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첨단에 근접한 한국 의학이지만 영어나 독어로 된 의학용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역량은 그에 못미치는 것 같다. 서양에서 온 의학용어를 순화하는 노력은 대한의사협회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의학용어집 4집이 나온 것은 2001년이고, 5집은 의협 100주년을 기념해 2008년 11월에 다시 나왔다. 영어로 의학공부도 하기 힘든데 의학용어를 다시 우리말로 순화시키는 게 쉬운 작업은 아닐터이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국내 의약품 분류체계를 보고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지난 4월부터 본 ‘헬스오’ 사이트의 의약품 데이터베이스(의약품센터)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면서 독립된 의약품 분류체계를 짜봤다. 이 과정에서 보건복지부가 약효분류체계를 참고했는데 그 분류용어가 너무도 시대에 뒤떨어진 발음이랄까, 낡은 의학개념을 반영하고 있어 시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선 ‘항전간제’다. 전간은 흔히 간질로 알려져 있는데 2010년 5월 대한간질학회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려해 뇌전증으로 병명을 바꿨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병명을 쉽게 바꾸는 것도 사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만약 바꿨다면 항전간제도 항뇌전증제도 변경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간질치료제가 더 낫다는 생각이다.
둘째 ‘개개의 기관계용 의약품’이다. 이 카테고리에 순환계용약,호흡기관용약,소화기관용약,호르몬제,비뇨생식기관용 및 항문용약, 외피용약 등이 들어있다. 개개 기관계용 의약품의 카테고리가 너무 넓어 독립시킬 필요가 있다. 호르몬제는 내분비계용약으로, 외피용약은 피부모발용약으로 바꾸는 게 옳다. 피부는 표피와 진피로 나누지만 외피와 내피로 분류하지 않듯이…. 아울러 비뇨생식기용약과 항문용약은 인체구조상 가까이 붙어있지만 관련성이 한참 떨어지지 않나 싶다.
셋째 한자용어의 남발이다. 유유아용제에서 유유아는 유아(乳兒)와 유아(幼兒)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쉬운 듯 어렵다. 치나제는 나병치료제나 한센병치료제로, 구매제는 매독치료제로 바꾸면 안될까, 너무 옛스러운 표현들이다.
넷째 글로로필제제는 클로로필(엽록소)제제,리케치아는 리케챠,비루스는 바이러스,후란계는 푸란(furan)계의 일본식 영어 발음인데도 그냥 쓰고 있다.
가장 황당했던 것은 자격요법제(비특이성면역억제제를 포함)와 수액선호르몬제제였다. 이들 두 용어는 네이버 등 포털을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다. 한자나 영어 명칭이라도 병기됐다면 대충 짐작하겠는데 아무 것도 모르니 답답했다. 그러다 수액선호르몬제제의 영어명을 찾았다. Preparations containing salivary gland hormone이었다. salivary gland는 침샘 또는 타액선(대한의사협회 의학용어집 5집)을 일컫는 말이다. 타액선(唾液腺)을 수액선으로 잘못 읽었다는 말인데 타(唾)자의 오른쪽방이 수(垂)로 읽히니까 이는 분명 한자 문외한의 잘못된 발음이다. 참고로 잠자기를 말하는 睡眠은 수면으로 읽지, 타면으로 읽으면 틀린다.
1991년 6월 27일 경향신문 기사에는 땀을 분비하는 에크린선을 수액선(水液腺)이라 불렀으니 이것도 헷갈릴이었다. 땀샘(한선, 汗腺)은 현재 에크린샘(소한선, ecrine sweet gland)과 에포크린샘(대한선, apocrine gland)으로 나뉘어 불리고 있다.
과거에 일부 한의사들이 구안괘사(口眼喎斜:안면성 말초신경마비,입이 돌아감)의 발음을 잘못 읽어 마치 구안와사가 표준어인 것처럼 잘못 안 것과 같은 오류다.
한글 순화도 좋지만 전립선을 전립샘이라고 한다든지, 신장을 콩팥으로 하는 것도 왠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글전용론이냐 한자병용론이냐의 논쟁을 재연하는 것이지만 국어의 70%가 한자인 마당(일부 한자병용론자는 85%라고 주장)에 의학용어의 무조건적이고 부자연스런 한글화는 재고해봐야 한다.
머리덮개보다는 두피(scalp),파킨슨씨병보다는 파킨슨병,객담보다는 가래가 낫지 않은가. 대퇴골(넓적다리뼈,넙다리뼈,하지골,장골)과 경골(앞쪽 정강이뼈),비골(종아리뼈,경골 외측의 보조뼈),하퇴골(경골과 비골의 합한 말) 등은 한글과 한자 중 어떤 게 부르기 편한지, 어떤게 기억하기 좋은지,어떤게 뼈를 구분할 때 쉬운지 논의해봐야 한다.
아무래도 많이 쓰는 단어가 의학용어로 굳는 게 낫다. 한자라도 기억과 구분이 용이하다면 표준이 될 수 있다. 국민정서는 분명 짜장면인데 국어학자들이 자장면이라고 우기다가 이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제기되자 짜장면과 자장면을 동시에 표준어로 인정한 것처럼 대중을 위하면서도 정제된 의학용어 순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