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6 10:05:28
대한의사협회와 보건복지부가 지난 6월 29일 제12차 의료현안협의체를 진행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제공)
청와대와 국민의힘이 지난 11일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참패하자 전격적으로 의대 정원 확대 카드를 꺼내들 태세다. 정부의 의대 정원 발표가 임박했다는 예상 보도가 지난주부터 흘러나왔지만 보건복지부는 아직도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적어도 1000명 이상 늘릴 것이란 예측이 기정사실화됐다.
의대 정원은 김영삼 정부 시절 정원 40명 규모의 의대 9개(제주대, 강원대, 건양대, 서남대, 관동대, 성균관대, 을지의대, 포천중문의대(현 차의과학대), 가천대 등)를 신설하면서 3273명으로 늘어났지만, 2000년 의약분업 타결에 따른 의정 협의 과정에서 정원이 감축돼(당시 10% 감원 합의), 2001~2003년에는 3253명, 2004~2005년에는 3097명, 2006년 이후 현재까지는 3058명으로 줄었다.
인구고령화와 더불어 국민의 높은 보건의료 서비스 욕구를 반영하면, 또 헬스케어를 국가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려면 의료인력의 증원이 불가피한데 의사집단의 ‘직역 이기주의’ ‘떼법’ ‘억지논리’로 정원 확대가 17년째 막혀 있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의사 정원 확대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다. 야당이 여당을 향해 ‘반대를 위한 반대’로 잠시나마 ‘의대 정원을 늘려봐야 필수의료(응급의학,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성형외과를 제외한 외과계 전반 등)와 지방의료기관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을 것’이란 의견을 표명했지만(주로 의사 출신인 신현영 의원 주장) 별로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 13일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원 증원에 더해 지역의대 및 공공의대 신설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를 막론하고, 의대 정원 확대 이슈를 선점하려는 모양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의대 정원 확대를 잘 막아섰던 대한의사협회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응급실 뺑뺑이’ ‘소아청소년과 폐과’ ‘외과계를 중심으로 한 필수의료 붕괴’ 등의 이슈가 부각되고 현 이필수 의협 회장 집행부의 대 정부 타협적인 자세와 맞물려 올봄에 500명 선의 정원을 감당할 수 있다는 절충안을 내보였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추석 연휴 직전 윤석열 대통령에게 의대 정원 확대안을 보고한 자리에서는 아마도 500명 증원을 거론했을 것이지만, 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1000명 이상 증원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의 스타일 상 장관이 아닌 자신이 직접 국민에게 보고하는 방식으로 정원 확대를 발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 야당은 김영상 정부가 논의하기 시작한 변호사 증원을 관철시켰다. 김대중 정부는 변호사 증원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말았고, 노무현 정부가 결행했다. 2007년 7월 3일 로스쿨 도입 관련 법률이 국회를 통과해 2009년에 법학전문대학원이 처음 문을 열었다.
그 결과 변시(로스쿨 졸업생) 출신 변호사는 ‘가상화폐(코인) 보유’ 논란을 일으킨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처럼 실력이 없다는 비아냥도 나왔지만, 법률 서비스 비용은 낮아졌고, 더 많은 국민이 저렴한 비용에 법무상담을 받고 있다. 과거에 소송 의뢰자가 거액을 내고도 변호사를 직접 보지 못하고 기껏해야 사무장과 상담하던 일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기자도 한 때 신현영 의원의 주장처럼 의대 정원 확대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주변의 어른들이 연로해지고 육아도 해보니 필수의료 분야의 공백과 이를 빌미삼은 암묵적인 병의원의 고압적 자세와 불친절을 체감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반대하는 소수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기왕 늘린다면 1000명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7월 23일 문재인 정부 당시 보건복지부는 2022년부터 10년간 매년 400명씩, 총 4000명을 증원한다고 발표했다. 이 중 3000명은 지역의사로 정착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8월 15일 광복절을 전후로 한 의사 총파업에 결국 ‘9.4 의정합의’란 것을 맺고 백기를 들었다. 의정합의의 내용은 이렇다.
