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죄가 너무 많으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바로 그런 사례다. 가끔 뉴스를 보다가 왜 이재용이 구속됐지 생각해보면 막상 무슨 죄목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최순실-이재용으로 엮인 국정농단 때문에 올 1월 18일 재구속됐다. 2018년 2월 5일 국정농단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지 1078년에 다시 수감됐다.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이 선고돼 사면이나 가석방 등 없다면 2023년 7월이나 돼야 풀려난다.
이것 말고도 이 부회장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회계 분식을 통해 제일모직의 가치를 올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제일모직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만들어 주주(국민연금공단 등)에게는 손해를 입히고 본인을 이익을 챙긴 혐의도 받고 있다.
이 부회장은 1996년 증여받은 61억원으로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헐값에 사들였다. 1999년에는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도 매입했다. 오랜 기간 삼성그룹은 삼성SDS는 상장할 계획이 없다고 기망하더니 2014년말 이 부회장이 9% 지분을 보유한 삼성SDS를 상장했다.
이어 2014년 6월에 삼성에버랜드를 제일모직으로 이름을 바꿨다. 앞서 패션 브랜드로 유명한 기존 제일모직은 2013년 말 패션 부문은 삼성에버랜드로, 2014년 7월 나머지 부문은 삼성SDI로 분할 인수됐다.
이 부회장은 2014년 삼성SDS 상장과 삼성에버랜드와 제일모직 일부 합병 상장으로 시가 6조원이 넘는 지분을 손에 넣었다. 자신이 많은 지분을 갖고 있던 삼성에버랜드를 지렛대로 삼아 제일모직을 접수했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제일모직에 유리한 지분 배정을 위해 회계조작을 하다가 걸렸다.
고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은 상속세로 약 12조원을 국가에 내야 한다. 세계 최고액이라고 한다. 5년간 여섯 차례에 걸쳐 세금을 내는 ‘연부연납’으로 상속세를 낼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30일 가족 공동 명의로 상속세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1차분 2조원을 납부할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회장의 주식은 절세와 경영권 유지 차원에서 유가족에게 적절히 안배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삼성은 1조원의 의료사회공헌과 2만3200여점의 미술품의 국가 기증을 실천하기로 했다. 1조원 중 감염병 대응에 7000억원, 소아암 및 희귀질환 환자어린이 지원에 3000억원이 투입된다. 구체적으로 5000억원은 ‘중앙감염병 전문병원’ 건립, 2000억원은 질병관리청 산하 국립감염병 연구소 건축 및 백신개발 지원에 쓰인다. 또 1500억원은 13종의 소아암에, 600억원은 크론병 등 14종의 희귀질환에 들어간다. 나머지 900억원은 이들 질환의 연구 인프라 구축에 투입된다.
미술품 중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 고미술품 2만1600점은 국립박물관으로, 이중섭의 ‘황소’ 등 근대 미술품 1600점은 국립현대미술관 등으로 가게 된다.
그많은 돈과 미술품을 모으기 위해 이병철 창업자를 비롯한 삼성 일가는 잠을 못 이루는 고심의 밤을 보내며 세상의 도전에 맞섰을 것이다. 이제 이재용 부회장의 안정적 상속과 감옥에서 구해내기를 위해 현금과 주식은 물론 아끼던 미술품까지 내놓게 됐다.
그동안 삼성은 준법감시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번 기부와 국가 기증을 계기로 진작에 더 일찍 했더라면 국민정서상 기업의 오너가 구속되는 일을 면하거나 처벌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 이건희 회장이 2008년 삼성 특검의 비자금 수사 이후 “실명 전환한 차명 재산 중 벌금과 누락된 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것을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행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2014년 이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후속 절차가 중단됐다.
28일 삼성일가 발표에 대해 어떤 매체는 ‘13년 만에 약속을 지켰다’고 하고, 어떤 매체는 ‘궁여지책에 만시지탄’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어떤 보수매체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71.2%가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에 찬성한다고 했다. 보수매체가 주관한 여론조사임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국민의 절반 안팎은 찬성할 것이라 판단한다.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한다. 영리를 추구하되 고용을 창출하고 세금을 제대로 내면 그것으로 제 구실을 충실히 한 것이다. 그게 바로 사회공헌인데 많은 국민들이 감염병 전문병원을 지어 국가에 헌납하고,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해 같이 감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더 멋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할 것 같다.
