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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학 길 닦은 메디컬 아티스트
  • 박정환 기자
  • 등록 2017-11-27 00:28:44
  • 수정 2021-06-13 19: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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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철 고려대 안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코골이 권위자 … 기타 연주로 청소년기 방황 탈출, 그림에도 심취
신철 고려대 안산병원 교수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어린이를 위해 음악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져 따뜻한 감성과 사랑을 전하는 자선콘서트나 개인전을 열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빳빳히 다려진 하얀 의사가운, 방 한켠에 쌓여 있는 진료차트, MRI 영상을 띄워놓은 컴퓨터 모니터화면, 인체 모형, 빽빽이 꽂혀진 의학서적. 의대 교수의 연구실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다. 하지만 신철 고려대 안산병원 인간유전체연구소장(호흡기내과 교수, 61)의 연구실은 다르다. 연구실 문을 열기 전부터 범상치 않은 블루스와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연구실 벽 한켠엔 전문가가 아니면 엄두도 못낼 블루스 연주용 타일러 기타가 걸려 있고, 테이블 위엔 풍경화와 그림서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베토벤 머리에 카키색 가죽자켓을 입고 “먼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며 악수를 청하는 신 교수의 모습은 의대 교수가 아닌 조예 깊은 예술가의 풍모가 느껴졌다.

의료계 대표 ‘괴짜’, ‘딴따라’를 자처하는 신철 교수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음악·그림·의학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메디컬 아티스트이자 코골이·수면의학 권위자다. 2008년 국내 최초로 습관성 코골이 및 수면장애 환자를 위한 ‘코골이 방지 조끼’를 개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수면의학 관련 60여편의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급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그가 이끄는 인간유전체연구소는 2001년부터 질병관리본부 연구비를 지원받아 한국인에서 유병률이 높은 당뇨병·고혈압·비만·골다공증·고지혈증·대사증후군 등 만성질환 관련된 보건·생체 지표를 개발하고, 특이적인 위험요인을 밝혀내 총 230여편의 관련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신 교수는 1957년 전북 부안에서 3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예술가적 기질은 집안 내력에서 나왔다. 일제강점기 저항시와 목가적 서정시로 이름을 날렸던 신석정(辛夕汀, 1907~1974) 시인이 그의 큰아버지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방황의 시기를 겪었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리느라, 형제들은 공부에 집중하느라 막내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반항심 가득했던 문제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기타였다. 신 교수는 “인천 광성고 2학년 재학시절 길을 걷던 중 레코드점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듣고 머리 한쪽을 무엇인가에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들은 곡은 1964년 ‘애니멀스 밴드(The Animals)’가 발표한 기타 명곡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었다. 

바로 기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학원으로 달려갔지만 악보 보기가 싫어 악보가 필요없는 드럼을 배웠다. 고3 때 대학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 인문계반 대신 취업반에 들어갔고, 이후 미8군 밴드 모집광고를 본 뒤 취업을 위해 4줄짜리 베이스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기타 솜씨가 일취월장하면서 사고 치는 횟수도 줄었다. 


고3 때부터 이듬해까지 미8군에서 B급 순회밴드로 연주생활을 했다. 그는 “당시 미8군 무대는 뮤지션이 되는 필수코스였는데 신중현, 조용필, 윤수일, 인순이 등이 미8군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며 “2년 동안 20만원 남짓의 월급을 받으며 미군 부대가 있는 동두천, 오산, 평택, 군산, 부산 등을 돌며 기타를 연주했다”고 회상했다. 특이하게 그때까지 악보를 볼 줄 몰라 200여곡이 넘는 곡의 음정을 모두 외운 채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고되고 불규칙한 밴드 생활을 지속하면서 몸이 망가져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거동조차 어려워 밴드를 그만둬야 했고 군대에도 가지 못했다. 제2의 방황기를 겪던 중 미국 시카고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셋째 누나(신경림 전 대한간호협회장)의 권유로 의사의 길을 결심, 1980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낮엔 접시닦이로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이 이어졌다. 처음엔 공부가 쉽지 않았지만 과거 200곡을 통째로 외웠던 기억력이 학업에 큰 도움이 됐다.

신철  교수가 병원 본관 1층 로비에 마련된 전시회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된 유학생활 끝에 플로리다 소재 팜비치칼리지를 졸업하고, 1983년 고려대 의대 예과 2학년에 편입했다. 1989년 졸업장을 받은 뒤엔 고려대병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동기들보다 5~6년 늦게 의사 생활을 시작한 터라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남들보다 인정받으려면 새로운 분야로의 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1992년 뉴욕 브롱크스 레바논병원에서 혹독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며 내과 전문의 자격증 취득했고, 이 때 당시 국내에는 없었던 수면의학을 배웠다. 이후 하와이대병원에서 노인내과를 전공한 뒤 1999년 귀국해 고려대 안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수면센터장, 유전체연구소장, 대한수면학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신 교수는 한국에서 볼모지나 다름없던 코골이 및 수면의학 분야를 개척해나갔다.  한국인의 30~40%가 코골이를 가지고 있지만 이중 치료받는 비율은 1%에 그친다. 그는 “코골이는 조기치매, 중풍, 심장마비 등 만병의 근원”이라며 “제 때 치료하지 않고 수면무호흡으로 이어지면 수면 질이 떨어져 갖가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면 중 숨을 10초 이상 쉬지 않거나 호흡량이 50%이상 감소하고, 이런 증상이 1시간에 5번 이상 발생하면 수면무호흡증으로 진단한다. 코골이와 수면무호흡증이 심하면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다음 날 일상에도 심각한 지장을 준다. 수면 중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산소부족증에 빠지면 수면의 질이 떨어져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신철 교수는 “코골이는 살만 빼면 90%이상 치료되고 옆으로 30도 가량 누워서 자면 코골이는 최대 80%, 수면무호흡증은 50%까지 줄일 수 있다”며 “하지만 현대인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운동에 소홀하고,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이 다시 비만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2008년 습관성 코골이 및 수면무호흡 환자를 위해 코를 골면 수면시 자세를 바꾸도록 유도해 기도폐쇄를 막고 코골이 증상을 줄여주는 ‘코골이 방지 조끼’를 개발했다. 환자가 코를 골면 조끼에 달린 센서가 이를 감지해 에어챔버가 팽창되면서 자연스럽게 옆으로 눕는 자세를  만드는 의료기기였다. 


