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치질로 불리는 ‘치핵’은 항문관을 형성하는 점막 아래에 있는 혈관이 여러 원인에 의해 붓고 늘어나는 질환이다. 주변에 한 명씩은 이 질병으로 고생할 만큼 발생률이 높지만 항문이라는 껄끄러운 부위에 발생하다보니 치료받기를 꺼리는 사람이 많다. 잘 씻지 않아서 생기는 병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치핵은 혈관질환의 일종이어서 노인에게 잘 생긴다.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인 치질 환자도 덩달아 증가하는 추세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80대 이상 초고령층 치핵 환자는 최근 5년간 5511명에서 8419명으로 약 1.5배 늘었다.
나이가 들면 혈관벽이 약해지면서 고혈압, 뇌혈관질환, 협심증 등 혈관질환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치핵도 항문의 혈관이 약해져 늘어나면서 발생한다. 항문 안쪽 피부가 자극에 의해 수축되고 근육이 모세혈관을 압박하게 되면 혈액의 농도가 짙어지면서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는다.
치질은 크게 치열, 치루, 치핵으로 나뉜다. 항문 쪽에 작은 덩어리를 생기는 게 치핵, 항문 입구부터 항문 안쪽 치상선에 이르는 항문관 부위가 찢어진 것을 치열, 항문선의 안쪽과 항문 바깥쪽 피부 사이에 구멍이 생겨 분비물이 누출되는 질환이 치루다. 이 중 치핵이 전체 환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치질이라고 하면 치핵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치핵은 항문 및 직장에 존재하는 치핵 조직이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내치핵, 항문 밖 조직이 부풀어올라 덩어리처럼 만져지는 외치핵으로 구분된다. 외치핵은 통상적으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증상이 가벼운 경우가 많다.
내치핵은 보통 4단계로 구분된다. 탈항이 전혀 없이 출혈만 있으면 ‘1도’, 탈항 증상은 있지만 변을 본 직후에 저절로 치핵이 항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2도’, 변을 다 본 후에도 탈항된 치핵이 들어가질 않아 손으로 밀어 넣어야 되거나 한동안 누워 있어야 들어가면 ‘3도’, 손으로 넣어도 잘 안 들어가거나 들어갔다가 금세 다시 빠져 나오면 ‘4도’로 규정한다.
보통 3도 이상이면 생활에 불편을 느끼고, 4도가 되면 치핵이 수시로 빠져 나오기 때문에 산책 등 가벼운 일상활동에도 지장을 받게 된다. 3·4도 치핵은 치료 후에도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는데, 노인의 경우 항문이 삐져나오는 게 싫어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탓에 활동이 증상이 나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치질의 정확한 발병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배변시 과도한 힘주기, 장기간 변기에 앉아있는 습관, 변비, 음주 등이 증상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여성은 임신 및 출산 과정에서 치질이 생기거나 악화되는 경우가 많고, 출산 이후에도 증상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주요 증상으로 출혈과 항문 주위 조직이 항문 밖으로 탈출하는 탈항이 나타난다. 항문 주위에 가려움증, 불편함, 통증이 느껴지고 점액성 분비물이 나오기도 한다. 배변 후 화장지나 대변에 피가 묻거나 항문 주변에 덩어리가 만져질 때도 있다.
치료법은 보존적인 요법과 수술요법으로 나뉜다. 보존적인 요법은 1~2도 치핵 환자를 대상으로 변완화제, 식이요법, 통증치료, 약물치료 등을 실시하고 배변습관을 교정한다. 치료제로 사용되는 성분은 ‘미세정제플라보노이드’로 부풀어오른 항문 정맥혈관의 압력을 낮춰준다.
박민근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 외과 교수는 “보존적 치료에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거나, 합병증이 동반되거나, 치핵 크기가 클 땐 수술적 치료가 필요하다”며 “배변과 관계없이 일상활동 중에도 치핵이 돌출돼 손으로 집어넣어야 하는 경우 수술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환상고무결찰술(elastic ligation)은 직장경을 이용해 치상선(항문 입구에서 1.5㎝ 안쪽에 위치한 톱니 모양의 조직) 상부 6㎜ 부위를 환상(고리 모양) 고무로 묶어주는 방법으로 2~3도 치핵 환자에게 시행한다. 시술 후 7~10일이 지나면 조직이 자연스럽게 잘리면서 치핵이 떨어진다. 이어 1개월 정도 지나면 상피 조직이 자연스럽게 덮이며 치료가 끝난다.
국소마취 후 짧은 시간 내에 시술하므로 입원할 필요가 없고 편리하며 비용도 적게 든다. 하지만 치핵이 너무 작으면 묶은 부위가 빠지기 쉽고 재발률이 높은 편이다. 드물게 치핵이 썩어 떨어지는 과정에서 1~2주간 출혈을 일으킬 수 있다. 노약자는 항문 주위 감염에 의한 패혈증, 배뇨곤란, 출혈이 올 수 있다.
적외선응고법(infrared photocoagulation)은 혈관 주위에 열을 가해 섬유화를 유도함으로써 병변을 치료한다. 한랭치질수술(cryosurgery)은 액체질소나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환부를 선택적으로 급속히 응고 및 파괴하는 보조술식이다.
치핵절제수술(excisional hemorrhoidectomy)은 크기가 큰 3~4도 치핵, 외치핵이 내치핵과 같이 있어 환상고무결찰술이 불가능한 환자, 급성 혈전성 치핵, 통증을 유발하고 썩기 직전의 상태인 감돈치핵(3~4기 탈출성 치핵에서 부종이 심해져 항문 안으로 복원이 안 되는 상태), 항응고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등에게 적용된다. 수술 후 합병증으로 배뇨곤란이 올 수 있고 출혈, 세균감염, 딱딱한 대변이 직장 내에 꽉 차는 분변 매복, 괄약근 손상, 항문이 좁아짐 등이 동반되기도 한다.
치질 예방은 작은 생활습관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변기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거나 책을 읽고 항문에 과도한 힘을 주면 치핵 발생률이 높아진다. 변기에 앉아 있는 시간은 5분을 넘기지 않는 게 좋다.
변비는 치핵을 유발하는 주원인이다.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컵을 마시면 대장운동이 활성화돼 대변을 보는 데 도움된다. 박 교수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통해 하루 30g 이상의 섬유질을 섭취하면 변이 부드러워져 변비 예방에 효과적”이라며 “카페인이 많이 든 음료나 술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장시간 앉거나 서 있는 직업군은 일정시간 간격을 두고 스트레칭을 하면 치핵 예방에 효과적이다. 강상희 고려대 구로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는 “항문 주위를 따뜻하게 유지해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면 치핵 통증을 완화하는 데 도움된다”며 “병변에 직접 뜨거울 물을 닿게 하는 좌욕을 통해 항문 체온을 높이고, 장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것을 피하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하루 3~4회씩 40~42도 온수에 엉덩이를 10분간 담그고 있으면 항문 주변의 혈액순환이 촉진돼 증상이 개선된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부종이 심해지거나 화상을 입게 된다. 물에 소금, 소독약, 기타 약물을 탈 경우 항문 주변에 소양증(가려움증)이 악화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