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모씨(57)는 편두통을 30년 간 앓았다. 편두통은 그냥 두통이 아니었다. 엄청난 강도의 통증이 한 달에 두 번씩 4~5일 간 이어졌다. 머리에 대못을 연달아 박아대는 듯한 극심한 통증 때문에 사회생활도, 일상도 마비되고 계속되는 구토로 아무것도 먹지도 못했다. 약도 듣지 않았다.
김씨는 “이 끔찍한 통증을 한 달에 열흘, 1년에 120일, 30년 간 3600일 겪었다”며 “난치성 편두통 때문에 직장생활도 제대로 못했고 딸에게 이 병을 물려주기까지 한 나는 가족들에게 죄인”이라고 했다.
누구나 두통을 경험한다. 흔한 경험이기 때문에 두통이 있으면 참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도 병으로 인식을 하지 않는다. ‘머리 좀 아픈 거 쯤이야…’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렇게 참다보면 난치병이 된다. 정확한 진단 없이 진통제만 사먹다가 두통이 낫지 않고 악화되는 경우도 많다. 두통은 우리의 일상을 흔드는, 그 자체로 ‘병’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인간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4대 질환으로 사지마비, 정신질환, 치매와 함께 두통을 꼽고 있다.
성인의 70~80%가 살면서 한 번쯤 경험하는 두통은 흔한 증상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다. 하지만 두통이 하루에 4시간 이상 지속되고, 이런 증상이 주 3회 이상 반복되면 치료가 필요한 두통이거나, 뇌졸중 등 뇌질환이 원인일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두통은 발생 원인과 상관없이 증상이 대부분 비슷한 데다 부정교합, 턱관절질환 등 다른 질환이 원인인 경우가 적잖아 전문 의료진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로 인해 의료기관에선 두통 환자 진료시 뇌질환을 의심하고 자기공명영상(MRI)을 촬영했다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과잉검사로 판정받아 진료비가 삭감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두통 중 가장 잘 알려진 편두통은 특별한 원인 없이 머리 한쪽이 쑤시듯 아픈 증상이 4시간 이상 지속된다. ‘머리에 심장이 달렸다’고 표현할 정도로 심장이 뛰듯 머리가 쿵쿵 울리면서 아프고, 심할 경우 속이 메스꺼워지는 위장 증상이 동반된다.
명칭과 달리 무조건 한쪽에서만 통증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편두통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뇌가 통증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세로토닌 등 뇌내 신경전달물질이 부족해 뇌혈관이 확장되거나, 칼시토닌 유전자 관련 펩타이드(CGRP) 분비가 활성화되면 편두통 발생 위험이 높아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편두통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개선되지만 뇌질환 등 기저질환이 원인일 수 있어 무턱대고 방치하기는 꺼림직하다. 만약 두통 증상이 나타나기 전 시각이상, 언어장애 등 특정한 ‘조짐’이 나타난다면 정밀검사를 받아 뇌질환 등 발생 여부를 체크해보는 게 좋다.
이론상 편두통은 전구증상, 조짐, 두통 및 동반증상, 해소, 후유증상 등 5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전구증상(premonitory symptom)은 두통 시작 2~48시간 전에 나타나며 피로감, 졸림, 무기력, 하품, 집중력저하, 목이 뻣뻣함, 감정의 예민, 식욕부진, 갈증, 음식에 대한 욕구 등이 발생한다. 전구증상이 사라진 뒤 조짐의 발현 여부에 따라 조짐편두통과 무조짐편두통으로 구분된다.
전체 편두통 환자의 80%는 5단계 중 조짐이 동반되지 않는 무조짐편두통이다. 나머지 20%에선 두통 시작 5~60분 전 조짐 증상이 나타난다. 편두통 조짐은 크게 시각조짐, 감각조짐, 언어조짐으로 구분된다. 셋 중 가장 흔한 것은 시각조짐으로 전체 조짐편두통 환자의 90%에서 나타난다.
눈 앞에 불빛이나 점이 깜빡거리거나, 까맣게 보이는 맹점이 점차 커지거나, 지그재그 형태의 번쩍거리는 선이 시야 중심에서 나타났다가 점차 좌우로 번지는 증상이 동반된다. 시각조짐 다음으로 흔한 감각조짐은 조짐편두통 환자의 30~40%에서 발생한다. 입 주변이나 팔·다리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고 점차 무감각해진다.
