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08 19:10:51
포르투갈 여행 4일차, 포르투갈의 첫 정(情)인 포르투를 떠나서 유서 깊은 코임브라대가 있는 코임브라로 향했다. 오전 9시 10분 포르투 상벤투에서 기차(16.7유로/1인 편도 기준)를 타고 약 1시간 35분 걸려 코임브라B역에 도착했다. 여기서 국철로 갈아타고 숙소로 잡은 시내 코임브라A역에 내렸다. 코임브라A역은 간이역 수준으로 철길과 나란히 몬데구강(Rio Mondego)이 눈앞에 펼쳐졌다. 포르투갈을 여행지로 선택하는 데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는 ‘공부는 코임브라에서, 돈은 리스본에서 벌고, 말년은 포르투에서 즐기자’를 떠올리며 대학도시의 냄새를 맡아갔다.
코임브라(Coimbra)는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과 제2도시 포르투 사이에 있는 포르투갈 중부 코임브라주(州)의 주도(州都)로서 몬데구강 구릉에 위치한 농업지역의 중심지이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아에미니움(Aeminium)’이라고 하였으며, 고대 로마 멸망 이후에는 무어인의 본거지가 되어 878년 레온 왕국의 알폰소 3세가 탈환한 후 북쪽 갈리시아인들을 이곳에 이주시켰고, 이후 13㎞ 남서쪽에 있는 코님브리가(Conimbriga)의 주교구를 이곳에 옮기면서 코임브라가 됐다. 9세기 말부터 이슬람교도에게 다시 정복되었고, 1064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가 이곳을 점령한 뒤 약 1세기 동안 카스티야-레온 왕국 연합과 이슬람 세력 간의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포르투갈이 독립한 1139년부터 리스본으로 수도를 옮긴 1260년까지 코임브라는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였다. 코임브라는 쌀·곡류·올리브·과일 등 농업과 어업을 주요 산업으로 한다. 지리적 이점과 철도 및 고속도로 네트워크의 중심지로 농산물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도자기·직물·종이·가죽·포도주 등의 제조업이 활발하며, 19세기에 출판사가 설립됐다.
코임브라 숙소는 역 앞에서 2분 거리인 비토리아호텔(Hotel Vitoria)이다. 하루 숙박에 42유로(조식 포함)이니 저렴하다. 포르투갈은 유스호스텔부터 호텔까지 숙소가 다양하고 정결해 여행객의 선택 폭이 넓다. 다만 실내나 화장실에 슬리퍼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체크인을 마치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돼지 등뼈(Ossos)찜으로 유명한 제마넬도스오소스 레스토랑(Restaurante Ze Manel Dos Ossos)은 근처 작은 골목에 박혀 있었다. 간판이 작다보니 지척에 있는데도 몇사람한테 물어 겨우 찾았다. 오후 12시30분부터 영업하니 이따가 오란다.
인근에 산타클라라 다리(Ponte de Santa Clara)와 포르타젱 광장(Largo da Portagem)이 있다. 광장 입구, 코임브라라고 쓰인 문구 위에 19세기 포르투갈 코임브라 출신의 정치인이자 세 번이나 수상을 역임했던 후아큄 안토니오 드 아궤르(Joaquim Antonio de Aguiar(1792~1884) 동상이 있다.
광장 저편에 포르타젱광장 관광안내소(Turismo Largo da Portagem)가 보이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몬테구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문민정부(Governo civil)’이라고 적힌 간판이 붙은 레스토랑 겸 호스텔이 위치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는 곳에 위치해 전망이 좋다. 과거 관공서였는데 지금은 연회장으로 쓰인다고 웨이터는 설명했다.
조금 더 올라가니 ‘별의 철갑(Couraca da Estrela)’으로 불리는 방어벽이 있다. 벽에 적힌 ‘Belcouce gate and tower’라는 표식처럼 예전엔 이 곳이 주요 전략적 방어지역으로 방벽과 문, 오각형 탑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다 점차 시내로 흡수되면서 이 문은 1778년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시간에 맞춰 돼지등뼈 식당으로 돌아갔다. 10평 남짓한 조그만 공간에 예닐곱 개 되는 테이블이 놓여 있다. 벽면에 방문객의 낙서지 메모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돼지머리 박제도 벽면을 장식하고 있으며 오픈 키친 형태다. 영어로 된 메뉴판이 따로 없고, 단 한 개의 메뉴판을 돌려가며 본다. 지배인에게 물어 어렵게 돼지등뼈(Ossos) 버섯찜, 꼬막찜, 하우스와인을 시켰다. 한국인의 입맛에도 딱 맞고 가격(18.7유로) 대비 맛이 좋았다. 대학도시라서 그런지, 농업·어업·교통의 중심이라 그런지 몰라도 포르투갈 내에서도 물가가 싸게 느껴졌다.
