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MERS) 사태로 보건의료 전문인력의 양성이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지만 갈길은 멀기만 하다. 우수 의료인력 양성에 걸림돌이 되는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과 의대의 불필요한 공존, 필수 진료과 붕괴, 과학영재들의 무분별한 의대 집중, 과도하게 비싼 등록금 등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016년 의대 수시전형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의대 지원자들의 과도한 서열의식도 문제로 지적됐다. 아직 20살도 채 안된 의대 지원자들이 ‘명문대’ 또는 ‘지잡대’를 운운하며 편을 가르는 모습은 같은 학교 출신끼리만 뭉쳐 단합하지 못하는 의료계 전체의 우울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이상 좋은 학교와 덜 좋은 학교로 구분되는 것은 당연하며 실제로 전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학교의 서열화는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은 다른 학교 출신을 대놓고 배척하거나 승진에서 제외하는 불합리한 행태가 유독 심하다.
의대 서열에서 가장 최상위층을 차지하는 곳은 서울대와 연세대다. 전통적인 명문대인 데다 의사 선배들이 대학병원은 물론 학회나 개원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커리어를 쌓기 좋은 편이다.
가톨릭대는 한 때 서울대·연세대에 이어 넘버3의 위치를 차지했지만 최근 들어 대기업의 막강한 자금력과 국내 최대 병원인 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 덕분에 인기가 치솟은 울산대와 성균관대에 밀리는 분위기다.
고려대 의대는 SKY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의대에 관한 한 서울대와 연세대에 비해 인기가 많이 떨어지지만 최근 안암병원과 구로병원이 모두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고 부속 병원에서 모교 출신의 성장이 빠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험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앞서 예로 든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울산대, 가톨릭대, 고려대 등은 이른바 ‘명문대 의대’로 꼽힌다. 의대 진학을 꿈꾸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최소한 이들 학교를 나와야 대외적으로 인정받고 개원해도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한 의대생은 “예전처럼 무조건 의사라고 해서 존경받거나 성공을 보장받던 시기는 지났다”며 “몇몇 후배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유력 의대에 합격했는데도 명문대 의대를 가기 위해 재수·삼수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가장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게 한양대, 경희대, 아주대, 중앙대, 이화여대 의대다. 서울 및 수도권에 위치해 있다는 점 외에는 의대 지망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요소가 없다. 그나마 중앙대는 두산그룹의 재정적 지원이 뒷받침되지만 나머지 의대들은 딱히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한양대는 학교가 병원에 거의 투자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갈수록 인기가 하락하는 모양새다.
오히려 이들 병원보다 ‘삼룡 의대’ 또는 ‘마이너 의대 최강자’로 불리는 순천향대, 인제대, 한림대 의대를 선호하는 의대 입시생이 많다. 산하 부속병원이 많아 이른 바 TO(Table of Organization, 정원)가 잘 나고, 인지도가 높으며, 내부적으로 결속이 튼튼해 경력을 쌓기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 출신끼리 똘똘 뭉치는 현 의료계 상황은 의대 지망생들이 학벌에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명문대 출신 의사는 대학병원을 나가 병원을 차리더라도 출신 의대 부속병원과 진료협약을 체결하거나 선후배를 스카웃하기가 수월해 다른 병원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쉽다”며 “전국적으로 여러 곳의 의대와 대학병원들이 있고 의사들의 실력도 점차 평준화되는 추세지만 여전히 서울대와 연세대 출신이 인사발령시 유리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통적인 명문인 서울대, 연세대, 가톨릭대, 고려대 등은 산하 병원장으로 거의 모교 졸업자를 임명하고 나머지 병원들은 외부에서 영입하는데 서울대와 연세대 출신을 특히 선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비효율적인 국내 입시제도와 학벌주의에 환멸을 느낀 일부 학생과 부모는 ‘의사들의 천국’으로 알려진 미국으로의 유학을 고려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생 및 전문의 선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개인의 성적이 아닌 신분, 즉 미국 국적 혹은 영주권 보유 여부이기 때문이다.
미국 의대의 교육시스템은 국내와 달리 전문대학원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의대생은 학부에서 4년, 전문 메디컬스쿨에서 4년의 교육과정을 거친다.
유학생도 미국 의대에 지원은 할 수 있지만 입학허가를 받는 경우는 3%에도 못 미친다. 미국의과대협회(AAMC)에 따르면 2013년 미국 의대 입학생 1만9517명 중 외국인 학생은 183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일부 주립대나 사립대는 유학생 선발 자체를 아예 고려하지 않고 있다.
미국내 130여개 의대 중 각종 평가 1위를 기록 중인 하버드대 의대의 경우 2013년 463명의 외국인 유학생이 지원했지만 8명만이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2위인 존스홉킨스대는 379명 중 3명, 3위인 UCSF(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 의대는 202명 중 단 한 명만이 입학허가를 받았다.
의대와 의전원의 어색한 동거관계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식 메디컬스쿨을 표방한 의전원은 1990년대 중반부터 도입을 위한 논의가 시작돼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 첫 신입생을 받았다. 2015년 기준 가천대, 가톨릭대(병행), 강원대, 건국대, 경북대, 경상대, 경희대, 동국대(병행), 부산대, 이화여대, 인하대, 전북대, 제주대, 조선대, 충남대, 차의과학대 등 16개 학교가 의전원을 운영하고 있다.
의전원은 의예과에서 본과로 이어지는 ‘2+4학제’의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의사양성 시스템을 개편해 다양한 전공을 거친 학생이 의사의 길을 걷게 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제도를 함께 시행해 인문계는 법대, 자연계는 의대를 향한 지나친 입시 경쟁과 의대 서열화를 해소하려는 목적도 작용했다.
하지만 4년간 등록금이 1억원에 달해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특히 서울대 연세대 등 기득권 대학들은 우수 학생의 이탈을 염려해 의전원 도입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의대 시스템은 젊고 특출한 인재를 모을 수 있는 반면 의전원은 나이가 더 들고 에너지가 떨어지는 학생들이 모인다는 게 기득권 대학의 시각이다. 교육 내용은 별 차이가 없는데도 의대 출신은 학사, 의전원 출신은 석사 학위를 받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점도 지적 사항이다.
교육기간이 과도하게 길어지는 것도 문제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5~6년의 교육과정을 밟으면 의사로 나설 수 있지만 의학전문대학원에서는 기간이 2년 정도 늘어난다. 이 때문에 수련의 및 전공의의 연령대가 너무 높아지고 의전원 입시 경쟁으로 학부 과정이 파행을 겪는 일도 부지기수다.
한 의대 관계자는 “고3의 입시 경쟁은 완화될 지 모르지만 오히려 대학교육은 황폐화될 것”이라며 “늘어난 교육기간과 높은 등록금은 빈곤층에게 의대 진입장벽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