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재유행 전 접종 이뤄져야, 500만도스 전부 파기 여부가 관건 … 촘촘한 백신 유통체계와 감시망 구축해야
지난 22일부터는 생후 6개월~만 18세 소아청소년과 임산부를 대상으로 시행하려던 독감(인플루엔자) 백신 무료접종이 하루 전 심야에 전격 중단됐다.
국가필수예방접종(NIP) 사업에 소요될 독감백신의 유통을 맡은 신성약품이 무료접종에 쓰일 백신 일부를 상온으로 유통한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당국이 품질 확인 및 유통 과정을 점검 중이지만 그 사이 무료접종 일정은 모두 미뤄졌다.
언제 다시 무료접종이 재개될지 모르는데다 백신물량이 부족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면서 서둘러 백신을 맞으려는 병원 앞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제2의 ‘마스크 대란’이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당국은 2주간 검사 후 접종을 재개한다고 하지만 검사 결과에 따라 백신 부족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예년보다 늘어난 무료접종 대상자 … 접종 일정 전면 중지
의료계 전문가들은 올 겨울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 코로나19)과 독감이 동시 유행할 경우 방역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보고 독감백신을 서둘러 맞을 것을 권장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겨울철 코로나19 2차 대유행을 대비해 가을에 미리 독감백신을 접종할 것을 권장했다. 최근에는 독감과 코로나19에 교차 감염될 경우 전파력이 2배가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된 바 있다.
이에 정부는 올해 무료 독감백신 접종 대상자를 생후 6개월~만 18세 유소아청소년, 임산부, 만 62세 이상 고령층 등 1844만명으로 확대했다. 기존 대상자는 생후 6개월~만 12세 유소아, 임산부, 만 65세 이상 고령층이었다. 올해 무료접종 대상자는 국민의 36%에 달한다.
지난 8일부터 생후 6개월~만 9세 소아에 대한 무료접종이 스타트를 끊었다. 22일부터는 6개월~만 18세를 대상으로 넓혀질 예정이었다. 오는 10월 13일부터는 만 75세 이상 고령층, 10월 20일에는 만 70~74세, 10월 27일에는 만 62~69세에 대한 무료 접종 일정이 계획돼 있었다.
이들에게 사용할 독감백신 가운데 585만명분은 지방자치단체(보건소)에서 자체 확보했으며 그 외 일선 의료기관에 들어갈 1259만명분은 질병관리청과 계약을 맺은 신성약품에서 독점 공급을 맡았다.
그런데 22일 무료접종 시작 하루 전에 독감 백신이 유통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됐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제보자는 독감 백신이 종이상자에 담긴 채 바닥에 놓여 있는 모습, 백신 수송차량 기사가 백신이 보관된 냉장차 문을 열어둔 채 백신 분류작업을 하는 모습 등을 촬영해 질병관리청에 신고했다.
백신 상온노출에 대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무료접종을 맡았던 일선 병의원 등에서 백신이 종이 상자에 담겨 왔다는 증언도 이어지고 있다. 의사 전용 커뮤니티 등에서는 독감백신이 아이스팩 등의 냉매 없이 종이상자에 담겨 전달됐으며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글들이 다수 올라오고 있다.
백신의 주요 성분은 항원 단백질이다. 적정온도에서 보관하지 않으면 이 단백질이 변질돼 효과가 떨어지거나 경우에 따라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때문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7월 ‘백신 보관 및 수송 관리 가이드라인’를 발표하고 “백신 보관 적정 온도는 2~8℃, 평균 5℃”이라고 규정했다.
식약처와 질병청은 무료접종을 중단하고 공동조사단을 꾸려 내용을 조사 중이다. 백신 품질 확인 및 유통과정 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정은경 질병청장은 “최대 2주 안에 결과를 알리겠다”고 지난 22일 밝혔다. 항목별 시험 기간은 1~2일이지만 무균 시험에 14일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은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면 결과가 나오는 즉시 접종을 재개하겠다고 밝혔지만 백신 방역 일정에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당국 “예년보다 접종 한 달 빨라져 지연돼도 문제 없어” … 500만명분 폐기되면 방역 차질
일정이 미뤄지고 무료백신의 품질에 대한 우려가 겹치면서 무료 대상자임에도 유료백신을 맞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늘고 있다. 여기에 신성약품이 유통한 백신이 모두 폐기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서둘러 유료백신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품귀현상마저 빚어지고 있다.
예방접종은 독감 유행 전에 맞아야 한다. 독감과 코로나19의 유행 시기와 증상이 비슷해서 함께 확산될 경우 방역에 큰 구멍이 뚫릴 수 있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독감과 코로나19의 초기 증상이 비슷한데, 독감백신을 맞으면 관련 증상이 생길 경우 코로나19만 검사하면 된다”며 “독감 예방접종이 이뤄지지 않으면 두 질병을 감안해서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방역에 드는 인력과 시간이 소모되고, 환자들이 섞이면서 교차감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서 독감은 보통 11월 중순에 확산되기 시작해 길게는 이듬해 초여름까지 유행한다. 지난해 방역당국은 11월 15일 독감주의보를 발령해 올 3월 27일 해제했다. 적어도 11월 전에는 독감 예방접종이 어느 정도 마무리돼야 한다는 얘기다.
