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楊州)’라는 지명은 고려 현종 임금이 이 지역에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고을이라고 하여 지었다는 말이 전한다. 고구려 때에는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매성군(買省郡), 혹은 창화군(昌化郡),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내소군(來蘇郡)으로 불렸다.
고려 태조 때 내소군은 견주(見州郡)으로, 한양군(漢陽郡: 서울 강북 일대, 구리시, 남양주 상당 부분)은 양주군(楊州郡)으로 바뀌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양주와 견주를 합쳐 양주목으로 승격됐다.
그러나 현종 9년(1018년) 12목이 8목과 여러 도(道)로 개편되면서 견주(오늘날의 양주군과 의정부)는 양광도(楊廣道: 경기도 양주와 광주의 머리글자)에 속하는 견주현으로 격하됐다. 경주와 평양을 오가는 중심지가 양주에서 개경으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고려 문종 21년(1067)년 양주의 중심지를 남경으로 정하니 그 중심지가 지금의 서울시 광진구 일대였다. 남경을 둘러싼 게 양주목이고 양주목은 한양군, 견주군, 풍양현(남양주 진접읍), 행주현(고양시 행주동), 사천현(동두천)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지명이 됐다.
요컨대 지금의 양주는 견주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의정부시가 떨어져 나간 형국으로 존재한다.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양주는 교통이 편리하고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고대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의 각 쟁탈전이 치열했던 지역이다.
신라와 고구려 군의 최후의 대규모 전투인 이른바 ‘매초성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양주 지역이었다. 당시 매초성의 위치는 양주시의 불곡산, 천보산,칠봉산에 둘러싸여 있는 양주시 회천동, 양주동 일대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주군은 양주부-양주도호부를 거쳐 양주목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인 연산군 10년(1504년)에 경기 북부 지역에 국왕의 무예 연마를 위한 수렵장을 조성하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는 금표가 설치되면서 한때 양주목이 소멸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중종 때 다시 양주목이 부활됐고 유양동 일대에 동헌과 향교, 사직단, 객사 등이 건립되면서 유양동을 중심으로 한 양주 시대가 열렸다.
애초에 양주 지역은 지금의 양주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지역이었다. 현재의 의정부시, 동두천시, 남양주시, 구리시, 연천군 전곡읍뿐만 아니라 서울시 동북부 일대의 노원구, 도봉구, 중량구, 광진구와 고양시 일대가 모두 양주목에 소속됐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고양군이 떨어져 나가고, 전곡은 연천군으로 넘어갔다. 이어 1963년 서울 대확장 시기에는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일대가 서울로 편입됐고, 의정부읍이 의정부시로 독립했다. 1980년에는 남양주, 구리 지역이 남양주군으로 분리됐다. 1986년 남양주군 구리읍이 구리시로 승격했다. 남양주군과 미금시가 1995년 통합돼 남양주시가 됐다. 1981년 양주군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팔다리를 다 떼어주고 몸통만 남은 꼴이 된 양주시는 도락산 불곡산을 잇는 능선을 중심으로 두 지역으로 크게 나뉜다. 서쪽에는 신천 주변으로 백석읍, 광적면, 남면, 은현면 등이 펼쳐지고 동쪽은 회암천과 청담천이 흐르며 덕정역, 덕계역을 중심으로 양주 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다.
송추계곡과 장흥관광지로 유명한 장흥면이 의정부시 남쪽과 이어져 있다. 양주시는 대부분이 농촌지역인데다 군부대가 많아 발전이 더디다. 최근에는 농촌지역 깊숙이 섬유, 화학 등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중소공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환경오염 문제도 심각하다.
그럼에도 양주시 회암동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목전에 두고 있는 조선 전기 최대 사찰로 알려진 회암사와 회암사 박물관이 있으며, 유양동에는 양주객사가 복원돼 양주향교와 더불어 과거 양주목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장흥면에는 장흥아트밸리, 남경 수목원, 장욱진미술관 등 볼거리가 넘쳐난다. 그런가 하면 양주 나리공원 일대에서 펼쳐지는 ‘양주나리공원 천일홍축제’는 대표적인 가을 축제로 각광받고 있다.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전국에서 수 십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조선 최대의 왕실사찰 ‘회암사’ … 승려 3000명, 262칸에 기거 … 문정왕후 때 절정
양주시 천보산 남쪽 기슭에는 조선시대 최대 사찰로 알려진 회암사(檜巖寺)의 폐사지인 회암사지가 있다. 회천동(법정동) 낸 회암동 21번지다. 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 왕사로서 조선 초기 전국 최대 규모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폐사지 방문은 역시 해질 무렵이 최적의 시간이다. 뉘엿뉘엿 연갈색으로 사그러져 가는 빛 속에서 폐사지는 쓸쓸함과 외로움, 인생무상의 정서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회암사지 전망대에 오르면 폐사지의 전체적인 모습을 더 잘 조망할 수 있다. 비록 폐사는 되었지만 가람의 형태는 온전하게 보존돼 있음을 알 수 있다.
