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 한 모씨(24)는 1년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무려 20㎏ 가까이 살이 쪘다. 평소에도 통통한 체형이었지만 한국보다 다이어트에 관대한 문화, 입맛에 맞는 음식 탓에 마중 나온 부모님조차 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한 씨는 귀국한 뒤에도 특별히 다이어트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목뒤가 왜이렇게 새카매졌냐’는 말에 단순히 착색이 심해진 줄 알고 레이저치료를 받기 위해 피부과를 찾았다. 의사는 “이유 없이 피부가 착색됐던 것은 다름 아닌 비만 때문”이라며 “‘흑색가시세포증’(acanthosis nigricans)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흑색가시세포증(흑색극세포증)은 겨드랑이, 목 뒤, 사타구니(서혜부, 鼠蹊部, inguinal region), 팔이 접히는 부분, 항문 주위처럼 피부가 접히는 부위에 주로 양쪽으로 회색·갈색 색소가 침착된다. 몸의 굴곡진 곳 어디든 나타날 수 있다. 피부에 색소침착을 일으키는 케라토사이트(가시세포)가 지나치게 증식돼 유발난다.
단순히 색이 침착되는데 그치지 않고, 피부가 두꺼워지는 ‘각화과다증’(hyperkeratosis)이 나타나며, 주름이 지거나 도돌도돌한 조직이 돋아나는 ‘유두종성 융기’(papillomatosis)로 이어지기도 한다. 심한 경우 피부가 갈라져 염증이 생길 수도 있다.
특별한 검사 없이 피부병변의 특징적인 모양과 발생 부위로 임상적으로 진단할 수 있다. 피부에 마치 때가 낀 것처럼 변하고, 각질층이 도드라져보여 미용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나 사춘기 청소년에는 심한 콤플렉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비만은 성인병 등 만병의 근원이라고 여겨진다. 국내서는 외형적인 문제로 살을 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심하다. 미용적 측면에서 몸이 커지는 것 외에도 피부에 악영향까지 끼칠 수 있어 더욱 공포심을 자극한다.
정확하게 밝혀진 발병원인은 없지만 ‘인슐린저항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소연 서울대 보라매병원 피부과 교수는 “흑색가시세포증이 비만한 사람에게 잘 나타나는 것은 인슐린저항성이 초래되는 것과 관련있다”며 “피부에 인슐린양성장인자(Insuline like growth factor)에 대한 수용체가 존재하는데 수용체가 인슐린양보다 적어지면 인슐린이 피부로 마구 엉겨 붙어 피부 표피세포가 증식해 각질층이 두꺼워지면서 증상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표피 자체가 두꺼워지는 것은 아니고, 각질층이 두꺼워지다보니 색이 짙어지고 주름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슐린저항성 외에도 드물게 악성종양과 연관돼 발생되는 경우도 있으나 극히 드물다. 서양에서도 수만명 중 2~3명 정도에 그친다. 이럴 경우 상대적으로 주름이 잘 잡히지 않는 손바닥에도 지문이 확대된 듯한 모양으로 악성종양의 병변이 발생하기도 한다. 피부병변이 손바닥 같은 곳이나 점막 등 온몸에 나타난다면 악성종양을 의심해볼 수 있다. 비만이 없는 환자에서 특별히 다른 발생 원인을 찾기 힘든 경우 흑색가시세포증에 악성종양이 동반될 가능성을 두고 필요한 경우 소화기내시경 등 암검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이밖에 경구피임약 등 호르몬제 복용 후 병변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조소연 교수는 “흑색가시세포증은 몸이 통통한 수준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며 “위밴드수술 등 비만외과 수술이 필요할 정도의 고도비만자에서 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증상은 통통한 사람의 경우 겨드랑이에, 더 심하면 사타구니 정도에 그친다”고 덧붙였다.
비만아동에서 흑색가시세포증이 나타나면 성인 당뇨병의 시작을 알리는 지표로 해석되기도 한다. 대한소아과학회는 “흑색가시세포증이 나타난 비만아들의 공복 혈당수치와 인슐린저항성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높았다”며 “특히 중등도 이상 비만도를 가진 아이들은 흑색가시세포증이 나타날 경우 성인 당뇨병의 발병 위험이 높은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학회는 따라서 우리나라 비만아동들 중 성인 당뇨병 위험군을 조기에 찾기 위해 흑색가시세포증에 대한 정확한 유병률 조사와 추가 연구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흑색가시세포증의 존재 유무를 학교신체검사 항목에 포함한다.
유재호 부산 동아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성장기에는 필수 영양소 공급이 필요하므로 비만이 심하지 않을 때는 체중을 줄이기보다 더 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체중이 늘지 않은 상태에서 키가 커지면 비만도는 정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
흑색가시세포증은 어느 질환이든 그렇듯 원인을 찾아 빨리 자기에게 맞는 처방을 받는 게 중요하다. 일반 피부질환처럼 약물치료 및 레이저요법을 받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방치하면 색이 더 진해지고 다른 부위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관리가 시행돼야 한다.
특별한 치료법은 규정된 게 없다. 비만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체중감량이 우선이다. 살이 빠지면 병변이 호전되므로 정상체중으로 돌아오는 게 급선무다. 조소연 교수는 “아직까진 임상에서 완치된 사례를 보지는 못했다”며 “살을 빼면 분명히 좋아지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살을 빼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악성종양이 동반된 환자는 종양을 제거하면 병변도 호전되므로 빨리 병원을 찾는 게 최선이다.
질병 유발 원인에 부합하는 처방을 받는 게 기본이다. 병변 개선을 위해 보조적으로 비타민A를 포함한 레티노이드를 복용하거나 피부에 바르면 치료에 도움이 된다. 레티노이드연고는 피부의 접히는 부분에 늘어난 각질층 두께와 간혹 나타나는 악취를 줄여 피부상태를 좋게 만든다. 1일 1~2회 정도 환부에 바르면 된다. 젖산암모늄크림 12%(ammonium lactate 12%)는 병변을 부드럽게 개선하는 데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