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앉아있다 갑자기 일어났을 때 ‘핑’ 도는 어지럼증을 느끼면 보통 빈혈을 의심한다. 어지럼증이 나타나면 병원에 가 진단받아야겠다는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다. 빈혈이 원인이라면 철분 보충 근본치료가 시급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질병이 진행되는 것을 나타내는 시그널이 될 수 있기에 정확한 원인 파악이 시급하다.
빈혈은 적혈구의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이 부족해 발생한다. 피부는 혈색이 없어 창백하게 보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두통과 어지럼증이 동반되기도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남자 성인의 경우 혈색소 농도가 13g/㎗, 여자 성인은 12g/㎗, 6∼16세 사이 청소년은 12g/㎗, 6개월에서 6세 미만 소아와 임산부는 11g/㎗ 미만이면 빈혈로 정의하고 있다.
빈혈 증상을 보이는 10명 중 9명은 몸 안에 철분이 부족한 철분결핍성빈혈이 원인이다. 2~3개월 정도 철분제를 챙겨 먹으면 증상이 쉽게 낫는다. 하지만 철분제를 먹어도 빈혈이 그대로라면 몸에 다른 질환이 있거나 비타민 부족이 원인일 수 있다.
유영진 인제대 상계백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청소년기나 20~30대엔 다이어트나 월경 등으로 철겹핍성빈혈이 발생하기 쉽지만 폐경기가 지나면 월경을 하지 않아 철분이 체외로 잘 빠져 나가지 않는다”며 “즉 중년 여성은 철분 부족 외에 위장관 기능저하 및 출혈, 단백질 및 비타민 섭취 부족 등을 의심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50대 이상은 다른 연령대보다 비타민결핍성빈혈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육류에 풍부한 비타민B12는 혈액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나이가 들면 소화기능이 떨어져 고기를 잘 먹지 않게 되고, 먹더라도 신진대사 속도가 느려 젊은 사람보다 비타민B12 흡수량이 현저히 저하되므로 빈혈에 걸리기 쉽다.
희귀질환으로 분류되는 악성빈혈은 위점막이 위축되거나 자가면역항체가 위벽세포(parietal cell)를 파괴해 비타민B12가 제대로 흡수되지 않아 발생한다. 위를 완전히 절제하거나, 위에서 위산 분비가 되지 않거나, 육류 섭취가 부족한 노인에서 잘 생긴다. 가장 큰 특징은 설통으로 혀가 아파 맵고 짠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노년기에 비타민 부족으로 인한 빈혈을 막으려면 소화가 힘든 고기 대신 비타민B12가 다량 함유된 콩·단호박·김 등을 자주 먹는 게 좋다. 소화기능이 많이 떨어져 음식 섭취가 제한될 땐 보충제로 비타민B12를 섭취하면 된다. 60대 이상 노인의 1일 비타민B12 권장 섭취량은 1000㎍ 이상이다.
악성종양이나 장출혈 같은 위장질환도 노년기 빈혈 증상을 유발하는 원인이다. 대표적인 게 대장·직장 부위에서 피가 나는 ‘하부 위장관출혈’과 위·십이지장에 문제가 생기는 ‘상부 위장관출혈’이다.
대변색으로 두 질환을 구별할 수 있다. 변에 선혈이 묻어 있으면 하부위장관 출혈일 가능성이 크며, 특히 대장게실증일 확률이 높다. 대장게실은 대장벽이 바깥쪽으로 동그랗게 꽈리 모양으로 튀어나오는 질환이다. 40세 이상의 20%, 60세 이상의 60%가 앓을 정도로 흔하며 혈변으로 내원하는 환자 중 40%는 대장게실증으로 진단된다. 직장염이나 궤양성 대장염은 설사나 점액성 변과 함께 선혈이 나오는 증상을 보인다. 대장암으로 인한 출혈은 암환자 100명 중 5~10명 정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흔하지는 않다. 치질 등 항문질환과 헷갈리기 쉬워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검은색 변을 본다면 상부 위장관출혈을 의심해볼 수 있다. 위암이나 궤양성질환을 앓으면 상부 위장관에서 발생한 출혈이 소화기관을 거치면서 위산이나 펩신(척추동물 위액에 함유된 단백질 분해효소), 장내 세균 등에 의해 변색돼 ‘짜장면색’으로 불리는 흑색변이 나온다. 냄새가 고약하고 끈적끈적한 타르 형태를 띤다. 간혹 변에서 선혈이 나와 검사받았는데 하부가 아닌 상부 위장관출혈로 확인된 경우 중증 소화기질환에 따른 대량출혈을 의심해볼 수 있다.
상부 위장관출혈은 위궤양 및 십이지장궤양, 위염, 식도정맥류, 말로리바이스(Mallory-Weiss)증후군, 혈관이형성증 등 약 60여가지 질환이 발병인자로 보고된다. 상부 위장관출혈이 하부 위장관출혈보다 사망률이 높고, 평소 간경변이나 만성신부전 등을 앓는 만성질환 환자에게는 더 치명적이다.
유영진 교수는 “40대 이후부터는 위암이나 대장암 등 심각한 질환의 발병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위·대장내시경검사를 정기적으로 받는 게 좋다”며 “빈혈 증상이 있다고 해서 정밀진단 없이 철분제제만 먹으면 큰 병을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노인빈혈은 간혹 일반적인 증상인 어지럼증이 거의 없고 대신 다른 증상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평소 심장이 좋지 않은 노인에서 빈혈이 오면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고 전신이 잘 붓는다. 경도인지장애 노인은 빈혈로 치매 증상이 심해질 수 있다.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는 등 머리를 움직일 때에만 어지럽고 자세를 바꿔주면 증상이 나아질 경우 빈혈이 아닌 귀질환인 이석증일 확률이 높다. 어지러움 증상을 경험하면 빈혈을 의심해 철분제를 복용하는데 섭취량이 지나치게 많거나 원인이 다른 기저질환일 경우 철 과다로 인한 간기능 저하나 호르몬 이상을 유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