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정이 부드럽고 너그러운 사람을 닮은 예산에는 천하의 명당자리가 많고 다수의 역사적 인물들이 배출됐다. 야심에 불타는 흥선대원군이 당대의 최고의 지관인 정만인에게 부탁해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기슭의 명당 터를 점지받았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가야사 자리다.
흥선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 곳 명당자리로 이장했다. 실제로 대원군 집안에서 고종과 순종 2대에 걸친 왕이 배출됐다. 그러나 명당의 효험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대한제국은 소멸됐다. 조승우 배우가 열연한 영화 ‘명당’은 흥선대원군과 명당에 얽힌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예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고,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겸 북한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은 예산 신양면 신양리에서 출생했다. 역시 해박한 공산주의 이론가로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서기장을 지낸 이강국(李康國 1906~1956)도 경기도 양주 출생이긴 하지만 유년 시절을 예산에서 보냈다.
조선왕조실록 추사 評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했으나 비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5~1856)다. 추사는 조선 후기의 가장 위대한 학자이자 예술가였다. 많은 이들이 추사 김정희를 추사체를 완성한 서예가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뛰어난 학자였다. 특히 금석학과 고증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기억해야 한다. 경학과 불교학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이해와 기여도 역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베이징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교서적 400여권과 불상을 구해 들여와 공주 마곡사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를 ‘해동의 유마거사’라고 칭하는 이유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卒記)에는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 사망하면 사관이 당시의 세간의 평과 자신의 평가를 곁들여 고인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실록에도 실렸을 정도면 위대성이 입증됐다고 할 수 있다. 졸기에는 높은 벼슬을 지낸 대부(大夫)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들도 실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매우 박해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 정도만이 칭송의 글이 남아 있을 정도다.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김정희는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철종 7년 10월 10일 갑오시(음력), 전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해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다.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할 수 없었으며 그의 작은 아우 김명희(金命喜 1788~1857)가 더불어 울연(蔚然)히 당세의 대가가 됐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아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에선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
추사의 굴곡진 삶 … 백부의 양자, 윤상도 옥사, 제주 귀양
추사의 생은 한 마디로 굴곡진 삶이었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년) 충남 예산에서 명문가인 경주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조부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노론의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이었다. 증조부는 김흥경의 넷째아들로서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남편, 다시 말해 영조의 사위(부마)가 된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었다. 김한신의 6촌인 김한구(金漢耉, 1723~1769)의 딸이 훗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됐다. 추사 집안은 영조 왕가와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추사는 김한신의 손자인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4살 때 후사가 없는 백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월성위(月城尉, 김한신) 가문의 봉사손(奉祀孫, 제사를 받드는 맏이)이 됐다.
추사는 14세 때 혼례를 올린 한산이씨와 사별하고 예산이씨와 두 번째 혼례를 올린다. 24살 되던 1809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819년에 대과에 합격해 순조의 아들이 효명세자의 스승이 됐고, 규장각 대교 자리에 오른다. 지금으로 치면 학예관이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과 병조참판을 역임했으나 그는 ‘규장각 대교’를 가장 명예롭게 여겼던 듯하다. 개심사 앞에 있는 그의 먼 친척 할머니의 묘비에 ‘11대 ‘규장각 대교’ 추사 김정희가 쓰다.’라는 서명이 이를 방증한다 하겠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강진 아버지가 강진현 고금도(지금은 완도군)로 유배를 가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 귀양살이를 뒷바라지하기 함께 유배길에 오른다. 임금이 지나갈 때 ‘아버지가 억울하다’며 두 번씩이나 격쟁을 한 일은 유명하다. 격쟁은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로 주로 서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단이었다. 추사 이전에 사대부에서 격쟁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추사의 생이 꼬인 것은 일찍 요절한 효명세자의 스승이었던 점과 그가 암행어사로서 안동김씨 집안 출신의 김우명을 비인현감(지금의 서천군 서부의 비인면 일대) 자리에서 파직시킨 게 원인이 됐다. 이로써 그와 생부가 함께 유배를 가게 됐다. 윤상도 옥사는 1830년 8월 28일 윤상도, 윤한모 부자가 호조판서 호조판서 박종훈(朴宗薰), 종2품인 유수(留守)를 지낸 신위(申緯), 어영대장 류상양(柳相亮) 등의 탐관오리를 탄핵했다가 안동김씨 등 노론시파의 역공을 당해 능지처참을 당한 사건이다.
추사는 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이듬해 1836년(헌종 2년) 성균관 대사성과 병조참판을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지만 잠시였다.
