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인의 삶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계기로 180도 바뀌었다. 과거 ‘노년기’라고 하면 은퇴 후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온가족이 웃고 떠들거나,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등 여유로운 삶을 떠올렸다. 하지만 IMF 이후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은퇴 후에도 쉬지 못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드는 고령층이 급증했다.
여기에 평균수명 연장, 인구고령화로 인한 노인 일자리 증가, 취업난으로 인한 늦은 사회진출 및 결혼, 캥거루족(자립할 나이가 지났음에도 심리적·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해 사는 청년층) 증가 등 요인이 겹치며 더 많은 노인들이 일터로 내몰렸다. 고령 노동자 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자 중 일하는 인구는 전체의 33.3%인 251만1000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또 55~79세 고령자 중 65%는 장래에 일하기를 원했고, 이유로는 ‘생활비를 보태야 해서’가 60.2%로 가장 많았다. 65세 이상 노인 중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노인을 ‘액티브시니어’라고 한다. 노년기 노동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강에 유익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연구결과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한 노인은 연간 54만6000원의 의료비 지출 감소 효과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노년기 노동이 치매나 우울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도 보고되고 있다. 하지만 액티브 시니어들은 노동의 긍정적인 효과와 별개로 ‘슈퍼노인증후군’을 앓을 가능성이 높다.
이 증후군은 은퇴 이후에도 현역 때보다 더 바쁘고 생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노년기 병리적 현상이다. 자신이 아직 늙지 않고 쓸만하다는 생산성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쫓기듯 더욱 맡겨진 일에 고군분투하게 된다. 주변에 나이가 비슷한 다른 노인보다 돈벌이가 적거나 역동적으로 살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사회의 낙오자로 여기며 괴로워한다.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체력이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일하다 건강을 해치기 쉽다.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은 노년기에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려면 외적인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완전하진 않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만족감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슈퍼증후군 노인에게 만족감은 사치다.
이은주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슈퍼노인증후군 환자는 삶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중년기까지 자신을 평가했던 기준인 ‘생산성’에만 집착해 스스로를 갉아먹기 쉽다”며 “빠른 산업화 속에서 자식들 뒷바라지와 부모 봉양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자신의 노후나 은퇴에 대해 계획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년층을 위한 사회적·문화적 인프라가 부족하고, 이로 인해 은퇴 후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도 슈퍼노인증후군의 발생 원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마음은 슈퍼맨인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한국의 노인은 일할 만큼 몸이 성치 않다.
국내 노인 89.5%는 만성질환을 앓고 있으며, 73.0%는 두 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가진 ‘복합 만성질환자’다. 심지어 노인 인구의 절반(51.0%)은 세 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갖고 있다. 질병을 앓거나 몸이 불편한 노인이 무리하게 일을 하다간 건강을 더 해칠 수 있다. 액티브시니어로서의 삶을 망치는 가장 큰 요인은 ‘노쇠’다.
노쇠는 흔히 말하는 노화와 다른 개념이다. 노화(aging)는 나이들면서 생기는 정상적인 기능저하 및 퇴화 과정이다. 대개 일정한 속도가 있으며 수일에서 수주 이내로 급격히 오지 않는다. 반대로 노쇠(frailty)는 신체기관이나 조직의 퇴행성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돼 몸이 쇠약해지는 현상이다.
유병철 건국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노쇠는 노화와 달리 비정상적인 병적 상태로 빠르면 수일, 늦으면 수개월 이내로 급격히 진행된다”며 “주로 식욕이 떨어지거나, 기운이 없거나, 걸음이 느려지거나, 자주 어지럽거나, 기억력이 저하되거나, 체중이 감소하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슈퍼노인증후군에 빠진 노인이 건강을 챙기지 않고 무리하게 일을 하다간 노쇠를 앞당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쇠 자체는 질병으로 분류되진 않지만 노년기 각종 질환의 위험을 높이고 사망을 앞당길 수 있다. 반대로 만성질환이 노쇠를 앞당기기도 한다. 당뇨병, 말초혈관질환, 근골격질환, 심부전, 빈혈,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갑상선기능항진증·저하증, 만성통증, 영양결핍, 우울증, 인지기능저하 등이 노쇠로 인해 발생하거나 노쇠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노쇠한 노인은 낙상, 치매, 보행장애 등에 쉽게 노출되고 건강한 노인보다 5년내 사망률이 6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전세계에서 노쇠사(老衰死)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다. 노쇠사는 다른 사망 원인이 없는 자연사를 의미한다. 올해 초 일본 아사히신문이 후생노동성의 인구통계를 분석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일본에서 노쇠로 사망한 사람은 11만명이었다. 이는 암(37만명), 심장질환(21만명)에 전체 사망 3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일본은 이미 10여년 전 70세 이상 노인 비율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한국도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이 예상돼 노쇠와 이로 인한 노쇠사에 대한 대비책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신체적 노쇠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게 ‘근육량 감소’다. 노쇠에 스트레스, 영양불균형, 운동부족 등 요인이 겹쳐 팔·다리 근육량과 근력이 감소하는 질환을 근감소증이라고 한다.
국내 70세 미만 성인의 15~25%, 80세 이후 여성의 40%와 남성의 50%가 앓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아 근감소증 진단기준(AWGS)’에 따르면 체성분분석검사(인바디검사) 수치가 남성은 7.0kg/m², 여성은 5.7kg/m² 미만일 때 근감소증으로 진단한다. 종아리 굵기는 근감소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팔·다리 등 사지 근육량은 종아리 둘레와 비례하며 근감소증 환자의 82%가 종아리둘레 32㎝ 미만으로 나타났다.
원장원 경희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종아리는 지방이 적고 보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위라 근감소증을 진단에 적합하다”며 “키·성별과 관련 없이 65세 이상이면서 종아리 둘레가 32㎝ 미만이면 근감소증을 의심해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보행 속도도 근감소증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60세 이상이고 4m를 걷는 데 5초 이상 걸리면 정밀진단을 받아봐야 한다.
의학적으로 △1년에 5kg 이상 체중감소 △잦은 피로감 호소(주관적) △악력 감소(하위 20%) △보행속도 감소(하위 20%) △신체활동량 감소(하위 20%) 중 3개 이상에 해당되면 노쇠증후군으로 진단한다. 간단한 설문조사로 노쇠 여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원장원 교수팀이 개발한 설문지는 탈진·근력감소·보행속도 저하·신체활동량 감소·체중감소 등 5개 항목에 점수를 매겨 0은 정상, 1~2점은 전노쇠, 3~5점은 노쇠로 분류한다.
노쇠는 신체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아산병원 연구팀이 강원도 평창에 거주하는 65세 이상 노인 408명의 건강상태를 관찰한 결과 사회생활이 단절되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줄어든 ‘사회적 노쇠’ 노인은 사회생활을 잘 유지하는 노인보다 우울감 발생 위험이 4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옷 갈아입기, 세수하기, 양치질하기, 식사 챙겨먹기 등의 일상생활을 혼자하기 어려운 장애발생 위험도 2.5배 높았다. 이밖에 사회적 노쇠가 근력저하, 인지기능저하, 사망 등의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련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 교수는 “사회적 노쇠 노인은 노인증후군 위험이 높아 현재는 물론 미래의 건강악화 고위험군으로 볼 수 있다”며 “신체적·사회적 노쇠를 예방하려면 은퇴 후에도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이웃과 자주 소통하면서 여가와 취미생활을 즐기고, 적당량의 운동과 충분한 단백질 섭취로 신체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