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게 그저 기특하기만 했었는데, 요즘엔 정말이지 무서워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엄마가 잘 돌보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닌가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자책하게 되네요.”
지난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 아이 수빈이(가명)와 소아성장발달센터를 찾은 엄마 윤 씨는 이내 눈물을 훔쳤다. 수빈이의 진단명은 다름 아닌 ‘성조숙증’. 그저 잘 먹고 잘 크면 그만인 줄 알았지만,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했다. 수빈이는 외관상으로 또래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편이었지만, 윤 씨는 자라면서 키로 가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 전 수빈이와 목욕하던 중 가슴에 멍울이 잡히는 걸 발견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의하면 2차 성징이 조기 발현하는 성조숙증(조발사춘기)으로 진단받은 아동은 최근 10년 사이 꾸준히 증가해왔다. 2014년 9만 6733명에서 2023년 25만1599명으로 2.6배 늘었다.
성조숙증 아동 증가, 소아비만 탓
성호르몬 분비의 증가로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사춘기 시기가 빨라지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빨라지는 추세다.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소아비만’의 증가다.
채민지 대전을지대병원 소아재활의학과 교수(소아성장발달센터)는 “학생표본통계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초·중·고생의 약 30%가 과체중과 비만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약 5%p 증가한 수치인데, 이로 인해 성조숙증을 겪는 아동도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성조숙증은 여아의 경우 유방발달이 되기 시작하거나, 남아의 경우 고환의 크기가 4cc 이상으로 커지는 게 대표적인 의심증상이다. 또 △키가 급격하게 큰다거나 △머리에서 이전에는 안 나던 기름 냄새가 난다거나 △음모 등 체모의 변화가 눈에 띈다면 성조숙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여아는 만 8세, 남아는 만 9세 이전에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난다면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다. 만약 아빠나 엄마의 성장이 또래보다 빨랐다면 아이에게도 영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미리 전문의를 찾아 상담하고, 필요하면 검사를 받아보는 게 바람직하다.
치료 시기 놓치면 암 발병 위험성도 증가
성조숙증으로 진단되면 일반적으로는 사춘기 지연 호르몬 주사제(GnRH agonist)로 치료를 하게 된다. 4주에 한 번 맞는 제형이 흔하고, 3개월에 한 번 맞는 제형도 있다.
GnRH(성선자극호르몬 분비 호르몬) agonist(작용제)는 성선자극호르몬(gonadotropin)의 수용체에 결합해 이 호르몬의 생성을 막는다. 성호르몬의 분비를 줄여야 하는 전립선암, 유방암, 자궁내막증, 자궁근종, 고안드로겐혈증 등의 치료에 사용된다. 또 난임으로 인한 체외수정 시술(시험관 아기) 시 과배란을 유도해 정자와의 수정 확률을 높이는 데 쓰인다. 아울러 중추성(진성) 성조숙증에서 성호르몬 분비를 억제할 목적으로 투여한다.
성조숙증에 체중 대비 가장 높은 농도로, 인공수정을 위한 배란 촉진에는 가장 낮은 농도로, 항암치료 목적으로는 중간 농도로 투여한다고 보면 된다.
GnRH 작용제는 사춘기를 늦추는 효과가 뛰어나지만 장기간 투여할 경우 성인이 돼 조기 폐경이나 난소질환에 노출될 위험성이 있다. 주사를 맞는 동안에 골형성이 덜 돼 오히려 키가 덜 자랄 수도 있는 만큼 장기간 사용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성조숙증의 치료 목표는 또래와 비슷하게 사춘기를 겪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치료 시작 시기나 동반된 문제에 따라 개별적으로 다를 수 있겠지만, 보통 치료 기간은 2년에서 3년 정도로 잡는다.
성조숙증 치료 시기를 놓치게 되면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키 손실’이다. 뼈 나이 등으로 예측되는 키만큼 자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여아의 경우 초경이 또래보다 매우 빠르게 시작될 수 있다. 문제는 신체적 변화로 인한 혼란으로 심리적인 스트레스까지 겪는 경우도 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여성호르몬이나 남성호르몬에 빨리 노출될수록 성인이 되어 자궁내막증이나 유방암, 난소암 같은 여성암, 전립선암 등과 같은 남성암의 발병 위험성도 증가할 수 있다.