1840년(헌종 6년) 이번에는 본인이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제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의 나이 55세, 동지사부사로 내정돼 북경으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이 무렵 안동김씨가 다시 집권한 게 발단이 됐다. 추사는 제주도 남서쪽 끝인 대정의 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혀 9년간 유배생활을 하고 1848년에야 풀려났다. 제주로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를 만나 써 준 대흥사 대웅보전, 무량수각 등의 현판이 남아 있다.
‘괴이함의 자기화’ 추사체 … 채제공, 어린 추사 글씨 보고 “인생 고달플 것” 예감
추사가 7세 때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추사의 집 앞을 지나다 대문에 써 붙인 ‘입춘대길’이라는 글씨가 어린 추사가 쓴 글씨라는 말을 듣고 ‘이 아이가 글씨로 이름을 날리겠지만 일생이 고달플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예언은 놀랍게도 꼭 들어맞았다. 이듬해에는 실학의 대가이자 노론 북학파인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1750~1805)가 추사 고택을 방문해 추사가 쓴 ‘입춘대길’ 글씨를 보고 ‘이 아이를 키워서 가르치고 싶다’라며 추사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박제가와 추사는 평생의 사제지간이 됐다.
추사체에 대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사람들은 추사체라고 쉽게 말하지만 추사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설사 안다 해도 그 가치가 무엇인지를 모른다”고 말했다.
추사 김정희 동시대 문인이자 추사의 후배 유최진(柳最鎭 1791~1869)은 저서 ‘초산집저’에서 추사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추사의 예서나 해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해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해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마음을 격동시키고 눈을 놀라게 해 이치를 따져본다는 게 불가하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추사체의 본질을 ‘괴이함’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 괴이함은 법도를 지키면서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음이라고 한다. 즉 내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게 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은 추사체에 대해 함부로 따라 하지 말라고 했다. 박규수의 <추사체 변천론>에 보면 그의 글씨에 대해 만년의 제주도 귀양살이 이후에는 드디어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됐고 여러 대가의 정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됐으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 그래서 내 후생 소년들에게 추사체를 함부로 흉내 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추사의 연구가들은 한결같이 ‘추사체의 본질은 마지막으로 이루어 놓은 괴이함을 쫓지 말고 그분처럼 고전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것으로 나오는 창작 자세를 배우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음을 되새겨 볼 일이다.
북경에서 청나라 옹방강 만나 ‘금석학’ 눈 떠 … 북한산, 황초령 순수비 해석
24살이 되던 해 추사는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으로 가는 이조참판인 생부(김노경)의 수행원 자격으로 북경 땅을 밟게 된다. 북경은 추사의 삶에서 키워드 중의 하나이다. 추사는 그곳에서 자신의 위대한 스승들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게 된다. 옹방강과 완원은 당시 청나라 제일의 학자로 두 대학자와의 학문적, 인간적 교류는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추사의 나이는 24세였고 옹방강의 나이는 78세였으니 실로 나이와 국적을 뛰어넘는 교류었다. 옹방강은 추사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며 극찬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하고 인간적 정을 통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교통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두 사람의 이런 교류는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 세 통이 남아 있다. 추사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한 이들 편지에는 추사의 학문적 질의에 노학자가 답을 하는 형식이며 편지글 말미에 추사가 보내 준 개성 인삼 덕분에 불면증을 면하고 있다며 치하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추사의 기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추사는 청나라에 머무는 동안 많은 탁본을 접하면서 새로운 학문세계를 경험한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직접 ‘답사길’에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청에서 배운 새 학문을 발전시켜 조선의 금석학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추사의 위대함이고 추사의 정신이다.
추사는 1816년 직접 북한산 비봉에 올라 그동안 도선국사의 비로 알려진 석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냈다. 경북 경주시 암곡동 무장산에 위치했던 통일신라시대의 고찰 무장사(鍪藏寺)를 답사해 무장사비의 파편을 탁본해 무장사비임을 밝혀냈다. 또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순수비도 고석했다.
유홍준 전 청장은 “여태껏 이런 학문적 자세를 갖춘 학자는 없었으며, 그를 두고 사대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그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일본 학자가 먼저 알아본 추사의 가치와 ‘세한도’
추사에 대한 연구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 학자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동경제국대학 중국 철학과를 졸업한 이래 47살 때인 1926년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조선에 부임하기 전 그는 북경에 1년 동안 체류하면서 중국철학 자료를 수집했다. 그런 과정에서 중국인들이 추사의 학문세계를 높이 사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17년간 추사 연구에 몰두하게 됐다.
국보 180호인 세한도(歲寒圖)를 처음 소장한 이도 후지스카 지카시였다. 세한도가 다시 고국의 품에 안긴 사연도 기가 막힌다. 세한도는 1840년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가 자신을 위해 두 차례나 북경에 가서 귀한 책을 구해다가 제주도로 갖고 온 제자이자 역관인 이상적(1804~1865)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푸르른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해 그려 준 것이다.
