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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소가야가 있던 곳, 경남 고성 … 송학동 고분, 학동 고택, 문수암 바다풍경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3-01-17 17:41:19
  • 수정 2023-01-25 22:5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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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와 백제에 가진 가야의 역사 간직 … 바다도 고택도 고즈넉

한국에는 같은 지명을 가진 지역이 4곳 있다. 경기도 광주(廣州)와 전라도에서 갈라져 나온 광주(光州)광역시, 강원도 고성(高城)과 경상남도 고성(固城)이다.  


강원도 동해 최북단에 있는 고성은 높은 성을 뜻하는 반면 경남 남해 최남단의 고성은 견고한 성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두 지역은 역사 및 문화 면에서 전혀 다르다.


경남 고성군은 북동쪽으로는 창녕군과 창원시, 서쪽으로는 사천시, 남쪽으로는 통영시, 북서쪽으로는 진주시와 접해 있다. 이 중 통영군과 가장 교류가 많으며 국회의원 선거구 역시 통영과 묶여 있다.


모든 도시들은 저마다 고유한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더러는 소멸하고, 더러는 살아남아 ‘국가’를 이루며 발전해 왔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그런 방식으로 ‘헤쳐 모여’를 반복하였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에는 그 지난한 ‘탄생과 소멸’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혀 있다. 운이 좋으면 공기 중으로 끌어 올려져 빛을 보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리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저 깊은 땅속에는 짐작할 수도 없는 ‘오래된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는 주로 ‘삼국’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경남 고성, 김해, 함안, 경북 고령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대 가야 고분군과 마주하게 되면 일종의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들 고분군은 ‘천년 신라’에도 ‘백제’에도 속하지 않는 ‘가야국’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가야국에 대한 연구는 2017년 대통령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이 포함되면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우선등재 대상으로 선정된 가야고분군은 정부가 정식 세계유산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는 문화유산이다. 


경남 고성군은 삼한시대에는 변한 12국 중 하나인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자국)의 본토였으며 고성읍은 소가야의 도읍지였다. 1세기 무렵 낙동강 서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가진 소국들이 등장했다. 후에 이들이 발전해 여러 가야국이 됐다. 3세기 경 지금의 고성에 둥지를 튼 고자국은 고사포국, 고차국 등으로 불리며 남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에 해상 세력으로 등장했다. 5세기 고자국은 인근 해상 세력을 규합해 ‘소가야국’을 세우고 교역 및 운송의 중심 역할을 하며 번영했다.


그러나 가야국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고 신라에 흡수됐다. 가야국의 고유한 문화나 삶의 방식은 어떠했을까. 가야국은 언제쯤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가야국의 멸망 이후 가야국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았을까. 100% 신라인들에게 동화됐을까. 정리되지 않은 채 쏟아지는 질문을 머릿속에 구겨 넣고 송학동 고분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어떤 실마리가 찾아질지도 모른다.


김수로왕의 막내 김말로가 세운 소가야, 송학동 고분군


고성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6형제 중 막내인 김말로(金末露)가 세운 소가야의 옛땅이다. 말로왕 때부터 이형왕에 이르기까지 아홉 임금이 461년 동안 다스린 부족국가가 있었던 곳이다.


고성군 고성읍 송학동 고분군./ 변영숙

고성읍 송학동(송학리) 고분군(사적 제119호)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구릉지대에 부드럽게 솟아 있다. 외견상 다른 고대국가들의 고분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주의 오름이나 경주 대능원을 축소해 옮겨온 듯도 하다. 


소가야국의 왕과 지배계층들의 무덤인 송학동 고분군은 모두 3개의 구릉에 나뉘어 조성되어 있다. 총 7기의 무덤 중 구릉 정상부에 있는 무덤이 1호 분이다. 무덤군 중 가장 이른 5세기 후반에 축조됐고, 규모도 가장 크다.  돌무덤방을 만든 뒤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이다. 나머지 무덤들은 1호 무덤을 보호하는 딸린무덤이다. 옆으로 6세기 전반에 축조된 2, 3호가 위치해 있으며, 좌우 능선에 보토문 8기가 있다.


고분군 앞쪽으로는 도로가 지나고 뒤편으로는 구도심 거리가 펼쳐진다. 고분 사이로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 주민들은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왁자지껄 고분군을 지난다. 송학동 고분군에는 마치 산 자들의 공간과 죽은 자들의 공간 사이에 어떠한 경계도 없어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모습이다. 


산책로 꼭대기에 이르면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짧은 겨울 해는 봉분 사이로 몇 번의 자맥질을 하는 듯하더니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안내문에는 이들 ‘고분군이 봉분을 먼저 쌓고, 쌓은 봉분을 다시 파내어 석곽이나 석실을 축조하는 분구묘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당시 백제나 일본에서 유행하던 무덤 축조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며 ‘고분들에서 발견된 일본과 백제의 토기 그리고 신라의 청동 그릇과 마구 등을 통해 소가야가 백제와 일본의 중간에서 해상 교역의 창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고성군 가야 고분 유물을 전시하고 가야사를 압축해 소개하는 고성박물관./ 변영숙

송학동 고분군이 축조된 방식이나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더 궁금하다면 고분군 아래쪽에 건립된 ‘고성박물관’을 방문하면 된다. 고성박물관은 고성 송학동 고분군 사적 발굴 및 보존을 위해 2012년 5월 17일 개관했으며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고성박물관의 외관이 매우 이색적이다. 향로 모양 같기도 하고, 모자처럼도 보인다. 앙증맞기도 하고 고풍스럽기도 한 외관이 딱 향토박물관에 어울린다.