1. 보건복지부는 의대정원 확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을 중단하고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의정협의체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한의사협회와 협의한다. 이 경우 대한의사협회와 더불어민주당의 정책협약에 따라 구성되는 국회 내 협의체의 논의 결과를 존중한다. 또한 의대정원 통보 등 일방적 정책 추진을 강행하지 않는다.
2. 보건복지부와 대한의사협회는 지역수가 등 지역의료지원책 개발, 필수의료 육성 및 지원, 전공의 수련환경의 실질적 개선, 건정심 구조 개선 논의, 의료전달체계의 확립 등 주요 의료현안을 의제로 하는 의정협의체를 구성한다. 보건복지부는 협의체의 논의 결과를 보건의료발전계획에 적극 반영하고 실행한다.
3. 보건복지부와 의료계는 대한의사협회가 문제를 제기하는 4대 정책(의대증원, 공공의대 신설,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비대면진료)의 발전적 방안에 대해 협의체에서 논의한다.
현 정부는 올해 5월 11일 코로나19 팬데믹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그에 앞서 올해 1월 26일 '의료현안협의체'를 재개했다. 상견례 후 사실상의 협의체 첫 회의는 1월 30일에 열렸다. 이날은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완화된 첫 날이었다.
그러나 의협은 정부가 9.4 의정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몇 차례의 의정협의체 회의 이후 정원 확대 진도가 나가지 않자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 16일 필수·지역의료강화를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며, 해당 의제를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로 옮기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보정심은 2013년 이후 겨우 3번의 회의만 열렸고, 사회시민단체 위원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의사들로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협의 방식이다.
의사가 선진국에 비해 절대 부족하다는 것은 의사들도 자인할 수밖에 없는 실체적 진실이다. 또 대한병원협회는 2020년 8월 의사파업 당시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했다가 의사들의 압력에 밀려 철회한 바 있다. 그럼에도 의사단체들은 직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본성에 의해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요즘 소아과 의사들이 환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드라이해졌다. 3~5분도 안 되는 시간에 1인당 1만7000원의 진료비를 챙기는 게 국민 평균에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소청과의 인당 진료비는 △2017년 11만291원에서 △2018년 11만4011원 △2019년 12만187원 △2020년 9만3627원 △2021년 9만7416원으로 줄어들었다. 과거 비급여 예방접종 상당수가 국가필수예방접종(NIP)로 편입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분석된다.
의사들은 수가 인상을 통해 필수의료 공백을 메워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진료과에 상관없이 모든 의사들이 아주 넉넉하게 살 수 있게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대를 가겠다는 초중고 학생이 넘쳐나는 마당에 의사들의 고수익을 보전하기 위해 국민의 주머니(건보 재정)를 더 털어야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예컨대 소아과 등 필수의료 의사들이 다른 진료과 의사들보다 돈을 훨씬 적게 번다는 것이지, 국민 평균 수준으로 못 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국 인기 또는 비인기 진료과의 의사가 된 것은 의사사회 내부경쟁의 결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벌써부터 초등생을 위한 의대 입시 준비반이 과열된다는 보도를 보고 ‘경박한 자본주의’를 느낀다. 산업발전의 씨알이 되는 기초과학이나 실질적인 외화 창출의 원동력이 되는 공학을 공부하겠다는 학생이 점점 줄고 있다. 이를 비난하는 것도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감안할 때 온당하지 않다. 만약 의대 갈 실력이 될 학생에게 공대를 추천했다가 적성이 맞지 않거나, 장성한 후에 수입이 의사보다 적은 엔지니어가 된 것을 후회하게 된다면 그 원망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국가백년대계를 생각할 때 의대보다는 공대생, 음지의 과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 시급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요불급한 국가 과학기술 예산을 삭감한 현 정부의 정책은 타당한 면이 있다고 본다.
요즘 늘어난 변호사로 수입이 감소한 변호사들은 의대 정원 확대 이슈에 ‘너희들(의사)이 변호사 늘려서 반색한 것처럼 너희도 한번 당해봐라’는 시선이라고 한다. 한 때는 아들 둘을 낳아서 하나는 변호사, 하나는 의사를 만드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 만리장성 중 하나는 차츰 무너져가는 중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번 의대 정원 확대 논의로 10년쯤 우리사회가 어떻게 변할지, 국민의 건강과 삶의 질 측면에서, 사회발전적 관점에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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