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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선암사와 송광사, 금둔사가 있는 한국불교의 요람 ‘순천’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6-04 21:28:46
  • 수정 2021-06-12 04: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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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편 선암사: 한옥마을 같은 절집의 향연, 승선교 아치의 데칼코마니, 달마전 수각의 ‘정갈함’

전라남도 남동쪽의 작은 도시 순천은 동쪽으로는 광양시, 서쪽으로는 보성군과 화순군, 남쪽으로는 순천만을 끼고 보성군과 여수시, 북쪽으로는 곡성군과 맞닿아 있다. 


시 면적의 70%가 산지로 산에 둘러싸여 있는 순천시는 전라남도에서 산이 가장 많은 도시이다. 순천시에서 느껴지는 아늑함은 소백산맥의 지맥들인 조계산, 고동산, 백이산, 오동산 등 높지 않은 산들에 둘러싸인 덕분일 것이다. 


게다가 전국에서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동천(東川)이 도시를 관통하며 흐르고 생태도시의 조건을 갖췄다.


순천의 아름다움은 누가 뭐래도 갯벌과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순천만이다. 저녁 햇살에 하얗게 부서지는 갈대숲과 용산전망대에서 순천만의 요염한 물살의 흐름을 보지 않고서는 순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없다. 


39.8km의 해안선과 21.6km의 개펄, 5.4km의 갈대밭으로 구성된 순천만은 국제 람사르 습지협약에서도 인정한 세계 5대 연안 습지이다. 아름다운 일몰을 자랑하는 와온해변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불교 태고종의 총림인 조계산 선암사와 조계종 승보사찰인 조계사인 송광사라는 천년 사찰과 숨은 보석 같은 절 금둔사를 품고 있는 한국 불교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600년 전 마을 모습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낙안읍성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태고종의 본산 선암사 … 석등, 협시불, 어간문 없는 3無의 절 … 화재 트라우마로 석등도 없어 


선암사 겹벚꽃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자락에 자리한 선암사(仙巖寺)는 백제 성왕 6년(526)에 아도화상이 현재의 비로암자에 처음 세웠고, 이창주(二刱主)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현재의 선암사 자리에 절을 중창하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다. 3창주 의천대각국사에 이르러 대중창이 이루어지고 천태종을 널리 전파해 호남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전소되다시피 한 선암사를 1660년 경준, 경잠, 문정 세 스님이 8년에 걸쳐 중수했다. 호암 스님에 와서 원통전, 불조전, 승선교 등을 지으며 중창 불사가 마무리됐다.


종무소 보살에게  선암사 자랑을 해달라고 하니 대뜸 ‘선암사는 3무(無)의 절’이라고 대답했다. 사천왕문, 협시보살, 어간문이 없다는 것이다. 선암사에 사천왕문이 없는 것은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이 선암사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에 협시불(夾侍佛 석가모니불 좌우의 불상, 본존물과 협시불을 합쳐 삼존불이라고 함)이 없는 이유는 주존불인 석가모니불이 삼독(탐욕(貪慾), 진애(嗔恚 성냄), 우치(愚癡 어리석음) 등을 일컬음)을 물리치고 마구니(魔仇尼, Maguni 귀신)에게 항복을 받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자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이 어간문(御間門)을 통과할 수 있기에 어간문을 두지 않았다.


선암사 영산홍

선암사의 3무는 곧 자긍심이다. ‘잡다한’ 것은 필요 없고 홀로 스스로 당당한 부처님을 섬기겠다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샛별이 사라지기 직전의 새벽녘 혹은 어둠이 깔리는 해질 무렵 선암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서 온 세상을 굽어보는 듯한 석가모니불을 바라보노라면 선암사가 왜 3무의 절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선암사에는 이밖에 석등과 원통전의 대들보, 대웅전 기둥의 주련 등이 없다고 한다. 선암사에 석등이 없는 것은 선암사의 빈번한 화재와 관련이 있다. 영조 35년의 큰 화재 이후에는 절 이름을 ‘청량산 해천사’로 바꾸어 화 기운을 누르려했다. 


일주문 안쪽 현판에 남아 있는 옛 이름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다. 그러나 순조 23년 또다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탔다. 해붕, 눌암, 익종 스님 등이 중창하면서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려놓았다. 