박물관 내부도 무척이나 꼼꼼하고 알차게 구성돼 있다. 1층은 안내창구와 문화해설사 대기실과 북카페, 체험학습실,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본 전시실은 2층에 있다. 1층에 대형 스크린을 통해 고성의 가볼 만한 곳들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소개하고 있어 처음 방문한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


전시물은 고성이 3세기경부터 ‘변진고자미동국’, ‘고자국’ 등으로 불리다 신라 경덕왕 16년부터 한자음화된 ‘고성’으로 굳어졌다고 소개한다. ‘단단한 성곽의 도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증명하듯 고성 남산과 만림산에는 20여 개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


2층 로비에는 송학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철갑옷과 투구를 재현해 실물 크기로 재현한 소가야국의 기마무사상이 서 있다. 말위에 올라탄 기사를 통해 가야국 무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고분을 조성하는 과정이 미니어처로 재현돼 가야국의 분묘 문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 다양한 형태의 토기와 검 등 유물들이 다량 전시돼 있다. 발굴 과정을 기록한 아카이빙관도 흥미롭다. 고성과 가야국에 대한 자료가 총망라돼 한 번쯤 방문할 만한 곳이다. 2023년 5월 31일까지 ‘고성박물관 10년의 기억전’이 열린다.


한려수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문수암


고성군 상리면 무선리에 위치한 무이산(武夷山 해발 546m)은 삼국시대부터 해동의 명승지로 유명하며, 국선 화랑들이 무예를 연마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무이산 정상 아래에 신라 성덕왕 5년(706) 의상조사가 창건한 문수암(文殊庵)이 자리하고 있다.


문수암의 창건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남해 금산의 보광사로 기도하러 가던 의상대사는 고성 무선리의 한 촌락에 머물게 됐다.  그날 밤 의상대사의 꿈속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내일 아침 걸인을 따라서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 찾아가 보라’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튿날 날이 밝으니 노승의 말처럼 걸인이 나타났다. 의상대사는 걸인을 따라 무이산에 올랐다. 무이산 중턱에 다다라 주변을 둘러보니 아래로는 바다와 수많은 섬들이 떠 있고,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에는 다섯 개의 바위가 오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마치 오대산처럼 보였다.


이때 걸인이 오대를 가리키며 ‘여기가 내 침소다’라고 말을 하자 갑자기 또 한 명의 걸인이 나타나더니 둘이 손을 잡고 바위 틈새로 사라졌다. 의상대사가 걸인들이 사라진 틈새를 살피니 걸인들은 이미 보이지 않고 석벽 사이에 문수보살상이 보였다. 의상조사는 꿈속의 노승이 관세음보살이고 두 걸인이 문수와 보현보살임을 깨닫고는 문수암을 지었다.


전국이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탓인가. 문수암 가는 길은 적막했다. 한파의 영향이 우리나라 최남단 고성의 무이산까지 영향을 미쳤나 보다. 기온은 분명 영상인데도 무이산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살이 아플 정도로 살 속 깊이 파고들었다. 겨울철 계곡의 바람이 바다의 습기를 만나면 이렇게 독해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다행히 문수암 코앞까지 포장도로가 나 있었다. 그때의 그 안도감이란.


그렇게 찾아간 문수암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고즈넉한 암자들에 울려 퍼지는 망치 소리는 아무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한창 작업 중인 기사에게 물으니 주차장을 짓는 중이란다. 속세를 벗어난 깊은 산속의 수행처에서까지 편리함을 고집하는 행태에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느껴지지만, 그만큼 문수암을 찾는 이가 많다는 방증이리라.


주차장 공사 현장을 지나 암자로 오르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순간 이 세상의 풍경이라고 믿기 어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끝이 없이 아늑해 보이는 남해 바다와 바닷속에 보석처럼 송송 박혀 있는 섬들… 어째서 의상대사가 이곳에 지체 없이 문수암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라도 이 선경을 보았다면 무심코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고 했던가. 그림 같은 한려수도의 풍광에 홀려 문수암은 뒷전이다.


겨우 눈길을 거두고 문수암을 바라보니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전각이 까마득하게 올려 보인다. 문수암에서 처음 대면하는 전각은 천불전이다. 시멘트로 지어진 건물에서는 특별한 감동을 느낄 수 없다.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대웅전(문수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2022년 12월 31일까지 증축 불사가 진행 중이라는 안내문에 막혀 법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대신 임시 법당이 운영 중이다. 대웅전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관음전과 독성각이 있지만 역시 공사 중이라 출입할 수 없다. 허무함이란 분명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의상대사를 문수암으로 이끈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사라진 석벽을 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니 문수암과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하다.


