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코로나19에 확진돼 재택치료 중이던 임신부가 진통과 하혈이 시작됐지만 병상이 없어 헤매다 구급차에서 출산했다.
16군데 병원에서 '포화상태라 확진자 병상이 없다'면서 손사래를 쳤고, 출산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구급대원들이 소방의료팀으로부터 원격 지도 등을 받아 무사히 순산했다. 황급한 상황에서 소방의료팀이 약물 주사 등 신중을 기해 악기가 무사히 탄생했다.
소중한 생명을 잉태한 기쁨만큼 걱정도 태산인 게 임신이다. 임신 중에는 평소보다 섭취하는 음식, 생활습관 등 많은 부분에서 주의가 필요하지만 특히 약물 복용은 많은 걱정과 불안을 안겨준다. 대부분의 임부는 임신 중 어떤 약물이라도 복용하면 태아 기형이 유발될까봐 복용 자체를 금기시한다.
임산부가 흡수한 약물은 소량만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 전달되지만 약물이 모체를 통해 배설되기까지 태아에 머무는 시간은 길다. 태아에 미치는 위험성의 관건은 주로 임산부의 약물복용 시기다.
수정 후 2주, 또는 마지막 생리시작일로부터 계산한 임신 4주까지는 ‘all or none’ 원칙이 적용된다. 즉 이 시기에 약물로 인해 수정란이 피해를 입으면 유산이 일어나 임신 전체가 소실되지만, 유산되지 않고 임신이 지속된다면 약물로 인한 기형의 위험 없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모르고 약물을 복용한 많은 임산부들이 무조건 유산을 생각하거나 출산 전까지 고통받는 경우가 많다.
수정 후 3~8주는 태아의 기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로 심장과 중추신경계의 틀이 완성되므로 이 때 기형을 유발할 수 있는 약물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임신 초기감기·독감·폐렴으로 고열이 오면 태아가 고온에 노출돼 무뇌아 발생 빈도가 4~5배 증가한다.
천식이 악화되면 태아에게 저산소증을, 심한 입덧은 탈수증세와 전해질 불균형을 초래하므로 오히려 초기에 치료하는 게 나을 수 있다. 감기약으로 주로 쓰이는 항히스타민제, 해열진통제, 기침억제제(진해제) 등과 흡입형 천식치료제 등은 대체로 안전하므로 필요하면 의사의 조언에 따라 적절히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정열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임신 초기 임신 사실을 모르고 약을 복용한 경우라도 심각하게 우려할 필요가 없지만 특정 약물은 태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우선 약물에 노출된 임신부들은 전문의와 상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간혹 약은 태아에게 무조건 나쁘다 생각해 아파도 절대 약을 먹지 않고 견디는 임산부도 있다. 그러나 통증을 참는 것이 스트레스로 작용해 오히려 엄마와 태아 모두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참기 힘든 극심한 통증이 있거나 자주 통증이 발생한다면 임신 중에도 먹을 수 있는 약을 알아두거나 의사와 상의한 후 복용하는 게 좋다.
미국, 호주 등에서는 임산부가 막연히 고열이나 심한 통증을 참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강조하며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 성분의 해열진통제를 임산부가 전문가와 상담 후 복용할 수 있는 약물로 소개하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약물 분류 5가지 등급’에서도 아세트아미노펜은 임산부 통증에 널리 사용 가능한 ‘B등급’으로 분류되고 있다.
국내에서 임부 약물 복용 시 많이 참고하는 FDA의 임부 카테고리(Pregnancy Categories)는 1979년 도입 이후 가장 널리 통용돼 온 임부 안전성 정보다. 임상시험 및 동물실험 등 이용가능한 자료에 기초해 1983년 이후 미국에서 허가된 모든 약물이 태아에 미치는 영향을 5개의 카테고리(A, B, C, D, X) 중 하나로 분류한 것이다.
