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회적 통념을 지키라는 평균적인 교육을 받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산다.그러나 많은 사람이 옳다고 규정한 것이 항상 ‘진짜’ 일까.
고교 시절 친구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인상 깊다. “내 친구들 보면 착하고 공부만 하고 모범생인 애들은 못된 남편 만나 고생하고,고교 때부터 빵집 다니며 남자 애들과 미팅한 애들은 남자 잘 만나 호강하며 지낸다”는 말씀이다. 28년이 지났는데도 그 이야기가 종종 생각이 난다.
필자를 찾아온 40대 어머니는 딸 뒷바라지에만 매달려 특목고에 외국 명문대까지 합격시켰는데 막상 가슴이 허전한 ‘빈둥지증후군’을 앓고 있다.특히 유학 떠나기 직전인 딸과의 다툼이 잦다고 호소했다. 귀가 시간을 오후 11시까지 넉넉히 줘도 자정 넘어서 집에 들어오는 게 다반사란다. ‘따님에게 결혼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세요’라고 물으니 ‘네가 얌전히 조신하게 지내고 조건(스펙)을 잘 갖추면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다’라고 답한단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두 가지를 갖춰야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돼요.하나는 나랑 잘 맞는 좋은 남자인가를 볼 줄 아는 안목, 둘째는 그 남자를 내 남자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 전에 최소 두세번의 연애는 필수적이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했다.그리고 “개인적인 삶의 목표는 뭐에요”라고 물으니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님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들에 대해 앞으로 이야기 나누자”며 다음에 만날 때까지 마쳐야 할 숙제를 드렸다.
요즘 종종 어머니들 모임에 끼게 되는데 다들 자기 이야기가 없다.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관심과 의견 교환으로 전체 대화가 가득 차 있다. 아이에게 ‘올인’하지 않으면 아이가 잘못될 것 같고 마치 나쁜 엄마가 될 것 같은 불안에 싸여 있다. 스스로의 현재에 초조하고 못하고, 앞으로의 행복을 준비하는 것마저 잊게 하는, 이 불안은 어디서 온 걸까.
“사회성을 길러주면 안됩니다, 인간관계가 좋으면 공부를 못해요.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해요,엄마가 옆에서 지키고 시켜야 합니다”라고 얘기하는 교육 컨설턴트에게 고액의 강연료를 뜯기는 게 요즘의 부모들이고 안타까운 교육의 현실이다.심지어 유치원생을 둔 엄마에게 이제 영재교육을 시키면 어떻게 하느냐고 호통치는 원장들도 있다고 한다.엄마의 모성애를 타깃으로 한 ‘불안마케팅’의 극단적 모습이다.
고1 아들이 우동을 먹자고 해 집 앞 주점에서 아들은 우동에 음료수, 필자는 술 한 잔하며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라고 근사하게 얘기할 찰라 아들은 엉뚱하게 ‘아빠,재혼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자기 친구들 중 재혼한 부모가 꽤 있는데 서로 아끼며 알뜰살뜰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 재혼할 거냐’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다운 우문을 던지니 ‘잘 모르겠다, 필요하면 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머쓱했다. 인공적인 사회화가 안된 아들의 감성적 대답에 오히려 진실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이혼은 절대 안 된다’와 ‘행복을 위한다면 재혼도 가능하다’ 중 어떤 콘텐츠를 아들에게 전달해야 할까 고민하게 됐다.
피곤한 세상이다. 수많은 규범과 규칙이 우리르 얽어 매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반항하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내가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가치 있다’고 여기고 이를 나의 운영 소프트웨어로 삼아온 ‘사회적 콘텐츠’가 진정 나와 주변의 ‘감성적 행복’에 도움을 주는 것인지 반문해봤으면 한다. ‘반항적 콘텐츠’에 스트레스가 풀릴 수 있다. 반항적 콘텐츠로 인해 가정과 사회가 잘못될 것 같은 불안은 우리의 기우일지도 모른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콘텐츠를 지금도 진짜로 받아들이는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