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시 성내동 죽서루를 지은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천은사’에 가 멈추게 된다. 두타산 동쪽 자락에 자리 잡아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한 마을 여러 개를 지나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천은사(天恩寺)로 향하는 길은 마치 세상 끝을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마을이 끝나고 절 자락이 나올 즈음 문득 아주 깊은 산속에 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산이 깊은 탓일까. 천은사로 오르는 길은 햇빛 한 자락도 인색하기만 하다. 계곡은 깊지만 물이 적어 마른 계곡이고 푸른 이끼가 푸른 멍처럼 바위들을 뒤덮었다. 계곡에 가득한 음산한 기운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하지만 일주문을 지나 절로 향하는 들머리 길은 울창한 숲, 특히 쭉쭉 뻗은 침엽수림과 수백 년 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숲이 일품이다.
천은사는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두타삼선이 백련(白蓮)을 가져와 창건한 절로 백련대로 불렸다. 흥덕왕 4년에 대웅보전을 건립한 후 절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들머리를 올라 절에 도착해 마주한 천은사는 두타산 천년고찰이란 수식에 비해 훨씬 아담하고 소박해 보였다. 중심 전각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약사전, 설선당, 삼성각, 보광루, 범종각 등이 있다.
극락보전에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이 봉안돼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7호이다. 대나무, 소나무, 매화나무 등 문살 모양이 고운 약사전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48호인 ‘삼척 천은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이 모셔져 있다. 삼성각에 올라 천은사를 굽어보니 천은사가 얼마나 첩첩산중에 둘러싸인 절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이곳에서 고려시대 이승가 10여 년 동안 기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집필했다. 고려 고종 11년에 태어난 이승휴는 12세에 원정국사의 방장에 들어가 신서(申諝)를 스승으로 모시고 좌전과 주역 등을 익혔고, 고종 39년(1252)에 과거에 급제해 두루 관직을 섭렵했다. 과거 급제 다음 해에는 홀어머니가 계신 삼척현에 갔다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혀 두타산 구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기도 하였다.
경흥부서기, 도병마녹사, 감찰어사, 우정언 등 관직을 거치며 국왕과 측근들의 전횡을 직언하다 여러 차례 파직 당했다. 충렬왕 6년(1280)에 파직 당한 후 삼척현 구동, 지금의 천은사 자리에 용안당이라는 초막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며 제왕운기를 집필했다.
충렬왕 13년(1287)에 저술한 제왕운기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읊은 역사서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중국인과 다른 천(天), 즉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으로 기술하며 단군신화를 한국사 체계 속에 편입시켰다.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며 우리나라 역사의 일부로 바라본 관점은 기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차별화된다. 제왕운기는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강조해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이승휴는 언덕 위에 용안당을 짓고 생활했다. 용안당 남쪽에 우물을 만들어 표음정이라 불렀으며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보광정이라 불렀다. 보광정 아래에는 연못을 만들어 지락당이라고 불렀다. 현재 용안당 자리에는 천은사 주지스님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연못 맞은편에 동안거사를 모신 사당이 있다.
천은사 경내 숲속 곳곳에 보이는 나무판자와 굴피를 엮어 만든 움집은 ‘통방아’이다. 통방아는 물을 이용해 작동시키는 방아로 과거 천은사 일대가 삼척현 구동마을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최근 복원했다.
천은사를 떠나기 전 처사님에게 준경묘와 천은사의 관계를 물었더니 “옛날에 천은사에서 준경묘 제사 지낼 때 쓰이는 제물을 준비했어요.”라는 말과 함께 “시간 되시면 한번 들러 보세요. 볼만합니다. 소나기가 올 것 같으니까 비옷과 우산도 챙겨 가시고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준경묘는 천은사에서 거리상으로 14km 남짓으로 10여 분이면 도착하지만 묘역까지 2km에 달하는 산길을 올라야 한다기에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시간이 오후 3시가 다 되어 가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런데 처사의 적극적인 권유 한 마디에 내 마음은 벌써 준경묘로 향했다. 처사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준경묘가 위치한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는 활을 쏘던 곳이라 하여 활터 또는 활계라고 불리던 곳이다. 활기리의 인적 없는 도로를 따라 달리니 옛날 유배 가던 선비의 심정이 이랬나 싶다. 끝도 없는 망막함이라고나 할까. 사람도 차도 없는 도로를 달려 활기리에 도착하여보니 마을이 제법 번듯하다. 준경묘 앞에는 관광안내소가 설치되어 있고, 문화 해설사까지 두고 있다. 하늘은 맑았지만 천은사 처사의 말이 떠올라 작은 우산을 챙겨 준경묘로 향했다.
준경묘로 향하는 임도에는 차단기가 내려져 있어 차량 운행이 불가능하다. 죽으나 사나 산길을 올라야 한다. 누군가의 산소로 향하는 길은 어찌 됐든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은 아니다. 하물며 인적 없는 깊은 산길이라면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발 빠른 사람에게는 왕복 한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필자처럼 다리가 무거운 사람에게는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정비도 안 된 오르막 숲길을 오르면 평평하게 다져진 시멘트 길이 나오고 다시 오솔길로 이어진다.