1997년부터 시작된 회암사지 발굴은 2015년까지 무려 10여 년 동안 12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70개소에 달하는 건물지가 확인됐다. 이중 35개소 이상에서 다양한 시설의 구들이 확인됐다. 구들의 구조 및 배치, 처리 기법 등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회암사지의 구들 시설은 우리나라 최대 온돌 유적으로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배수로와 화장지 등이 발견돼 당시의 위생시설 수준을 가늠케 한다.
회암사는 창건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2세기 금나라 사신이 들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12세기 중엽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 인도의 고승 지공의 제자 나옹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고 그의 제자 무학대사가 주지로 재임하는 동안 더 크게 번창했다. 태조는 왕위 양위 후 이곳 회암사에서 기거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불도에 전념했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확장했고, 명종 때 문정왕후의 입김을 얻어 조선 전기 전국 최대의 사찰로 번성했다. 고려 말 대학자인 이색의 ‘목은집’에는 승려의 수가 3000여 명, 건물은 모두 262칸, 높이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을 모셨다는 기록이 보이인다. ‘건물이 크고 웅장하여 동국 제일이며, 중국에서도 이러한 사찰을 보기 힘들 것’이라고 적혀 있다. 문정왕후 사후 회암사는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1566~1595년 이후 유생들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회암사지에서 건물 터뿐만 아니라 청기와, 용봉 문양 막새, 잡상 등 수많은 유적들이 출토됐다. 이들 유물은 ‘회암사지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 추정 회암사지 사리탑(보물 제2130호)
천보산 기슭 바로 아래쪽에 ‘회암사지 사리탑’이 홀로 외롭게 서 있다. 사리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각 층마다 용과 말, 연당초문(蓮唐草文: 연꽃과 당초의 무늬가 연달아 이어짐) 등의 조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기단부에 남아 있는 용마상은 무척이나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회암사지 사리탑은 탑의 규모와 조각 수법 등이 조선 초기의 양식을 계승한 탑으로 왕실 불교예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어 가치가 매우 높다. 2021년 6월 24일 보물 2130호로 지정됐다.
출토 유물 전시하는 회암사지박물관 … 무학대사 승탑 옆 새로 지은 회암사
회암사지박물관에는 회암사에서 발굴된 유물들의 대부분이 전시되고 있으며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전돼 보관 중이다.
1층에는 상설전시실과 영상 체험실, 방문자 센터와 회암사 대가람실이 있다. 회암사의 창건, 관련 주요 인물 등 회암사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물들로 꾸며져 있다.
영상체험실에서는 출토된 유적과 학술자료 등을 통해 고증된 회암사의 모습을 3D 영상으로 구현한 영상물을 관람할 수 있다. 사찰의 구조와 구들 시설, 배수 시스템 등이 영상을 통해 입체적으로 재현돼 회암사의 과거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회암사는 종교적 공간과 정치적 공간이 혼용돼 있는 게 특징이다. 전면의 보광전, 설법전과 같은 종교적 공간이라면 후면의 정청이나 동서 방장은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됐다. 궁궐의 편전이나 침전의 배치 형식을 고려한 독특한 건물 배치는 회암사가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왕실의 집무공간으로도 사용됐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전시실 중앙에는 태조 이성계가 회암사를 방문하는 어가 행렬이 미니어처로 재현돼 있다.
2층 전시실에는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기와, 용두토수(龍頭吐首), 잡상들과 불화 등이 전시돼 있다. 왕실에서만 사용되었던 백자나 분청사기 및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서 볼 수 있는 용 문양과 봉황 문양 기와, 청기와, 용두 등을 통해 회암사의 높은 지위를 실감할 수 있다.
회암사지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회암사지 그리고 양주” 특별전을 열고 있다. 오는 3월 26일까지이다. 회암사지의 발굴 및 정비의 역사를 도표와 사진, 도면 등으로 만나볼 수 있다. 문정왕후가 남긴 불화 복제본 5점도 전시돼 있다. 특히 회암사가 명문으로 드러난 최초의 유물인 청동 금탁의 진본을 만나볼 수 있다. 그동안 진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회암사지박물관에는 사본이 전시돼 있었다.
회암사지와 박물관까지 둘러보았다면 이번에는 회암사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의 사리탑들을 찾아보자. 회암사지에서 차로 5분 정도 천보산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아담한 절집 회암사가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 지어진 회암사가 아닌 최근에 지어진 절집이다. 대웅전과 관음전, 조사전, 삼성각, 요사채 등의 전각을 갖추고 있으며 천보산과 어우러져 그윽한 절집 향취가 물씬 풍긴다.
이 절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조금 오르면 무학대사 승탑(보물 제388호)과 그 앞의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지공선사의 승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49호), 나옹선사 승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50호)이 세워져 있다. 이들 석조 유물들을 통해 당시 회암사에 주석했던 승려들의 면면과 회암사의 위상을 새삼 짐작할 수 있다.
