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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포항의 얼굴, 떠오르는 ‘구룡포’와 한반도 호랑이 꼬리 ‘호미곶’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2-04-29 08:57:29
  • 수정 2022-05-21 23: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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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육사의 시 ‘청포도’가 탄생한 곳 … 젊은이의 핫 명소로 떠올라

포항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접한 도시로 남쪽으로는 경주시, 서쪽으로는 영천시, 북쪽으로는 영덕군과 청송군과 경계를 이룬다. 형산강이 도시를 관통해 흐르고 천년 고찰 보경사를 품은 내연산을 비롯해 수 십 개의 산들이 포진해 있다.


구룡포항과 수산시장

포항은 어업이 주를 이뤘고 군사도시이기도 했으나 포스코(포항제철)가 들어선 이후 우리나라 철강 산업의 메카로 우뚝 섰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가 탄생한 곳도 포항시이다.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북경과 조선 땅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1940년 잠시 포항을 방문하는데 그때 지은 시가 만든 시가 바로 ‘청포도’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박혀 들어와… <중략>”로 유명한 시다. 청포도 산지인 포항의 청포도 밭을 보며 고향을 떠올렸을 시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온다. 이 시를 발표하고 3년 후 시인은 북경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요즘 포항시에서 가장 핫한 구룡포 마을을 소개한다. 


구룡포 마을 …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아스라함과 ‘일본인 가옥’의 씁쓸함 겹쳐  


길에 이어진 계단 아래로 바다가 펼쳐지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쪽빛 바다에는 알록달록 요트와 고기잡이 어선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호수처럼 잔잔한 구룡포 바다를 보면서 사랑의 ‘썸’을 타는 젊은 남녀 주인공들. 


어느 날 한적한 구룡포 마을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서울에서 상처받고 오갈 데 없는 그녀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아온 작은 해안가 마을. 마을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녀를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녀가 마을 청년과 사랑의 썸을 타고 점차 주민들에게도 한마을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가 바로 구룡포 마을이다.


포항의 남쪽 동해 바닷가에 자리 잡은 구룡포는 한반도의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 지명에서 ‘용’과 관련된 마을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지명의 유래는 신라 진흥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지명은 ‘사라리’. 진흥왕은 새로 부임하는 장기 현감에게 “동쪽 바다가 노해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백성들의 고충이 크니 백성들을 잘 보살피라”고 명을 내렸다. 장기 현감이 사라리 마을에 도착하자 갑자기 맑은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더니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때 소용돌이치는 바다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는데 마지막 한 마리 용은 그만 바닷물에 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후 바다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잔잔해졌다. 그 후 사라리는 ‘구룡포’가 되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로 승천하지 못한 용이 수호신이 되어 구룡포를 지키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구룡포 앞바다에는 용 한 마리가 남아 있다. 


구룡포공원의 9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을 형상화한 조각상

‘일본인 가옥거리’ 입구로 들어서서 높은 계단을 오르면 ‘구룡포공원’ 안에 용 아홉 마리가 승천하는 듯한 형상의 청동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아홉 마리 용들은 흡사 하늘로 올라가기 직전의 용트림을 하는 모습이다. 구룡의 뒤편에는 ‘충혼각’이 있다. 원래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으나 해방 이후 헐어 버리고 순국선열을 기리는 충혼각을 세웠다.


그러나 정작 젊은 사람들은 공원까지 올라와서도 구룡이나 사당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사진 한 장 남기는 것이 최대 목표인 것처럼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지면 아무런 미련 없이 계단을 내려간다.


구룡포구와 일본인 가옥거리 일대 전경

1920년대까지만 해도 한적했던 포구는 일본인들이 1km에 달하는 방파제를 쌓고 집단 거주하면서 동해안의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포구로 발전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구룡포에 일본인 거주지를 만들었다. 계단 아래 골목길에는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가옥 몇 채가 남아 있다. 일본인 가옥거리는 종종 영화 속에 등장하곤 하는데 ‘여명의 눈동자’가 대표적이며 최근에는 동백꽃 필 무렵이 이 골목에서 촬영됐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곳은 ‘카멜리아’이다. 주인공 동백이가 운영했던 식당이다. 두루치기를 제일 잘 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카페로 변신했다.

카페로 개조된 구룡포 일본 가옥 모습

 

공원과 골목길을 둘러보았다면 이번에는 계단 아래 세워진 비석에 눈을 돌려 보자. 앞면에는 영일군수 김우복, 영일교육감 김종락, 제일제당 구룡포 통조림공장 하사룡 등. 지역 유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석의 뒷면을 보면 시멘트가 처덕처덕 발라져 있다. 1920년대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된 이후 공원을 조성한 일본인들은 관계자들의 이름을 비석에 새겼다. 일제 패망 이후 일본인들이 시멘트로 일본인들의 이름을 지우고 돌려세워 구룡포 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겼다. 계단 아래 주차 도움을 주는 마을 어른이 얘길 해주지 않았다면 놓칠 뻔했던 ‘비석’이야기다.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라는 일본인이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 가옥이 최근 복원 공사를 마치고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개관했다. 그는 구룡포에서 선어 운반업으로 크게 성공해 부를 쌓았으며 건물을 짓기 위해 당시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들여왔다. 내부에 불단과 난방기구, 창살, 칸막이 문, 장식기둥 등 일본식 건물의 구조적·의장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어 근대 일본 건축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돌계단에 걸터앉아 바라본 바다는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하다. 그러나 불과 100년도 안 된 과거에 이곳이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과메기문화관, 과메기의 역사와 산업 총망라 … 구룡포 과메기 전국 점유율 90% 


