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제약, 병원경영시스템 등 헬스케어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한 한국의료에서 의료기기는 ‘아픈 손가락’이다. 국내 의료기기 회사 대부분이 영세한 규모 탓에 기술력이 떨어져 값비싼 해외 기업의 제품들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국내시장 규모도 워낙 작아 대기업 진출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수천억원을 지원하고 있지만 인프라 자체가 열악하다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마냥 주목할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 실정이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김선태 가천대 길병원 의료기기융합센터장(이비인후과 교수)은 병원·기업간 상생을 통해 국산 제품의 품질 향상을 이끌고 있는 의료기기 국산화의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김 교수는 1995년부터 길병원 이비인후과에서 축농증수술을 집도하며 내시경과 수술내비게이션 등 의료기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임상현장에서 국내 의료기기의 기술력 부족과 관련 업체들의 열악한 현실을 피부로 느꼈지만 개인과 한 병원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엔 구조적·제도적 장벽이 너무 높아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2012년 길병원 연구부장과 산학협력단장을 맡아 길병원이 연구중심병원으로 지정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지난해부터 의료기기융합센터를 이끌며 연구중심병원으로서 쌓아온 역량을 국내 의료기기산업 발전을 위해 쏟아붓고 있다. 특히 경성내시경 등 최소침습의료기기 분야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해 5건의 특허를 내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2015년엔 국내 최초로 스코피스(scopis) 내비게이션시스템을 도입해 이비인후과질환 수술의 정확도와 안전성을 향상시켰고, 풍선카테터와 내비게이션간 융합시스템을 개발하는 등 의료기기 분야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 교수는 국내 의료기기 기업들이 부진을 겪는 가장 큰 이유로 영세한 규모를 꼽았다. 그는 “총 2800여개 국내 의료기기업 중 20인 미만의 영세한 기업이 80%를 차지하고, 100인 이상 되는 기업은 3%도 채 되지 않는다”며 “한 중소기업이 정부과제를 5개나 떠맡아 직원 한명이 과제 하나씩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선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기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의료기기 설계 과정에서 의사와 의공학자·제조업자간 협업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 그동안 병원은 만들어진 의료기기를 임상시험하는 장소의 역할만 할 뿐 설계 및 생산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의료기기 제조는 수요자인 의사가 아닌 공급자인 의료기기 업체 위주로 이뤄진 게 사실”이라며 “의사들이 진료·수술 현장에서 피부로 느낀 니즈가 제품에 반영되지 않다보니 의료기기를 만들더라도 의사들이 사용하지 않아 제품화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한 의료기기 업체가 제조한 내시경의 경우 환자 몸 속에 삽입하는 과정에서 혈액이 묻으면 화면이 무지개색으로 변하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설계 과정에서 의사들의 자문을 받고 실제 수술실에서 시험가동을 해봤다면 미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국산 제품의 질과 활용도가 떨어지다보니 병원과 의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해외 제품을 들여올 수 밖에 없다. 보건산업진흥원 조사결과 2014년 기준 종합병원에서의 국산 의료기기 사용률은 19.9%, 상급종합병원은 8.2%에 그쳤다. 해외에서 의료기기를 수입하면 비용이 두 배는 상승해 병원 입장에선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고, 궁극적으로 환자의 진료비 상승을 초래할 수 있다.
국산 의료기기의 90% 가량이 해외에 수출되는데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국내 의사와 병원들이 써주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 의료 수준이 낙후된 국가에 제품을 수출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 교수가 이끄는 의료기기융합센터는 의료기기 설계 단계부터 의사들이 직접 참여해 기기 활용도와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의료기기 중개 임상시험센터, 의료기기R&D센터, 헬스IT융합센터의 기능을 통합해 제품 개발부터 임상까지 원스톱 지원한다.
