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는 항구다’라는 말보다 목포라는 도시를 더 잘 표현할 수가 있을까. ‘목포는 항구다’는 1942년 ‘목포의 딸’ 가수 이난영(李蘭影, 1916년 6월 6일 ~ 1965년 4월 11일)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대중가요의 제목이다. 목포가 어떻게 태어나 흥망성쇠를 거쳤는지를 말해주는 키워드로 ‘항구’란 말보다 나은 것은 없는 듯하다.
왜 ‘목포’(木浦)라고 불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영산강 하구와 서해 바닷물이 합류하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길목쟁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여 ‘목개’라 부르다가 한자로 ‘목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영산강 푸른 물결의 종착지였던 작은 포구마을에 불과했던 목포는 1789년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 개항장이 되면서 급성장했다. 한때는 우리나라 3대 도시에 속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한 시절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면화와 호남의 미곡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전초기지가 되면서 목포 사람들의 애환과 고충은 그 어느 곳보다 심했다.
이난영의 대표작인 ‘목포의 눈물(1935)’에는 이러한 목포 사람들의 한과 설움이 그대로 담겨 있다. ‘목포의 눈물’은 단순히 목포의 눈물을 넘은 민족의 눈물이었고, 목포만의 노래가 아니라 나라 잃은 겨레의 노래였다. 특히 2절의 가사 중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이란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3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유재란이고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쳤다는 곳이다. 누가 봐도 국권을 침탈한 일제를 향한 원한임을 알 수 있고, 자연스럽게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한 것이다. 님이란 이순신 장군을 가리킨 것이니, ‘목포의 눈물’은 독립을 눈물로 기원했던 노래인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일본 경찰을 속이기 위해 ‘삼백연 원안풍(三栢淵 願安風)’으로 가사를 바꿔 불렀으니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민족의 노래였다.
조선시대 수군 주둔했던 목포진 역사공원
조선시대 호남과 경남 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의 중요한 길목으로 목포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493년(세종 21년)에 처음으로 목포진 설치가 재가 됐고 1502년(연산군 8)년에 목포진은 성의 모습을 갖췄다.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이었던 목포진(鎭)은 목포영(營), 목포대(臺)로도 불렸으며, 우두머리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대, 만호진, 만호청이라고도 했다. 호남읍지에 따르면 당초 진성의 규모는 석축 둘레 1306척, 높이 7척 34촌이었으며, 성 안에 우물과 못이 각 1개소씩 있었고, 남문과 서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다.
목포진은 한반도 서남해의 방어지역으로써 역할을 다 했으나, 1895년(고종 32년) 7월 15일 고종 칙령 제141호에 의해 폐진됐다. 1897년 개항 당시만 해도 진의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유적비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됐다. 2014년 120년 만에 일부가 복원되어 역사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붉은 홍살문과 유적비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객사 담장을 따라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이 그런대로 옛 목포진의 위상을 실감 나게 해 준다. 객사 뒤편 전망대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목포진의 역사를 말없이 증거하고 있다. 목포진에서는 목포 시내와 유달산, 바다 건너 삼학도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정자에서 할머니 세 분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삼학도로 변신한 세 처녀가 환생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할머니들은 호남의 정치 1번지인 목포 사람답게 한창 새로 뽑힌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짐짓 ‘새 대통령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우리 같은 촌것들이 뭐 아나?” 하면서도 “근디 새 대통령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라며 뼈 있는 말을 덧붙인다. 서울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반도의 작은 도시에서도 듣는 것은 다 듣는 모양이다. 그래서 민심이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알아야 할 사람들이 민심 무서운 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3월~10월 매월 넷째 주 토요일마다 목포진지 객사 앞마당에서는 수군교대식이 열린다. 수군 무예시범, 진검 베기, 활쏘기, 수군 복장 입어보기 등 다양한 체험도 즐길 수 있다.
목포진 맞은편에는 ‘소년김대중공부방’이 있다. 목포는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다. 전남 무안군 하의도라는 작은 섬에서 1923년에 태어난 김대중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36년 가족과 함께 목포로 이사 왔다. ‘공부방’은 목포로 올라온 김대중이 1936~1945년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젊은 김대중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일본영사관으로 쓰였던 목포근대역사관 1관
1897년 개항과 동시에 목포에는 대한제국과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가 체결한 ‘목포 각국 공동 조계장정’에 따라 ‘조계지’가 형성됐다. 조계지란 외국인이 자유롭게 살며 경제 활동을 하면서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개항과 함께 목포로 몰려든 일본인들은 유달산 기슭과 남쪽 해안가에 일본인 거류지를 형성했다. 일본 영사관을 비롯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경찰서와 법원, 학교, 신사, 우편국, 일본인 가옥 등이 들어섰다.
치밀한 계획 하에 구축된 일본인 거류지는 반듯한 포장도로와 가로수 길, 하수도 시설 등을 갖췄다. 상점과 식당, 숙박시설이 들어서면서 도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조선인들은 선창가나 묘지터인 유달산 북쪽 산기슭 등에 자리를 잡았다.
