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명쾌한 것은 어떤 것이 부재하거나 평균보다 너무 부족하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너무 가난해도, 성취에만 빠져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간과해도, 나와 가족만 생각하고 사회 전체의 조화와 질서를 외면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새해 각 언론에서 신년특집 형식으로 내놓은 ‘대한민국 행복비결’과 관련, 한 기사를 보니 우리 국민이 불행감을 느끼는 주된 요인은 경제적 불안 때문이요, 해결책은 경제살리기란다. 또 다른 시리즈 기사를 보니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자신만의 행복 공식을 찾아내고 남이 뭐라든 신경쓰지 않고 즐겁게 살아간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하지만 이들 기사의 주인공들은 주로 예술인·자유인이어서 직장과 가정에서 들들 볶이고 사는 보통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트랙이기에 그럴수도 있겠구나하면서도 왈칵 공감이 오지 않았다.
모 경제신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56.5%가 경제적 여건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때마침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7일 대통령직인수위 첫 회의에서 국민안전과 경제부흥을 국정운영의 두 가지 중심축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는 가까스로 넘었으나, 선진국의 3만~4만달러 수준에는 못 미치고 글로벌 경기침체나 경제양극화를 감안하면 단기간안에 이를 달성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경제가 성장해야 그 온기가 경제적 하위계층에도 전해져(이른 바, 낙수효과) 행복이 증진될 수 있다는 것은 마땅한 얘기다. 이를 통해 중산층이 두터워져야 한다. 아직도 우리경제는 산업구조 고도화, 서비스업 활성화, 문화·콘텐츠 육성 등을 통해 더 성장할 여지가 있고 다시 한번 ‘한강의 기적’을 이뤄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으면 성장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약해진다는 연구결과가 다수 나와 있다. KBS 개그콘서트 ‘어르신’ 코너에 나오는 김대희의 말처럼 “돈 있으면 무하겠노, ~~ 소고기 사묵겠지”라는 푸념처럼 돈이 절대적 빈곤의 사람을 행복한 세상으로 건져 올려주는 주요 요소이긴 하나 마침표를 찍어주거나 완성도를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스트레스에 절어 있다. 어린아이부터 직장인, 전업주부, 영세사업자 및 중소기업인, 노인까지 행복하지가 않다. 학업스트레스, 학교폭력, 취업난, 직무스트레스, 실직 및 승진누락에 대한 불안감, 육아·가사노동부담, 도산위험, 가계부채, 노후불안 등이 그 요인이다. 이 모든 것에서 경제적 요인이 배제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먹고 살만하니 행복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돈만 쫓지 말고 산업화과정에서 잃어버리는 한국인의 내면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예컨대 러시 아워, 차량이 얽힌 사거리에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운전자가 울려대는 경적소리를 들어야 하는 한국인이 불행하다. 차창밖에 있는 자는 그저 사람이 아니다. 대중음식점에서 시끄럽게 뛰어노는 아이를 제지하려면 ‘귀한 우리아이에게 왜 나무라느냐’고 신세대 엄마 아빠들과 말싸움이 붙으니 이 또한 인간이 어우러져 사는 행복과 거리가 멀다. 부잣집 애완견이 빈곤층 사람보다 대접받고 사니 이 또한 인본주의적 이상향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먼저다’라고 낙선한 문재인 전 대통령 후보가 외쳤을까.
지금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안철수 전 무소속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지저분한 정쟁이 혐오스러워 ‘이 당, 저 당 다 싫다’며 그에게 공감했다. 하지만 이에 더해 한국사회가 직면한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감을 안 후보가 마치 구세주처럼 해결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그를 추종하지 않았을까. 행복과 안정, 동시대인으로서 유대감 복원, 인간으로서 품위있는 삶을 염원하며 그를 쳐다보지 않았을까.
다들 통장에 돈을 쌓느라 열중이다. 보험 드느라 허리띠를 졸라맨다. 아버지는 뼈 빠지게 벌어 아내와 자식을 풍족하게 만들려 애쓴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다. 부동산 부자는 빌딩·아파트값 하락에 과연 꽃시절이 다시 올지 좌불안석이다.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훨씬 덜 불안할 것 같아서 다들 재테크에 열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다. 원초적 공허감도 메워지지 않는다. 돈, 돈 할수록 마음이 황폐해져가고 행복은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가진 사람을 질시하는 시선도 온당치 않다. 나의 가난을 과도하게 사회책임으로 돌리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다. 가난한 평등이나 성취의 포기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가끔 행복이란 생각을 하면 1970년대 중반에 다른 집보다 약3년 먼저 텔레비전을 봤던 것, 또래 국민학생들보다 조금 나은 운동화를 신었던 것, 어쩌다 운 좋게 김치찌개의 돼지고기를 누이들보다 더 많이 건져 먹던 것,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며 으스대던 것, 할머니가 곶감을 몰래 숨겨놨다 사촌동생 몰래 줬던 것 등이 떠오른다. 유치하게도 행복은 소소한 것이며, 남보다 자기가 조금 형편이 낫다고 느낄 때 극대화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행복감도 1970년대말과 1980년대 초반에 걸쳐 경제부흥이 되고 다들 먹고 살만해지면서 무뎌졌던 것 같다. 그 때는 가난해도 더 나은 내일이 있다고 믿었기에 다들 열심히 살았고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상당한 산업화를 이룬 지금에는 이런 행복감이 다시 찾아올 리 없다.
필자에게 요즘 행복의 관건이란 “언제쯤 비교적 성공했다는 자부심으로 고향으로 귀거래사할 수 있을까”이다. 또 최고의 불행이란 다시 돌아온다고 효도할 것 같지 않지만 섭섭하게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의 부재다. 맹자가 말한 환과고독(鰥寡孤獨: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 늙고 남편이 없는 사람, 어리고 어버이가 없는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 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하는 사람은 별로 행복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다들 돈, 돈하면서 이런 원초적 불행감에 대해서는 외면하는지 궁금하다. 우리사회가 솔직하지 않은 것인가. 의식이 너무 서구화됐나. 그게 대세니까 따라야만 하는가. 돈만 있으면 이런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가. 너무 이런 문제에 무관심하다. 효와 공동체의식의 부활, 결혼 및 출산 장려, 이혼에 따른 가정해체, 인간다운 삶의 모델 만들기, 체면치레와 허영심 버리기, 과욕의 절제, 경제력 뿐만 아니라 의식도 선진국인 국가 정체성 구축 등이 필요한 시기다.
행복하려면 친구가 있어야 한다. 내 창피한 것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한 두명의 절친, 부르면 언제나 달려와 술을 같이 먹어줄 예닐곱명의 부담없는 말벗, 각계 각분야에서 취미생활을 같이 하거나 삶의 중대한 조언을 해줄 지인 10여명은 있어야 한다. 이런 친구를 우리는 가졌는가. 가정이 있어야 한다. 지친 몸과 마음을 편히 뉘울 수 있는, 가난해도 마음이 부자인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가정이 필요하다. 거주 형태로 원룸이 많아지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행복하려면 삶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최소한 주위사람에 도움이 되고, 인류발전에 한 줌의 흙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건전한 목표를 가져야 하고, 나의 부재를 슬퍼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행복하려면 당장 지금이 즐거워야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만 그 고생이 장맛비처럼 언제 그칠지 모른다면, 죽을 때까지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건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당장 스트레스를 풀어 줄 취미생활을 찾고, 운동장을 달린다면 즐거운 삶이 전개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