식이다. 나머지 149기는 형식이 불분명한 것들이다.
흔치 않은 북방식 고인돌 중 고창읍 도산리의 덮개돌을 받치는 다리가 아주 긴 고인돌은 따로 이름이 붙여져 있는 유일한 고인돌이다. 지방기념물 11호로 ‘망북단’ ‘망곡단’이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때 이 마을 출신 의병장이 출정하려다 ‘삼전도의 굴욕’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북방식 고인돌 주변에는 3기의 남방식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죽림리 고인돌공원에서 운곡리로 넘어가는 매산재를 넘으면 오방골(오베이골)이다. 오방골은 다섯 갈래 고개를 넘으면 아산면 부안면 고창읍내 등으로 나갈 수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 운곡습지 탐방로와 운곡저수지가 있다. 예부터 이 곳은 물이 풍부하고 청정했다. 아침과 저녁이면 물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운곡(雲谷)이란 이름을 얻었다.
1981년 영광의 원자력발전소 가동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이곳에 저수용 댐이 건설되면서 운곡리와 용계리 일대가 둘레 10km의 저수지 속으로 사라졌다. 158세대가 고향을 떠났다. 원전 냉각수의 수질 관리를 위해 운곡저수지 전체에 철조망까지 설치되니 이 산골에 인적이 끊겼다. 운곡리 사람들은 습한 지형에서 잘 자라는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어 매산재를 넘어 고창읍내에 내다팔았다. 지금은 운곡습지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시간이 나면 운곡서원까지 걸어서 저수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그래도 고창의 얼굴은 아무래도 모양성(牟陽城, 고창읍성)이라 할 것이다. 모양성은 바다해 인접한 연해 읍성으로 단종 원년인 1453년 고창, 영광, 화순, 나주, 제주 등 전라도 7개 군현의 노동력이 총동원돼 지어졌다.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4년에 한 번, 윤3월이 되면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는 답성(踏城)놀이 풍속이 전해온다.
모양성은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5만172평이다. 갈고리처럼 생긴 옹성, 숨어 있는 치성, 왜적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만든 웅덩이와 장애물로 구성돼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다. 주로 행정과 치안을 목적으로 했던 성이라 성 안에는 민가가 거의 없었다. 성 동쪽에 마을이 있었다. 성 둘레는 도는 데 약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봄에는 성벽 안팎으로 진달래가 피고 사시사철 노송도 푸르다.
고창읍성 앞 주차장 건너에 얕은 돌담이 둘러진 일자 모양의 초가집 한 채가 있다. 판소리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1884)년)의 집터이다. 동리의 선대는 서울에서 대대로 하급무관으로 지냈고 자신과 아버지는 고창에 내려와 향리 출신으로 지냈다. 학식은 있으되 양반에 치이고, 민초들에게 불신을 당하는 처지였다.
판소리에 이런저런 한문 투성이, 한시나 고사에서 유래된 고급 표현이 거의 대부분 신재효에서 나왔다고 해서 과언이 아니다. 판소리 춘향가는 원전인 춘향전과 상당히 다르고 각색돼 있는 데 상당수가 신재효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다. 동리는 향리를 그만 두고 여생을 판소리 사설 정리에 몰입했다. 향리로서 신분 제약과 부정부패한 세상에 대한 원망을 판소리에 녹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수 송창식은 ‘푸르른 날’(1983년) ‘선운사’(1990년)을 지으며 평생 미당과 친하게 지냈다. 송창식은 미당을 일컬어 ‘언어를 가지고 노는 시를 쓰는 분이고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유쾌한 분이며 잔망스러운 것조차 기분 좋게 한다’고 평했다. 문단 실세였던 미당은 이런 저런 모임에서 한참 연하인 송창식을 ‘친구’라고 소개했다. 필자는 왠지 고창하면 선운사, 미당, 송창식으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을 끊을 수 없다.
송창식도 한 동안 군사정권이 금지가요로 찍어내린 ‘왜 불러’ ‘고래사냥’을 작곡했지만 거꾸로 군부가 좋아할 만한 ‘토함산’ ‘내나라 내겨레’ 같은 곡도 만들었다. 미당과의 친분도 그런 면에서 통하는 것 같다. 예술에서 이데올로기 운운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다.
고창에는 체험농장인 상하면 자룡리 상하농원(매일유업 운영)과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청보리밭)이 있다. 상하농원에선 소를 키우고 젖을 짜고 치즈 등 유제품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보고 경험하는 테마학습이 이뤄져 인기다.
학원농장은 진의종 전 국무총리 내외가 1960년대 초반 고창군의 야산 약 33만579㎡를 개간해 조성했다. 청보리밭은 경관농업의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로 알려져 있다. 봄에 청보리, 여름에 해바라기, 가을에 메밀 등으로 갈아탄다. 이국적이고 애수를 불러오는 경치를 제공한다. 다만 수확하지도 않고 갈아 엎으면서 입장료만을 바라는 상업적인 마인드는 선한 농심을 우롱하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고창군은 전국 귀농귀촌 최적지로 다섯 손가락에 항상 손꼽히는 지역인데 말이다. 이밖에 고창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점이요, 서해에선 드물게 수평성이 드넓은 동호해수욕장의 고장이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술
풍천장어는 지명에서 유래된 게 아니라 지형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풍천(風川)은 바닷물과 해풍이 드나드는 강의 하구를 말한다. 선운사를 지나 인천강을 흘러 서해로 이어지는 기수역(brackish water zone, 汽水域, 강물이 바닷물과 섞이는 곳)은 길이가 무려 10km에 달한다. 이 곳은 일반적인 강과 달리 개펄이 형성돼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하고 뱀장어(민물장어)의 서식지로 최적이다.
뱀장어는 먹장어(꼼장어), 붕장어(아나고), 갯장어(하모) 등과 육질과 서식지가 다르다. 장어하면 그냥 민물장어, 뱀장어로 알면 된다. 민물장어는 6400km나 떨어진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성장하고 다시 바다로 나가 산란한 후 생을 마친다. 고창의 풍천장어는 이런 치어를 잡아다 양식한 것이다.
고창의 장어양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다른 지역처럼 치어를 잡아다가 민물에서 키우는 방법이다. 둘째는 민물에서 키우던 장어를 갯벌에 다시 풀어 6~12개월 동안 인공적인 먹이를 주지 않고 자연 상태로 양식하는 것이다. 후자의 방식으로 키우면 일반 양식 장어에 비해 맛과 영양, 육질이 뛰어나다는 게 고창 사람들의 주장이다. 풍천장어는 숯불에 익혀야 살점이 흐트러지지 않고 쫄깃하다. 채를 썬 생강과 함께 먹으면 속살이 부드러운 게 입에서 살살 녹는다.
풍천장어와 함께 고창을 대표하는 먹거리는 복분자다. 전국 재배량의 40%에 달하는 약 5000t 이상이 여기서 나온다. 달달한 복분자주와 풍천장어의 궁합은 환상이다.
정종호 기자·약학박사 help@heal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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