선암사는 석등을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내에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연못을 만들어 화재에 대비했다. 모두 6개의 연못이 있었으나 2개의 연못은 적묵당과 성보박물관을 지으면서 메꾸어졌다. 


현재는 원통전과 장경각 옆에 연못, 설선당 서쪽의 쌍지, 뒷간과 일주문 사이에 연못,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의 타원형의 삼인당이 있다. 심검당(尋劍堂) 환기창에 ‘水’와 ‘海’ 글자가 투각돼 있는 것도 화재 예방을 위한 것이라니 선암사가 얼마나 화재에 트라우마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긴 타원형의 연못 삼인당(三印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으로 꼽힌다. 삼인은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교리 즉,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새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삼나무들이 불법을 수호하듯 연못을 둘러싸고 있고 연못 가운데 알 모양의 섬에는 전나무와 배롱나무가 한 그루씩 심어져 있다.


작은 한옥마을을 닮은 선암사


선암사는 절집보다는 마당과 연못을 갖춘 고풍스러운 가옥이 빼곡히 들어선 운치 있는 마을을 연상시킨다. 전각들은 마치 잘 지어진 정자나 지조 높은 양반가옥 같다. 전각 둘레에 돌담을 쌓고 작은 나무문을 달았다. 돌담들은 이어져서 돌담길이 되었다. 돌담을 따라서는 500년 넘은 매화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작은 정원에는 온갖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4월이면 수양벚꽃(홍매의 일종)이 길게 늘어진 연못 속을 유유자적 헤엄치며 노니는 잉어들이 운치를 더한다. 


돌담길과 석단을 사이에 두고 선암사는 몇 개의 커다란 영역으로 나뉜다. 대웅전 영역, 원통전 영역, 응진전 영역 등이다. 


대웅전 영역은 대웅전과 맞은편의 만세루, 좌우의 선불당과 심검당, 중정에 세워진 통일신라 때 조성된 탑 2기, 지장전과 응향각 등을 일컫는다.  


선암서 절집들

대웅전 뒤편으로 돌담길을 사이에 두고 팔상전, 불조전, 조사전 등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팔상전에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팔상도와 정조 4년에 제작된 화엄경 설법 모습을 그린 ‘화엄경변상도’ 등이 있다. ‘화엄경변상도’는 우리나라에 3폭이 남아 있는데 나머지 2폭은 순천 송광사와 하동 쌍계사에 있다. 불조전에는 과거 7불과 미래 천불(千佛)의 53불을 모셨다. 조사전에는 선암사의 개창자와 중창자, 중수자 등 역대 주지들이 영정이 모셔져 있다.


팔상전과 불조전 사이에 좁은 계단을 오르면 날갯짓을 하는 듯한 모습의 원통전을 만나게 된다. 원통전은 1689년 호암대사가 중창했다. 조계산 배바위에서 관세음보살 친견을 위해 백일기도를 드린 호암대사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바위에서 떨어져 죽으려 했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호암대사를 구하였는데 그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원통전을 중창하고 친견한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였다. 


정조가 후사를 이을 자손이 없자 눌암대사가 원통전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후 순조가 태어났다는 일화가 전한다. 후에 순조가 내린 ‘대복전’이란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호암대사가 지은 원통전은 1759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현재의 원통전은 1824년 눌암스님의 중수를 거쳐 1923년 재중수한 것이다. 원통전 옆에는 원통전을 관리하는 스님을 위한 요사채 ‘첨성각’이 있다.  


절 들머리 아름다움의 최고 포인트 ‘승선교’ 


선암사는 무엇보다 들머리가 아름다운 절이다. 선암사 들머리의 아름다움은 숲길 중간 쯤에 모습을 드러내는 승선교(昇仙橋)에 이르러 극대화된다. 보물 400호로 지정된 아치 모양의 홍교(虹橋)인 승선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라고 할 수 있다.  


승선교의 아름다움은 계곡 아래로 내려가 아치 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강선루(降仙樓)와 함께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무지개다리와 강선루가 푸른 계곡물 위로 떠오르는 반영(反影)은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루며 천상의 풍경을 만든다. 무지개 다리도  두 개요, 강선루도 두 개가 되는 것이다. 하얀 옷을 차려입은 선녀들은 금방이라도 다리 위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그러나 선녀는 없고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빌 틈이 없다.  


