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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동해시의 절경 무릉계곡과 마천루 협곡 … 여름엔 피서, 가을엔 단풍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2-09-17 22:21:19
  • 수정 2022-09-17 22: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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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틀바위~12산성 폭포 구간은 ‘한국의 장가계’

강원도 동해시의 서쪽 대부분을 차지하는 삼화동은 남서쪽에 두타산(頭陀山 1357m), 청옥산(靑玉山 1404m)을 품고 있다. 두 산의 계곡을 배경으로 수많은 기암절벽과 폭포 등이 어우러져 천혜의 절경을 이루는 일명 ‘무릉도원 명승지’가 있다. 

두타산은 동해시 삼화동,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에 걸쳐 있다. 삼화사(三和寺)와 천은사(天恩寺)라는 천년 고찰이 자리 잡고 있다. 삼척 여행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천은사는 고려 때 이승휴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한 곳이다. 천은사는 동해시의 경계에 인접한 삼척시 미로면에 있다.

두타산의 두타는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를 닦는다는 뜻이다. 두타산은 보통 무릉계곡(관리사무소)을 기점으로 등반한다. 왼쪽길(남서길)은 삼공암, 미륵바위, 베틀바위, 산성터, 12산성폭포, 다래나무 군락지를 거쳐 박달계곡에 이른다. 오른쪽길(북서길)은 가장 대중적인 길로 삼화사, 관음암, 학소대, 옥류동을 거쳐 얼레지쉼터를 지나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에 이른다. 더 가면 박달계곡에서 두 길이 만난다.

조선 태종 14년에 산세를 이용해 쌓은 두타산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두타산성 아랫길이 바로 옥류동에서 쌍폭포와 용추폭포으로 향하는 길이다. 박달재(박달계곡)는 옛 사람들이 정선군 임계면(정선의 북동쪽)을 거쳐 서울로 가는 고갯길이었다. 참고로 전통 트롯트의 노래가사에 나오는 천등산 박달재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 사이에 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베틀바위와 마천루 협곡 구간이 2020년과 2021년 차례로 개방돼 탐방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두타산에는 눈누난나 힐링 코스, 야경일품산책코스, 베틀바위 산성길, 두타산 오름길 코스 등 다양한 트레킹 길이 조성돼 자신의 체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계곡을 건너면 길은 베틀바위 산성길과 용추폭포길 두 갈래로 나뉜다.

A구간 :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1.5 km/편도 1시간 30분)

B구간 :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 – 미륵바위(회양목 군락지) - 두타산성 쉼터(2.7km/편도 2시간 30분)

C구간: 관리사무소 - 베틀바위 전망대 – 두타산성 쉼터 - 마천루 협곡(12산성 폭포-다래나무 군락지-수도골 석간수 구간: 최고봉에 마천루 전망대 위치)- 선녀탕-쌍폭포 - 용추폭포(4.7km/편도 3시간)

베틀바위 산성길은 줄곧 오르막과 가파른 돌계단길이다. 30분 정도 오르면 서서히 첫 시야가 트이면서 산 아래 리조트와 주차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컴컴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두 눈앞에 커다란 소 엉덩이처럼 푸짐한 산세에 털이 벗겨진 듯한 바위들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 계곡도 보인다. 허연 바위가 드러난 산들은 얼핏 보아도 거칠고 방문객에게 쉽게 곁을 내어 줄 것 같지 않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를 지나고 회양목 군락지도 지난다. 산세는 점점 더 험악해지고 도저히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느껴질 즈음 눈앞에 뾰족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드디어 베틀바위 전망대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수정처럼 날카롭게 깎인 바위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푸른 나무들이 바위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 기이할 정도다.

두타산의 베틀바위 /변영숙

해발 550m에 위치한 이 뾰족바위들은 베틀처럼 생겨서 ‘베틀바위’라고 불린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베틀릿지', '두타산의 소금강'으로도 통한다. 베틀바위에는 하늘나라 선녀가 벌을 받아 인간 세상으로 쫓겨나 비단 세 필을 짜고 개과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마천루 협곡으로 향한다. 베틀바위를 조금 지나면 미륵바위(회양목 군락지)가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약 2km 구간 끝에는 12산성폭포가 기다리고 있다.

베틀바위부터 12산성 폭포에 이르는 구간은 가히 ‘한국의 장가계( 張家界)’라고 할 만하다. 중국 후난성 북서부의 장가계의 옛 지명이 무릉이었으니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듯하다.

바위산들이 이중삼중으로 주름처럼 겹쳐 있고 짙은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며 피어오르는 모습은 순간 인간계가 아닌 선계에 들어온 듯하다. 주변은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이요, 하늘과 경계를 이룬 듯 서 있는 병풍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갑자기 계곡에서 긴 수염을 기른 신선이 나타나 ‘웬 놈이냐?’라고 호통이라도 칠 것 같다. 

