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터를 내버려둬라!”
지난해 브라질 리우올림픽 당시 전세계 네티즌들은 트위터·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HandsOffCaster’ 해시태그를 통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육상선수 캐스터 세메냐를 응원했다.
세메냐는 뛰어난 육상선수지만 ‘성별 논란’으로 곤욕을 치러왔다. 그는 2009년 독일 베를린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린 여자 800m 결승에서 1분 55초45라는 시즌 최고 기록으로 우승하자 ‘여자가 맞느냐’는 의혹에 시달렸다. 당시 짧은 머리, 강인한 근육을 걸고 넘어졌으며 세계육상연맹(IAAF)은 결국 성별테스트를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조사 결과 세메냐의 남성 호르몬 수치가 일반 여성보다 3배 이상 높은 ‘인터섹스’(간성, 間性·intersex)로 판명돼 2010년 7월 6일까지 국제대회 참가가 거부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세메냐는 신체적으로 남성 성기와 여성 성기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여성호르몬이 아닌 남성호르몬이 분비되는 유전적 특징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전문가들은 “남성호르몬이 많은 것은 세메냐의 탓이 아니며 여성적인 유전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여성’으로 올림픽에 참여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도 “근거가 부족하고 차별 논란이 있다”며 세메나의 여자 선수 자격을 인정했다.
최근 세메냐 같은 ‘간성’을 ‘제3의 성’으로 인정하는 추세다. 유엔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약 1.7%가 간성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여권의 성(性) 표기란에 ‘제3의 성’을 추가했으며,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에서는 성별을 간성으로 표기한 첫 출생증명서가 발급됐다.
간성은 생물학적 용어로 자웅이체(雌雄異體) 개체에서 완전한 자형(雌型·암컷)이나 웅형(雄型·수컷)이 아닌 중간적 성질이나 형태를 띠는 현상을 일컫는다. 사람으로 따지면 태어났을 때는 완전한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둘 다의 성질을 띠고, 자라면서 한 가지 쪽으로 외형이 발달하는 양상을 보인다.
여자는 XX 염색체를 남자는 XY 염색체를 갖고 있다. 반면 인터섹스는 XX 염색체임에도 남자 몸을 갖고 태어나거나, 반대로 XY 염색체임에도 여자 몸으로 태어나거나, 심지어 한 성에 남자·여자의 두가지 생식기를 모두 갖고 태어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성을 거부하고 자신과 반대인 성을 택한 트랜스젠더와는 다르다. 인터섹스는 유전자 혼란으로 야기되는 일종의 질병이고, 트랜스젠더는 후천적으로 성 정체성 혼란이 광범위하게 발생한 경우다.
인터섹스는 약 30여가지의 다양한 유전적 변이의 경우를 포함한다. 성염색체관련증후군으로는 남성에서 나타나는 클라인펠터증후군, 여성에서의 터너증후군 등이 대표적이다.
남성은 일반염색체 22쌍과 성염색체 XY 한 쌍을 갖고 태어나는데, 클라인펠터증후군은 여성염색체 X염색체를 1개 이상 더 갖고 있는 유전병이다. 외형은 남자지만 고환이 작고 여성형 유방이 나타나는 게 이 증후군의 특징이다. 정자수도 극히 적어 임신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만13세가 지나야 고환의 기능을 의심할 수 있는 증상이 나타나 성인이 된 후에 질병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미 결혼한 뒤에도 불임이나 여성형 유방을 검사하다가 우연히 진단되기도 한다.
최근엔 신생아 유전자검사 등을 통해 미리 진단받을 수 있고, 대처가 빨라질수록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치료는 12세부터 남성호르몬을 투여하며 여성형 유방으로 심리적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면 수술을 고려할 수 있다. 고환 기능 손상은 영구적이어서 적절한 처치로 남성화 현상을 유발한 뒤 현상유지시키는 방법을 쓴다.
