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진료수가 협상 시기가 되면 의료계 내외부적으로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보험자(국민건강보험공단), 가입자(보험 가입자), 공급자(병·의원) 등 3자간 지분 싸움에서 공급자 측은 보험자, 즉 건강보험공단이 지나치게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조건을 내세운다며 불만을 터뜨려왔다.
여전히 ‘관(官)’, 즉 정부가 민간에 비해 절대 우위에 있는 국내 사정상 진료비 수가 협상에서도 건보공단 등 정부 측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이는 정보 공유의 부재로 이어지고 올해에도 공급자 협상단은 추가재정 소요액(밴딩) 등 필수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채 협상테이블로 나가야 했다.
건보공단과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2일 장기협상 끝에 2016년 의원급 의료기관의 수가를 3% 인상키로 합의했다. 대한약사회는 3.1%의 수가협상 인상을 약속받아 최고 인상률을 기록했다. 이밖에 대한한의사협회는 2.2%, 대한간호사협회(조산원)는 3.2%씩 수가를 인상키로 했다.
반면 대한병원협회와 대한치과의사협회는 건보공단과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협상이 결렬됐다. 건보공단은 병협엔 1.4%, 치협에는 1.9% 최종 수가 인상률을 제시했지만, 양 측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건정심에서 최종 인상률을 조율 중이며 최종 안은 오는 25일 결정된다.
수가 협상은 일단락됐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협상이었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공급자단체들은 수가 협상 전 추가재정소요액(밴딩) 규모가 아예 공개되지 않아 협상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건보공단은 매년 수가협상에서 재정운영위원회를 통해 추가재정소요을 정하고 있다. 이번 수가협상 시 최종 공개된 총 밴딩 규모는 6503억원으로 지난해의 6718억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중 의협은 2459억원, 한의협 421억원, 약사회는 753억원, 조산원 5000만원의 추가소요 재정을 할당받았다.
문제는 수가 협상 직전까지 공급자 측은 밴딩 규모를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총 계약 규모도 모른 채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러 나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경우 합리적인 협상안을 준비할 수 없게 되고, 협상 과정에서 수동적으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공급자 단체 관계자는 “밴딩폭을 공개하지 않은 채 인상률에 대해 논의하다보니, 얼마만큼의 재정이 공급자 단체로 흘러올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며 “수가 협상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한 추가재정액을 공급자 단체들이 쪼개서 나눠 먹는 양상을 띄면서 치졸한 밥그릇 챙기기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건보공단은 또 ‘진료비 목표관리제’라는 부대조건을 내놔 공급자 측을 당황케 했다. 이 제도는 진료비 가격과 진료량을 통합해 총량적인 개념의 수가계약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가계약을 체결할 때 보험자와 공급자가 가격과 양을 고려한 뒤 연도 목표비를 합의하고, 이를 기준으로 내후년 환산지수를 결정한다. 이 방식을 도입하면 다음연도 실제 진료비가 목표진료비보다 높으면(환자수가 일정 수를 넘어 지나치게 늘어나면) 수가를 인하하고, 낮으면 수가를 인상해야 한다. 하지만 내후년도 목표 진료비를 2년 앞서 설정하는 게 현실성이 떨어지고, 환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수가가 떨어지기 때문에 병·의원들은 이 제도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건보공단이 부대조건으로 이 제도를 내걸자 공급자 측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의협 관계자는 “건보공단 측이 초반부터 작년에 제시한 내용과 흡사한 ‘진료량 연동 환산지수 조정(진료비 목표관리제)’이라는 부속합의사항을 제안하고, 지속적으로 부대조건 수용을 요구해 수많은 어려움과 압박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올해 협상에서는 이 부대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지난해와 올해에도 그랬듯이 건보공단은 새로운 부대조건을 제시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부대조건을 거부하면 그만큼 수가 결정에서 페널티가 부과될 확률이 높다. 부대조건 승낙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지만 여기에 들어가는 기회비용이 더 크다는 게 의료계 대부분의 시각이다.
평의사회는 “의협은 왜곡된 건정심을 탈퇴해 일방적 건정심 구조와 강제 수가결정구조인 건강보험법 4조, 45조에 대한 근본적 투쟁에 나서야 한다”며 “공단이 13조의 흑자와 의료기관들의 생존 위기를 도외시하고 진료비 목표관리제를 들고 나와 11만 의사들을 우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건보재정의 누적 흑자가 13조원에 달하는 상황에서 건보공단이 지나치게 ‘짜게’ 굴었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번 수가협상시 최종 공개된 총 밴딩 규모 6503억원으로 지난해보다 오히려 줄었다. 수가협상은 의협, 병협, 치협, 한의협 등 가입자단체가 총 밴딩액 중 얼마만큼을 가져가냐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즉 할당된 밴딩 규모가 적으면 그만큼 각 공급자가 가져갈 수 있는 파이의 양도 줄어든다.
수가협상 당시 공급차 단체는 “건보재정 흑자는 일선 병·의원의 희생에 따른 결과”라며 추가적인 수가인상을 요구했지만 건보공단은 지불준비금 적립, 보장성강화 계획 추진 등을 이유로 난색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협은 이번 수가협상 결과에 대해 “회원들이 피부로 느끼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수가 인상분 총 재정이 작년보다 적게 책정된 상황에서 계약을 결렬하고 건정심으로 넘어가면 더 큰 손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며 “조금이라도 의원 경영에 보탬이 된다면 소소한 수치라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부득이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임익강 대한개원의협의회 보험이사는 “최근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경영상황이 힘들어져 직원을 줄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적정 수가 인상은 단순히 의사의 수익을 늘리는 게 아니라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큰 시각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가입자단체는 수가인상 부분에서 공급자 측과 대척점에 서 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으로 이뤄진 수가협상 가입자단체는 “건강보험재정 흑자는 정부나 의료계의 재정절감 노력이 아닌,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국민의 의료 이용이 감소한 결과물”이라며 “흑자 재정을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사용해 일반 국민이 더 안정적으로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입차단체는 또 진료 수가를 오히려 인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단체 관계자는 “수가계약 이후에도 상대가치 점수 조정을 통해 진료비가 일상적으로 인상되고, 이에 대한 통제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퍼주기식 수가 인상은 어불성설”이라며 “특히 대형병원의 진료량과 수가를 통제하지 않고서는 건강보험 재정지출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동안 진료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인상됐던 수가를 인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밴딩 폭을 미리 정해서 제한적으로 수가협상을 진행하는 부분도 문제로 언급됐다. 공급자단체 관계자는 “현행법에는 밴딩 폭을 미리 정한 뒤 협상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며 “그런데도 우리는 늘상 재정위가 정한 밴딩을 가지고 각 단체가 얼마나 많은 파이를 가져올 수 있을지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보공단과 공급자·가입자 단체가 협상을 하면서 접점을 찾고 밴딩을 결정한 후에 수가 인상을 확정하는 안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부족한 협상시간도 개선 사항으로 꼽혔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협상 기한을 2주만 주고서 결정하라는 것도 문제”라며 “2주 동안 공급자와 가입자의 의견을 모으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관이 협상을 주도하고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공급자 단체에는 상(보험수가 인상)을 주고, 대드는 공급자 단체에겐 벌(페널티)을 주는 관행이 개선돼야 자발적인 조정과 협상다운 협상이 이뤄질 것이라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