두타산의 폭포/ 변영숙

정신을 차리고 바위 끝에 매달린 잔도길을 내려오면 쌍폭포의 끝자락이 보인다. 쌍폭포는 두타산 정상과 박달계곡(두타산과 청옥산의 가운데 정상 지점), 청옥산과 고적대(高積臺) 물이 한곳으로 모여 형성된 폭포이다. 쌍폭포에서 50m 위쪽에 용추폭포가 있다. 신선봉 아래 3단으로 떨어지는 용추폭포는 주변의 반석과 어우러져 천하 절경을 빚어낸다. 한여름에는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용추폭포를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쌍폭포에서 삼화사 방향으로 내려오면 이번에는 학소대(鶴巢臺)가 모습을 드러낸다. 청옥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너른 바위를 따라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곳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부른다. 

양사언과 김시습의 글이 새겨진 무릉반석 … 토포사에 눌린 백성들의 恨 

두타산 계곡/ 변영숙

무릉반석을 지나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을 지나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에 이르는 구간을 두타산 무릉계곡이라 한다. 깨끗하고도 풍부한 물, 폭포, 기암괴석, 아름다운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여름 피서지로 최고이고 가을 단풍관광으로도 그만이다. 이 14km의 계곡길은 너무나 아름다워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경이 됐다.

두타산 무릉계곡은 설악산 천불동 계곡, 포항 내연산 보경사 계곡, 오대산 노인봉·청학동계곡·소금강 등과 함께 동해안 4대 명승지로 꼽힌다.

넓히가 무려 1500평에 달하는 무릉반석/ 변영숙

약 5000㎡(약 1500평)에 달하는 무릉반석은 그 자체로 절경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반석마다 어떤 생명체들이 꿈틀거리는 듯 수많은 묵객들이 새겨 놓은 글과 이름들이 빼곡하다. 돌에 새긴 글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또렷하고 정갈한 글씨체들이 더욱 감탄을 자아낸다.

그 중에는 조선 전기 4대 명필가로 꼽히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초서체로 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글귀가 단연 눈에 띈다. 이 글씨는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 시(1571~1576) 무릉계곡을 방문했을 때 쓴 글씨라고도 하고, 옥호거사 정하언(玉壺居士 鄭夏彦)이 삼척부사 재직하던(1750~1752) 중 1751년(신미년)에 썼다는 설도 있다.

무릉반석에는 단종의 폐위 이후 천하를 떠돌던 매월 김시습의 글도 있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이름들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이름들 속에는 조선시대 산속으로 숨어들었던 이들을 잡으러 나선 토포사들의 이름도 상당수라고 한다. 신해 3년 또는 계미 3년 등 연도와 이름을 함께 새겨 넣었다.

토포사(討捕使)는 조선 후기 도적이나 화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특정 수령이나 진영장이 겸했던 특수 관직으로 명종 때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는 남치근이 이 직책에 임시로 임명된 적이 있다. 토포사가 제도화된 것은 인조 16년(1638)년 이후이다. 토포사들의 추적 대상에는 화적이나 도적뿐만이 아니라 탐관오리나 양반들의 폭정을 견딜 수 없어 달아난 선량한 백성들도 포함됐다. 이름들의 정체를 알고 나니 무릉도원은 한순간 으스스한 귀곡산장 같은 느낌으로 다가선다.

실제로 두타산 무릉계곡은 임진왜란 때는 수천수만의 화살이 강물에 떠 흘러 ‘화살내’를 이루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고여 ‘피쏘(피로 물든 연못)’가 생겨났던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량학살이 일어나 7개의 커다란 피범벅 구덩이가 있었고 5000명이 한날한시에 총살당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무릉계곡을 방문한 시인 김지하는 이곳에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의 피비린내 나는 아우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가 들었던 피와 고통의 소리는 시집 ‘검은 산 하얀 방’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그중에 ‘너럭바위’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한 노인을 만났는데 가라사대

사람은 손을 손으로 저울질할 일이다라고 하더라

두타산은 일곱 개의 피복창이 있었다고 하더라

오십 개의 우물 터가 있었다고 하더라

오천 명이 한날한시에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라

사멧골 제사는 모두 한날한시라고 하더라

피쏘 한복판에 물 못 들어가는 큰 구멍 하나 있다 하더라

그 구멍 속에 한 여자가 발 거꾸로 해 지금도 떠있다 하더라

돌아오는 길에

피쏘 너럭바위 위에

아로새겨진

토포사! 토포사! 토포사!