묘역에 도착할 무렵 단정하게 지어진 목조건물이 나오는데 뜻밖에도 화장실 건물이다. 역시 한국의 화장실 문화는 세계 최고를 자랑하고도 남는다. 화장실을 지나면서부터 송림은 더 울창해지고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솟구치는 듯하다. 붉은색을 띠는 곧고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들이 마치 묘역을 감싸고 있다.
준경묘 소나무들은 금강송 중에서도 특히 황장목(黃腸木)이라고 불리는 최고의 소나무들로 조선 후기 경복궁 중수 때 목재로 사용됐다. 화재로 전소된 남대문 복원 때에도 쓰였다. 금강송은 ‘백두대간 금강산에서 경북 영덕에 걸치는 산악지대에 주로 자라는 질 좋은 소나무의 한 품종’이라고 정의돼 있지만 크게 보면 육송에 속한다. 육송은 국내에서는 해송(곰솔)에 비해 적통으로 여겨진다. 강송, 홍송, 적송 등이 금강송의 다른 말이다.
황장목은 금강송과 같은 말이다. 누런 창자저럼 목재 속이 황금빛처럼 누렇다는 의미다. 금강송, 강송, 적송, 홍송, 춘양목, 조선소나무는 일제 강점기에 붙은 이름이라 최근엔 황장목으로 순화하자는 의견도 있다. 지역에 따라 경북 봉화에서 나면 춘양목, 울진에서 나면 울진송, 충남 태안 안면도에서 나면 안면송이라 부르는데 모두 육송 계열의 적송들이다.
2001년 산림청 임업연구원은 충북 보은군 정이품송을 복원할 가장 우량한 형질의 소나무를 5그루 찾았는데 이 중 준경묘에서 2그루, 울진군 소광천에서 2그루, 강원도 평창에서 1그루가 선발됐다. 이들 소나무가 국내 최고의 미인송인 것이다.
준경묘와 가까워질수록 소나무들은 더 촘촘하게 서 있다. 그 모습에 넋을 잃고 있는데… 갑자기 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늘게 시작된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은 빗방물로 변했다. 천은사 처사의 말을 듣고 혹시나 하고 챙겨 온 우산을 펴면서 야릇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홍살문이 보이고 이내 넓고 편편한 대지가 펼쳐진다. 묘역까지는 홍살문에서도 한참을 더 가야 했는데 일대는 마치 울창한 숲이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새로운 땅이 돋아난 듯했다.
준경묘(濬慶墓)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인 이양무 장군(李陽茂, ? ~ 1231년, 고종 18년)의 묘다. 예전에는 이 무덤의 위치를 몰랐으나 세종대에 사람들의 전하는 말과 기록을 참고해 1899년(조선 고종 3년)에 묘소를 구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세우고 준경이라는 묘호를 내렸다. 이미 성종 때 이곳에 묘를 조성하려 했으나 여러 논란 끝에 중단된 바 있다. 성종대에 이어 고종대에 두 차례 성역화 작업이 이뤄졌기에 준경묘는 원시림 상태의 금강송 숲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성계 조상의 실묘 중 남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묘이다. 그러나 학계에서 사후 668년이 지나서야 공인된 준경묘의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천하의 명당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조의 4대조인 이안사는 전주에서 아전으로 지내다 산성별감과 기생을 사이에 두고 다투다 삼척으로 피신했다. 삼척으로 이사 온 지 1년 만에 부친상을 당한다.
일화에 따르면 이안사가 아버지의 묏자리를 찾아 헤매다 지쳐 나무그늘에 쉬고 있는데 도승과 어린아이가 나타나 ‘길지로다. 대지로다’하는 소리를 엿듣게 된다. 이어 도승이 ‘소 100마리를 잡아 개토제를 지내고 널을 금으로 하면 5대손 안에 임금이 날 것’이라고 하는 것까지 죄다 들었다. 살림이 넉넉지 못한 이안사는 고심 끝에 소 100마리를 잡는 대신 흰소(백우) 한 마리를 잡고 금관 대신 황금빛 귀리 짚으로 널을 만들어 묻었더니 뒤에 이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목조는 산성별감이 삼척으로 부임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추종자 170명과 함께 함경도로 이주(도주?)했다. 세월이 흘러 익조, 도조, 환조, 태조가 태어났다.
제실 앞에는 “준경묘 진응수’가 흐른다. 땅의 생기가 넘쳐흘러 지상으로 분출되고 있는 진응수를 마시면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진다고 한다. 주변에 소나무 숲을 보며 크게 호흡하고 진응수도 한 바가지 퍼 올려 꿀떡꿀떡 삼킨다. 필자는 삼척 여행 후 크게 몸살을 앓았으니 명당의 기운도 받을 준비가 된 자에게만 베풀어진다고 생각하게 된다. 빗속에서 준경묘를 방문하고 내려오니 거짓말같이 하늘이 갠다. 이래저래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준경묘에서 4km 떨어진 미로면 하사전리에는 삼척 이씨 이강제(李康濟) 장군의 딸이자, 이양무의 아내이자, 목조의 모후를 모신 영경묘(永慶墓, 강원도 기념물 제43호)가 있다. 하사전리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200m쯤 올라가면 영경묘가 나온다. 능 아래에는 목조가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다.
준경묘와 영경묘 일원의 숲은 2005년 제6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100년 이상된 금강송이 20~30m 높이로 장대하게 서 있는 풍경은 가히 선계(仙界)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