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학기를 두고 휴학을 결정하는 대학생들. 일명 ‘스펙 쌓기’를 하기 위해서다. 토익시험과 함께 영어회화도 늦춰서는 안된다. 이같은 ‘스펙 쌓기’를 해도 취업이 쉽지 않아서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청년실업률은 9.4%로 나타났다. 취업난과 비싼 대학 등록금 등 경제적 문제로 2030세대들의 아픈 청춘을 지칭해 ‘3포세대’, ‘5포세대’, ‘N포세대’라는 별명이 생겼다.
3포세대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다. 5포세대는 3포에 내집마련,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이들이다. 모든 게 취업조차 힘들고 학자금 대출의 빚도 남아있는데, 어떻게 결혼을 생각하고 아이까지 기대할 수 있느냐는 입장에서 비롯됐다. 한국사회의 피할수 없는 현실이라고 하지만 꿈과 희망마저도 잃어간다는 게 정신과의사로서 마음이 아프다. 이들을 내가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
첫째, 정해진 기준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라. 그런 법은 없다.
20대들을 진료실에서 만나면서 25년 전의 나의 20대 생각과 달라진 바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여전히 일류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을 나와서는 쉬지 않고 곧바로 대기업에 취업해야 하며,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만 하고, 결혼했다면 집을 사고 아이들을 낳아서 키워야 하는 것을 정석으로 삼는다.
3포나 5포를 원하지 않는 부류도 있지만, 이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N포세대’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는 부정적인 의미도 자발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포기에 가깝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른바 몇 살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수학공식과 같은 삶이 왜 정석이 되었을까. 부모가 바라는 삶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석에 가까운 삶의 기준에 맞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생의 루저’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다.
성형수술이 유행하는 것도 어떤 미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자기 모습이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여고생들의 대화를 듣게 된 적이 있다. “너는 코해야겠다. 코가 뭉뚝해서.” “엄마한테 해달래야지. 엄마가 나 대학가면 해준댔어.” “정말? 너희 엄마가 해준대?” “엉, 내 코를 이렇게 낳아줬으니 엄마가 수술시켜줘야지.”
얼핏 본 그아이의 콧대는 평균 이상의 예쁜 코모양인데, TV화면에 늘상 비치는 ‘연예인 모양의 코’만이 예쁜 코라고 생각하나보다. 이미 유럽에서는 결혼이나 출산에 대한 선택의 권리를 존중해준다. 가족이 주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예외도 있다. 모든 남녀가 일정한 때가 되면 꼭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통과의례를 강요할 수는 없다.
이제 초혼연령이 32세. 세상은 달라졌다. 이제 30대 여성에게 해야 할 질문은 ‘왜 그 나이까지 결혼 안하고 있냐’가 아니라 ‘왜 벌써 결혼했냐’가 됐다.
둘째, 부모를 탓하지 말자. 아무런 득이 안된다.
가장 불행하고 우울한 순간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리 집안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돈이 많아서 나와는 다른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과의사를 하다보면, 같은 부모에게 나온 형제나 일란성 쌍둥이들조차도 너무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목구비가 다 다르듯이 내 인생과 저 사람의 인생은 비교나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법이다.
진료실에서 만난 두 자매는 서로 비난을 일삼았다. 언니는 동생이 어려서부터 예뻤기 때문에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결혼도 먼저 하게 되었다며 자기 삶을 비관했다. 동생은 언니가 첫째라서 교육의 혜택을 더 받아 좋은 대학을 가고 전문직 여성이 되었다며 둘째라서 서럽다고 하였다. 불평불만을 시작하다보면 끊임 없이 나올 수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런 불평불만을 이제 좀 버려라. 불평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순간, 내 결핍감은 커지고 자포자기가 되니 아무런 이득이 없다.