목포 해안로 일대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에는 구호남은행 목포지점(등록문화재 29호), 구일본영사관(국가사적 289호), 해안로 일본식 상가와 주택들, 일본인 교회, 목포부립병원과 관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전남 기념물 174호), 카페나 게스트하우스로 개조된 적산 가옥 등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관공서 건물이나 일본식 가옥이 다수 남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유달산 남쪽 노적봉 기슭에 위치한 ‘구 목포 일본영사관(사적 289호)’이다.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12월에 완공된 구 영사관은 현재 목포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다.
시가지보다 높은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일본영사관 건물은 얼핏 보아도 권위적, 위압적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 위세를 실감하게 한다. 역사관 입구에 세워진 ‘목포 평화의 소녀상’이 가련해 보일 정도다. 목포 시민의 성금으로 제작된 ‘목포 소녀상’의 제막식은 2016년 4월 8일, 목포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1919년 4.8만세운동 기념일에 맞춰 거행됐다.
돌계단 오른 편으로 난 언덕길을 오르면 영사관 마당과 붉은색 벽돌 건물 입구가 나온다. 영사관 마당에 서니 정면에 반듯하게 도로가 나 있고 주변에 상가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이 도로는 목포항까지 이어진다. 소위 말하는 일본인 ‘거류지’이다.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일본인 거류지는 모두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부지에 세워졌다고 한다.
영사관 건물 외관 곳곳에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전범기 문양과 국화 문양이 장식돼 있다. 내부에는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벽난로 등이 남아 있다.
구일본영사관 건물은 1905년 이후에는 이사청, 1910년부터는 목포부청으로 사용됐다. 해방 이후 1947년부터 목포시청, 1974년부터 목포시립도서관, 1990년 1월부터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 목포문화원이 이전함에 따라 보수 공수를 마치고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개관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모두 7개 주제로 전시관이 꾸며져 있다. 조선 수군 진영인 ‘목포진’의 설치부터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목포의 역사와 생활상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 뒤쪽 유달산 자락에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당시 적의 공격에 대비해 파 놓은 방공호가 남아 있다. 폭 2m, 길이 80여m의 방공호에는 강제 동원돼 굴을 파고 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앙상한 몸에 속옷 한 장만 걸친 채 곡괭이질을 하는 조선인들은 당시 모든 조선인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전국에 일제가 파 놓은 방공호와 진지동굴이 흉악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고, 희생자들의 서러운 통곡이 멈추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역사관에서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가면 ‘노적봉예술공원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목포를 대표하는 전원형 미술관으로 2층 상설전시관에서 목포 미술계의 거장 소화 김암기(蘇話 金岩基, 1932 ~ 2013) 화백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유달산과 그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영사관과 방공호에서 무거워진 마음을 훌훌 털어내고 목포의 예향에 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구 일본영사관에서 조계지였던 거리로 내려오면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있다. 토지를 매수해 높은 소작료를 받고 조선 농민에게 임대해주는 악역을 맡았던 기관이다. 이 건물은 1921년에 건축된 것으로 전해진다. 부속건물은 모두 철거됐고 장방형의 2층 석조 본건물만 아 있다. 외벽 양각 장식과 출입문의 석조 아치 현관 등이 눈길을 끈다. 지금은 ‘목포 근대역사관 2관’으로 운용되고 있다.
충무공의 숨결 어린 유달산과 노적봉
해발 고도 228.3m의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진 목포 유달산(儒達山). 노령산맥이 쉼 없이 달려와 무안반도 남서쪽 끝자락 바닷가에 멈춰 선 것이 목포 유달산이다.
목포는 유달산과 노적봉(露積峰)을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되는 곳이다. 목포 어느 곳에 서 있어도 가깝게 혹은 멀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길동무처럼.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듯이 목포에는 유달산이 있다. 목포의 설움도 목포의 눈물도 유달산만은 모두 알고 있다.
과거 유달산은 서남 해변의 군사 요충지로 해남과 무안의 봉수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영산강의 목을 지키는 요새였다. 유달산 동남쪽에 크게 솟아 있는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바위 위에 짚을 쌓아 올려 군량미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이 많은 수의 병력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라게 해 물리쳤다는 일화가 전한다. 볏가리를 쌓아 놓은 모양이라 하여 ‘노적봉’이라 하였다. 유달산의 정상은 일등바위라고 부르며, 유달산의 중심부에서 약간 남쪽에 있다.
유달산에는 유달공원과 조각공원, 일제강점기 때부터 정오를 알리는 신호로 사용했다는 오포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 새 천년 시민의 종, 유선각, 달선각 등 정자, 암벽폭포 등 둘러볼 곳이 많다. 유달산 북측면의 조각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이다. 국내는 물론 외국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유달산 남서쪽의 낙조대는 서해의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는 명소다.
트레킹 길을 따라 유달산 속살을 만나봐도 좋고, 산행을 해도 좋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목포해상케이블카 위에서 유달산을 감상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