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는 독특한 향기와 맛으로 음식의 풍미를 북돋아 식욕을 촉진시킨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까지의 항로를 개발한 것도 모두 향신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유럽인들이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세계 식민지화도 시작됐다.
후추와 초피는 매운맛을 내는 대표적인 향신료다. 후추는 인도 남부지역이 원산지로 동아시아에선 ‘호초’(胡椒)로도 불린다. 후추과에 속하는 상록덩굴식물로 꽃은 4~10월 사이에 핀다. 한 개의 긴 꽃자루에서 여러 꽃이 이삭처럼 붙어 핀다.
후추는 영어로 ‘블랙 페퍼(black Pepper)’다. 고추가 ‘레드 페퍼(red pepper)’로 불리다 보니 둘이 같은 뿌리에 나온 식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서로 관련없는 식물의 열매다. 페퍼란 단어는 고대 산크리스트어 피팔리에서 유래됐다. 피팔리가 라틴어 피퍼로 번역됐다가 영어에선 페퍼로 바뀌었다. 과거엔 페퍼는 후추를 뜻하는 고유명사였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신대륙에서 고추가 발견되면서 둘을 구분짓기 위해 색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후추가 서양으로 전해진 것은 기원전 400년경 아라비아 상인에 의해서다. 초창기 유럽에서는 후추를 정력제로 믿어 금이나 은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됐다. 교환의 매개물로 귀금속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결혼 지참금, 세금, 집세 등을 후추로 계산했다. 지주들은 화폐보다 가격 안정성을 지닌 후추로 값을 받는 것을 선호했다. 한때 후추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공급이 끊기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권에 대한 전쟁을 일으킨 요인의 한켠에 후추가 있었다.
중국에는 육조시대(六朝時代, 200~500년경)에 전해졌다. 한나라 때 호나라(월지, 月氏로 추정되는 서역의 나라 중 한 곳) 사신으로 갔던 장건(張騫)이 비단길을 통해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호초란 이름도 호나라에서 전래된 초(椒)라는 뜻이다. 국내에는 고려시대 이인로가 지은 ‘파한집’에 후추가 처음 등장하는데, 1000년경 송나라 시절 후추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후추는 크게 흑후추, 백후추, 적후추, 녹후추 등으로 나뉜다. 흑후추는 익지 않은 녹색 후추 열매를 껍질 채 햇빛에 말린 것이고, 백후추는 붉게 익은 후추를 물에 담가 붉은 껍질을 벗겨 말린 것이다. 적후추와 녹후추는 각각 후추 열매가 다 익었느냐 덜 익었느냐의 차이다. 흑후추는 스테이크나 샐러드에, 백후추는 흰색 소스나 생선요리에, 녹후추는 수프나 크림소스 등에 뿌려 먹으면 된다.
한방에서는 후추를 소화불량, 구토, 이질 등을 치료할 때 사용한다. 사람의 속을 데워주고 기운을 순환시키며 음식의 독을 풀어주는 작용을 한다.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뭉친 피를 돌게하는 효과도 있다.
조선시대 말기 지규식이 쓴 ‘하재일기’에는 ‘아내가 밤새 기침을 하며 숨이 차, 후추(호초) 가루에 꿀을 타 떡을 만들어 수시로 먹게 했다’고 적혀져 있다. ‘산림경제’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습한 곳에서는 후추 두세 알을 물고 이와 혀로 문지르면 매운 기운이 오장에 들어가서 나쁜 기운을 막는다’고 씌어져 있다.
후추는 소화를 돕는 역할도 한다. 후추 속 알칼로이드 성분은 타액과 소화액 분비를 촉진시킨다. 하지만 이 성분을 과다하게 섭취할 경우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후추는 성질이 뜨거워 평소 몸이 차고 맥이 약한 사람에게 좋다. 하지만 몸에 열이 많거나 임신 중인 사람은 과다 섭취는 피해야 한다. 사상의학에서는 후추를 소음인의 음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육류를 볶기 전 양념을 하는 과정에서 잡내를 없애기 위해 넣는 후추는 발암물질인 아크릴아마이드 함량을 늘릴 수 있다. 일반적으로 후추에 들어간 아크릴아마이드는 평균 492ng/g 수준이지만 후추를 넣고 육류를 조리할 경우 5485ng/g, 튀김 조리 시 6115ng/g, 구이 조리 시 7139ng/g으로 각각 약 10배 이상 증가한다.
아크릴아마이드는 발암물질로 체내에 일정량 이상 들어오면 신경계에 문제를 일으킨다. 감자칩이나 감자튀김 등에 포함된 아크릴아마이드의 경우 요리과정에서 주로 형성된다. 조리과정에서 아크릴아마이드의 형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175도 이하의 온도에서 튀기거나 구워야 한다.
초피는 중국 쓰촨성(四川省) 일대에서 나는 열매로 후추와 흔히 비교된다. 초피는 잎을 따 생으로 사용하거나 열매 껍질을 벗겨 말린 뒤 농축해 활용한다. 열매는 완전히 익기 전 여름에 수확해 말린다. 초피 가루는 말린 열매를 구워 갈아야 본연의 풍미가 강해진다.
초피는 중국 쓰촨요리에 빠져서는 안될 향신료다. 영어로는 ‘쓰촨 페퍼’(Sichuan pepper)로 불린다. 쓰촨 지역은 분지라는 지형 특성상 육류와 채소류를 많이 사용한다. 매운 식재료를 사용해 특유의 강한 향을 낸다. 초피는 갑각류, 육류, 가금류 등 요리에 사용되며 특히 사천식 구운오리요리에 반드시 들어간다. 음식을 만들기 전 먼저 기름에 볶아져 음식의 맛과 향을 돋워주는 역할을 한다.
후추보다 톡 쏘는 맛이 강하다. 국내서는 주로 추어탕에 뿌리는 향신료로 사용된다. 초피는 미꾸라지의 비린내와 찬 성질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흔히 추어탕에 치는 향신료를 산초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고 엄밀히 초피가루(말린 열매를 분쇄한 것)이다. 초피 열매는 예부터 소화불량, 구토, 이질, 설사, 신경쇠약, 기침 등을 치료하는데 쓰였다.
초피나무는 한반도 남부 지방과 동해 연안에 자생한다. 키가 3m 가까지 자라고 가지에는 가시가 있다. 5~6월에 꽃이 피고 늦여름에 열매를 맺는다.
흔히 초피는 산초와 헷갈리기 쉽다. 산초는 산초나무 열매로 중부 내륙 지방에 자생한다. 초피와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쓰임새는 완전히 다르다. 산초는 초피에 비해 매운맛도 없으며 시지도 않다. 향은 비누 냄새와 비슷하다. 무엇보다 향신료로 사용하지 않는다. 열매의 씨앗에서 기름을 짜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