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공화국’이라는 별명답게 한국인의 커피 사랑은 유별나다. 2018년 기준 국내 20세 이상 인구 1인당 연간 커피소비량은 약 353잔으로 전세계 평균인 132잔의 3배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2020년 기준으로 1.8kg으로 세계 57위로 중간 정도지만 카페 연간 매출액 기준으로는 미국, 중국에 이어 43억 달러로 일본보다 큰 규모이다. 이렇게 커피를 즐기는 문화가 정착되면서 커피에 대한 예찬론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선 대표적인 효과로 단기 기억을 증진시키는 각성작용이 잘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우울증 감소, 치매 예방, 담석증, 간암을 포함한 항암 효과, 심혈관 질환 감소, 당뇨병 예방 및 자궁내막염 감소 등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커피 애호가들을 흐뭇하게 하고 있다. 이는 항산화 물질인 카페인과 폴리페놀과 같은 유익한 성분이 작용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엔 커피 속 항산화성분이 각종 질환 위험을 줄이고 노화를 늦춘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돼 인기가 더욱 높아지는 추세다. 하지만 커피 원료인 원두를 볶는 로스팅(Roasting) 과정에서 항산화성분이 사라지거나 변형돼 몸에 해로울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로스팅하기 전 커피 원두(생두)는 회녹색을 띠고 약간 비릿한 냄새가 난다. 로스팅을 시작하면 점차 갈색을 띠고 커피 특유의 향이 올라온다. 보통 커피 원두를 200~230도에서 30분간 볶는데, 고온에서 더 오래 볶을수록 원두 색이 옅은 갈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국내에선 로스팅 정도에 따라 커피 원두를 총 8단계로 구분한다. 원두 색이 옅은 순으로 △라이트(밝고 연한 황갈색) △시나몬(연한 황갈색) △미디엄(밤색) △하이(연한 갈색) △시티(갈색) △풀시티(진한 갈색) △프렌치(흑갈색) △이탈리안(흑색) 순이다.
오래 볶을수록 신맛에서 쓴맛으로 바뀐다. 즉 원두가 밝고 연한 황갈색일수록 맛이 시고, 검은색일수록 쓰다.
한국인은 깊고 구수한 맛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과거 조상들이 식후에 누룽지나 숭늉을 먹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로 인해 커피도 신맛보다는 쓴맛이 강할수록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원두를 볶아 맛과 향이 진할수록 건강엔 해로울 가능성이 높다.
커피에 함유된 항산화성분 중 대표적인 게 폴리페놀 화합물의 일종인 클로로겐산(chlorogenic acid, CGA)이다. 클로로겐산은 비타민C보다 강력한 항산화물질로 저밀도지단백(LDL) 콜레스테롤를 감소시켜 심혈관질환 위험을 낮추고, 암 촉진 단백질의 결합을 방해해 암세포 성장을 억제하며, 뇌와 신체 노화를 막는 역할을 한다. 또 인슐린저항성(인슐린이 정상적으로 분비돼도 수용체에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혈당저하 효능이 떨어진 상태)을 개선해 당뇨병을 예방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클로로겐산 같은 항산화물질은 고열에 취약하기 때문에 구수하고 깊은 맛과 향을 내기 위한 로스팅 과정에서 파괴돼 사라지거나, 변형될 수 있다. 장문정 국민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가장 짙게 볶은 원두와 가장 옅게 볶은 원두의 항산화물질 양 차이가 20배 가까이 나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보통 로스팅 과정에서 클로로겐산의 80~90%가 소실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장시간의 로스팅은 클로로겐산 외에 폴리페놀 계열 물질을 감소시켜 항산화기능과 항염증기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반면 커피 속 카페인 성분은 열에 강해 오래 로스팅해도 양이 줄거나 변형되지 않는다.
명승권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교수는 “클로로겐산은 철분 흡수를 방해해 빈혈인 젊은 여성은 커피 섭취를 줄이는 게 좋다” “체내 철분이 부족하면 신진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쉽게 피로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신경이 예민해질 수 있어 수험생도 커피 섭취를 줄이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성분은 위장을 자극할 수 있어 평소 소화장애를 자주 겪는 사람은 커피 섭취를 자제하고, 공복에 커피를 마시는 습관도 고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원두를 로스팅하는 과정에서 유해물질이 생성될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다. 커피를 오래 볶을수록 맛과 향이 깊어지는 것은 ‘마이야르 반응’과 연관된다. 프랑스 화학자 루이 카미유 마이야르(Louis-Camille Maillard)가 발견한 이 현상은 포도당, 과당, 맥아당 등이 단백질의 구성 성분인 아미노산에 달라붙어 화학적으로 반응하면서 음식물 색이 갈변하고 구수한 향이 더해지는 현상이다.
모든 동·식물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으로 구성돼 사실상 모든 음식에서 마이야르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고온으로 조리할 때 마이야르 반응이 잘 일어난다. 예컨대 밀가루 반죽을 오븐에 넣고 구우면 노릇노릇 구워지면서 부드럽고 구수한 향을 내는 빵이 완성된다. 석쇠에 올려놓은 돼지고기가 갈색으로 익으면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것, 밥솥 밑바닥에 붙은 쌀이 바싹 구워져 누룽지가 되는 것도 마이야르 반응의 결과다.
하지만 마이야르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분자 중엔 몸에 해로운 것도 있다. 고기를 태우면 마이야르 반응을 통해 발암물질의 일종인 다환방향족탄화수소(PAH)가 생성될 수 있다. 최근엔 탄수화물 함량이 높은 식품을 100도 이상 고온으로 조리하면 같은 원리로 발암물질인 아크릴아미드(acrylic amid)가 나온다는 연구결과가 보고됐다.
아크릴아미드 성분은 커피 원두를 볶을 때에도 발생한다. 이로 인해 202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고등법원은 모든 커피 제품에 암 발병 위험성을 경고하는 문구를 표기토록 판결해 논란이 됐다. 결국 세계보건기구(WHO)가 “커피와 암 발병이 연관된다는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로스엔젤레스 법원도 입장을 선회했지만 커피의 유행성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식품안전의약처 권고안에 따르면 카페인 1일 섭취량은 성인 400㎎ 이하, 임산부 300㎎ 이하, 어린이는 체중 1㎏당 2.5㎎ 이하로 제한하는 게 바람직하다. 레귤러 사이즈(300㎖) 아메리카노 한 잔의 커피에는 평균 100~150㎎의 카페인이 들어 있다. 성인 기준 커피전문점에서 파는 아메리카노는 하루 3잔, 커피믹스는 하루 5잔 이상 마시면 하루 적정 카페인 섭취량을 초과한다. 이 이상 커피를 마시면 각성효과로 인해 숙면이 방해받거나, 땀·긴장감·메스꺼움·불안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평생 하루에 3잔 이상 커피를 마시면 뇌에서 수면호르몬인 멜라토닌을 분비하는 ‘솔방울샘(송과체, Pineal Gland)’의 부피가 감소해 노년기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도 보고됐다. 특히 다량의 카페인 섭취는 조심해야 한다. 현재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성인 하루 카페인 섭취 제한량은 400mg, 임산부는 300mg이다. 카페인 400mg은 250cc 아메리카노 3잔 정도에 해당하므로 주로 오전에 1, 2잔 정도의 커피를 마시는 것은 무방하지만 커피가 건강에 좋다는 생각으로 너무 많은 커피를 마시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