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하루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낸다는 말은 이미 옛말이 돼 버렸어요. 특히 한국인은 전세계에서 잠을 가장 적게 잡니다. 하루 평균 수면시간이 7시간 41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18개 나라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죠. 부족한 수면은 심혈관계질환, 대사증후군, 우울증 등을 유발하므로 수면장애가 한달 이상 지속될 땐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무한경쟁 속에서 치열하게 사는 현대인에게 잠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일쑤다. 더욱이 한국은 근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와 빠른 산업화로 인해 잠을 덜 자는 게 일종의 미덕처럼 여겨져 수면부족에 노출되기 쉽다. 한국은 수면시간이 OECD 평균보다 40분이나 짧고 미국(8시간38분)이나 프랑스(8시간50분)보다는 1시간이나 적게 잔다.
이향운 이대목동병원 수면센터장(신경과 교수)은 수면의학의 볼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수면질환 환자들의 ‘잃어버린 잠’을 되찾아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12년 3월 개원하면서 4개 진료과가 다학제진료를 펼치고 있는 수면센터를 이끌며 수면장애 환자의 삶의 질 개선과 수면의학의 저변 확대에 기여해왔다.
한국인 12% 불면증 … 수면부족, 심장질환·우울증 유발
이 교수는 “센터 개소 후 불면증·수면무호흡증·하지불안증후군·기면증·렘수면행동장애 등 10대 수면질환으로 내원한 환자는 첫해 2500여명에서 2014년 4300여명으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며 “불면증 환자가 가장 많은데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불면증을 경험하고, 12%가량이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수면장애 환자 중 여성의 증가세가 눈에 띈다. 2015년 기준 국내 성별 수면장애 환자는 여성이 42만7000명으로 남성(29만명)보다 1.5배나 많다. 이 교수는 “여성은 임신, 출산, 폐경 및 갱년기 등으로 모든 연령층에서 수면장애 유병률이 높은 편”이라며 “폐경을 맞은 중장년층 여성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줄면서 수면과 연관되는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 분비가 감소해 얇게 잠이 들고 자주 깨게 된다”고 말했다.
잠은 생체리듬과 신체 회복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수 요소다. 이 교수는 “잘 때 분비돼 ‘수면호르몬’으로 불리는 멜라토닌은 항산화, 노화방지, 항암 작용, 혈압 및 스트레스 감소, 면역력 증대 등 건강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며 “수면부족이 오래 지속되면 멜라토닌 분비에 이상이 생겨 생체리듬이 깨지고 면역력이 저하돼 대사질환, 심혈관질환, 집중력 저하, 만성피로 등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뇌와 정신 건강에 치명적이다. 수면시간이 짧아지면 자율신경계 중 특히 교감신경의 활성도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고혈압, 부정맥, 심뇌혈관질환의 발생위험이 증가한다. 또 뇌내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줄어든다. 세로토닌은 충동성을 억제하고 사고능력을 유지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도록 돕는데 수면부족 등으로 덜 분비되면 충동적인 행동이 나타나고 결정 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수면장애가 우울증 위험을 10배가량 높이고 불안장애, 알코올중독,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조현병(정신분열병) 등 정신과 질환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결과도 보고됐다.
수면유도제 무분별한 사용, 코골이·수면무호흡 악화
하지만 단순히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병원을 찾는 환자는 극소수다. 수면장애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여겨 치료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부족하고, 코골이나 수면무호흡증 등은 증상이 자는 도중 나타나 가족의 도움이 없으면 정작 환자 자신은 모르는 경우도 흔하다.
이 교수는 특별한 스트레스 요인이 없는데도 잠자리에 든 뒤 30분 이상 잠이 오지 않거나, 푹자고 일어난 뒤에도 개운하지 않거나, 주간에 피로와 졸음이 몰려오는 증상이 1주일에 3회 이상, 한달 간 지속된다면 진료를 받아보는 게 좋다고 강조한다. 그는 “왜 잠이 오지 않는지, 왜 깊은 잠을 못자는지, 대낮에 졸음이 밀려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빠른 치료가 가능하다”며 “수면유도제 등에 의지하다간 원인질환을 제 때 진단하지 못하고 차후 치료가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수면유도제는 호흡근육까지 느슨하게 만들어 코골이 또는 수면무호흡 환자가 오남용할 경우 증상이 악화되고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민 끝에 병원을 찾아도 진단을 받기가 쉽지 않다. 수면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수면다원검사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용이 30만~100만원에 달한다. 수면의 질과 잠자는 동안 발생하는 모든 신체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어 유용하지만 환자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병원 측에서 검사를 권유하면 ‘왜 바가지를 씌우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환자도 제법 많다.
이 교수는 “환자의 비용 부담을 줄이고 수면질환 진단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해 학회 차원에서 보건당국과 수면다원검사 급여화를 추진해왔다”며 “현재 급여 비율 등 세부적인 시행 방안을 논의 중이며 빠르면 올해, 늦으면 내년 중으로 수면다원검사에 급여가 적용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이대목동병원 수면센터, 4개 진료과 다학제 진료
검사 비용 외에 수면질환 환자의 애로사항 중 하나는 정확히 어느 진료과를 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과 유럽에선 수면질환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진료과가 개설돼 있는 반면 한국에선 정신건강의학과, 신경과, 가정의학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 진료과별로 치료가 중구난방식으로 이뤄져 환자가 헷갈리기 쉽고 치료 효율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5년 전 수면질환센터를 개소한 것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센터는 신경과, 정신건강의학과, 이비인후-두경부외과, 치과 등 4개 진료과가 다학제 협진체계를 갖춰 표준화된 최신치료를 해왔다. 각 과에서 산발적으로 운영하던 수면다원검사실을 통합하고 3개의 최신검사실과 조종실 및 판독실 등을 갖췄다. 수면장애가 확진되면 환자별 맞춤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약물치료와 함께 지속적 기도양압술, 구강내 장치, 광치료, 인지행동치료 및 심리치료 등을 필요에 따라 병행한다.
