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전통이 잔존하는 한국사회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미덕 중 하나로 여겨진다. 반면 눈물이 많거나, 쉽게 흥분하는 등 얼굴에 감정이 잘 나타나는 사람은 진중하지 못하고 경박스럽다는 평가를 받기 일쑤다.
대인관계에나 사회생활에서 어느 정도 ‘포커페이스’는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내성적이거나 감정표현에 인색하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우울증이나 화병에 노출되고 자칫 감정 표현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해외 연구에 따르면 감정이 풍부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일수록 정신건강이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질병으로 병원에 방문하거나 약물을 복용하는 비율도 낮았다. 웃음을 통한 적절한 감정표출은 면역기능을 높이고, 반대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면역력을 낮추는 코티솔(cortisol)의 분비는 억제한다. 통증을 줄이고 행복감을 주는 엔도르핀(endorphin)이나 엔케팔린(enkephalin)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도 증가시킨다.
반대로 부정적인 감정을 잘 표출하지 않는 사람은 화병이나 우울증 등 정신적인 문제는 물론 두통, 근육통, 소화불량, 변비 등 신체 증상에 쉽게 노출된다. 특히 지나치게 내성적인 사람은 ‘상대가 상처받지 않을까’, ‘한마디했다가 싸움으로 번지면 어쩌나’하는 걱정 탓에 감정문제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안으로 억누르다 울화병이 도지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억눌린 스트레스가 위액 분비와 위장관운동을 과도하게 활성화해 위궤양, 대장염, 역류성식도염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간헐적으로 분노가 폭발하기도 한다. 김종우 강동경희대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는 “답답한 감정이 의욕상실, 무력감,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심하면 욕설·폭력·심한 짜증 등으로 분출되기도 한다”며 “취업난, 빈부격차, 극심한 경쟁문화 등 사회적 요인이 겹치면서 화병을 앓는 20~30대 젊은층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습관적으로 감정을 억제하면 우울증이나 화병 외에도 감정을 제대로 느끼거나 표출하지 못하는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이 생길 수 있다. 그리스어로 ‘영혼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음’을 의미하는 이 질환은 자신의 감정은 물론 다른 사람의 감정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시오패스와 일정 부분 비슷하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신체는 자동적으로 스트레스와 감정에 반응해 만성요통, 위장질환, 이명 등이 동반될 수 있다. 불안장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섭식장애, 우울장애, 성격장애 등 정신적인 문제와 함께 발생하기도 한다. 정확한 발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뇌의 감정처리 기능이상, 과도한 방어적 심리, 특정 유전자 이상 등이 지목되고 있다.
이럴 땐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쑥스럽더라도 적절하게 자기감정을 표현해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김종우 교수는 “화가 날 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정리한 뒤 상대방에게 솔직하고 분명히 털어놔야 한다”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자신만의 대안을 만들어 스트레스상황이 생길 때마다 적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감정표현이 어렵다면 혼자만의 공간에서 크게 웃거나 소리를 질러보는 게 권고된다. 우울하다면 어두운 밤에 슬픈 노래를 듣거나 울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단 슬픔을 너무 자주 표현하면 우울증이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 또 기쁨은 ‘기분이 째질 정도로 좋다’ 또는 ‘눈물나게 웃기다’, 슬픔은 ‘마음 한켠이 무겁다’ 또는 ‘코끝이 찡하다’ 등 구체적이고 다양한 단어로 표현하면 감정표현불능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