구룡포 과메기문화관

구룡포공원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고래 형상으로 지은 ‘과메기문화관’이 나온다. 포항 하면 과메기가 떠오를 정도로 포항은 맛 좋은 과메기 산지로 유명하다. 과메기는 말린 청어를 말한다. ‘관목청어’(貫目靑魚), 즉 꼬챙이처럼 날카로운 것으로 청어의 눈을 뚫어 말렸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목은 ‘메기’ 또는 ‘미기’를 일컫는 말로 ‘관목’이 ‘관메기’로 불리다가 ‘과메기’가 됐다.


과거 과메기는 청어를 그냥 외풍에 말리지 않고 ‘냉훈법’이란 독특한 방법으로 말렸다. 구룡포 집들의 부엌에는 ‘살창’이 있었는데, 과거에는 청어를 살창에 걸어 건조했다. 이때 아궁이의 솔가지 향이 살창을 통해 나오면서 청어에 은은하게 베어 최상의 과메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과메기는 과거 왕실의 진상품으로 올릴 정도로 맛이 좋고 귀한 음식이었다. 불포화지방산인 EPA와 DHA 함량이 많이 고단백 음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60년대부터 동해에서 청어가 잡히지 않으면서 청어와 비슷한 꽁치로 과메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요즘 과메기는 청정해역에서 잡은 꽁치를 영하 10도의 기온에서 냉동시켰다가 추운 겨울날 실외에서 냉동과 해동을 반복해 말려 만든다. 강원도 황태 제조법과 비슷하다.


과메기문화관에서는 과메기의 유래와 문헌상 나타난 과메기에 관한 기록부터 과메기 덕장, 과메기 만드는 법, 과메기의 활용법 등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과메기에 관한 문헌상 기록은 경상도읍지, 영남읍지 등에 등장한다. 과메기는 영일만의 토속 식품으로 영일(迎日, 또는 연일·延日, 현재 연일읍)과 장기(長鬐, 현재 장기면)에서 만든 과메기만 궁중의 진상품으로 선정됐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매년 겨울이면 영일만 하구(주진·注津)에서 가장 먼저 청어가 잡히는데 이를 나라에 진헌한 후에야 다른 곳에서도 청어 잡이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청어의 어획량으로 그해 농사의 길흉을 예측했다고 한다. 이밖에 다수의 문헌에 ‘관목청어’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예부터 과메기가 상당히 귀한 식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과메기는 구룡포뿐만 아니라 다른 동해안이나 서남해안에서도 생산되지만 구룡포의 신선한 청어와 깨끗한 물로 만드는 구룡포 과메기를 따라잡을 수 없다. 포항 구룡포 과메기는 전국 시장 점유율의 90%를 차지한다.

과메기 문화관에는 체험실과 카페도 있다. 문화관 카페는 구룡포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육당 최남선 ‘호미곶 일출’을 대한십경으로 칭송 


영일만 끝자락에 위치한 호미곶은 마치 호랑이 꼬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옛 대보면·大菩面)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지도에서 보면 영락없이 한반도의 호랑이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조선 명종 때의 최고의 풍수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는 한반도를 호랑이가 앞발로 연해주를 할퀴는 형상이며, 백두산은 호랑이의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최고의 명당자리라고 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호미곶과 경북 울진군 죽변 용추곶을 일곱 번씩 답사한 끝에 호미곶을 우리나라 최동단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지리’에서 호미곶 일출을 ‘대한십경’의 하나로 꼽았다.


우리나라 최동단 호미곶의 ‘해맞이광장’은 최고의 일출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새해 첫날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려는 사람들로 호미곶 광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인파로 붐빈다.


이 곳엔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등대박물관’이 있다. 광장 끝에는 ‘상생의 손’이라는 대형 손 모양의 조각상이 서 있다. 그 옆 새 천년을 기념하는 ‘불씨 보관함’에는 남태평양 피지섬과 동해 독도 일출의 햇빛에서 채화한 불씨들과 호미곶에서 채화한 새 천년 시작의 불씨를 합한 영원의 불씨 ‘천년의 눈동자’가 보관돼 있다.


호미곶은 “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이란다.”로 시작되는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의 무대이기도 하다. 광장의 ‘영일노래비’에 그의 노래 가사가 새겨져 있다.


광장에서 더 바닷가로 가면 육지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양의 청동 손이 물 위로 솟아 있다. 각각 왼손과 오른손이다. 다섯 손가락에 갈매기가 앉아 있을 때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호미곶은 ‘호미곶 해안둘레길’ 4코스이기도 하다. 네 개의 코스로 구성된 총 58km의 해안둘레길은 걷는 내내 동해 바다의 푸른 물결과 파도 소리가 친구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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