이재용 부회장이 프로포폴을 맞았다는 병원 내부자 고발을 당했다. 지난 3월 26일 대검찰정 수사심의위원회는 수사 계속 여부를 논의한 결과 8대 6으로 반대해 부결시켰다. 이재용 변호인은 “합법적인 처치 외 프로포폴 불법투약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100%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반인이라면 단지 벌금형이나 받을 일을 이 부회장이라 수사까지 갈 뻔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 강호갑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회장 등은 지난 26일 이 부회장 사면 건의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이에 청와대는 사면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이 모자라고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시점에 이재용 회장이 감옥에 있는 것은 경제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미국 텍사스주에 170억달러(20조원)를 들여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을 짓다가 한파 등 이런저런 이유로 지난 2월부터 중단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평택 3공장(P3)에 50조~70조원 규모 반도체 시설 투자를 결정해야 하는데 기업의 수장이 감옥에 있다. 항상 그렇듯이 최고결정권자가 구속돼 있으면 기업경영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해 조기석방이 필요하다는 게 재계의 입장이다.
그러나 기업이란 시스템이어서 재벌 총수가 구속돼 있다고 해서 결정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런 명분으로 조기 석방을 요구해온 게 관행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삼성더러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라고 촉구하는데, 삼성 총수의 신병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한국 대통령은 미국에서 코로나19 백신을 한국에 먼저 배정해달라고 사정사정하면서도 백신과 반도체는 상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은 죄 중 최순실 딸에게 비싼 명마를 빌려준 것(어쩌면 그냥 준 것)은 사실 대기업의 총수에겐 사소한 일일 것이다. 이를 트집 잡아 감옥에 가두는 것은 저급한 통치 행위가 아닐까. 분식회계를 통한 주가 시세조작이나 탈세는 벌금형으로 처리하면 될 것을 굳이 실형으로 밀어붙이는 것 역시 국가권력의 횡포다.
오히려 이재용 부회장이 더 사업을 벌이게 해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는 게 국가에게 득이다. 이재용 사면은 경제적 측면도 감안해야 하지만 한 개인의 신병을 지나치게 구속한다는 명분 없음, 합리적 실리실용주의 측면에서 구속이 합당하지 않음 등 두 가지 관점에서 필요하다.
의료담당 기자로서 삼성이 이번에 1조원에 달하는 의료사회공헌을 했다고 하지만 단적으로 삼성서울병원이 그동안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영리를 극대화한 점에 비춰볼 때 순수성이 빛을 잃었다고 말하고 싶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고영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안산단원갑)은 2019년 총 1412억원에 이르는 삼성서울병원의 외부용역 하청이 계열사인 삼성생명 548억원, 웰스토리 291억원, 에스원 287억원, 삼성SDS 241억원 등에게 돌아갔다고 고발했다. 이 중 131억원(9%)는 입찰에 부쳤지만 이 역시 모두 계열사에 낙찰됐다. 부정한 ‘일감 몰아주기’의 전형이었다.
삼성서울병원은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수술 감소와 대규모 바이오 연구개발 투자, 2016년 도입한 양성자 치료기 운영난,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원내 감염 사태 등의 여파로 경영수지가 크게 악화되면서 2016년 –570억원, 2017년 –683억원, 2018년 –403억원, 2019년 –292억원 등의 적자를 보이고 있다.
이를 메우기 위해 국내 상급종합병원 중 가장 많은 진료비를 환자에게 청구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친절한 서비스로 정평이 나 있지만 의술 수준에서는 아직 서울아산병원이나 서울대병원 등에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공권력을 행사하는 정부가 기업의 소소한 일까지 쳐다보고 끄떡하면 국민정서를 들어 잡아가두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기업도 ‘사회적 책임’ 완수라는 명분에 흘러다닐 게 아니라 연구개발 및 인재육성에 투자하고 이윤 창출에 집중해야 한다. 이에 뒤따르는 국부창출, 세원증가, 고용증대는 기업으로서는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다.
기업이 기왕 사회공헌에 나섰다면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시급성, 적절성, 실용성에 눈을 맞춰야 한다. 자선단체인지, 성금모금기관일지 모를 그런 곳에 거액을 내는 것은 돈만 낭비하고 수혜자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기업이 병원이라면 의술 발전에 힘써야 한다. 삼성서울병원이 적자에 허덕인다는 것은 그만큼 의술 수준이 경쟁 병원보다 뒤떨어져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 병원들이 의료수익 자체보다는 장례식장, 병원내 상가 직영 또는 임대수입, 주차장 수입으로 실제 순익을 창출한다고는 하지만 헬스케어기업의 본연은 의료서비스 수행 능력 수준에 달려 있다.
삼성그룹이 의료사회공헌 한다며 구체적이지도 않은 곳에 1조원을 투입하느니 삼성서울병원에 더 집중 투자해 양질의 서비스를 더 저렴한 가격에 의료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게 훨씬 나은 대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