승선교는 호암스님이 숙종 때인 1713년에 완공했다. 호암은 승선교 외에도 벌교의 홍교와 북한산성을 쌓았다. 청빈하기 이를 데 없는 스님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봄의 전령사 ‘선암매’ … 원통전 뒤편 백매와 무우전 돌담길 홍매


선암사 하면 선암매를 빼놓을 수 없다. 매화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그 향이 천리만리까지 뻗어가는데 선암사에는 수백 년 된 노매 20여 그루가 향을 뿜어내고 있어 봄날엔 선암사로 달려가지 않을 재간이 없다. 


선암매는 고려시대 대각국사가 중창할 때 삼성각 앞의 ‘와송’과 함께 처음 심었다고 상량문에 전한다. 긴 시간 풍파 속에서 기이하게 구부러지고 뒤틀린 가지에서 피어나는 선암사 매화의 자태는 아리도록 곱다. 그 향은 육당 최남선의 말처럼 ‘코가 에어져 나가는 듯한’ 내음이다. 


2007년 선암사 ‘무우전매’, 정확히 원통전 뒤편의 600년 된 백매와 무우전(無憂殿) 돌담길의 홍매 두 그루가 천연기념물 488호로 지정됐다.


선암매는 꽃이 없는 겨울철에도 봄날 매화 못지않은 아름다움이 있다. 이리 굽고 저리 휜 메마른 굵은 가지들을 온전하게 드러낸 모습은 겨울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관이다. 


매화가 지고 난 4월 중순이 되면 겹벚꽃이 화려하게 선암사를 장식한다. 화려함은 매화보다 겹벚꽃이 한 수 위다. 커다란 카네이션 꽃송이 같기도 한 왕벚꽃이 필 무렵이면 천상의 화원이 따로 없다. 선암사 겹벚꽃에 대한 내력은 선암사 스님들도 잘 모른다. 대략 일제강점기 편백나무와 같은 시기에 식재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시인 정호승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읊어


선암사의 뒷간(해우소)은 맞배지붕을 한 고풍스러운 목조건물로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전남문화재자료 214호). ‘뒤깐’라는 안내판이 없다면 누가 이 건물을 뒷간이라 여길까 싶을 만큼 멋스러울 뿐만 아니라 통풍이 잘 돼 화장실 냄새도 나지 않는다. 



시인 정호승은 ‘선암사’ 라는 시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선암사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라고 노래한 바 있다. 


이 시를 이해하려면 해우소로 들어가 앉아 나무 창살 틈으로 선암사를 무념무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다 문득 평생 꽃과 바람을 찾아 허공을 헤매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득도의 기쁨을 누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선암사 편백나무숲과 삼나무숲


선암사는 졸참나무, 서어나무, 상수리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 등 활엽수들이 어우러진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겨울에도 초록의 싱그러움을 자랑하며 쭉쭉 뻗어있는 삼나무와 편백나무들 덕에 선암사 숲은 사시사철 생동감이 넘친다. 


선암사 삼나무와 편백나무들은 일제강점기 때 심어진 것으로 종묘의 원산지는 일본이다. 따뜻하고 습한 기후에서 잘 자라고 단단하고 변형이 적어 쓰임새가 많아 일제는 주로 남부지방에 삼나무와 편백을 심었다. 남부지방에 잘 자란 편백나무 숲이 많은 이유 중 하나이다. 


삼인당과 일주문 근처와 운수암(雲水庵) 가는 길에 삼나무숲을 볼 수 있다. 편백나무 숲은 조금 더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대각암(大覺庵) 올라가는 길 옆쪽에 ‘편백나무 숲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을 따라 송광사로 넘어가는 큰굴목재쪽으로 시원한 편백나무 숲이 펼쳐진다. 


