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폐렴(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국내 확진자가 15명으로 급증한 가운데 정부가 기존 입장을 4일 만에 뒤집고 무증상 감염 가능성을 인정해 혼란이 예상된다. 특히 초기 정부 방역시스템이 발열·기침 등 증상을 보인 환자에만 초점을 맞춰 사실상 초기 대응에 실패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2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진행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 총리 주재 회의결과 브리핑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감기 등 일반 호흡기질환과 증상이 유사해 구별하기 어렵고 무증상, 경증 환자에서 감염 전파 사례가 나와 기존보다 방역 관리가 어렵다”며 “잠복기 상태가 아닌 잠복기에서 증상이 발현되는 단계로 넘어가는 초기에 무증상 상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세계보건기구(WHO) 등이 무증상 감염 위험에 대해 언급했음에도 질병관리본부는 지난 29일 “입증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며 이를 일축했다. 기침, 재채기, 발열 같은 증상이 관찰되지 않는 무증상 시기엔 바이러스의 활동이 미약하고 감염자의 몸 밖으로 거의 배출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중국,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선 무증상 전파가 의심되는 사례가 수차례 보고됐다. 지난달 30일 발간된 국제학술지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NEJM)’엔 증상이 없는 시기에 타인을 감염시킨 사례가 보고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상하이에서 독일로 출장 온 중국인 여성은 무증상 상태에서 30대 독일인 남성을 감염시킨 뒤 중국에 돌아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 감염된 독일인 남성도 발열이나 기침 같은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 바이러스검사를 받았는데 양성 판정이 나왔다. 이 남성은 증상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두 명을 더 감염시킨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도 지난달 31일 홈페이지에 업데이트한 질병 관련 설명에서 독일의 ‘무증상 감염’ 사례를 언급했다. CDC는 “호흡기질환 바이러스는 증상이 강하게 발현될 때 전염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경우 증상 없는 감염자와 접촉해 전파된 사례가 보고됐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해외 사례와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무증상 전파 의심 사례가 나오자 정부는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최초의 무증상 전파 의심자는 3번 확진자(54)다. 그는 지난달 20일 중국 우한에서 귀국할 당시만 해도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공항 방역망을 그대로 통과했다.
3일 뒤인 23일 오후 1시쯤부터 열감, 오한 등 몸살기를 느껴 해열제를 복용한 뒤 서울 강남구의 한 식당을 이용하고 한강 일대를 산책했다. 24일엔 다시 일산으로 이동해 백화점, 음식점, 카페 등을 방문했으며 25일에 다시 기침과 가래 증상이 생겨 1339에 신고해 26일 확진 판정을 받았다. 3번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95명에 이른다. 6번 확진자(55)는 지난달 22일 당시만 해도 별다른 증상이 없었던 3번 확진자와 식사한 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12번 확진자(48)도 최종 확진 판정을 받기 전까지 총 4차례 병원을 방문하고, 약국에도 2차례 들렸으며, 138명과 밀접하게 접촉했지만 의료진을 포함, 누구도 증상을 감지하지 못했다. 중국을 다녀온 적이 없었고 미세한 근육통 외에는 발열이나 기침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중국 우한에서 온 관광객과 접촉한 관광가이드 동료 2명이 감염됐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달 30일 스스로 보건소에 신고했다. 그의 아내는 14번 확진자로 판정됐다. 결과적으로 환자가 자진 신고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2차감염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동안 질병관리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의 검역망은 중국 후베이성을 다녀온 뒤 14일 이내 발열 또는 호흡기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으로 제한됐다. 하지만 검역망에서 빠져있던 사례가 늘면서 지역사회 전파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철저한 방역 대책 수립을 위해 먼저 잠복기 감염과 무증상 감염을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무증상 감염(inapparent infection)은 말 그대로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감염’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무증상 감염은 대부분의 환자가 보이는 증상인 고열과 기침 등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감염을 의미한다.
반면 잠복기 감염(incubation period)은 바이러스가 체내에 들어와서 증식하는 단계, 즉 첫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타인에게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WHO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잠복기를 최대 14일로 보고 있다.
확진자와 밀접 접촉한 사람을 2주간 격리 또는 능동감시하는 이유다. 보통 잠복기에는 바이러스가 충분히 증식하지 않아 타인에게 전파되는 사례가 드물다. 예외적으로 홍역, 수두, 인플루엔자(독감) 등 일부 질병만이 잠복기 중에 전파된다. 같은 코로나바이러스 계열인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 SARS)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East Respiratory Syndrome, MERS)에선 발견 사례가 없다.
무증상 감염과 잠복기 감염의 가장 큰 차이는 잠복기인 최대 2주가 지났는지 여부다. 예컨대 잠복기가 지났지만 증상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미한 환자가 다른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염시켰다면 무증상 감염이다. 반면 다른 감염자와 만났던 시점에서 잠복기가 지나지 않았는데 증상 없이 바이러스를 전파한 것으로 확인됐다면 잠복기 감염으로 볼수 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의 무증상 감염자는 ‘증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증상이 나타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환자에 따라 남보다 증상이 천천히 나타나거나, 미미한 증상에 그칠 수 있다는 의미다.
엄중식 가천대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나이가 어리거나, 고령이거나, 불규칙한 생활습관 등으로 면역력이 저하된 사람은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열이 나지 않거나, 미열에 그칠 수 있다”며 “이로 인해 뚜렷한 증상이 나타나 병원에 왔을 땐 이미 감염이 어느 정도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발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잠복기 감염과 무증상 감염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모두 부족한 상황”이라며 “초기 증상이 생각보다 천천히 진행되고 무증상기와 유증상기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 무증상 감염을 정확히 체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2차·3차 감염 사례가 잇따르고 무증상 감염자에 의한 가능성이 높아지자 보건당국은 4일부터 후베이성 경유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고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을 자가격리토록 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지침 제4판’을 적용했다. 이에 따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은 전원 14일간 자가격리에 들어가야 하고, 이를 위반하면 3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