천불전 맞은편에는 사리탑과 전망대가 있다. 1973년 이곳에서 수도한 이청담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 또한 절경이다. 산봉우리들이 물결처럼 펼쳐지는가 싶으면 물결 사이로 섬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산인지, 바다인지, 산봉우리인지, 섬인지 좀처럼 구분할 수 없다. 순간 무념무상 상태가 된다. 원래 이 세상은 형체도 이름도 없이 그저 존재할 뿐임을, 모든 집착과 망상은 분별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성 무이산 보현사 약사전과 약사여래상./ 변영숙

멀리 봉우리 정상에 거대한 불상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보현사 약사전의 약사여래상이다. 문수암과 보현사가 거의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보현사 약사전은 문수암에서 차로 3~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보현사 약사전은 높이 13m에 달하며 동양 최대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보현사에서 마주 보이는 문수암이 또한 절경이다.


문수암에서 머물렀던 짧은 시간은 마치 산과 바다 위로 펼쳐지는 불국정토에 잠시 머물렀다 온 듯하다. 문수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무이산과 고성 하일면 자란만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특히 문수암은 새해 첫날 해맞이 행사가 열릴 정도로 일출 모습이 빼어난 곳이다. 새해 첫날의 일출을 놓쳤다면 설날 일출은 문수암에서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고성군 고성읍 남산공원 내 남산정에서는 고성읍과 남해바다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고성군청 홈페이지

고성군의 바다풍경 구경은 고성읍 동쪽의 거류면 당동만도 빼놓을 수 없다. 거류산 정상, 그게 어렵다면 중턱 전망대까지만 올라가도 활짝 트인 당동만을 구경할 수 있다. 이곳은 가을 풍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누런 벼와 파란 바다의 어우러짐이 시() 같다고. 거류산(巨流山 해발 570m) 전망대에 오르려면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장의사(藏義寺)를 지나야 한다. 고성읍내 남산공원에서도 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다. 3월말이나 4월초면 백목련이 흐드러진다.  


하이면 바닷가의 높이 120m의 화력발전소 전망대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돼 있지만, 주말에 단체로 예약하면 일부 시설을 견학할 수 있다. 고성 앞바다의 사량도와 남해군 창선도, 서쪽의 삼천포대교가 두루 한눈에 잡힌다.


시루떡 같은 판석으로 쌓은 돌담이 아름다운 학동마을 


고성 학동마을의 전주최씨 사당(교육기관)인 육영재./ 고성군청 홈페이지

고성읍의 송학리(송학동)와 다른 서쪽 하일면의 학림리(학동)이 있다. 350년 전 형성된 전주 최씨 안렴사공파의 집성촌이다. 임진왜란의 여파가 잠잠해지기 시작한 1600년경 처음 들어섰다. 한 때 150여세대가 모여 살 정도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50여세대 100여명의 주민들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백학포란지형’으로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이 학이 마을을 감싸 안은 듯한 마을이다. 마을의 볼거리는 아늑한 고택들과 이를 굽이치듯 보호하고 있는 돌담길이다.  2006년 6월 국가등록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된 학동마을의 돌 담장은 마을 뒤 수태산에서 채취한 두께 2~5cm의 납작돌과 황토를 결합해 바른 층 쌓기로 만들어졌다.돌담은 모두 얇은 판석들로 쌓아져 있다. 기와를 전혀 쓰지 않고 덮개돌(개석)까지도 판석으로 덮은 돌담은 전국에서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출토되는 황토에는 골재 성분이 많이 포함돼있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사리 무너지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담장의 맨 아랫 부분엔 판석만을 평평하게 쌓고, 그 위로는 황토를 섞어 쌓고 중간중간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을 강담이라 하는데, 바람을 통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바닥이 판석인 것은 비가 와도 물에 젖지 않게 위함이다.


돌담을 따라가면 전주 최씨 11대 종가인 최씨 고가(지방문화재 제178호)가 나온다. 현 소유자인 최영덕씨의 5대조인 최태순 선생이 고종 6년(1869년)에 지은 한옥이다. 안채, 익랑채, 곳간채, 대문간채, 사랑채 등 5채의 건물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예스러운 양반가옥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최영덕 고가(매사고택) 뒤뜰 텃밭에는 우물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두꺼운 덮개돌을 덮어놨는데 세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장수·부귀·자손번성을 바라는 뜻이면서, 천·지·인의 뜻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구멍을 통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렸는데, 지금은 펌프로 물을 끌어올린다. 사랑채 옆 250년 된 토종 동백나무는 3월이면 붉은 꽃을 활짝 피운다. 선비들의 정신을 맑게 해준다는 회화나무, 두 나무의 가지를 서로 이어놓은 연리지 모과나무도 있다.


학동마을 들머리는 봄이면 살구나무와 목련 덕분에 환하다. 100년쯤 된 살구나무는 분홍빛 꽃송이들을 뭉게뭉게 피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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