터너증후군(Turner syndrome)은 성염색체인 X염색체가 부족해 난소 형성 부전으로 조기폐경, 저신장증, 심장질환, 골격계이상, 자가면역질환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여자는 온전한 X 성염색체가 2개(44, XX)여야 한다. 터너증후군은 이 염색체의 1개 또는 일부분이 소실되거나, 자궁 내에서 염색체 모양의 이상이 발생하며 유발된다. 난소 기능장애가 이른 시기에 시작돼 거의 대부분 환자에서 사춘기가 잘 오지 않고 불임 등이 초래된다.
터너증후군은 성장호르몬 결핍증은 없지만 성장호르몬 치료를 받으면 호전된다. 이 역시 신생아 유전자검사로 조기발견할 수 있다. 가능하면 일찍 치료할수록 유리하고, 성장이 거의 멈출 때까지 지속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키가 150㎝가 될 때까지 보험으로 치료받을 수 있다. 90% 이상의 환자에서 난소 기능이 없어지므로 성인이 돼서도 폐경이 오는 나이까지 여성호르몬 투여가 필요하다. 불임은 거의 모든 환자에서 발생하지만 자궁이 정상적으로 존재해 임신이 되기도 한다.
이달 초 벨기에 출신 톱모델 한느 가비 오딜리(Hanne Gaby Odiele, 29)도 자신이 간성임을 고백했다. 그는 보그, 엘르 등 글로벌 패션모델이자 마크제이콥스·샤넬·지방시·프라다 등 유명 브랜드의 런웨이 무대에도 수차례 등장한 인물이다.
오딜리는 여성의 신체와 XY염색체를 지녔으며, 간성질환 중 하나인 ‘안드로겐불감성증후군’(androgen insensitivity syndrome, AIS)이다. 그는 법적, 사회적, 의학적으로도 여성으로 분류되지만 XY염색체를 갖고 있어 여성 생식기의 내부 기관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잠복고환(undescended testicle) 상태로 태어난 그녀는 자신에게 있는 남성성기가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말에 10살에 고환제거수술을 받았다. 또 성장하면서 활발하게 분비되는 남성호르몬(Testosterone)을 억제하기 위해 에스트로겐을 꾸준히 복용했다. 이후 모델 활동이 한창이던 18살에 여성 성기 및 자궁 복원술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처럼 간성인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간성 어린이가 부모의 뜻에 따라 불필요한 수술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 정체성을 밝히게 됐다고 밝혔다.
오딜리는 “간성으로 사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두 차례의 수술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억”이라며 “간성 아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모른 채, 부모의 결정에 의해 이뤄지는 강제적인 수술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어 “나 역시 수술한 뒤 생리가 멈췄고,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강제로 이뤄진 두 번의 수술은 트라우마로 남았고, 오히려 어릴 때 누군가가 처음부터 솔직히 ‘간성’인 것을 이야기해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딜리의 이같은 발언은 지지를 얻고 있다. 유엔은 과거 인터섹스 아동에 대한 성전환 수술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간성 자녀가 태어난 경우 대부분 아이가 미래에 겪게 될 괴로움과 수치심을 덜어주기 위해 의료진과 부모가 협의, 남녀 중 한 가지 성별을 선택해 소위 ‘정상화수술’이라는 성전환수술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결정이 반영되지 않은 데다 아이의 성적 특징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조기에 성별을 결정해 버린다는 비판도 제기돼 왔다.
유엔은 이같은 정상화 수술이 ‘돌이킬 수 없고, 비자발적인, 합의 없이’ 이뤄진 의료행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수술은 의학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며 상처와 성적 감각의 상실, 고통, 실금, 우울증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간성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구와 달리 간성 자체에 대한 정보가 드물고, 성역할이 확고해야만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불분명한 성별’은 숨겨야할 대상으로 인식된다. 이에 대해 전문적으로 조언해줄 전문가도 드문 게 현실이다.
한국에서 간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이 간성이라는 점을 알게 된 후 부모가 쉬쉬하며 당사자의 동의 없이 수술을 받게 하거나, 혹은 없는 문제인 것처럼 덮으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2014년 클라인펠터증후군으로 태어난 아기를 살해하고 자살한 어머니의 사연은 이같은 관점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