선암사 야생차 밭과 달마전 수각


선암사 달마전 수각(水閣)

일주문 근처와 칠전선원(七殿禪院, 응진당, 진영당, 미타전, 벽안당, 달마전, 수각, 산신각 등 7개 건물을 일컬음) 뒤편으로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선암사 야생 자생차 밭이 펼쳐진다. 삼인당과 일주문 사이에 약 1000평, 칠전선원 뒤 약 5000평, 대승암 옆에서부터 송광사 가는 길목의 산밭에 약 1만평 등에 이른다. 


삼인당 차밭은 도선국사가 처음 조성했고, 칠전선원 뒤 차밭은 중흥조 대각국사가, 산밭의 차밭은 선암사 주지스님을 지내신 지허스님이 1996년에 조성했다.  



우리나라 자생차의 역사는 유구하다. 혹자는 828년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나무 열매를 가져와서 지리산 남쪽에 심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차의 유래라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차 문화가 시작됐다. 



2세기 인도의 허황옥이 금관가야의 왕비로 시집올 때 차씨와 차를 가져왔다고 하며, 4세기에 인도의 승려 행사존자가 백제에 불교를 전할 때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일본사기’에는 7세기 초 백제 스님 행기보살이 일본에 차를 처음 전했다고 기록돼 있다. 


선암사 차밭

선암사의 야생차밭은 오랜 세월 우리 풍토에 맞게 가꾸어지고 뿌리를 내려, 외래종이 섞이지 않은 자생차나무밭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기에 더욱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 숭유억불과 일제강점기, 근현대의 고단한 시기를 지나면서도 선암사 야생차밭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선암사 스님들의 각별한 노력 덕분이다. 한국 자생차는 선암사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한겨울에도 선암사 차밭은 온통 초록빛으로 넘실댄다. 차 밭 너머 쭉뻗은 나무들과 선암사 전각의 지붕들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비경임이 분명하다.


차나무 꽃은 서리가 내리는 10월에서 12월 사이에 핀다. 곡우 무렵에 첫 찻잎을 따기 시작한다. 찻잎은 몇 차례의 찌고 덖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차가 되는데 아홉 번 덖아낸 차를 최고급으로 친다.


찻잎을 따는 시기가 되면 선암사는 분주해진다. 5월에는 손이 부족해 마을사람들까지 동원한다고 한다. 작고 여린 잎을 상처 없이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따는 일은 숙련된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차나무는 땅 속에 깊게 뿌리를 내려 혼신의 힘으로 성장해 가지에 균등하게 생명을 나눠준다. 자라서 차꽃을 피우고, 차씨를 맺게 한다. 그 차씨는 다시 차 나무가 되어 또다시 생명을 나눠주는 윤회의 삶을 사니 스님들의 명상과 수행생활에 빠지지 않았다.


선암사 칠전선원 달마전은 이러한 선암사의 다맥을 이어가는 다각으로, 달마전 부엌 뒤편에는 돌을 깍아 만든 아름다운 ‘수각’(水閣)이 있다. 수각은 모양과 크기가 모두 다른데 통나무와 대롱을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끔 설치되었다. 


조계산 선암사 계곡에서 발원한 물은 야생차밭을 거쳐 통나무를 타고 수각으로 흘러드는 물이니 얼마나 귀하겠는가. 그중에서도 첫 번째 네모난 수각에 담긴 물은 부처님께 바치는 청수나 차를 다릴 때 사용된다. 두번째 타원형 수각 물은 먹는 물이다. 세 번째 큰 둥근 수각의 물로는 쌀이나 과일을 씻는다. 마지막 수각의 물은 허드렛일에 사용한다. 


칠전선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수행 공간이라 달마전 수각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스님께 부탁하면 잠시 출입을 허용해 줄지도 모르겠다. 


달마전에서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면 무우전과 각황전에 닿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무우전 툇마루에 앉아 느릿한 조계산의 능선을 바라봐야 비로소 선암사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이 떠올라 잠시 툇마루에 앉아본다. 조계산의 꾸물꾸물 느릿한 능선이 눈 앞에 펼쳐지는 모습이 가히 일품이다.


무우전 뒤편에 자리잡은 각황전에는 도선국사가 조성했다는 철불이 봉안돼 있다. 도선국사가 남긴 3대 유산 중 하나인 이 철불은 발견 당시 마당에 묻혀 있었으나 지금은 금칠로 새롭게 단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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