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에서 양수리와 세미원을 빼놓고 논한다면 ‘팥 앙금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가을 남한강변은 길가에 올망졸망하게 피어 있는 작은 들꽃 한 송이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고 지난 봄여름에 감사하며 남은 계절의 무사안녕을 넉넉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만든다. 아직은 이른 낙엽이 뒹구는 작은 들꽃 오솔길을 걸으며 여름 내내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옛 시절 ‘황포돛배 영화’ 뒤로하고 그리움과 연꽃세상의 아름다움 펼치는 양수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하나의 물줄기로 되는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의 두물머리 포구는 남한강 최상류인 강원도 정선군과 평창군에서 발원한 물길이 충북 단양과 충주를 거쳐 경기도 여주를 거쳐 닿는 곳이다. 또 강원도 금강군(북한)에서 발원해 화천, 춘천, 가평을 거치는 북한강물이 여기서 합류한다.
예부터 강원도나 충청도에서 나오는 목재가 곡식 등이 종착지인 서울 뚝섬과 마포나루까지 이어질 때 마지막 중간 정착지로 역할을 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1973년 양수리보다 하류인 지점에 팔당댐이 건설되고 일대가 상수원 보호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수로는 육로로 대체되었고 포구를 오가는 길손들도 뜸해졌다.
나루터에 묶여 힘없이 떠 있는 황포 돛배 한 척이 과거의 영화를 기억할 뿐 흐르는 듯 멈춰 선 듯한 고요한 물줄기와 400년 넘은 늙은 느티나무는 인간사에 무심한 듯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다만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정비 공사가 끝난 두물머리 일대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두물머리 둘레길이 조성되었고 느티나무 주변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쉼터와 포토존이 생겨났다. 강가에 사각 프레임 하나 설치했을 뿐인데 프레임을 통해 보는 두물머리는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경기도 두물머리 나루터'라는 표지석과 함께 겸재 정선이 화폭에 남긴 두물머리 풍경도 감상할 수 있다. 강가 카페 루프탑에 앉아 흐르는 강물이 되어 깊어가는 가을을 느껴볼 수도 있다.
두물머리에서 ‘배다리’를 건너면 세미원(洗美苑)이다.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水洗心 觀花美心)는 의미의 세미원은 경기도로부터 100억원을 지원받아 한강 상류에서 떠밀려 내려온 쓰레기 매립장이나 다름없던 지역을 정비하여 만든 자연정화공원이다.
전통적인 정원 양식에 6개의 연못을 조성했다. 한강물의 중금속과 부유물질을 정화해 팔당댐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역할도 한다. 연 50종, 수련 120종 등 270여 종의 수생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2019년 경기도 제1호 지방정원으로 지정됐다. 1만9000평의 이 곳 땅주인은 건설교통부다.
연꽃이 피어나는 6~9월 세미원은 온통 수련과 연꽃 세상이 된다. 특히 밤에만 피어난다는 빅토리아 연꽃을 보기 위해 사진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연에 대한 예찬은 예부터 끊이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 자라도 때묻지 않고, 맑은 물에 씻기었어도 요염하지 않다. 속(연꽃대)은 비었어도 곧게 자란다. 연꽃은 일제히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지 않는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번갈아 핀다.
연과 달리 수련(睡蓮)은 잎이 수면에 붙어 있다. 개구리가 추운 물속에 나와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한자 이름도 ‘물 수’가 아니라 ‘졸릴 수’다. 오후 2~4시가 되면 잎을 오므리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수련의 빛깔은 흰색을 기본으로 분홍색, 연분홍, 빨강, 노랑색, 보라색 등 다양하다. 화가 모네는 시간과 물빛에 따라 달라지는 수련의 모습을 담기 위해 평생을 보냈다.
양수리의 상춘원에는 석창포 등 수생식물이 심어져 있는 석창원(石菖園), 수레형 정자인 사륜정(四輪亭), 정조 때 창덕궁 안에 있던 온실, 세종 때 강화도에 설치했던 온실 등이 재현돼 있다. 사륜정은 고려시대 문인인 이규보가 설계만 해 놓고 정작 만들지 못한 것을 문헌에 따라 복원해 놓은 것이라 한다. 상춘원의 세미원의 일부다.
