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임신은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커다란 사건이다. 임신은 여성이 한번쯤 거쳐가는 관문이라고 당연시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정도가 지나치면 신체가 반응하기도 한다. 가령 임신이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상상임신’을, 임신을 극도로 거부하는 경우 ‘임신거부증’(deni de grossesse, Pregnancy denial)을 겪기도 한다.
임신거부증은 대개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을 느끼는 여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임신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상상임신의 반대 개념이다.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아직 진단기준조차 없어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보통 강간당한 트라우마가 남은 상태에서 임신했거나, 난산 후 임신했거나, 임신공포증을 가진 사람이 이를 겪을 확률이 높다. 이밖에 첫 아이 출산 직후 출산과 육아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가 증후군으로 이어지거나, 혼외정사로 임신하고도 이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국내서 임신거부증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06년 프랑스 여성 베로니크 크루조가 일으킨 ‘서래마을 영아 살인사건’ 이후다. 이 여성은 한국에서 영아 2명을 살해한 뒤 냉동실에 넣어 보관했으며, 프랑스에서도 1명의 영아를 더 살해한 사실을 자백했다.
이후 프랑스는 의사들이 임신거부증협회를 만들고 연구에 나서기 시작했다. 연구 결과 매년 800~2400명의 여성이 이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신거부증이 나타나면 임신 상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심지어 월경이 계속되기도 한다. 충격적인 것은 태아도 자신을 원치 않는 엄마의 마음을 알고 ‘알아서 조용히’ 숨어서 큰다는 점이다. 자궁은 둥글게 커지는 게 아니라 길어지고, 태아는 태동도 없이 9개월간 최대한 엄마에게 방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큰다고 한다.
갑작스런 출산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극단적인 영아 살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내 아이’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임신거부증은 대체로 고등교육을 받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여성에서 나타나며, 임신거부증 이외의 정신질환은 전혀 앓고 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협회의 설명이다.
펠리스 나바로 프랑스 임신거부증협회 회장은 “환자 2500명당 한 사람은 출산이 임박할 때까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완전한 임신거부증을 앓고 있다”며 “이는 드문 경우이고 보통 임신 7~8개월에야 임신 사실을 알고,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아이를 낳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럴 경우 혼자 출산하는 순간 위험한 상태가 된다”며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눈앞에서 보게 되지만 그게 아이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어떤 식으로든 없애버리고 싶어한다”고 덧붙였다.
문지현 정신과 전문의는 “임신거부증은 실재하는 증후군임에도 아직까지 정확한 정신과적 진단기준조차 도출하지 못했다”며 “부정(denial)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방어 기제를 동원해 온몸과 마음으로 아기의 존재를 거부하려는 여성이 외면하고 싶은 뒷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