기성세대가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인식한 데 비해 요즘 청년들은 노력보다 ‘물려받은 것’이 성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현실적 어려움이 반영된 사고방식이겠지만, 몇 살까지는 무엇을 해놔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인생에서 뒤진다는 조급함도 문제다.
“내가 서른살이 되면 이보다는 더 나을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서른살까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100년 인생에서 서른살 이후에 지속적인 성장을 하는 것이다. 부모 곁을 떠날 나이가 되면 대다수는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고, 어떤 위치에 오르면 나하나 말고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생긴다. 부모 덕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눅이 든다면 당신은 지금 허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말자.
셋째, 내 시간의 주인은 내가 되자.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라.
물질만능주의가 되다보니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여전히 만족할 수가 없다.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무조건 더 행복에 가까워보인다. 부모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좀 천천히 벌고 여유 있게 살아도 되는데, 이만하면 되지 않았을까라고 만족할 순 없는가. 바쁘다는 게 자랑인 삶. 바쁘지 않으면 나는 뒤지는 듯하다.
나 역시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정신없이 달려왔고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부했었다. 10여 년간 가진 것은 점점 늘어났을지 모르지만, 많이 지치고 힘들었다. 미국 유학을 결정하는 순간은 마치 달리는 기차에서 몸을 던져 뛰어내리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빈들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는 느낌으로 미국 생활이 시작됐다. 아무도 조급하게 굴지 않았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한심하고 불안했다.
미국에서 제일 처음 배운 것은 시간의 주인이 되는 것. 35년간 단 한번도 내 마음대로 내 하루 24시간을 써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이 처음에는 얼마나 길게만 느껴졌는지 모른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 예컨대 시장을 봐 밥을 해먹고 치우는 일, 소파 덮개를 만드는 일, 화분에 꽃을 심는 일 등이 새롭게 다가왔다. 비록 돈이 많이 드는 여가가 아니더라도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꾸려나가면서 ‘자기조절감’, 즉 자존감이 높아짐을 느꼈다.
좇기는 삶이 아니라, 내 시간의 주인이 되는 인간성의 회복이라고나 할까. 미국 유학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재충전할 나홀로의 시간’을 의도적으로 챙기는 얄미운 이기심을 갖는 것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은 마음이 충전돼 감정의 찌꺼기도 잘 씻어내고 인정욕구에 목말라 허우적거리는 시간들을 절약할 수 있다.
넷째, 쉬는 시간도 일의 연장이다.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
프랑스는 한달간 휴가를 법적으로 인정한다고 한다. 신입사원까지도 당당하게 한달 휴가를 떠난다. 우리나라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법정 공휴일조차도 눈치를 보면서 쉬어야 한다.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도 무리를 떠나서 혼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곳곳에 있다. 이 구절이 굳이 왜 성경에 씌여져 있을까. 3년간 사람들을 가르치고 치료한 내용만으로도 꽉 찰텐데 말이다. 쉬는 시간도 곧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메시지를 믿는다.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운동할 시간이 없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시간을 내서 운동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음을 고쳐 먹어보자. 직장을 마치고 길 건너에서 운동을 시작하거나, 퇴근 길 30분간 집근처를 걸어보자. 내 퇴근시간은 운동이 끝나는 시간, 운동도 내 업무의 연장이다. 내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계속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때 커피 전문점이 왜 인기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커피가 맛있어서가 아니다. 일상을 떠나 잠시나마 한가로이 커피를 마실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제공해서다. 일상에서 단 몇 분만이라도 도망쳐보라.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다가 눈을 들어보면 벌써 바깥이 어두워졌다고들 한다. 가끔은 건물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고 호흡을 해보아라. 조금은 농땡이를 쳐도 된다. 그만큼 일했으면 됐다. 학교나 직장생활 몇 년쯤 하다보면 잠시 쉼표를 찍을 때도 있을 것이다. 너무 불안해 말아라. 조급하겠지만, 내가 뛰어갈 방향을 고를 시간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