배다리를 건너면 세한정 송백헌(歲寒亭 松柏軒)을 먼저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양서면 용담리에 속하고 유료 입장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그림과 함께 세한도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세한도의 사람들’에서는 세한도를 그린 추사와 그의 제자 이상적, 일제강점기 때 세한도를 지킨 서예가 손재형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을 오갈 때마다 스승을 위해 신간 서적을 구해와 스승에게 전해 주었다. 책을 갖고 무려 두 번이나 유배지인 제주를 찾았다. 의리를 지키는 제자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표현한 것이 세한도이다. 집 한 채와 소나무 세 그루가 그려져 있고 발문이 적혀 있다. 발문에는 겨울이 와야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해 제자의 신의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손재형은 대표적인 한국 근대 서예가로 ‘서예’라는 용어를 처음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추사를 연구하던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는 인사동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발견하고 구입하게 된다. 후지스카가 1943년에 세한도를 갖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이 사실을 안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동경으로 그를 찾아가 끈질긴 설득 끝에 1944년 세한도를 한국으로 되찾아왔다. 세한도의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세한정은 세한도 속 정원을 본 따 만든 것이니만큼 서로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세미원은 세한정 외에도 열대수련연못, 빅토리아연못, 홍련지, 굽이굽이 물길에 찻잔을 띄어 풍류를 즐기는 유상곡수(流觴曲水), 청계천의 수표교의 수표(수위를 재던 돌기둥)를 본 따 만든 분수대, 장독대 모양의 분수대, 창경궁에서 바람의 방향을 살피던 풍기대(風旗臺), 유리온실인 세계수련관, 연꽃박물관, 연꽃빵집, 한반도 모양의 연못에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백수련을 심은 나라를 생각하는 뜰이란 의미의 국사원(國思園), 모네의 수련 그림을 본 따 아치교가 놓인 ‘모네의 정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이처럼 세미원은 왕과 귀족들의 연꽃 또는 식물가꾸기의 취미와 글로벌한 수생식물 정원의 여러 형태를 응축해놨다. 세미원은 연꽃이 한창이 7~8월에 가야 한다. 지금은 늦어서 연꽃을 볼 수 없으니 아쉬운 마음을 내년 여름으로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양평군은 세미원을 발판으로 연을 군의 상징이자 먹거리로 발전시켜 나가려 하고 있다. 연으로 만든 과자, 빵, 술, 차, 레시피 등을 개발 중이다. 연이 양평군을 먹여살리는 효자가 될지 모른다.
토종 야생화 200종, 남한강변과 어우러지는 ‘숨은 보석’ 양평들꽃수목원
중앙선 오빈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양평읍 오빈리의 양평들꽃수목원이 있다. 남한강변에 조성된 들꽃이 소박하고 가을 햇살처럼 포근한 수목원이다. 시골 동네 어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들이 이 수목원의 주인이다.
강변의 정취와 꽃들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수목원 구석구석에 설치된 코끼리 상, 그네 타는 오누이, 연주단, 책 읽는 소녀상들이 수목원의 단조로움을 깨고 자잘한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다양하게 수목원을 꾸미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자연생태박물관에는 생태계의 표본과 실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허브 및 야생화 정원에는 멸종돼 가는 토종 야생화 200여 종이 전시돼 있다. 각종 허브 50여 종이 아로마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밖에 수생습지, 관목과 덤불로 기하학적 모양을 내는 토피어리(Topiary)정원, 열대식물원, 야외정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이외에도 사계절 썰매장, 쿠키 체험장, 자전거 대여점 등 체험 공간과 놀이 공간이 많아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에게 좋다. 지금은 코로나19 유행으로 체험장을 유동적으로 운영하니 방문 전에 꼭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수목원과 자전거도로가 연결돼 있어 시원한 가을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려봐도 좋겠다. 성인 기준 8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양평의 별미, 황해도 피란민이 빚은 옥천냉면마을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일대에는 6.25 전쟁 당시 황해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모여 냉면을 만들어 팔면서 형성된 옥천냉면마을이 있다. 현재 20여개소가 성업 중인데 가격은 물냉면이 8000원으로 아직까지는 착한 가격을 받고 있다. 다소 두껍고 쫄깃한 면발, 기름기를 뺀 편육, 큼직한 동그랑땡 모양의 완자가 별미다. 평양냉면에 가깝지만 조금 더 간이 배고 메밀향이 더 진하고 구수하다. 돼지고기로만 육수를 내어 담백한 국물 맛이다. 평양냉면 스타일에 너무 익숙해진 사람은 입에 맛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만족하는 사람이 대체로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