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근거 부족·당초 성장촉진제로 개발… ‘대사변조제’란 확증 없지만 도핑금지약물로 묶인 건 타당
지난달 8일 세계 여자 테니스 간판스타인 마리아 샤라포바(29·러시아)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금지약물인 멜도늄(meldonium)을 복용했다고 고백했다. 이후 샤라포바의 대회 출전은 금지당한 상태이며 국제테니스연맹의 결정에 따라 선수자격 중지기간이 좌우될 것으로 보여 샤라포바가 선수생활에서 일대 위기를 맞고 있다.
당시 세계 랭킹 7위였던 샤라포바는 기자회견에서 “세계반도핑기구(WADA, world anti-doping agency)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아 멜도늄이 금지약물인 사실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세계반도핑기구는 선수들이 운동능력 향상을 목적으로 멜도늄을 복용한다고 판단, 지난해 9월 29일 멜도늄을 금지 대상에 올렸고, 올해 1월 1일부터 멜도늄을 금지약물로 공표했다.
멜도늄은 성분명이며 상품명은 밀드로네이트(Mildronate)로서 현재 동유럽의 한정된 시장에서만 판매되고 있다. 250㎎, 500㎎의 캡슐형과 10%용액 주사제 형태가 있다. 1970년 초·중반 라트비아 과학자 이바르스 칼빈(Ivars Kalvins)이 개발했으며 같은 나라의 제약회사인 그린덱스(Grindeks)가 최초로 제조해 현재까지 판매하고 있다. 당초 라트비아 유기합성연구소에서 가축이나 가금류 사육에서 성장촉진 용도로 이 약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유럽에선 협심증(angina)·심근경색(myocardial infarction) 등 항허혈제(anti-ischemia)로 쓰인다.‘허혈’은 조직·장기의 산소 수요에 대해 혈류 공급이 부족한 상태로 심근경색, 뇌경색 등이 이에 속한다. 4~6주 복용하게 돼 있으며 필요에 따라 연간 2~3회 주기로 투여기간을 늘릴 수 있다. 그 이상의 투여는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보고 판단하는데 샤라포바는 무려 10년간 지속 복용한 게 걸리는 대목이다. 동유럽에서는 이 약의 일정기간 투여 후 다른 약으로의 대체에 관한 지침은 사실상 없다.
멜도늄은 주로 협심증과 심근경색증 치료에 사용된다. 이밖에 신경성질환(뇌전증, 졸음증, 알코올 중독 등)과 당뇨병 치료에도 도움된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반도핑기구는 2015년에 멜도늄을 감시약물로 선정하면서 “멜도늄은 원래 취지와 달리 회복을 빠르게 하거나 운동능력을 향상시켜 이를 복용하는 선수가 늘고 있어 호르몬 및 대사변조제(metabolic modulator)로 분류하고 선수들의 사용을 금지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즉 멜도늄이 아나볼릭스테로이드처럼 자연스런 호르몬 대사를 교란시켜 인위적인 근력증강에 악용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샤라포바는 “감기에 자주 걸리고 당뇨병 증세도 있어 멜도늄을 복용했다”고 변명했다. 이에 뉴욕타임스는 “샤라포바를 돕는 팀원이 몇 명인데 멜도늄이 금지약물로 등재된 사실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전문가 반박을 인용 보도했다.
동유럽권의 일부 선수들은 멜도늄이 금지약물로 지정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복용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샤라포바의 당뇨병 가족력 때문에 2006년부터 이 약을 복용해왔다고 설명했다. 샤라포바의 기자회견을 가진 같은 날 러시아 아이스댄싱 선수인 에카트리나 보브로바(Ekaterina Bobrova)도 2016 유럽 피겨스케이팅 챔피언십 때 받은 도핑테스트에서 멜도늄 양성반응이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는 멜도늄이 금지약물에 추가된 것을 알고 복용을 중단했는데도 양성 결과가 나온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이밖에도 에티오피아 출생 스웨덴 여자 중거리 육상 선수 에아베바 아레가위(Abeba Aregawi)를 포함해 세계반도핑기구는 올해 1월 1일부터 3월 25일까지 123명의 선수에게서 멜도늄 양성반응을 확인했다. 선수들의 국적은 러시아가 가장 많았으며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권 선수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선수명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독일 레슬링선수도 이 명단에 들어가 있다. 이들은 일정기간 선수자격이 정지될 예정이다.
멜도늄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Food and Drug Administration) 승인을 받지 못했다. 영국과 유럽의약품국(EMA)에서도 허가되지 않았다. 라트비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동유럽 및 구 소비에트연방국에서는 합법적으로 처방된다. 멜도늄을 생산·판매하는 그린덱스는 이 약물로 2013년 한 해 65만유로(한화 8억5200만원)의 수익을 얻었다. 미국에서 공식 시판허가를 얻지 못해 세계반도핑기구의 금지약물에 올랐다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제조사 그린덱스는 “이 약물의 주효능은 카르니틴의 특정 부산물로 야기되는 세포의 손상을 줄이는 것이므로 운동능력 향상에 이용된다고 금지약물로 지정된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이어 “멜도늄은 허혈성 세포의 죽음을 방지하는 것이지 정상 세포의 기능을 강화하지 않기 때문에 선수의 운동능력을 향상시킬 수 없지만 허혈증의 경우 조직의 손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약물 개발자인 이바르스 칼빈은 “WADA가 멜도늄이 도핑 대상에 오른 과학적 증거를 충분히 밝히지 않았다”며 WADA의 결정을 비판했다. “멜도늄은 선수의 운동능력을 향상시키지 않으며 다만 강도 높은 운동을 한 후 산소 부족으로 인한 심장과 근육 손상을 예방하는 목적으로 쓰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선수들이 이 같은 건강관리도 못하게 하는 것은 인권 침해이며 동유럽 선수를 세계 무대에서 탈락시키려는 편협한 행위”라고 말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메이오클리닉(mayo clinic)의 마이클 조이너(Michael Joyner) 마취학 교수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운동이나 다른 활동 후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멜도늄이 선수의 운동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며 칼빈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어 “멜도늄의 근육량 강화효과가 자연물질인 카페인이나 ‘크레아티닌(creatinine)’보다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오히려 더 높은 것으로 규명된다면 뉴스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크레아티닌은 근육내에 존재하는 크레아틴에서 생기는 물질로 1일 생산량은 근육의 양에 비례한다.