배불리 먹고 나와서 포르타젱 광장부터 이어진 상점과 카페 등이 즐비한 페레이라 보르게스 거리(Rua Ferreira Borges)를 따라 5월 8일 광장(Praca 8 de Maio)에 위치한 산타 크루즈 수도원(Mosteiro de Santa Cruz, Igreja de Santa Cruz)에 이르렀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포르투갈 건국왕인 아폰수 엔리케왕 등 초대 2명의 왕이 묻혀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두 개의 탑, 화려한 아치형 입구에 새겨진 조각으로 인상적인 이곳은 포르투갈을 건국한 아폰수 엔리케 왕이 세우고, 16세기 마누엘 1세가 개축을 했다. 12세기 유럽에 성행했던 로마네스크 양식과 마누엘 1세(재위 1495~1521) 통치기에 유행한 마누엘 양식이 혼합돼 있다. 특히 내부 천장과 아줄레주 장식의 벽은 마누엘 양식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침묵의 회랑, 성물실이 수도원 옆으로 이어져있다. 수도원 건물에 붙어있는 산타 크루즈 카페(Santa Cruz Cafe)는 수도원 건물 일부를 카페로 개조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코임브라대학교로 올라가는 길에 작지만 눈에 띄는 작은 망가정원(Jardim da Manga)이 있다. 마누엘 1세 아들인 포르투갈 15대 국왕 주앙 3세의 봉긋한 소매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정원을 보면서 식사할 수 있는 레스토랑도 옆에 있다. 주앙 3세는 1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재위 중 아시아, 아프리카로 영토를 확장했고, 리스보아에 있는 대학을 코임브라로 옮겨왔다.
언덕을 굽이굽이 올라서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코임브라대학교(Universidade de Coimbra)에 도착했다. 설마 이렇게 높은 곳에 위치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올라가는 길이 가파랐다. 오르막길 중간중간에 오래된 대학건물, 검은색 망토를 거칠고 내려오는 코임브라대 교복패션은 1930년대 영화 장면을 방불케 한다.
원래 코임브라대는 1290년 리스본에 세워진 포르투갈 최초의 대학이자, 가장 큰 고등교육 기관이기도한 국립대학(public university)이었다. 1537년 주앙 3세가 코임브라궁전을 대학으로 개조할 것을 명해 국립대학이 코임브라로 이전했다. 16세기까지 포르투갈 유일의 고등교육기관으로 포르투갈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임브라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와 함께 전통이 오래된 40개 대학이 참여한 유럽 기술연구대학의 선도적 모임인 코임브라 그룹(Coimbra group)의 설립회원이며, 현재 학생 수만 2만명이 넘는다. 코임브라 인구가 약 13만명(2007년 기준)이라고 하니 대학도시로 불릴 만하다. 이런 오랜 역사만큼 포르투갈 국민시인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Luis Vaz de Camoes), 포르투갈인으로는 유일하게 1949년에 노벨의학생리학상을 받은 에가스 모니스(Egas Moniz) 등 많은 문인과 학자를 배출하였다.
대학 캠퍼스는 구대학과 신대학으로 나뉜다. 구대학으로 들어가려면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는데, 우리 일행은 티켓 없이 도서관, 법대, 시계탑 등 ㄷ자형 대학 건물이 있는 파티우 다스 에스콜라(Patio das Escola)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계탑은 ‘염소’라는 별명을 가졌다. 시계에서 수업의 끝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면 1학년생들이 상급생의 괴롭힘을 피해 염소처럼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유래가 참 재미있다.
방학 때문인지, 이날 저녁 도서관 내 연말콘서트 때문인지 조아니나 도서관(bibiloteca joanina)은 들어갈 수 없었다. 멀리 타국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교내 행사로 ‘오늘은 관광금지’라는 말에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나마 관계자와 대화할 때 문틈으로 도서관 내부를 살짝 엿본 데 만족해야 했다.