한쪽 팔과 입 주변에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약 50%다. 증상이 발생한 뒤 점차 넓은 부위로 퍼져나가는 게 특징이다. 따끔함 없이 무감각만 나타나는 환자도 있다. 조짐편두통 환자의 10~20%에서 나타나는 언어조짐은 단어를 착각하는 착어증, 언어 이해 및 구사력이 떨어지는 실어증 등이 주요 증상이다. 일부 환자는 혀와 입 주변의 감각이상으로 발음곤란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밖에 드문 확률로 팔·다리 힘이 빠져 축 늘어지는 운동조짐이 나타날 수 있다.
박정욱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신경과 교수는 “조짐편두통이 무조짐편두통보다 특별히 더 위험하다는 의학적 근거는 아직 없다”며 “다만 뇌신경이나 뇌혈관에 이상이 생길 경우 시각·감각·언어조짐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므로 뇌졸중 같은 뇌질환과 조짐편두통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조짐편두통과 다른 기저질환을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박 교수는 “가장 흔한 시각조짐 없이 감각조짐만 나타날 경우 편두통보다는 경련이나 간질 등 질환을 의심해볼 수 있다”며 “조짐편두통을 자주 겪던 환자가 나이를 먹은 뒤 두통은 사라지고 조짐 증상만 남았다면 뇌졸중 여부를 체크해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이어 “40세 이후 갑자기 조짐 증상이 나타나거나, 조짐 지속시간이 지나치게 짧거나 또는 긴 경우에도 정밀진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흔히 편두통 증상 완화에 사용하는 아스피린, 아세트아미노펜 등 진통제는 편두통 증상이 발생한 직후나 조짐이 있을 때 바로 복용해야 효과가 좋다. 단 무분별한 진통제 오·남용은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통제를 장기간 복용하면 신경계가 과도하게 흥분해 약물과용 두통이 생길 수 있다.
2018년 대한두통학회 조사결과 만성 편두통 환자의 73% 이상이 두통치료제를 과다 복용하고, 전세계 인구의 1~2%가 이로 인한 약물과용 두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편두통 치료는 급성기치료와 예방치료로 나뉜다. 급성기 편두통엔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이미그란(성분명 수마트립탄, sumatriptan)’과 ‘나라믹정(성분명 나라트립탄, naratriptan)’, 아스트라제네카의 ‘졸믹정(성분명 졸미트립탄, zolmitriptan)’ 등 트립탄 계열 약물이 주로 사용된다.
이들 약물은 뇌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수용체에 작용해 두통을 완화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일부 환자에서 흉부 압박감, 저림, 불편감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최근엔 평소 소량의 약을 꾸준히 복용해 두통 횟수를 줄이는 예방치료가 강조된다. 대한두통학회는 편두통 환자 중 생활습관 개선과 급성기 치료를 적절하게 시행했음에도 편두통이 개선되지 않거나, 주 1회 이상 잦은 편두통이 나타나는 환자에게 예방치료를 권고하고 있다.
예방치료엔 편두통을 유발하는 칼시토닌 유전자 관련 펩타이드(CGRP)를 표적으로 하는 단일클론 항체약물이 사용된다. 현재 출시된 편두통 예방치료용 약제는 암젠·노바티스의 ‘에이모빅(성분명 에레뉴맙, Erenumab)’, 릴리의 ‘엠갈리티(성분명 갈카네주맙, galcanezumab)’, 테바의 ‘아조비(성분명 프레마네주맙, Fremanezumab) 등이다.
이들 약물은 삼차신경에 의해 방출돼 편두통을 유발하는 CGRP를 차단하거나 감소시켜 증상을 완화한다. 트립판 계열 제제에 비해 장기적인 심혈관계 부작용 위험 등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두통학회는 프로프라놀롤(propranolol), 토피라메이트(topiramate), 디발프로엑스나트륨(Divalproex Sodium) 등 성분 제제도 편두통 예방치료용 약물로 권고하고 있다.
예방치료는 3개월 이상 지속 후 용량을 줄이거나 중단할 수 있다. 유지 기간은 두통 빈도·강도, 일상생활 지장 정도 등 환자의 개별 상태에 따라 판단한다. 최근엔 만성 편두통 치료에 보톡스(보툴리눔톡신)를 활용하는 의료기관도 적잖다. 보톡스를 이마부터 어깨까지 삼차신경이 분포한 31개 지점에 주사해 CGRP를 차단하는 원리다.
한 번 시술하면 두통 완화 효과가 최대 3개월 지속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직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라 시술 비용이 1회 15만~40만원으로 비싼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