채민지 대전을지대병원 소아재활의학과 교수(왼쪽), 이정선 인천세종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성조숙증 치료는 어릴수록 좋다. 6세가 되기 전 치료를 시작하면 여아의 경우 9~10㎝, 남아의 경우 6~7㎝의 성장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6~8세 때 치료를 시작하면 4.5㎝ 성장 효과를 낸다.
다만 주사치료는 사람에 따라 주사 부위 통증, 발적, 얼굴 홍조, 주사 부위 무균성 농양, 일시적 질 출혈 등을 초래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예측 성인 키가 치료 시작 전보다 줄어드는 등 오히려 성장 속도가 감소하는 경우도 있다.
제때 성조숙증 치료를 시작했는데도, 간혹 억제가 풀려 생리 등 2차 성징이 발현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대개 전조증상이 있으며, 가슴이 커지거나 갑자기 키가 확 크기도 한다.
이정선 인천세종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은 “성조숙증 치료를 위한 호르몬 주사는 억제가 풀리지 않도록 주사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며 “부작용은 극히 일부에서 발생하는데, 성조숙증 치료를 안 했을 때도 예측 성인 키는 작아질 수 있다. 정기적인 진료를 통해 추적 관찰 및 관리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성조숙증을 치료하면서 부모들이 걱정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주사치료 때문에 호르몬이 영향을 받아 향후 불임이나 암이 유발되진 않을지’에 대한 것이다.
채민지 교수는 “여러 연구 자료에 따르면 조기 초경이 오히려 유방암의 위험인자로 보고됐고, 또 초경이 빠르면 불임 위험도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며 “결과적으로 성조숙증임에도 치료를 미루면 향후 질병으로 발전할 위험에 더 노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성조숙증의 진단과 보험급여
성조숙증은 혈액검사와 뼈 나이(성장판) 검사, 성선자극호르몬 방출호르몬 작용제 주사 후 반응을 보는 호르몬 자극 검사를 통해 진단한다.
저신장의 경우 소아 내분비 분과 진료로 성장 평가를 하고, 성장호르몬 주사 치료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성조숙증으로 진단되면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다. △(여아)만 8세 이전 가슴발달 확인 △(남아)만 9세 이전 고환 용적 증가 확인 △(공통)만 나이보다 빠른 뼈 나이 △(공통)사춘기 호르몬 자극 검사에서 최고치 5IU/L 이상 확인 등의 경우다. 다만 조발 사춘기에는 급여가 되지 않는다.
성조숙증 예방하려면 소아비만을 잡아야
성조숙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소아비만을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균형 잡힌 식단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성장기 아동들은 인스턴트식품에 쉽게 노출되는데, 이를 최대한 피하고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을 고르게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을 챙겨 먹는 게 좋다. 또 학원 등의 일정으로 밤늦게 식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녁 식사시간은 오후 6시 30분으로 정하고 될 수 있으면 7시 30분을 넘지 않도록 한다.
규칙적인 수면도 중요하다. 불규칙한 수면은 식이의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성장호르몬의 분비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성장호르몬은 보통 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많이 분비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잠든 후 한두 시간이 지나면 깊은 수면에 들어가면서부터 활발히 분비된다. 따라서 일정 시간에 충분히 숙면하는 것이 중요하며, 수면시간은 하루 8시간 정도가 적당하다.
더불어 점프 동작이 포함된 유산소운동은 성장 발달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운동 전후 충분한 스트레칭을 병행한다면 더욱 효과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간혹 성조숙증 주사치료를 ‘키 크는 주사’로 생각하고,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님에도 치료를 원하는 경우가 있다. 이 또한 자녀의 건강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므로 오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정음식과 성조숙증과 연관성 맹신 금물, 스마트폰이 더 해로워
특정 음식과 성조숙증의 연관성을 맹신하는 것도 금물이다. 대표적으로 ‘율무와 다시마가 성조숙증 예방에 좋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우유나 계란을 많이 먹으면 초경 등 성조숙을 촉진시킨다’는 소문도 근거 없다. 이정선 과장은 “우유나 계란의 성장촉진제는 체내에서 생물학적 활성이 없어 연관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히려 어린 자녀들에게서 스마트폰 사용과 성조숙증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이 과장은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어린 나이부터 전자기기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며 “잠을 자야 할 시간에 밝은 빛을 내는 TV와 컴퓨터, 특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 멜라토닌 분비에 문제가 생겨 사춘기가 빨리 시작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