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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투어
예산 수덕사와 서산의 절들 … 내포 경허·만공 선사만행길 순례
  • 변영숙 여행작가
  • 등록 2021-09-25 00:52:53
  • 수정 2021-09-25 01:3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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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원사지, 가야사터엔 쓸쓸함 묻어나 … 야트막한 산과 구릉 어우러지는 평안한 지세

예부터 충남 가야산(伽倻山)의 주변에 있는 고을을 내포(內浦)라 하였다. 내포는 ‘내륙 깊숙이 들어 있는 포구’라는 의미로 서산, 예산 말고도 오늘날에는 그 언저리인 태안, 당진, 홍성, 아산 등을 아우른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가리켜 땅은 기름지고 평평하면서 넓다. 또 소금과 생선이 풍부해 사대부와 알부자가 많다. 산천의 수려한 맛은 떨어지나 야트막한 산과 높고 마른 땅과 낮고 습한 땅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였다. 


가야산하면 경남 합천의 가야산을 먼저 떠올리지만 충남 서산시 운산면과 해미면, 예산군 덕산면 경계에 있는 가야산은 해발 678m로 서산은 물론 충남 서부 지역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꼽힌다. 가야산 동쪽에 위치한 예산은 백제시대엔 오산현(烏山縣)이었다가 신라시대에 들어와 고산현(孤山縣)으로 불리다가 고려 태조 때부터 예산(禮山)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저수지인 예당호에 2019년 4월 6일 가설된 출렁다리

충남 당진 삽교호 놀이동산 대관람차 안에서 바라본 삽교호 모습

예산의 동쪽에는 도고산, 덕봉산, 봉수산이 서쪽으로는 수덕사와 서원산, 가야산이 봉긋 솟아 있다. 그 사이로 드넓은 예당평야, 삽교평야가 포근한 이부자리처럼 펼쳐진다. 추석을 즈음해 황금빛 물결로 일렁이는 일대의 평야지대를 지나노라면 ‘풍요로움’이 무엇인지를 오감으로 느끼게 된다.


근현대 명불허전 선사들의 수행지 ‘내포의 도량들’


내포에는 대자유인 경허선사(鏡虛禪師 1849~1912)와 그의 세 제자인 수월(水月·1855∼1928) 선사, 혜월(慧月·1861∼1937) 선사, 만공월면(滿空·1871∼1946) 선사가 수도했던 여러 절들이 있다. 


수월은 백두산 올라가는 고갯마루에 허름한 암자를 짓고 배고픈 길손에게 밥을 지어주고 짚신을 삼으며 보시를 했다. 혜월은 평생 괭이질로 황무지를 논밭으로 일구며 수도했다. 만공은 아주 쉬운 설법으로 대중을 교화했으며 만해 한용운(1879~1944), 김좌진 장군(1889~1930)과 허물없이 지냈다. 그는 세계일화(世界一花)를 강조하며 미물도, 왜놈도 부처로 봐야 이 세상이 모두 편안할 것이라고 설파했다. 


이 곳 선사만행길은 예산 덕숭산(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慧寺), 서산 연암산(燕岩山) 천장사(天藏寺, 또는 천장암), 서산 상왕산(象王山) 남쪽의 일락사(日樂寺), 상왕산 북쪽의 개심사(開心寺). 서산 보원사지(普願寺址), 서산마애여래삼존상, 옛 가야사터(남연군 묘)로 구성돼 있다.


충남 서산시 상왕산 개심사의 심검당. 자료 위키피디아

보원사지와 서산마애불은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가깝다. 보원사지에는 장대한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승려가 한때 1000명이 넘었던 절터로 쓸쓸함이 묻어 난다. 보원사지에서 개심사 가는 코스는 조붓한 오솔길이다. 개심사에선 서산 해미읍성이 한눈에 보이고 그 너머엔 바다가 있다. 개심사 심검당의 ‘구불기둥’이 오래됐고 정겹다. 


경허가 어미니를 모시고 있던 천장사엔 스님이 용맹 정진했던 쪽방(1.3m×2.3m)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서산 도비산(島飛山) 부석사(浮石寺) 심검당(尋劒堂) 현판은 경허가, 큰방에 걸려 있는 부석사 현판은 만공이 썼다. 서산 간월암(看月庵) 현판글씨도 만공 것이다. 부석사엔 만공이 수행하던 토굴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이 절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 묘 이장한 옛 가야사터 


서산, 예산, 홍성에 걸쳐 있는 가야산엔 수많은 절과 탑들이 있었다. 현재 확인된 옛 절터만도 얼추 100개가 넘는다. 그만큼 내포 가야산은 천하명당이다. 수정봉(453m)-옥양봉(621m)-석문봉(653m)-가야봉(678m)-원효봉(677m)이 연꽃잎처럼 빙 둘러 있다. 연꽃 한가운데 꽃심이 바로 옛 가야사터이다. 가야사는 1846년 흥선대원군이 일부러 불태웠다.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이구) 묘를 이장하기 위해서다.