반면 리엔 코즈로브스카(Liene Kozlovska) 라트비아 스포츠의약품센터 도핑방지 부서장은 “멜도늄을 과량 사용하면 위험하므로 의학적 처방에 따라 질병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며 이 약물을 개발한 칼빈의 의견에 반대했다. 또 “러시아에선 작년 말 도핑방지위원회의 활동이 정지됐기 때문에 자국 선수들이 멜도늄이 금지약물 리스트에 추가됐다는 주의사항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멜도늄의 부작용으로는 불규칙한 심장박동, 심박급속증(tachycardia), 혈압 변화, 불규칙한 피부변화 등이 꼽힌다. 드물게 알레르기반응(발적·발진·가려움증·부종), 소화불량이 초래되기도 한다.
멜도늄은 카르니틴 생합성 경로에서 감마부티로베타인 탈수소효소(gamma-butyrobetaine hydroxylase)를 억제해 지방산 산화를 저해한다. 이 효소는 카르니틴 생합성의 마지막 단계인 감마부티로베타인(gamma-butyrobetaine)에서 L-카르니틴이 생성되는 과정(감마부티로베타인 + 산소 + 2-옥소글루타르산(2-oxoglutarate)→ L-카르니틴 + 숙신산(succinate) + 이산화탄소)을 촉매한다. 멜도늄은 이 효소를 경쟁적으로 저해함으로써 L-카르니틴이 미토콘드리아 안에 지방산 연소를 밀어넣어 태우는 과정을 방해한다. 대신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쓰이게 한다. 궁극적으로 지방산 산화과정에서 초래되는 산소의 낭비를 줄이고 결과적으로 운동피로로 야기되는 조직이나 근육의 산화적 스트레스나 세포 손상을 줄이며 인체의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을 유도한다고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 약대 카렌 코파섹(Karen Kopacek) 조교수는 설명했다.
고혈압치료제로 쓰이는 안지오텐신전환효소차단제(angiotensin converting enzyme inhibitor)인 ‘리시노프릴(lisinopril)’과 멜도늄의 만성 심부전(chronic heart failure)에 대한 병용 효과 연구는 2005년 심장학세미나(Seminars in Cardiology) 저널에 처음 보고됐다. 연구진은 “두 약의 병용은 심부전 환자의 삶의 질과 운동능력, 말초혈관의 순환(peripheral circulation)을 개선한다”고 밝혔다. 심부전은 심장의 기능적 이상으로 인해 심장이 혈액을 받아들이는 이완능이나 짜내는 수축능이 감소해 신체조직에 필요한 혈액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 발생하는 질환이다.
2008년 심혈관의약세미나(Seminars in Cardiovascular Medicine) 저널에 게시된 다른 팀의 추가 연구에서는 “멜도늄과 리시노프릴의 병용이 만성 심부전 환자의 경동맥 압력수용기 반사작용(carotid baroreceptor reflex)을 개선한다”고 보고됐다.
2011년에는 협심증 환자에게 멜도늄과 ‘표준 운동부하 치료(standard exercise tolerance therapy)’를 병행해 유효성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임상시험이 진행됐다. 그 결과 ‘안정 협심증(stable angina)’ 환자의 ‘운동 부하(exercise tolerance)’가 눈에 띄게 개선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연구결과는 리투아니아 의학저널인 ‘메디시나(Medicina)’에 소개됐다.
중국 산시 성에 위치한 제4군의대(Fourth Military Medical University) 연구팀은 ‘급성 협심증(acute ischemic stroke)’ 환자 227명을 대상으로 멜도늄의 유효성과 안전성에 관한 2차 임상시험을 진행해 2013년 8월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이 약물이 자국에서 사용하는 혈관확장제 신파자이드(cinepazide)만큼 효과적이고 안전하다”고 결론지었다.
멜도늄이 급성 간질치료제와 수면을 깨우는 각성제로 작용한다는 연구논문이 2010년 9월 ‘행동약리학(Behavioural Pharmacology)에 발표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약물시험과 분석’(Drug Testing and Analysis) 저널에는 멜도늄이 선수의 운동능력을 향상시키고, 운동 후 회복·스트레스에 대한 방어·중추신경계(CNS, central nervous system) 기능 등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같은 보도와 연구를 종합해보면 멜도늄은 미국·유럽 수준의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고 탄생했으며, 다양한 약리작용을 갖고 있으나 검증되지 않은 게 많다. 무엇보다도 동물실험이나 조잡한 임상시험으로 나온 연구결과가 태반이다. 비록 세계반도핑기구가 확실한 과학적 근거를 대고 반도핑 약물로 묶은 것은 아니지만 그럴 만한 정황적인 근거는 충분한 편이다. 다만 샤라포바 등 다수의 동유럽 선수들이 올 1월 이전부터 복용해서 체내에 축적된 억울한 사례와 약물복용의 고의성 여부가 각 선수의 선수활동 중지시간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참고기준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