내시경, 카테터, 스텐트 등을 포함한 최소침습의료기기(Minimal Invasive Medical Device)는 김 교수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다. 현재 경성내시경 중심의 최소침습의료기기의 세계시장은 지난해 기준 약 30조원 규모로 연 12%씩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2019년 6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김 교수는 “전체 의료기기기업의 17%(483개)가 최소침습의료기기를 연구·개발 중이고, 전체 진료과의 50% 정도가 이를 사용해 블루오션으로 인식된다”며 “의료기기융합센터는 산업통상자원부 핵심과제로 국내 의료기기업체와 함께 이비인후과용 경성내시경, 스코피스 내비게이션, 풍선카테터 등 최소침습의료기기의 국산화에 집중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이달 내에 정부로부터 중개임상시험지원센터로 지정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수술항법장치(내비게이션)는 수술 부위를 정밀하게 파악하는 장비로 뇌, 척추, 관절, 악안면의 복잡하고 세밀한 구조를 3차원영상으로 보여준다. 이비인후과질환 수술은 대부분 뇌와 안구 등 민감한 부위와 인접한 곳에서 이뤄져 약간의 오차도 큰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로 인해 내비게이션을 활용하면 수술 정확도와 안전성이 대폭 향상되지만 국산 제품은 전무하다.
카테터는 심혈관계, 근골격계, 호흡기계, 비뇨기계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특히 부비동수술을 위한 풍선카테터 시장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추세지만 전량 외국에서 수입하는 실정이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료기기융합센터는 2015년 24억원 규모의 산업자원통상부 핵심의료기기과제를 수행해 내시경·전기수술기·제세동기 등을 연구 및 개발했다. 올해부터는 향후 5년간 93억원 규모의 산자부 산업혁신기술과제를 맡게 됐다. 그는 “지난해 정부과제는 이미 국산화된 제품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올해는 이비인후과 내비게이션과 풍선카테터 등 전량 해외에서 수입하던 의료기기를 국산화하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갑을 관계로 인식되던 병원과 의료기기업체간 벽을 허물고 먼저 찾아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김 교수는 “병원 교수진과 의료기기 업체들이 직접 참여하는 기술설명회를 연 5회, 기술교류회는 연 2회 개최해 아이디어와 사업 방향을 논의한다”며 “기업 입장에선 병원 진입 문턱이 낮아지고 사업 영역을 확대할 수 있는 데다 제품 오류에 따른 재생산 비용 등을 절감하는 등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부터 1년간 20여 곳의 의료기기업체와 연구기관을 직접 방문했으며, 아이디어를 충분히 공유하기 위해 병원 내에 의료기기 업체 직원이 상주하는 기업지원실도 마련했다.
해외 바이어들을 초청해 직접 의료기기를 시연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김 교수는 “가천대 길병원은 공항과 항만이 가까운 지리적 이점 탓에 외국 의료진과 바이어를 초청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며 “의료기기 임상을 위한 핸즈온센터를 만들어 국산 의료기기가 실제 수술실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얼마나 효과적인지 해외 바이어 앞에서 직접 시연함으로써 국산 의료기기의 해외 진출을 활성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연구중심병원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 2800개 국내 의료기기업체를 위한 테스트베드가 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좋은 치료결과는 의사의 실력과 함께 우수한 의료기기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의료인들은 국내 의료기기의 발전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임상현장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가감 없이 들려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병원과 의료기기 업체는 서로를 갑을 관계로 인식하는 구식대적인 시스템에서 벗어나 제품 설계 단계부터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며 “정부는 의료기기 산업에 대한 추가적인 지원과 관련 업무를 통합 수행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선태(金善泰) 가천대 길병원 의료기기융합센터 이비인후과 교수 프로필
1988년 고려대 의학 학사
1999년 고려대 대학원 이비인후과학 박사
1988년 3월 ~ 1989년 2월 고려대 구로병원 인턴
1989년 3월 ~ 1992년 2월 고려대 구로병원 레지던트
1992년 3월 ~ 1995년 5월 공군 군의관
1995년 5월 ~ 1999년 2월 중앙 길병원 이비인후과 스태프
1995년 5월 ~ 1999년 4월 가천대 의대 이비인후과 부교수
1999년 3월 ~ 현재 가천대 길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2002년 3월 ~ 2004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UCSF) 연수
2008년 3월 ~ 2010년 2월 대한비과학회 상임이사
2008년 9월 ~ 2012년 8월 가천대 의학전문대학원 교무부장
2009년 9월 ~ 2012년 2월 가천대 이비인후과 과장, 주임교수
2012년 1월 ~ 현재 가천대 길병원 산학연협력지원단 단장
2012년 9월 ~ 현재 가천대 길병원 연구부장
2015년 12월 ~ 현재 가천대 길병원 의료기기융합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