A등급은 태아에 대한 통제된 연구결과 위험성이 없음을 뜻하고, 뒤로 갈수록 위험성이 높아져 X는 임부투여 금기 등급이다. 그러나 단순히 A에서 X로 갈수록 위험성이 높다고 볼 수도 없다. 같은 카테고리 약물 사이에도 위험성의 차이가 크게 날 수 있고, 반대로 동물실험 유무에 따라 카테고리 B와 C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FDA 분류는 같은 약이라도 사용기간과 용량, 임신 주수 등에 따라 위험성이 달라질 수 있어 분류법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또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사례처럼 동물실험 결과가 사람에게는 무의미할 수 있어 동물실험 유무에 따라 카테고리 B와 C로 분류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1950년대 독일 제약사 그뤼넨탈(Grunenthal)이 개발한 탈리도마이드는 신경안정제로 동물실험 결과 무해한 성분으로 판단돼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었다. 입덧에도 효과적이라 임산부에게 많은 인기가 있었으나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임산부가 낳은 1만명 정도의 신생아에게서 선천적으로 팔다리가 결손되거나 짧은 상태로 태어나는 ‘해표지증’(해표상지증, phocomelia)이 나타났다.
이 사건으로 1961년 대부분의 국가에서 탈리도마이드의 사용이 금지됐다가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골수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알려지면서 2006년 부활했다. 이에 따라 30년 넘게 사용됐던 FDA 임부 카테고리는 곧 사라질 예정이다. FDA는 전문의약품에 대해 2014년 12월 PLLR(Pregnancy and Lactation Labeling Rule)을 도입했다.
2015년 6월 30일부터 본격 시행되고 있으며 2020년 7월부터는 종전의 임부 카테고리는 사라지고 PLLR만 적용된다. 아직은 유예기간이라 전부 교체되지는 않았지만 곧 미국 내 전문의약품 설명서는 모두 PLLR을 따르게 된다. PLLR은 임신-분만-출산과정을 하나로 합쳐 의약품 설명서의 8.1항 임산부에 주의사항을 표기한다. 수유기와 수유부에 관한 문제를 8.2항 수유부에 표기하고, 가임기 여성과 남성 항목을 신설해서 8.3항에 넣었다.
임신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나 임신시킬 가능성이 높은 남성이 약을 복용할 경우 어떠한 우려가 있는지 기술하는 항목이다. 즉 의약품 설명서에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을 확인한 임상시험 및 처방 시 고려사항을 기술해야 한다.
의료진이 해당 약물의 유익성과 위험성을 평가한 후에 임산부 및 수유부에게 조언하면 임산부가 충분한 정보에 근거해 아이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각 제품에 대한 FDA 허가정보는 데일리메드(DailyMed)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전문의약품(처방약)에만 해당되며 일반의약품이나 건강기능식품은 적용대상이 아니다.
국내 임부금기 약물 등급은 식품의약안전처 공고에 따른다. 2008년 12월 식약처는 임부에게 원칙적으로 처방할 수 없는 의약품을 공고했다. 식약처가 임부금기 성분을 발표하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HIRA)은 해당 정보를 의약품안전사용서비스(Drug Utilization Review, DUR)에 등록해 의사나 약사가 해당 성분의 의약품을 임부에게 처방·조제 시 참고하게 된다.
국내 임부금기 등급은 크게 1등급과 2등급으로 나뉜다. 임부금기 성분은 태아에게 매우 심각한 위해성(태아기형 또는 태아독성 등)을 유발하거나 유발할 가능성이 높아 임부 사용이 권장되지 않는 유효성분을 말한다. 1등급은 태아에 대한 위해성이 명확해 약물사용 위험성이 치료상의 유익성을 상회하는 경우로 원칙적으로 사용이 금지된다. 2등급은 태아에 대한 위해성이 나타날 수 있으나, 치료상의 유익성이 약물사용의 잠재적 위험성을 상회하거나 명확한 임상적 사유가 있을 경우 예외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호주의약품안전청(Therapeutic Goods Administration, TGA)의 경우 약물의 태아유해성 정도를 7개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아세트아미노펜은 임산부가 가장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A등급’으로 분류된다. 임부 약물 기준은 점점 더 강화되고 있지만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 안전성이 확인된 약물에도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분류체계나 제품설명서에 의존해 판단을 내리면 간단하고 편리할 수 있으나 FDA의 기존 임부 카테고리 폐지 조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떤 분류도 완벽하게 태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 복용하려는 약에 의문이 든다면 반드시 병원을 찾아 정확한 정보를 확인한 뒤 복용해야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모두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