조아니나 도서관은 18세기 초 주앙 5세 때 지어졌는데 평소에는 관광객의 줄이 길게 늘어선다. 정교한 프레스코 천장화, 금으로 중국풍 그림을 그려 넣은 흑단 책장을 가득 채운 약 3만권 정도의 라틴어 고서들이 압권이라고 한다. 도서관을 지은 18세기에 브라질에서 대량으로 금이 들어왔기에 이런 게 가능했다고 한다. 도서 보호상 내부 촬영은 금지돼 있다. 도서관 지하 1층은 책을 유지·보수하는 곳, 지하 2층은 옛 학생감옥이 있다고 하니 코임브라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려보길 권한다.
예전에는 책이 귀하고 값이 비싸서 책 도둑이 많았는데 책을 훔친 학생이나 규율을 위반한 학생은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유럽에서는 흔했다. 도서관과 예배당은 1인당 9유로를 내야 입장이 가능하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대학 설립자인 디니스왕(Dinis)과 주앙 3세의 동상이 있다. 광장 끝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지 풍경이 멋지다. 이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유명한 구 대성당(Se Velha)로 발길을 돌렸다. 이 곳은 원래 무어인들의 요새였으나 포르투갈 초대왕 아폰수 엔리케 왕이 12세기에 성당으로 재건했다.
총을 쏘기 위해 성벽에 뚫은 꼭대기 부분의 총안은 포르투갈이 이슬람 세력에 대항해 국토 회복 운동을 벌였던 레콩키스타(Reconquista) 시대에 요새로 사용했다. 무어인들이 사용했던 건물이어서인지 입구에 아랍풍의 문양들이 새겨져있다. 내부의 반원통형 천장, 한가운데는 높고 주변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아치형 곡면구조인 궁륭에는 로마네스크풍 장식들이 아름답게 장식돼 있다. 교황이 묻혀있는 고딕 양식의 무덤, 그 주변을 장식한 밝고 화사한 스페인 안달루시아 스타일 타일도 볼거리다.
구성당 바로 앞 식당 겸 매점 옆에는 퀘브라 코스타스 계단(Rua Quebra Costas)이 있다. 딱 보기만 해도 이쪽으로 올라오지 않길 잘했단 생각이 들 정도로 가파른 계단으로 된 언덕이다. 코임브라 대학생 사이에서는 ‘등 브레이커(Back Breaker)’로 유명하다. 코스타스(Costas)는 등, 퀘브라(Quebra)는 브레이커라는 뜻으로 술 마시고 내려오는 대학생들이 발을 헛디디는 순간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아이고, 허리야’라고 비명을 질렀다는 데서 유래됐다. 이 계단은 아랍식 성문인 알메디나 문(Arco de Almedina)을 지나 구 대성당 앞까지 오르막으로 이어져 있다.
이어 의과대학부(Faculdade de Medicina) 등 코임브라 대학 건물들을 지나 국립 마사두 드 카스트루 미술관(Museu Nacional de Machado de Castro)으로 갔다. 이곳은 11세기 교황이 살던 궁을 코임브라 출신 천재 조각가 마사두 드 카스트루의 이름을 딴 미술관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조각·회화 등 다양한 전시물도 유명하지만, 코임브라가 ‘아에미니움’으로 불렸던 고대 로마 시절에 도시의 포럼이 지어질수 있도록 인공적인 플랫폼을 창조하기 위해 지었던 로마의 건축 양식인 크립토포르티토(Cryptoportico)가 남아 있는 게 인상적이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지쳤던 몸과 마음을 쉬게 해준 미술관 내 로기아(Logia) 카페테리아도 인상에 남는다. 현대식 장식으로 점심뷔페(7유로)뿐만 아니라 샌드위치, 커피(에스프레소 1유로) 등도 저렴하게 판매한다. 테라스에 앉아 바라보는 주변 경관이 아늑하고 맑고 시원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온다.
신대성당(Se Nova)은 오르막에 있다. 구대성당을 대신하기 위해 1598년부터 100년 동안 지어졌다. 가톨릭 예수회가 리스본 알파마지구에 있는 상 비센트 데 포라 성당을 벤치마킹해 지었다. 금세공 장식의 제단, 신고전주의 양식의 파이프 오르간 한 쌍이 구 대성당과 비교해 화려하다. 성당 정면에는 4인의 예수회 성인이 조각돼 있다.
대학출판사 앞 디니스왕 광장(Largo)의 석상을 뒤로하고, 코임브라대 정문 쪽으로 걸어 내려오니 로마시대 수로로 추정되는 상 세바스티안 수도교가 있다.그 옆으로 코임브라대학식물원(Jardim Botanico da Universidade de Coimbra)이 있다. 1772년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기부한 4만평의 대지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울창한 나무로 이뤄진 산책로, 바로크 양식의 분수, 온실, 포르투갈 식물학자 로테로(Avelar Brotero) 동상 등이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단으로 구성된 공원 안에 크고 작은 다양한 기후대의 나무, 공원 중앙의 분수, 벤치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안 안식처가 되기에 충분했다.