전체 수면 중 코골이 시간이 10% 이상인 환자 14명에 조끼를 입히고 이틀간 수면다원검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환자의 63.9%에서 코골이 증상이 개선됐다. 이 제품은 기술제품의 독창성을 인정받아 의학 논문에 수차례 게재됐고 일본의 퍼시픽메디코사와 약 5억6000만원 규모의 수출을 진행할 정도로 경제적 파급효과까지 만들어냈다. 이밖에 코골이 및 수면무호흡 증상과 심혈관질환, 고혈압, 치주질환, 치매 등과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연구결과를 꾸준히 발표하며 한국인의 수면의 질과 삶의 질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연구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예술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기타를 잠시 내려놓고 진료와 연구에 매진하던 그는 2008년 서울 교대 근처 악기점에서 밴드 ‘다섯손가락’의 리더 이두헌 씨를 만난 게 인연이 돼 본격적인 기타 연주를 재개했다. 다음해인 2009년 9월 ‘의학박사 신철 콘서트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를 개최했으며 ‘다섯손가락’, 서울재즈소사이어티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을 펼치기도 했다.

십수년간 수준급 기타리스트로서 예술적 혼을 뽐낸 그는 최근 ‘그림’에도 눈을 떴다. 올해 5월 아내와 함께 체코의 유명 화가인 알폰스 무하(Alphonse Maria Mucha)의 작품을 보고 붓을 잡기로 결심했다. 취미로 하나둘씩 그려온 작품이 벌써 800점.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작품 수가 늘어날수록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던 중 차상훈 안산병원장이 신 교수의 작품을 보고 ‘혼자 보기 아깝다’며 개인전을 권유해 이달 초 병원 본관 1층 로비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늦은 밤 가로등 빛에 반사된 나무, 눈으로 덮힌 대학교 캠퍼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 풍경 등 21점의 작품은 평소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 등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 ‘미술은 무조건 어렵다’는 편견을 가졌던 젊은층으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는 작품활동을 하면서 ‘중국의 피카소’, ‘중국 수묵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치바이스(齊白石)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치바이스는 한평생을 가난한 농사꾼으로 살다 63세가 돼서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제 막 60대에 들어선 신 교수는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붓을 잡은 치바이스의 그림을 보며 작품활동에 대한 의지를 다잡는다.  


신 교수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도 남다르다. 한 번에 한 작품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내키는 작품에 손을 댄다. 그는 “한 작품에 장시간 집중하면 색이 한정되고 그림 자체가 틀에 박히는 느낌을 받는다”며 “네다섯 개 작품을 동시에 작업하면 아이디어가 풍부해지고 색도 다채로워진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릴 때 블루스 음악은 필수다. 신 교수는 “흑인들의 애환이 담긴 블루스 음악을 들으면서 붓을 움직여야 100% 완성된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30년간 의사이자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신 교수의 가슴엔 여전히 자유와 낭만, 얼굴엔 행복과 미소가 살아 있다. 각박한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행복과 낭만을 전파하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신 교수는 “자신의 음악과 그림으로 환자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완치를 향한 희망을 품게 되길 바란다”며 “기회가 된다면 가정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어린이를 위해 음악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져 따뜻한 감성과 사랑을 전하는 자선콘서트나 개인전을 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신철(辛澈) 고려대 안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 프로필

학력
1983년 2월~1989년 2월 고려대 의대 졸업
1990년 2월~1999년 2월 미국 하와이대 의대 박사

경력
1992년 7월~1995년 6월 미국 브롱스레바논(Bronx-Lebanon)병원 내과 인턴 및 전공의
1995년 7월~1997년 6월 미국 브롱스레바논병원 호흡기내과 임상강사
1997년 2월~1997년 8월 미국 하와이 쿠아키니메디컬센터(Kuakini Medical Center) 호흡기·수면장애센터 지도전문의
1997년 7월~1998년 6월 미국 하와이대병원 노인내과 임상강사
1999년 2월~2016년 1월 고려대 안산병원 호흡기내과 과장
1999년 9월~ 현재         고려대 안산병원 수면호흡장애센터 소장
2001년 3월~2005년 2월 고려대 의대 내과 조교수
2005년 3월~ 현재         고려대 안산병원 인간유전체연구소장
2007년 11월~2008년 10월 대한수면학회 회장
2010년 3월~ 현재         고려대 의대 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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