남연군 시신은 가야사 금탑자리에 묻혔다.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혈처이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황제(재위 1863∼1907), 손자인 순종황제(재위 1907∼1910)가 배출됐으니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다만 망국의 길을 가게 된 게 원통할 일이다.


이 곳은 풍수지리상으로 ‘석중지토혈(石中之土穴)의 명당’이라고 한다. ‘사방이 돌로 쌓여 있는데 시신이 묻힌 자리만 흙’이라는 것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무덤 주위에 돌이 워낙 많은 데다 관의 회벽이 두껍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북쪽엔 상왕산(307m), 남쪽엔 덕숭산(495m)이 있다. 상왕산엔 개심사와 일락사, 덕숭산엔 수덕사와 정혜사가 자리잡고 있다.


수덕도령이 덕숭낭자 흠모하다 끝내 못 이룬 사랑에 ‘수덕사’ 됐다는 전설’  


예산 덕숭산 수덕사의 겨울 풍경

덕숭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의 수덕사는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그와 관련된 아름다운 전설이 전한다. 홍주(지금의 홍성) 마을에 수덕이란 도령이 살았다.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인 수덕 도령은 사냥을 나갔다가 먼발치에서 본 낭자를 흠모하게 된다. 수소문한 끝에 그 여인이 건넛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 낭자라는 것을 알고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했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에 마침내 덕숭낭자는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주는 조건으로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절이 완성되는 순간 수덕도령의 정염으로 가득찬 탐욕 때문에 불이 나서 절은 완전히 불타버렸다. 마음을 가다듬고 절을 짓기 시작했으나 여인에 대한 정념이 일어 또다시 불이 나고 말았다. 세 번째에야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혼인했으나 낭자가 수덕도령에게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자 강제로 안으려 했다. 이 때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도령의 손에는 낭자가 신고 있던 버선 한쪽만이 쥐어져 있었다.
낭자가 있던 자리는 바위로 변했고 바위 옆에는 버선 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나 있었다. 이후 꽃은 버선꽃, 도령이 지은 절은 수덕사, 산은 덕숭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덕숭산 수덕사에 얽힌 애절하고 안타까운 전설이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립된 수덕사 대웅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국보 49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의 맞배지붕은 단청이 벗겨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수덕사는 대한제국 말 우리나라 선승의 계보를 잇는 경허스님과 그의 제자 만공스님이 도를 닦고 크게 일으켜 세운 곳으로 불교계 4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수덕사는 근현대사에서 숱한 화제를 낳은 문화계 인사들과의 인연이 깊으며 다양한 문학작품과 대중가요의 소재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렀고 최인호 작가는 1989년작 소설 ‘길 없는 길’에서 수덕사 방장 경허 스님의 일대기를 다뤘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로 시작되는 <수덕사의 여승>이란 대중가요 때문에 많은 이들이 수덕사를 비구니 사찰로 알고 있지만 수덕사는 비구 사찰이다. 1930년 수덕사 부속 암자인 견성암(見性庵, 일명 여승당)에서 많은 여승들이 수도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불교 전문 수덕사 선미술관 … 이응노 화가의 흔적 남은 수덕여관 일대, 나혜석도 머물러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 해탈문을 지나면 ‘수덕사 선()미술관’이 나온다. 2010년 7월 26일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전문 미술관으로 수덕사 대웅전의 맞배지붕을 본 떠 만든 건물이 돋보인다.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응노 선생의 사적지가 있고 냇가의 거대한 바위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화가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가로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해강 김규진을 사사하고 일본 가와바타 화(畵)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1958년 파리로 가서 정착해 창작활동을 했다. 1963년에는 19세기 프랑스 예술을 선도하던 기관이자 예술인단체인 살롱 도통(Salon d'Automne)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동백림 사건은 조작된 간첩사건으로 다수의 시인과 화가 등 문화계 인사들이 화를 당했다. 천상병 시인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고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생을 마감했다. 이응노 선생은 프랑스 정부의 탄원으로 1969년 사면을 받았고 1983년엔 아예 프랑스 국적을 획득하고 파리에 머물렀다. 1989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회고전 첫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수덕여관 개울가에 문자를 추상화해 새겨 그린 이응노 화가의 암각화

이응노 화가가 1969년 3월 석방돼 작품 활동을 하던 수덕여관과 우물, 그가 여관 앞마당 너럭바위에 남긴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수덕여관은 화가가 1944년 매입하여 6.25전쟁 당시 피난처로 사용하며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15년간 머물던 곳이다. 화가는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특히 개울 물가에 있는 암각화는 문자적 추상화로 화가가 동백림 사건에서 사면된 뒤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이곳에 머물면서 남긴 작품이다. 화가는 이 작품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답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인 나혜석이 불교에 심취해 수덕여관에 5년간 머물렀으며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인 수필가 김일엽도 승려가 되기 전 이곳에 머물렀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가의 첫째 부인 박귀희(朴貴嬉, 1909~ 2001) 여사가 2001년까지 운영하다 세상을 뜨고 폐허가 된 것을 2007년에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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