<김지하 ‘너럭바위’> 


번득이는 것이

왜 빛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눈뿐일까요 

번득이는 것이 

왜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햇빛뿐일까요 

하늘에 가득 찬 총알 총알 총알 

그 구리의 빛은 

찢어진 왼쪽 다리 끌며 당신 찾는데(......)

가물거리는 마지막 생각

가물거리는 마지막 눈 

그 속에 타고 있는 

삼화사 촛불 

마지막 들리는 

삼화사 독경소리 

마지막 보이는 

삼화사 쇠 부처님 

아 아 

물방울. 

<김지하 ‘피쏘’ 중> 

무릉계곡 반석 초입에는 금란정(金蘭亭)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금란정은 1947년 삼척 유림들이 삼척 북평동에 건립한 정자인데 195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삼척 유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삼척향교'를 폐지했다. 이에 유림들은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 후인 1947년 금란정을 건립했다. 정자의 12기둥에는 '양사언이 붓을 휘두른 곳이고 '이승휴가 불경을 열파한 곳이다'와 같은 주련들이 새겨져 있다.

금란정 앞쪽에도 초서체로 쓰인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암각 반석이 놓여 있다.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희미해지고 마모되자 1995년에 만든 복제품을 이곳에 두었다.

후삼국의 화합 기리는 천년고찰 ‘삼화사’ … ‘고려망국 원혼’ 달래는 수륙재 도량 

두타산 삼화사와 삼층석탑/ 변영숙

무릉반석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천년고찰 삼화사가 반긴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두타산과 청옥산의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삼화사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삼화사는 "서쪽 봉우리는 봉황이 춤추고 학이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며 남쪽 기슭은 용이 어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형세"라는 말이 전해온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통일신라 흥덕왕 4년(829)에 창건됐다는 설도 있다. 

삼화사는 경문왕 4년(864)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개조인 범일국사가 중창하여 삼공암이라고 하였다. 이후 측연대, 중대사로도 불렸다. 

고려 태조 원년에 삼창되면서 세 나라(후삼국)를 하나로 화합한 영험한 절이라는 뜻으로 삼화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삼화사는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다. 또 조선 개국 당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추종세력을 삼척 앞바다에 수장했는데 그 원귀를 달래는 수륙재(水陸齋) 도량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전소돼 효종 때 몇 차례에 걸쳐 중건됐다. 

현재 삼화사는 적광전(대웅전)을 비롯해 약사전, 극락전, 삼성각, 비로전, 범종각 등의 전각과 두타선원, 적묵당 등의 당우로 가람을 이루고 있다. 문화재로는 통일신라 말 혹은 고려 초에 제작된 적광전의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과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이 있다. 

삼화사에서는 10월이면 국행 수륙재가 열린다. 수륙재는 정처 없이 떠도는 고혼(孤魂)과 아귀(餓鬼)의 천도(薦度 : 이승의 업을 소멸하고 극락으로 보내는 것)를 위한 의식을 말한다. 삼화사 수륙재는 조선 전기의 국행 수륙재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국가무형문화제 제125호로 지정돼 있다. 

숨겨진 백두대간 트레킹로 ‘원방재’ ‘백복령’ 길 … 옛날 소금장사 넘던 고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트레킹 길로는 동해시 신흥동(행정동인 삼화동의 일부) 관촌마을과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로 넘어가는 원방재다. 원방재( 720m)는 백두대간에 걸쳐 있다. 정선군 임계면과 삼척시 하장면을 임도는 길이가 100km에 가까워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선호한다. 

원방재에서 정선으로 향하면 부싯돌을 생산하던 ‘부수베리’가 나온다. 원방재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북상하면 백복령에 이른다. 남하하면 상월산, 이기령 구간이다. 

백복령을 경유하는 42번 국도는 동으로는 강릉시를 거쳐 동해시에서 끝나고, 서로는 정선 평창 횡성 원주를 지나 여주 이천 용인 수원 안산 시흥 인천에 이른다. 

백복령과 원방재는 삼척 강릉으로 소금을 사러 나갔던 소금장수들이 굽이굽이 지게를 메고 넘어다니던 눈물고개다. 백복령(白伏嶺) 일대에는 한 때 군사들이 많이 주둔해 군대(軍垈)로도 불린다. 

동해시의 바다는 묵호항 외에 망상해수욕장과 추암촛대바위(추암동, 법정동은 북평동), 경복궁 근정전의 정동쪽에 있다는 대진마을(대진항) 등이 대표적이다. 대진항은 어달동 회타운과 망상해수욕장 사이에 있다. 대진동, 망상동(일부), 어달동은 모두 법정동으로는 묵호동이다. 촛대바위의 일출은 방송에 나오는 애국가 영상의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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