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재단을 설립해 국내 의학발전과 인재양성에 앞장 서왔던 박영하 박사가 7일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그는 소규모 병원을 굴지의 의료 및 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킨 보건의료계의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또 개인재산인 병원을 모두 법인화로 전환시키는 등 의료 공익화에 앞장서왔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중령으로 예편 후 1956년 서울 을지로에 을지재단에 모태가 되는 ‘박영하 산부인과 병원’을 개원했다. 이어 1981년 대전을지병원, 1995년 을지병원, 2001년 금산을지병원, 2009년 강남을지병원을 차례로 개원해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져왔다.
박 박사는 선친 박봉조 선생의 유업에 따라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1983년 학교법인 을지학원을 설립했다. 국내 최초 보건계열 중심 대학인 서울보건대학(현재 을지대학교 성남캠퍼스)을 인수한 그는 1996년 대전 용두동에 을지의과대학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보건의료의 미래를 위한 의료계 후학양성을 위한 터전을 닦았다.
대전을지병원을 학교법인의 부속병원으로 무상 기부하는 동시에 10년간 540억원을 쏟아 부어 대학발전에 헌신했다. 1999년에는 학교법인 을지학원에 60억원, 의료법인 을지병원에 40억원 등 개인 재산 총 100억원을 출연한 것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두 대학은 2007년 을지대학교로 통합돼 국내 최고의 보건의료 특성화 종합대학으로 거듭났다. 현재 을지대학교는 의·생명공학 중심의 대전캠퍼스와 보건·의료 중심의 성남캠퍼스로 구성돼 인재양성과 학문연구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환자중심 경영을 철학이자 원칙으로 삼아 직원들에게 항상 친절을 강조했다. 이같은 경영철학은 감동적인 사연들을 낳았다.
1998년 8월 대홍수로 서울 북부·의정부에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무료진료소’를 개설해 수재민들의 건강을 돌봤다. 또 박치기로 유명한 프로레슬러 고 김일 선수가 일본에서 홀로 투병 중인 것을 알고 한국으로 이송해 2006년 10월 그가 임종할 때까지 무료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재일교포에 대한 관심도 높아 재일한국민단과 의료지원협정계약을 체결해 한국을 방문하는 제일교포 30만명에게 의료서비스와 편의를 제공했다.
의료의 공익화는 고인이 평생 강조해 온 삶의 원칙이었다. 이는 단순한 병원 발전이나 생존을 위한 운영에서 벗어나 국가와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병원의 법인화 전환, 대전을지병원 학교법인 기부, 개인재산 법인 기부 등으로 일생동안 의료 공익화를 실천했다.
또 1997년 2월에는 10억원의 개인재산을 들여 범석학술장학재단을 설립해 후학 양성 및 불우이웃 돕기에 앞장섰다. 이 재단은 현재 매년 5억원에 달하는 기금을 장학금과 학술연구사업에 지원하며 국내 의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같은 노력과 공헌을 인정받아 박 박사는 1998년 6월 사단법인 한국상록회로부터 ‘인간 상록수’에 선정됐다. 이어 1999년 보건의 날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2008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박준영 을지대 총장(아들), 박준숙 범석학술장학재단 이사장(딸), 홍성희 을지학원 이사(며느리), 최원식 을지대 의대 교수(사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