양주향교, 450년된 느티나무 … 흥선대원군 사위 조정구 양주소학교 세워
향교는 조선시대 국가가 세운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중·고등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시와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배우는 경학이 주 교육내용이었다. 유교의 성립과 발전에 공을 세운 중국과 한국의 선현들에 대한 제를 올리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양주에도 조선 태종 원년(1401년)에 건립된 향교가 남아 있어 조선시대 교육 및 제사 문화를 살피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제를 지내고 봄가을로 일년에 두 번 유림들이 모여 석전제를 지낸다. 청소년 예절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양주시 유양동에 위치한 양주향교는 양주시청에서 차로 약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인근에 양주 관아와 양주 별산대 공연장이 있어 두루두루 ‘전통’을 체험할 수 있다.
향교 앞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우람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전소될 때에도 살아남았다. 그 뒤쪽으로 향교의 출입문인 외삼문이 있다.
양주향교는 향교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인 ‘전학후묘’ 양식을 따라 앞쪽에 명륜당이 있고 뒤쪽으로 내삼문 안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다. 내삼문은 ‘동입서출’라 하여 반드시 동문으로 들어가고 서문으로 나와야 한다. 성조(聖朝)라 적힌 중문은 신도(神道)라 하여 제물과 제주만 출입할 수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중국 5성과 송조 2현(정호, 주희),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 정몽주, 조선 우암 송시열, 김장생, 김진, 조광조, 이황, 이이 등 우리나라 18선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태종 원년인 1401년에 세워진 양주향교는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됐다. 인조 때 재건됐으나 한국전쟁 때 또다시 전소됐다. 지금의 향교는 유림들에 의해 대성전은 1958년에, 명륜당은 1984년에 각각 재건됐다.
1896년 9월 양주향교에 근대식 양주공립소학교가 개교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양주군수 조정구가 명륜당 앞마당에 심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
조정구(趙鼎九, 1860~1926)는 흥선대원군의 사위이자 고종의 매부로 홍문관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1899~1902년에 양주군수를 맡았다. 경술국치 직후 일제가 내린 남작 작위를 거부하고 자결을 기도하기도 했다. 7년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차남 조남익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해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에서 기거하다 노환으로 별세했다. 아들 조남승과 조남익, 딸 조계진을 두었다. 딸 조계진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 규학과 혼인해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을 낳았다. 순종이 사망 직전 한 유언을 구술 받아서 신한민보에 공개한 사람이다.
양주별산대놀이, 중요 무형문화재 2호 … 밤10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에 끝나
양주향교에서 5분 거리에 양주별산대공연장이 있다. 한양과 인접했던 양주에는 조선시대의 한양권 전통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양주 상여소리와 회다지, 양주별산대놀이가 대표적인 예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2호로 지정됐을 정도로 문화적,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다. 매년 5월 양주별산대놀이 정기 공연이 있다. 공연 중에는 주민들에게 떡도 나눠주고 탈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행사와 먹거리 장터가 열려 주민들의 흥겨운 잔치 마당이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는 통영오광대와 제11-2호로 지정된 평택 농악공연 등이 함께 진행되기도 해 우리나라 전통놀이 공연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대축제의 장이 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의 한 분파로 녹번, 아현, 구파발, 사직골, 송파 등지의 본산대와 구별하여 별산대로 부른다.
약 250여 년 전부터 백정, 상두꾼, 건달로 구성된 한양 딱딱이들을 불러 놀게 하였는데 지방 공연 관계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잦아지자 아예 양주골 사람들이 직접 딱딱이패를 본떠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한 게 양주별산대의 시작이다.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한가위에 주로 연희됐다. 기타 대소 명절, 가뭄 때의 기우제에도 공연됐다. 연희는 한번 시작되면 대체로 밤 10시를 넘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놀이는 길놀이로 시작된다. 별산대 깃발과 영기를 앞세우고 연희자들이 풍물을 올리며 마을을 돈다. 낮에는 주로 부잣집에 들러 춤과 덕담을 베풀어 흥을 돋우다가 밤에 탈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탈고사’를 지낸다. 놀이 전 고사에는 삼색 떡과 과일, 소머리, 돼지다리 등이 올라온다. 제물과 제주를 음복해 취기가 돌면서 본격적인 놀이가 시작된다.
산대놀이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사당(社堂: 오늘날의 연예인), 무당, 기타 늙고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해 현실 폭로, 풍자, 호색, 웃음과 탄식을 보여주는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서민 탈춤극이다.
양주별산대는 모두 8과장 8경으로 구성돼 있고 사미승, 어린 중, 옴중(옴·피부병이 옮은 중), 상좌, 먹중, 팔먹중 등이 등장한다.
모두 배역에 맞는 탈을 쓰고 나와 음악 반주에 맞춰 춤과 노래, 재담(대사)을 구사하는 종합예술이다. 각 배역의 재담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절로 흥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노골적인 음담패설에 민망해지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쓰고 나오는 탈 모양도 매우 흥미롭다. 옴중은 옴이 옮은 중으로 검은 점을 얼굴 전체에 그려 넣는다. 원숭이, 애사당, 노장, 취발이 등의 모습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