이 교수는 “수면제 오·남용은 당연히 나쁘지만 필요한 경우에도 무조건 약물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도 수면질환을 악화 및 만성화시키는 원인”이라며 “해외출장이 잦거나, 낮밤이 뒤바꿔 근무하는 등 특수한 상황에선 전문의 진료 후 적절한 약물치료가 도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폐경기 여성의 수면질환은 단기적인 수면제 처방보다는 멜라토닌 투여로 자연스러운 수면리듬을 유도하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장기간 입원 등으로 외출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광치료를 병행해 멜라토닌 분비를 촉진하면 효과적이다
수면의학, 의학계 블루오션 … 야간근무 노동자 수면장애 관련 연구 계획
이 교수는 의학도로 입문할 당시 주로 난치성질환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수면질환이 굉장히 흔하면서 현대인의 건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데도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의학계에서 수면의학은 비교적 새로운 분야로 국내에선 2000년대 들어서야 제대로 다뤄지기 시작했다”며 “수면의학 선두 주자인 유럽과 미국을 열심히 따라잡고 있으며, 향후 야간 교대근무 노동자 등 현대사회에서 불가피하게 증가하는 수면장애 치료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수면질환을 비롯한 뇌신경 관련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성과를 거둬왔다. 2016년 12월엔 최병옥 성균관대 교수, 이민아·박창현 이화여대 의대 박사팀과 함께 유전적 이상으로 말초신경병 및 근육마비가 진행되는 샤르코마리투스병(Charcot-Marie-Tooth disease, CMT) 환자의 유전자형별 뇌미세구조 변화를 나타낸 신경망 지도를 세계 최초로 작성했다.
2015년엔 뇌전증수술 환자의 두개강내 전극에 기록된 대뇌피질 뇌파와 휴지기 상태의 기능적 자기공명영상과 뇌 연결성 변화를 뇌지도 상에 구현한 공로로 ‘2015 뇌기능매핑 학술상’을 수상했다.
낮잠 15분 이상 자기, 주말에 잠 몰아자기 피해야
이 교수는 “수면장애를 이겨내려면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며 “피곤하다고 해서 낮잠을 15분 이상 자거나, 주말에 늦게까지 잠을 몰아자면 정작 밤에 수면의 질이 떨어져 다음 날 정신이 멍해지고 더 피곤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불면증 예방 및 치료에 도움되는 천연 수면제로는 우유, 상추, 양파 등이 대표적이다. 우유, 계란, 두부 등엔 수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의 원료로 볼 수 있는 트립토판이라는 아미노산이 다량 함유돼 있다. 잠자기 전 우유를 미지근하게 데워 마시면 마음을 편안해지고 체온이 상승해 숙면에 도움된다.
상추는 락투세린과 락투신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마음이 진정되고 불면증을 해소시켜 준다. 양파의 경우 유화알린 성분이 신경안정과 혈액순환을 유도해 신경성에 의한 불면증을 개선해준다.
이 교수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오전 10시부터 정오 사이에 햇빛을 15~20분간 쬐어주고, 잠자리에 누워 책·컴퓨터·스마트폰을 보는 행위는 삼가는 게 좋다”며 “잠자리에 든 뒤 20분 이내 잠이 오지 않는다면 잠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독서나 음악감상 등 정적인 활동을 하면 다시 잠드는 데 도움된다”고 조언했다.
이향운(李香雲) 이대목동병원 신경과 교수 프로필
1993년 이화여대 의대 졸업
1994~1996년 이화여대 의학석사
1996~1999년 고려대 의학박사
1993~1998년 이대부속병원 수련의, 신경과 전공의
1998~2000년 삼성의료원 뇌전증·수면장애 전임의
2000~2001년 이대목동병원 신경과 임상강사
2001년 한국과학재단 박사후 해외연수과정 연구비 수상
2001~2002년 미국 존스홉킨스 의대 신경과 박사후 전임의(postdoctoral fellow)
2002~2003년 미국 국립뇌신경질환및뇌졸중 연구소NINDS(National Institutes of Neurological Disorders and Stroke) 임상 전임의
2003~현재 이화여대 의대 신경과 교수
2010~2011년 미국 예일대 신경과 교환교수
2012~현재 이대목동병원 수면센터장
대한신경과학회 정회원
대한뇌전증학회 홍보위원장
대한수면학회 홍보이사
한국뇌기능매핑학회 대외협력이사
미국신경과학회 정회원
미국뇌전증학회 정회원
세계뇌전증협회 태스크포스 멤버(Task Force Member)
1996년 대한신경과학회 우수논문상 수상
2001년 한국여자의사회 연구업적상 수상
2003년 NINDS Intramural Postdoctiral Fellowship Award 수상
2003년 American Epilepsy Society Milken Family Fellowship Award 수상
2004년 2008, 2015: 대한신경과학회/대한뇌전증학회 전공의 우수발표상 지도교수
2007년 대한뇌전증학회 우수연구자상
2007년 이대목동병원 베스트닥터상
2007년 이화여대 의대 동창회 우수논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