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평일 휴진에 들어가거나, 시급히 인력을 충원하는 의료기관이 늘고 있다. 특례 적용 여부를 두고 노사간 갈등이 증폭돼 골머리를 앓는 병원도 적잖다.
이달부터 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 국가, 공공기관, 지방자치단체 등은 주당 최장 근무시간이 주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됐다. 단 의사, 간호사, 방사선 병원을 비롯한 보건업은 운송업 4개 업종(육상, 수상, 항공, 기타)과 함께 ‘근로시간 특례업종’으로 지정돼 주당 근로시간 상한이 없다. 4시간 일할 때마다 30분씩 주어지는 의무 휴게시간 조항에서도 제외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노사가 특례조항을 적용하기로 합의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병원 측이 근로자대표와 서면으로 합의하지 않으면 의사와 간호사도 다른 업종과 똑같이 주 52시간제를 지켜야 한다. 현재 주 52시간제가 우선 적용된 근로자 300인 이상 중대형 종합병원 대다수는 아직 노사 합의를 이루지 못한 상태다. 보건의료노조는 “특례조항을 적용하면 사실상 ‘무제한 근로’가 가능해진다”며 특례 적용을 거부하고 있다.
게다가 오는 9월부터는 노사가 특례업종 적용에 합의해 주 52시간제 근무를 피하더라도 11시간 연속 휴식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전날 자정에 퇴근하면 다음날 오전 11시까지는 쉬게 하는 식이다. 이럴 경우 의료진이 온콜(비상대기) 상태에 있다가 응급수술을 하는 게 어려워진다.
서울 지역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응급환자가 실려와 수술을 하다가도 11시간 연속 휴식시간을 보장해 주려면 도중에 의료진을 교체해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며 “몇몇 병원에서는 차라리 주 52시간 근무를 노사합의로 채택하는 방안을 고민 중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례업종 적용을 두고 노사간 합의를 이루지 못해 갈등이 커진 병원도 있다. 서울대병원은 노사 합의를 이루지 못해 주 52시간 근무가 가능하도록 인력을 재배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부산대병원은 노사 간 합의가 불발돼 52시간 근무제를 강제 시행 중이다.
주 52시간제가 2020년 1월부터 근로자 50~299인 사업장, 2021년 7월 5~49인 사업장으로 확대되면 혼란은 더 커질 수 있다. 밤에도 의료진을 둬야 하는 소규모 호스피스의원 등에도 주 52시간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유인상 대한병원협회 총무이사는 “인력 충원이 어려운 지방병원이나 규모가 작은 병원은 당장 2020년부터 의료인력난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현재 개원가에선 주 52시간 적용해 상대적으로 환자 수가 적은 평일에 휴진하는 곳이 늘고 있다. Y정형외과 원장은 “주52시간 시행 이후 1주일 중 평일 하루나 반나절을 쉬는 병원이 한두 곳씩 늘고 있다”며 “처음엔 일부 행정직원만 쉬게 하다가 지금은 아예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비뇨기과 L 원장은 “무작정 간호사나 간호조무사들의 인건비를 많이 줄 수가 없다보니깐 주52시간을 핑계 삼아 진료시간을 줄이는 선택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기관 근로자들은 온콜, 인수인계 시간 등도 근무시간에 포함해야 근무환경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최근 병원의사 특별법을 제정해 각 전문의의 근무시간은 온콜을 포함해 주 52시간이 넘지 않도록 해달라는 성명을 냈다.
지난달 2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노동시간 단축? 간호사는 제외다!’라는 근무환경 개선 촉구의 청원도 올라왔다. 청원인은 △인수인계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할 것 △전산 출결 시스템을 전국 병원에 확대 적용할 것 △다른 직종처럼 교육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할 것 등 3가지를 요구했다.
대학병원 간호사 A 씨는 “간호사들은 근무 교대 시 환자의 상태와 치료 계획 등을 설명하고 전달받는 인수인계 과정을 거친다”며 “‘인수인계는 30분~1시간가량 진행되는데 간호사들은 이 시간이 정식 근무로 인정되지 않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방사선사 C 씨는 “수기로 출퇴근을 기록하다보니 실제 근무시간과 상이한 부분이 많아 현재 일부 병원에서만 시행되는 전산 출결시스템을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