당국은 일정이 지연돼도 독감 유행 시기에 맞춰 접종할 수 있다며 건강한 사람들이 서둘러 유료 백신을 맞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올해 무료접종 대상자가 늘어난 만큼 접종 시기를 작년에 비해 한 달 당겨서 시작했기 때문에 품질검사로 2주가량 소요돼도 일정상 큰 차질을 빚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당국은 안전성에 문제가 없는 게 확인되면 신성약품 공급분 500만 도스(1회 접종분) 외에 나머지 700만 도스를 풀어 13~18세를 시작으로 62세 이상 무료접종을 순차적으로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백신 접종 지연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질병청은 22일자로 중단됐던 인플루엔자 국가 예방접종 사업을 25일)오후부터 일부 재개키로 했다. 문제가 된 백신과 공급체계가 다르게 운영되고 있는 만 12세 이하 어린이(2회 접종대상자 포함)와 임신부에 한해서다. 일선 병의원에서 일단 접종하고 나면 나중에 급여로 약제비와 주사비를 청구할 수 있다는 조치가 나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문제가 된 백신 중 얼마나 폐기되느냐에 따라 백신 부족 사태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신성약품이 유통한 백신은 총 500만 도스로 올해 국내에 공급된 독감백신 총량 2964만 도스의 약 17%, 공공접종분의 약 27%에 해당한다. 업체는 500만 도스 중 17만 도스만이 상온에 노출됐다고 주장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500만 도스 모두 폐기해야 할 가능성도 남아있다. 이 경우 백신 물량이 크게 부족해 독감에 대해 통제력을 잃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문제가 된 500만 도스 백신을 전량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원급 의료기관을 운영하는 의사들의 단체인 대한개원의협의회도 23일 성명을 내고 상온 노출 백신 전량 폐기를 요구하고 나섰다.
김우주 교수는 “독감백신 500만 명분이 갑자기 사라질 경우 정부가 세운 올 겨울 방역계획이 흔들릴 수 있다”며 “질병청은 지금 백신 효능과 안전성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최악의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비상계획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은경 질병청장은 “인플루엔자 백신은 통상적으로 25도에서 최소 14일, 최대 6개월까지는 품질이 유지되었다는 시험결과가 있다”며 폐기에 신중해야 하며,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면 500만도스를 사용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백신 재생산‧민간 접종분 전환‧수출물량 전환 등 거론 … 현실성 낮아
500만 도스의 백신이 폐기될 경우 이를 메울 수 있는 방법으로는 백신 재생산, 민간 접종분 공공물량 전환, 수출용 백신 확보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백신을 재생산하려면 6개월이 걸린다. WHO가 매년 2월께 유행할 가능성이 높은 인플루엔자 유형을 예측하고, 백신 제조사들은 이를 반영해 백신을 생산한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계절 차이를 고려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데 북반구 백신 제조 기한은 이미 종료됐다.
민간 접종분을 공공 물량으로 돌리는 방안도 전체적인 국민 보건에 도움이 안된다는 지적이다. 20~50대 고위험자 기저질환자가 무료접종 대상자에서 빠져있는데 민간 접종 분을 줄이면 이들이 위험에 처한다.
위약금을 주고 남반구에 수출하기 위해 제작 중인 백신을 국내로 돌리는 방안이 가장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만 업체들이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건강한 성인의 경우 백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며 예방접종 과열을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독감 예방접종은 독감에 걸리면 폐렴으로 이어져 상태가 위중해질 수 있는 유아, 고령자, 임신부, 만성질환자 등에겐 필수적이다. 하지만 대부분 건강한 성인은 고열이 난 지 이틀 내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복용하면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되므로 무리하게 백신을 맞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김우주 교수는 “독감 예방접종은 10월 중순까지만 맞으면 된다”며 “패닉에 빠지기보다 좀 더 차분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폐렴으로 발전될 수 있는 고위험군만 예방접종을 하면 되지 모든 국민이 독감이 두렵다고 접종을 할 필요는 없다”며 “마스크 잘 쓰고 손 잘 씻고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는 것 등 개인 위생수칙을 지키는 게 백신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모란 국립암센터대학원 예방의학과 교수도 “매년 준비한 백신보다 맞는 사람이 적어 100만~200만 도스를 폐기 처분해 왔다”며 “예방접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예방접종률을 높여야 하는 것은 건강한 성인이 아닌 만성질환자들”이라고 강조했다.
또 기 교수는 “먼저 겨울을 맞은 호주 뉴질랜드 등 남반구 국가에서 코로나19 개인방역 영향으로 독감이 90% 줄었다”며 “국내도 올 겨울 독감이 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종이상자로 담아도 불법 아냐 … 이번 기회에 국내 백신 유통 체계 점검해야
이번 일을 계기로 국내 백신 유통 체계 전반을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김우주 교수는 “감염병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려면 백신 접종이 필수적”이라며 “코로나19 백신이 생산돼 국내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백신 유통체계를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성약품은 일부 백신이 상온에 노출된 점을 인정하면서도 “종이상자에 담긴 백신을 냉매가 든 캐리어에 담아 운반하는 것 자체가 규정을 어긴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백신 수송 방법을 규정한 법령 '생물학적 제제 등의 제조·판매관리 규칙'(총리령) 6조에 따르면 백신 운송시 10℃ 이하 온도가 5∼6시간 유지될 수 있는 철제 또는 견고한 플라스틱 상자를 이용하도록 하고 있으며 온도 유지 시간을 늘리기 위해 용기 내부에 스티로폼 등 단열재 장치를 하고 여기에 더해 화학냉각제 또는 얼음덩어리를 넣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판매자가 냉동차량 또는 냉장차량으로 직접 수송하는 경우에는 별표에 의한 수송용기를 사용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업체의 말대로 종이상자를 사용해도 불법이 아닌 것이다.
향후 일어난 감염병 사태를 대비해 더 촘촘하고 정밀한 백신 등 약물 유통 체계와 감시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