이 그림은 이상적 가문에서 떠나 130년을 떠돌다가 후지스카 지카시 손에 들어갔다. 후지스카가 세한도를 갖고 1943년 일본으로 귀국하자, 이듬해 거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간 이가 서예가이자 동양화가인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이다. 그는 후지스카의 집과 그가 입원한 병원으로 100일간 문안하며 그림을 넘겨달라고 간청했다. 감복한 후지스카는 “결국 내가 졌다”며 돈도 받지 않고 세한도를 건넸다. 석 달 뒤 후지스카 집은 폭격을 맞아 그가 소장한 상당수 책과 자료가 불타버렸다. 극적으로 세한도가 살아남은 것이다.
1958년 소전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자금이 필요하자 경매에 내놨고, 이를 개성 출신의 갑부인 손세기 씨가 사들였다. 2021년 8월 20일 손세기의 장남인 사업가 손창근 씨가 10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세한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후지스카는 저서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간의 긴밀한 학문적 교류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추사 김정희라는 영특한 천재를 만나게 됐으며, 청조학 연구 제 1인자는 김정희’라고 밝히고 있다. 추사는 이미 사대가 아닌 당당하고 독자적인 경지의 학자이자 문장가 서예가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북경에서나 제주도 유배에서도 늘 그리웠던 고향의 추사고택
추사는 북경에 갔을 때도 말년에 제주로 유배를 떠나 있을 때도 늘 ‘이곳’을 그리워하며 마음을 추스렸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고향마을 예산의 추사고택이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마을에 추사 김정희 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에 추사기념관과 체험관 등이 들어서 있다. 고택을 방문하기 전에 기념관에 먼저 들러 추사의 일생을 만나보면 좋다. 전시관을 차분히 둘러볼 시간이 없다면 10분 정도 길이의 영상을 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기념관에는 추사의 생애를 정리한 패널과 추사의 글씨들을 감상할 수 있다. 비록 진품은 아니어도 우리나라 4대 명필가로 꼽히는 추사의 글씨를 차분히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고증학과 금석학 대가의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
기념관과 고택 사이의 둥그런 언덕 위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묘소가 있다. 이곳은 추사와 첫째 부인 한산이씨와 둘째 부인 예안이씨와의 3인 합장묘로 조성돼 있다.
추사는 1851년(철종 2년)에 헌종의 묘천 문제로 다리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추사의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김정희를 돌봐줬는데 헌종묘천 문제로 실수를 하게 돼 친구와 함께 엮인 것이다. 그는 1852년 68살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 벼슬을 하지 않고 경기도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이런 연유로 과천에는 후시스카 지카시와 그의 아들인 후지스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21~2006) 부자가 기증한 추사 친필 글씨 26점, 추사와 관련된 서화류 70여 점, 한국 영화자료 등 1만여 점을 보관하고 있는 추사박물관이 있다.
추사 묘소에서 100m가량 떨어져 있는 추사고택은 증조부인 월송 김한신이 영조로부터 하사받은 사패지(賜牌地)에 건립한 집이다. 종택은 사랑채와 너른 마당 그리고 안채로 구성돼 있다. 마당에는 추사가 해시계의 받침 용도로 사용한 돌기둥이 남아 있다. 기둥에 새겨져 있는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아들이 추사체로 쓴 글씨이다.
추사고택에서 눈여겨볼 것은 각 기둥에 적혀 있는 주련 글씨이다. 주련 글씨는 쌍을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인데 모두 한글로 해설이 달려 있어 천천히 음미해 보면 좋다.
사랑채를 지나면 ㅁ자형 안채 건물이 나온다. 마당이 있고 양쪽에 아궁이가 있고 문간방이 딸려 있다. 2칸의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대청마루가 연결돼 있는 구조다. 나무 기둥이며 댓돌, 채색되지 않은 목조건물이 예스러움을 잃지 않고 서 있다.
안채에서 나오면 분홍빛 상사화들이 활짝 피어 있다. 추사는 제주 유배 시절 특별히 노란색 수선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봄을 알리는 수선화를 보면서 자신의 유배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뒤켠의 가장 높은 곳에는 추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다.
추사고택에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용궁리 백송’과 ‘화순옹주홍문’이 있다. 용궁리 백송은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백송의 종자를 가져와 고조부 묘 앞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화순옹주 홍문은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은 화순옹주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으로 터만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 고택에서 수덕사로 가는 길은 내내 곡식이 익어가는 풍요로운 평야지대와 사과 과수원 길이 이어진다.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린 예산사과가 발걸음을 잡아당기지만 해가 이미 서산에 걸터앉은지라 눈 호강으로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