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회의원과 대학교수 등 사회지도층이 성추행 사건으로 입건되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갑이 을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성범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요즘 들어 부쩍 빈도 수가 높아지는 추세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신체 부위를 의도적으로 만지거나 직접 접촉하는 행위는 엄연한 성추행이다. 다만 다른 사람과의 신체접촉이 불가피해 성추행인지 아닌지 모호한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의사들의 진료행위다.
의료인이 특정 신체부위를 사전설명 없이 만지거나 누르면 환자는 성추행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반면 의료인은 진료가 목적인 정당한 진료행위라며 억울해한다. 의료인과 환자간의 이런 오해와 갈등은 의료인에 대한 환자의 불신만 키운다.
이런 가운데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진료빙자성추행방지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 법안은 의료인이 성추행 우려가 있는 신체 부위를 진료할 때 의무적으로 환자에게 사전고지를 하거나 제3자를 배석시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2013년 8월 중학생 박민서 양이 치료를 받기 위해 찾은 한의원에서 ‘수기치료’라는 이름으로 한의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사건에서 촉발됐다.
환자단체연합회 관계자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성기, 유방, 항문 등 민감한 신체부위를 의료인이 사전설명 없이 만지거나 누르면 환자들은 성추행을 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이 법안은 의료인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당한 진료를 성추행으로 오해하는 것을 예방함으로써 의료인과 환자가 서로를 더욱 신뢰하게 만드는 가교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단체는 제19대 국회가 만료되는 2016년 4월 13일 이전에 이 법을 제정하기 위해 1만명 문자 청원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민병두 의원(정무위원회)도 같은 내용의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 준비 중이다.
진료실내 성추행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보통 병원을 찾은 성인 여성 10명 중 1명 정도는 성적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경험한다고 한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로 작성한 ‘진료과정 성희롱 예방기준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의료기관을 이용한 성인(19~59세) 여성 1000명 중 118명이 성적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희롱 유형으로는 ‘프라이버시가 보호되지 않는 공간에서 진찰 또는 검사를 위해 옷을 벗거나 갈아입은 것’이 46건으로 가장 많았고 의료인이 외모나 신체 등에 대해 성적인 표현을 했다(30건), 진료와 관계없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상태에서 성생활이나 성경험을 물었다(25건), 진료와 관계없이 성적으로 신체를 만지거나 접촉했다(23건), 성생활이나 성적 취향에 대한 불필요한 언급을 했다(23건) 등이 뒤를 이었다.
이밖에 ‘의사가 청진기 진찰 중 사전동의 없이 옷과 브래지어를 들고 가슴에 청진기를 갖다 댔다’,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가슴을 만졌다’, ‘한의원에서 진맥을 하면서 속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등 수치심을 느낀 사례는 다양하다.
특히 산부인과의 경우 진료 특성상 의사가 환자한테 성관계 여부를 묻는 과정에서 성추행으로 오인받는 경우가 많다.
또 진료 부위가 민감한 부위이다보니 트러블이 잦을 수밖에 없다. 하혈이나 통증으로 내원한 환자는 복부나 질의 초음파검사를 통해 자궁 상태를 살펴야 한다. 질초음파검사를 하려면 질경이라는 기구를 질 내부에 삽입해야 하는데, 미혼이거나 성경험이 없는 여성은 이런 검사 방식에 불쾌함을 느끼기 쉽다.
진료실내 성추행 논란에 의사들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한 내과 개원의는 “신체변화 등 증상에 대해 말하고 신체적 접촉이 이뤄지는 진료행위와 성추행의 경계가 모호한 게 사실”이라며 “환자들이 불쾌한 경험으로 꼽은 청진기의 경우 옷 위로 대고 청음을 하면 잡음이 많이 들려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 “여성 환자의 경우 웃옷을 들어올리는 게 부끄러울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양해를 구하긴 하지만 의사로서도 난감한 것은 마찬가지”라며 “일부에서는 신체 앞쪽이 아닌 등쪽으로 청진기를 대면 안되냐는 말이 있는데 등쪽으로는 몸 상태를 제대로 체크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한 의사단체는 환자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받느니 차라리 환자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3m 청진기’를 사용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미국 등에서는 이런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진료 시 일어날 수 있는 신체적 접촉 행위에 대해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게 ‘샤프롱’(Chaperone)제도다. 이 제도는 진료실이나 검사실에서 여성이나 미성년 환자, 정신지체 환자 등을 진료할 때 가족·보호자·간호사 등을 함께 있게 해 환자를 안심시키고 진료 중 발생할 수 있는 성범죄 등의 행위를 방지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즉 신체접촉이 불가피할 경우 간호사 등이 동반한 상태에서 진료가 이뤄진다.
의료인과 환자 외 제3자가 동행해 혹시나 있을 환자의 피해를 방지하고, 거짓 고발을 당할 수 있는 의료진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간 불신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최적의 진료는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 제도는 불신을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다. 한 개원의는 “도입 취지는 100% 이해하지만 제대로 시행될지 실효성에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라며 “손은 물론 청진기조차 환자 몸에 댈 수 없다면 방어진료를 할 수밖에 없고 이는 명맥한 진료방해 행위”라고 불만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