코임브라대학 알타(Alta) 구역과 소피아(Sofia) 구역을 중심으로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구(舊)대성당, 산타 크루즈 수도원(Monastery of Santa Cruz), 알사코바궁전, 16~17세기에 세운 여러 대학(colleges) 건물, 성 미구엘교회(Sao Miguel Chapel), 바로크 양식의 주도서관, 18세기에 세운 식물원과 대학출판사, 화학실과 실험실 등은 ‘코임브라대학-알타와 소피아’라는 명칭으로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상 세바스티안 수도교가 이어진 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니 비사야 바레토(코임브라대 의대 교수 1886~1974)박물관(CASA MUSEU BISSAYA BARRETO), 군사시설(QUARTEL GENERAL), 코임브라 종교재판소 감옥(CADEIA PENITENCIARIA DE COIMBRA) 이라고 써 있는 건물 등이 있다.
신 산타클라라 수도원(Convento de Santa Clara-a-Nova)을 가기 위해 다시 코임브라대 구대학 정문을 거쳐 포르타젱광장 관광안내소로 가는 언덕으로 내려갔다. 언덕에서 보는 해질녘의 몬데구강, 산타 클라라 다리를 끼고 있는 도시풍경이 낮과는 사뭇 다르게 운치 있다.
다리를 건너면 1314년 디니스왕 왕비이자 코임브라의 수호성녀인 이사벨 여왕의 지시로 세워졌고, 여왕은 죽은 뒤 묻힌 구 산타클라라 수도원(Monastery of Santa Clara-a-Velha)이 있다. 이 곳은 몬데구강의 수면보다 낮은 저지대에 세워진 탓에 홍수로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겪었다. 1647년 주앙 4세 왕의 명령으로 가까운 언덕에 이전되기 전까지 사용된 수도원의 잘 보존된 고딕 유물은 300년 동안 방치됐다가 20세기 후반에 발굴되었다.
한참 언덕으로 올라가니 잦은 홍수해를 피하기 위해 새로 지은 신 산타 클라라 수도원(Convento de Santa-a-Nova)이 있다. 이사벨 왕비를 기리는 수도원으로 왕비의 관도 이곳으로 이전했다. 수도원 정문을 통과하면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앞마당에는 왕비의 하얀 석상이 있다. 외벽에는 그녀의 일화를 그린 벽화가 있다. 예배당에는 14세기에 만들어져 구 수도원의 홍수 때 물에 잠겼던 석관, 17세기에 신 수도원으로 이전 후에 만든 은관이 있다.
전설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사벨 왕비는 스페인 아라곤의 왕 페드루 3세의 딸로 자애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줬던 왕비였다. 죽고 나서 성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일화에 의하면 디니스왕비는 왕 몰래 불우한 백성들을 보살폈는데, 어느 날 왕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금화를 들고 나서는 왕비를 불러 손에 무엇이 있는지 물었는데 왕비는 당황해 장미라고 둘러댔고, 왕은 억지로 그녀의 손을 펼치게 했는데 금화가 장미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녀의 묘에 오직 장미만을 바친다고 한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니 벌써 칠흑같은 밤이다. 다시 포르타젱광장으로 돌아가니 파스텔라리아 아코 이리스(Pastelaria Arco Iris) 앞에 먹음직스러운 빵을 사러온 사람들이 북적인다. 하얀 설탕이 코팅된 코임브라 전통빵, 과자 등을 몇 개 샀다. 빠삭한 빵 위에 코팅된 설탕 맛이 당이 떨어진 우리 일행에게 괜찮게 느껴졌다.
저녁을 먹으러 숙소 인근에 있는 산타다마리아 레스토랑(Restaurant Santa da maria)로 갔다. 날씨도 생각보다 덥고 언덕도 오르락내리락 해서 힘든 하루였는데, 메뉴 추천을 받아 나온 염소, 돼지고기가 잘못된 선택이었다. 역시 확신이 서지 않을 때에는 쇠고기 스테이크 등 평범한 음식이나 메뉴판 맨 위에 적힌 음식을 주문해야 하나 보다. 요리 2개에 와인 1병까지 포함된 가격이 저렴(29.2유로)해 그나마 위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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