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충제·제초제 등 한 때 농업생물학 관련 사업으로 방향을 틀다 다시 의약품 부문으로 회귀한 바이엘이 새로운 최고경영자로 빌 앤더슨(Bill Anderson, 56) 전 로슈(Roche) 제약사업부 CEO를 영입했다.
제초제 소송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바이엘은 그동안 ‘사고를 친’ 베르너 바우만(Werner Baumann, 60) 현 CEO의 경질이 필요하다는 주주들의 압박을 받아왔다. 이에 임기가 2024년 4월로 1년 여 남은 바우만의 퇴진과 앤더슨 신임 CEO의 외부 영입을 통해 이런 미로에서 벗어나려는 시동을 걸은 것으로 판단된다.
바이엘 감독이사회는 오는 6월 1일부로 빌 앤더슨을 새로운 회장(CEO)으로 임명한다고 8일(현지시각) 공표했다. 실제 경영 관여는 오는 4월 1일부터 이뤄질 예정이다. 빌 앤더슨 회장은 지난해 중반부터 시작된 후임자 엄선과정을 거친 끝에 전원일치로 선임됐다.
이에 따라 지난 7년여 동안 재임해 왔던 베르너 바우만 회장은 오는 5월말로 퇴진하게 됐다. 바우만 회장은 지난 35년여 동안 바이엘에 몸담아 왔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에는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2016년 9월 바이엘은 660억달러 규모의 거대 종자 및 농약·제초제 생산기업인 몬산토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바우만은 “농업작물재배 산업이 미래의 먹거리”라며 “이를 바이엘이 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후 몇 년 동안 몬산토의 제초제 ‘라운드업(Roundup)’에 함유된 글리포세이트(Glyphosate) 성분이 암을 유발해 피해를 입었다는 소송으로 4만2000건 이상의 소송으로 바이엘에 부담을 주었고, 수십억 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런 파국 속에서 바우만은 2019년 4월 주주 신임 투표에서 패배해 독일 기업 역사 상 처음으로 투표에서 불신임을 당한 CEO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0년 9월 바이엘의 감독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바우만의 임기를 2024년 4월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노베르트 빙켈요한(Norbert Winkeljohann) 감독 이사회 의장은 ‘바이엘의 전략적 강점과 강력한 실행 성과‘가 바우만과 경영진에서 비롯됐다며 두둔했다. 이후 바이엘의 소송 건수는 더 늘어나 2020년 6월 기준 누적 12만5000건의 소송을 당하며 120억달러에 달하는 합의금을 지급해야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우만은 2020년 새로운 임기 동안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COVID-19) 유행으로 인한 산업 및 경제적 어려움을 통해 바이엘을 이끌고 수익성 있는 성장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2022년 3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국부펀드 테마섹홀딩스(Temasek Holdings)는 바이엘 이사회에 새로운 CEO를 임명할 것을 촉구하며 바우만 경영 체제 아래서는 실적이 만족스럽지 않다며 바우만의 추방을 주장했다. 테마섹은 바이엘의 지분 4%를 보유하고 있으며 몬산토 인수에 소요된 자금을 댄 실질적인 전주였다.
이에 스위스 투자관리 회사인 알라투스캐피털(Alatus Capital)도 동조했다. 알라투스는 “바우만의 경영 행동이 바이엘의 상당한 주주가치 파괴로 이어졌다”며 “바우만이 2016년 바이엘 CEO로 취임한 이후 주가가 48% 하락했다”고 질타했다. 특히 제약산업과 농생물산업으로 균형을 이뤄온 바이엘의 지속성장 전략을 구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투자자 압력이 점증하자 바이엘의 감독이사회는 2022년 9월, 바우만을 교체할 적임자를 찾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바이오젠·제넨텍·로슈서 잔뼈 굵어 … 15개 블록버스터 창출 이끌어
미국 국적의 빌 앤더슨 내정자는 지난 25년여 동안 생명공학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가장 최근에는 로슈 제약사업 부문의 CEO를 맡아 포괄적인 전환(transformation)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하면서 다수의 성공적인 신약 발매와 괄목할 만한 매출성장, 조직 전반에 걸친 생산성 제고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미국 텍사스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화학공학 석사 및 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사회생활의 첫걸음은 1989년 미국의 연료첨가제 기업 에칠코퍼레이션(Ethyl corporation)에서 뗐다. 이후 미국의 기술‧전자제품 기업 레이켐(Raychem)에서도 일반경영 관리자로 재직했다.
생명공학 업계에서는 바이오젠에서 일반경영, 제품개발 및 재무 등의 분야 요직을 거쳤다. 로슈에서는 2013년 제약 사업부문 글로벌 제품전략 담당대표 겸 최고 마케팅 책임자로 발탁됐다. 2016년 제넨텍(2009년 468억달러에 인수된 로슈 자회사)로 옮겨 북미 사업부를 이끌었고, 이듬해 CEO에 올랐다. 이어 2019년 로슈로 컴백해 제약 사업부문을 총괄했다.
특히 앤더슨 내정자는 바이오젠, 제넨텍, 로슈에 재직한 기간 동안 총 25개의 신약개발 및 발매에 관여했다. 이 중 15개를 블록버스터로 이끌었다. 그의 모국인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등 다수의 유럽 국가에서 근무해 글로벌 감각이 풍부하다. 바이엘 CEO로 영입됨에 따라 이제 독일 중서부 산업도시 레버쿠젠에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됐다.
바이엘의 노르베르트 빈켈요한 감독이사회 의장은 “빌 앤더슨을 바이엘의 새로운 CEO로 영입하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다”면서 “그가 생명공학, 화학, 인공지능(AI) 등의 분야에서 파격적인 혁신을 맞고 있는 이 시점에 바이엘을 새로운 성공의 장(章)으로 이끌 적임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앤더슨 내정자는 강력한 제품 파이프라인 구축과 생명공학적 혁신의 성공적인 제품화를 이끈 실적을 갖고 있다”며 “변화를 추구하는 리더로, 혁신을 이끌며 생산성과 성과를 끌어올리는 한편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를 창조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빈켈요한 의장은 또 “앤더슨 내정자의 임부는 명확하다”며 “바이엘의 잠재력을 100% 이끌어 내고, 우리의 주주들과 농업 종사자, 환자, 소비자, 임직원 및 우리 회사와 연을 맺고 있는 전체 관계자들을 위해 지속가능한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바이엘 감독이사회를 대신해 지난 35년여 동안 바이엘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은 베르너 바우만 회장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앤더슨 내정자는 “바이엘은 영양, 건강, 환경보호 등의 분야에서 이미 놀라운 유익성을 제공해 준 혁신기업”이라며 “농업, 의학, 컨슈머 헬스 분야에서 선도적인 연구개발 투자를 주도하면서 또 다른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에 바이엘의 전체 임직원과 함께 혁신을 앞당기고, 경영실적을 끌어올리면서 지속가능성의 진전과 잠재적인 회사 역량의 최대한 발휘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나갈 것이라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